(3) 북한 평양 지역

북한의 평양 지도 보기   지역은 고구려 장수왕대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후 고구려 멸망 때까지 수도였던 지역이다. 장수왕은 427년에 도읍을 남쪽의 평양으로 옮겼다. 이때 천도한 곳은 대동강 연안 지역이었는데 이 지역은 고조선 이래 선진문화가 발달해 왔던 지역이기도 하다. 이때의 왕성은 이전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의 왕성구조를 재현했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즉 평지성과 산성의 양성 구조를 옮겨서 대성산성(大聖山城) 과 청암동토성(淸巖洞土城) 을 중심으로 하여 왕도(王都)를 구성하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는 국내외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왕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4세기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고구려는 인구와 영토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귀족세력 기반을 약화시키고 보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 필요성 때문에 새로운 도읍의 건설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울러 장수왕 재위기간 동안의 국제정세는 주변세력이 복잡하게 어우러져 있었는데, 특히 백제, 왜, 신라로 이루어진 고구려의 남쪽 방면에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정치·경제적인 체제의 정비를 가져왔다. 천도 이후 고구려는 한동안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중국의 북위(北魏)는 외교사절 가운데 고구려를 또 남제(南齊)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정치세력으로 인정하였다.

 

한편 고구려의 천도는 남쪽 백제, 신라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후 475년 장수왕의 한성 함락과 한강유역 장악은 백제의 웅진천도(熊津遷都)로 이어졌고, 이에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평양천도를 통해 강성한 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으나 삼국의 대립이 본격화되는 양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대성산성
복원된 대성산성 남문
청암동토성 위치도
청암동토성 안의 금강사터 건물 주춧돌(ⓒ『조선고적도보』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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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이렇게 중국은 만리장성을 고무줄처럼 늘려 고구려 성까지 포함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의 일부로…
남동생 :
누나, 고구려는 우리 역사잖아. 중국이 왜 저러는 거야?
누나 :
음, 그건 말이지… 함께 찾아보자.
누나 :
동북공정은 중국의 동북 3성인 랴오닝 성, 지린 성, 헤이룽장 성의 역사 지리, 민족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사업이래.
남동생 :
무슨 근거로 그러는데?
누나 :
중국은 현재 중국 땅에 있던 모든 나라의 역사를 모두 자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기 때문이야.
남동생 :
음… 그럼 옛날 고구려는 어디에 있었는데?
누나 :
지도로 봐볼까?
누나 :
고구려보다 오래된 고조선부터 보자.
남동생 :
와아! 엄청 넓네!
누나 :
고구려는 여기…
남동생 :
전부 한반도 북쪽과 만주 쪽에 있었네?
누나 :
그래. 아까 얘기한 대로 지금은 중국 땅인 곳도 있어.
남동생 :
흠! 이 나라의 땅이었던 곳을 현재 중국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역사라고 주장한다 이거지.
누나 :
그래.
남동생 :
음, 그러면 우리나라의 역사라고 하려면 어떻게 중국과 싸워야 해?
누나 :
싸우긴. 우린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반론을 제시하면 돼.
남동생 :
역사적 사실이라면… 어떤 거?
누나 :
흐음!
남동생 :
어떻게 다른데?
누나 :
고구려 사람들은 성을 쌓을 때 대부분 돌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긴 쐐기돌을 많이 사용해서… 이런 모습이 되는데,
남동생 :
그렇구나. 고구려성이 훨씬 강하네.
누나 :
그렇지!
누나 :
또,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영락’이라는 고구려만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 대왕의 치적을 기록한 내용과 건국신화가 새겨져 있지.
남동생 :
아하!
누나 :
그러니까, 고구려는 그 옛날 고조선부터 이어온 역사를 계승하고 있고, 신라에 멸망한 이후에도 고려, 조선 등이 고구려를 이어받았다는 계승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분명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란 말이지
남동생 :
휴! 증거가 있어서 다행이다.
누나 :
역사는 언제나 밝혀지게 되어 있어.
남동생 :
추리 소설의 범인처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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