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북한 기타 지역

(1) 중국 요녕성(遼寧省) 환인현(桓仁縣) 지역

오녀산성 - 고구려 졸본성
하고성자토성(下古城子土城)
상고성자 고분군(上古城子古墳群)
고력묘자 고분군(高力墓子古墳群)

(2)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輯安縣) 지역

국내성(國內城)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 - 환도산성(丸都山城)
우산하고분군(禹山下古墳群)
장군총(將軍塚)
태왕릉(太王陵)
서대총(西大塚)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3) 북한 평양 지역

고구려 평양성(平壤城)
진파리 고분군(眞坡里古墳群)

(4) 북한 기타 지역

덕흥리 벽화고분(德興里壁畵古墳)
쌍영총(雙楹塚)
안악 3호분(安岳 3號墳)

(5) 대한민국 지역

호로고루성(瓠蘆古壘)
아차산 일대 보루군(阿且山一帶堡壘群)
충주 장미산성(薔薇山城)
충주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 中原高句麗碑)

(1) 중국 길림성 돈화 지역

돈화(敦化) 오동성(敖東城)
돈화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
정혜공주묘(貞惠公主墓)

(2) 중국 흑룡강성 영안 지역

영안 상경성
영안(寧安) 삼릉둔고분(三陵屯古墳)

(3) 중국 길림성 화룡 지역

화룡 서고성자(西古城子)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

(4) 중국 길림성 혼춘 지역

혼춘 팔련성(八連城)

(5) 러시아 연해주 지역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
연해주 스쵸클랴누하 성터

(6) 북한 지역

청해토성(靑海土城)
청진 부거리 일대 유적

우리나라 역사상 고구려와 발해가 가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그것은 고구려와 발해가 있었던 위치의 대부분이 우리나라의 영역 밖에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경우 국가 성립 초기부터 전성기까지 영역의 대부분은 현재 중국과 북한 지역에 있고, 발해의 경우에는 중국과 러시아 일대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이들 유적이 우리나라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은 물론이다. 고구려와 발해의 문화유산지도가 가지는 의미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최근 고구려와 발해의 문화유산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가 시행되었다. 그 결과 고구려 문화유산의 경우 중국에 406개소, 북한에 214개소, 대한민국에 89개소, 일본에 8개소 등 총 717개소가 조사되었다. 문화유산의 분포를 보면 중국의 환인 지역과 집안 지역, 그리고 북한의 평양 지역, 남한 지역 등으로 구분된다. 발해 문화유산의 경우에는 중국에 459개소, 북한에 261개소, 러시아 379개소, 일본에 51개소 등이 조사되었다. 분포는 주로 발해의 발원지인 길림성 돈화 지역, 5경의 중심지였던 흑룡강성 영안시, 길림성 화룡시, 길림성 훈춘시와 러시아 연해주의 크라스키노성 등에 집중되고 있다.

 

 

문화유산 지도는 해당 국가의 강역, 정치현황, 경제, 군사의 중심지를 파악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고구려 발해의 주요한 문화유산에는 무엇이 있는지 집중된 지역을 중심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 모든 문화유산을 다 다룰 수는 없기 때문에, 핵심적인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그 대강을 살펴보도록 한다.

 

 

중국 요녕성 환인현지도 보기 지역은 고구려 국가 초기 건국자인 주몽(朱蒙)이 북부여에서 남하하여 근거지로 삼은 졸본(卒本) 지역이다. 여기에 대해서 광개토왕릉비문에는 홀본(忽本),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졸본’이라고 하였으며, 『위서(魏書)』 「고구려전」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으로 되어 있다. 모두 같은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지금의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지목된다. 주몽왕이 비류수(沸流水) 골짜기의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수도를 정한 곳으로, 혼강(渾江)을 끼고 있는 비옥한 충적지대이다.

오녀산성 원경
오녀산성 원경
남벽 아래 남아 있는 돌무지무덤, 장강유적의 남은 자취
남벽 아래 남아 있는 돌무지무덤, 장강유적의 남은 자취

환인분지의 약 800m의 산지에 축조된 오녀산성은 남북 약 1,000m, 동서 너비 약 300m의 비교적 규모가 큰 성이다. 동·서·남쪽은 모두 넓적한 돌로 성벽을 쌓았고, 북쪽은 수직에 가까운 벼랑에 의지하여 성벽을 이루었다. 부근에는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 돌무지무덤을 비롯, 많은 고분군이 있다. 이 오녀산성과 주변의 고분군들은 고구려 건국 초기의 국가성격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를 하고 있다.

 

오녀산성지도 보기의 성벽은 30×20×35cm의 돌로 견고하고 높은 성벽을 구축하기 위해 층이 올라갈수록 안으로 들여쌓는 굽도리 축조공법을 사용하였다. 성 내부의 지세는 평탄하며, 서측은 절벽이 길게 이어져 따로 성벽을 쌓지 않았다. 동측은 성문을 직접 공격할 수 없도록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옹성(甕城)이 있다. 이러한 방식은 고구려 유적 중 오녀산성과 국내성에서만 발견되는 양식이다.

 

 

성안에는 천지라고 하는 못이 있고, 이 못과 연결된 조그마한 샘도 있다. 못이나 샘은 모두 잘 다듬은 돌로 쌓았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약 2,000점에 달하는 고구려시대의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2004년에 다른 고구려 유적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환인 일대는 요동에서 국내성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이므로 오녀산성은 국내성 천도 이후에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체로 환인 서쪽에서 혼강으로 진입하는 교통로를 공제하면서 환인분지 일대의 중심적인 군사방어거점으로서 기능하였을 것이다.

 

하고성자와 혼강
하고성자와 혼강

 

하고성자토성(下古城子土城)은 요녕성을 흐르는 혼강(渾江) 서쪽 육도하자향(六道河子鄕) 하고성자촌지도 보기에 소재한다. 졸본성으로 비정되는 오녀산성과는 10km 정도 떨어져 있다. 70∼80년 전 대홍수로 혼강이 범람하면서 성의 동벽과 동쪽 일부분이 유실되었으나 다른 세 성벽의 기초부는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이다. 하고성자성은 원래 한(漢)의 현도군(玄菟郡)의 군현 치소(治所)로 축성되었다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아직 성 내부에서 한나라 유물이 출토된 적은 없기 때문에 정확한 초축(初築) 연대는 알 수 없다.

 

 

성벽은 흙을 층층이 다져 쌓는 판축법(版築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기초부는 매우 견고하며, 단면이 노출된 어떤 곳의 층위는 수십층에 달하기도 한다. 성문은 원래 동문과 남문 2개가 있었으나 동벽에 있었던 동문은 홍수로 유실되었고, 남문도 심하게 파괴되었다. 유물은 청동기시대부터 고구려·요(遼)·금(金) 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구려의 대표적 와당(瓦當: 기와)인 수면문(獸面文) 와당이 1950년대에 출토된 바 있으며, 토기로는 시루의 바닥이나 토기의 구연부·손잡이 등이 출토되었다. 철기는 환두도(環頭刀)와 화살촉 등이 출토되었는데, 화살촉의 형식은 산형(鏟形: 대패모양)·선형(扇形)·모형(矛形) 등으로 나뉘며, 오녀산성 출토품과 형식이 비슷하다.

 

 

한 사군 시기의 축조 토성으로 짐작되지만 고구려 시기의 유물이 다량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시기에 사용되었던 것은 틀림없으며, 주변에 있는 상고성자촌 고분군의 피장자를 이 성에 거주하던 주민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환인 지역을 초기 고구려의 도읍지인 졸본(卒本)으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하고성자성와 주변의 오녀산성을 고구려 초기 도성(都城)으로 보기도 한다. 즉 하고성자성을 평상시에 거주하던 평지성, 오녀산성을 전쟁 등 비상시에 거주하던 방어용 산성으로 볼 수 있다.

 

상고성자 유적공원 표지판
상고성자 유적공원 표지판
상고성자 유적공원의 적석묘
상고성자 유적공원의 적석묘

상고성자 고분군은 요녕성 환인현 육도하자향 상고성자촌지도 보기에 위치한다. 이곳 인근에 혼강과 육도하, 그리고 하고성자 유적지가 있다. 고분군은 동서 200m, 남북으로 1500m 가량 범위로 펼쳐져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200여 기의 무덤들이 조사되었다고 전해지나,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무덤은 대부분 파헤쳐졌고 지금은 겨우 20여기 정도만 남아 있다.

 

 

무덤의 대부분은 기단식 돌무지무덤이다. 기단식 돌무지무덤은 형태상으로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무덤 네모서리에 큰 돌을 놓고 그 사이를 돌로 채워 초보적인 기단을 만든 무덤이다. 다른 하나는 커다란 돌로 방형으로 기단을 만든 전형적인 형식이다. 대체로 후자가 상대적으로 비교적 큰 규모를 갖추게 되며, 한 변의 길이가 10m 정도에 이른다. 이외에 고분군의 서쪽 끝에 위치한 기단식 돌무지무덤은 길이 19.7m, 너비 10.2.m, 높이 2.5m 정도로 큰 규모이며, 봉분 안에 여러 개의 무덤방이 있었던 특수한 형태의 고분이다.

 

 

상고성자 고분군의 돌무지무덤은 집안 지역에서 1~3세기에 유행하던 돌무지무덤과 유사한 형태로서 대체로 같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곳에서 후기에 등장하는 봉토분(흙무지무덤)이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고구려 초기의 역사와 관련된 주민집단의 고분군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상고성자 고분과 하고성자 평지성에 살던 주민과의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력묘자 고분군 전경총
고력묘자 고분군 전경총

중국 요녕성 환인현 고력묘자촌에 위치한 고구려 전기 돌무지무덤군이다.지도 보기 현지 촌명인 ‘고력(高力)’은 ‘고려(高麗)’와 통한다. 환인현 중심지에서 동쪽으로 15km 떨어진 혼강가 구릉지대 위에 위치하고 있다. 인근에 혼강과 오녀산성이 있다.

 

환인현 지역의 돌무지무덤은 고구려인의 토착적인 무덤으로 대체로 서기 전후에 발생해서 2∼3세기에는 강가나 강변대지·산기슭에 거대한 무덤떼를 이루게 된다. 또한 시기가 내려올수록 가공된 판석을 재료로 한 기단식으로 발전하고, 내부도 판석으로 짠 돌방을 갖춘 형식으로 발전한다. 약 5세기 초부터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토총(土塚)으로 바뀐다. 이로 미뤄볼 때, 고력묘자촌의 돌무지무덤들의 축조연대는 3세기 전후로 추정할 수 있다.

 

 

고분군은 남북 1km 정도로 컸으나, 현재 환인댐의 건설로 대부분이 물 속에 잠겨버렸다. 오녀산성 정상에서 환인호 동쪽 편을 바라보면 수몰된 고려묘자의 능선이 바라보인다. 지금도 갈수기에 일부 무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고분군은 1963년 북한의 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40기의 돌무지무덤과 봉토묘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고분은 시기적으로 지대가 높은 남쪽에서 낮은 북쪽으로 내려오면서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1958~1959년에 모두 44기의 무덤이 발굴 조사되었는데, 출토 유물은 많지 않으나 고리자루큰칼, 철제허리띠, 쇠화살촉, 말재갈, 금동제 장식품과 청동제 유물편 등이 출토되었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지도 보기 지역은 고구려 유리왕대부터 장수왕대까지 425년간 고구려의 수도가 있던 지역이다. 이곳에는 수도성으로 존재했던 국내성(國內城)이 있던 지역이며, 고구려 초기부터 전성기까지 수많은 전란을 겪었던 지역이기도 하다. 즉 고구려는 집안 지역에서의 성장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 패권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국내성 시기는 그 발전이 평탄하지만은 않은 시기였다. 동천왕 때는 위나라의 위협에 시달렸고 고국원왕 시기에는 선왕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대비가 납치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수림왕대 국가체제의 재정비를 거쳐 광개토대왕 시기에 이르러서야 정복국가로서 그 위용을 동북아시아에 떨치게 되었다.

 

 

국내성이 위치한 현 길림성 집안시 지역에는 약 1만 2천여 기의 고구려 무덤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한국 고대사 연구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의 무덤으로 비정되고 있는 장군총, 고국양왕 혹은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측하고 있는 태왕릉, 미천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는 서대총 등 왕릉급 묘제들이 존재한다.주1)

 

혼강 유역의 졸본(환인)에서 압록강 유역인 국내(집안)로의 천도는 고구려사의 발전 방향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구려는 경제·군사적인 측면에서 여건이 좋은 압록강변의 국내로 천도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아울러 대외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고 하였다. 중국 한나라 군현 세력으로부터 보다 멀어짐으로써 국가의 위기를 최소화시키는 한편 압록강 유역을 장악하여 그 주변에 산재해 있던 여러 세력을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가 있었다. 이는 곧 국가체제의 정비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동옥저(東沃沮) 지역을 비롯한 주변의 곡창지대로 진출하기 위한 육로와 수로망을 장악하여 고구려가 태조왕 이후 비약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국내성 지도(위치)
국내성 지도(위치)
국내성 서벽(2007)
국내성 서벽(2007)

국내성(國內城)은 졸본성(卒本城)에 이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로, 서기 3년(유리왕 22년)부터 427년(장수왕 15년)까지 425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였다. 그 위치는 현재 성벽 일부만 남아 있는 집안시내의 통구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이 성은 드물게 볼 수 있는 평지성이며, 압록강의 중류에 위치해 있다. 성벽은 사각형 또는 직사각형 모양의 돌을 쌓고 중간의 틈새에는 흙과 모래로 채웠는데 굽도리 부분은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들여쌓았다. 동쪽 담 길이는 554.7m, 서쪽 담 길이는 664.6m, 남쪽 담 길이는 751.5m, 북쪽 담 길이는 715.2m로 둘레를 모두 더하면 2,686m에 달한다. 담장의 높이는 4.2m, 너비는 7~10m이다. 또 성 밖에는 인공으로 만든 해자를 빙 둘러 물이 흐르게 했다.주1)

 

 

성문은 6곳이 있는데 남북에 각각 하나씩 있고 동서에 각각 둘씩 있다. 6곳의 성문 모두에 성문이 성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옹문(甕門)이 있고, 동·북 두 면에 연못이 있다. 성의 네 모서리에는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성벽 위에 모서리에 지은 누각인 각루(角樓) 터가 있으며, 4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성벽을 돌출시켜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전면과 좌우 양 측면으로 3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게 만든 시설물인 치(雉)가 설치되어 있다. 또 이러한 석축성이 축조되기 이전에 토성(土城)이 존재했음이 확인되었다.

 

 

지금은 이 일대에 아파트가 들어서 북쪽 성벽만 남고 거의 사라졌으며 성벽의 높이도 2m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그 주변에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를 비롯하여 태왕릉(太王陵)·장군총(將軍塚) 등 고구려의 유적·유물들이 산재해 있어 고구려시대 국내성의 영화를 말해 준다.

 

중국 정부는 2000년대에 들어 이 일대를 정비하여 잘 보존하고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국내성지도 보기은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긴 뒤에도 평양, 한성과 더불어 3경 중의 하나로, 고구려의 정치, 군사적 요충지로 중시되었다. 평지성인 국내성은 왕궁과 관청이 있고 귀족들과 일부 평민들이 거주하는 도성이었다는 점과 고구려의 왕족과 귀족들의 벽화고분이 평양성과 이곳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는 점을 통하여 이 성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환도산성과 그 앞을 흐르는 통구하
환도산성과 그 앞을 흐르는 통구하

산성자산성은 일명 환도산성지도 보기으로 중국 길림성 집안시(국내성) 북방 2.5km 지점에 있는 고구려의 도성지이다.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集安)시 지역은 고구려의 옛 수도로, 국내성(國內城)이 있었던 곳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대 국내 위나암 천도 기록에 나오는 국내 위나암의 위치가 바로 여기라고 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고구려는 이후 압록강변의 평지에 국내성을 축조하고 도읍으로 삼았다. 따라서 고구려 중기의 왕성은 산성인 산성자산성과 평지성인 국내성의 양성 체제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산성은 북고남저의 지형으로서 남쪽에서 바라보면 성벽에 산봉우리를 병풍으로 두른 듯한 전형적인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성벽은 동·서·북 3면은 전체적으로 험준한 지형과 암반 등을 이용하여 자연 성벽으로 삼고, 산마루의 평탄한 곳은 군데군데 돌을 다듬어 성벽을 축조하였다. 현재 잘 남아 있는 북쪽 성벽 높이는 대략 5m 정도이다. 낮은 지대인 남쪽은 대부분 성벽을 높이 쌓았는데, 현재는 많이 무너진 상태이다.

 

 

성문은 남쪽과 북쪽, 동쪽에 각 2개, 서쪽에 1개 등 총 7개가 확인되었고, 남쪽의 문터는 옹성을 갖추고 있었다. 성내에는 2개의 샘물과 음마지라는 연못이 있고, 외부를 관측할 수 있는 요망대가 구축되어 있다. 성안 동북쪽 경사면에서 궁궐터가 확인되었는데 남북 길이 95.5m, 동서 폭이 74m 정도이며 경사면을 따라 3층의 대지를 이루고 있다. 궁전 터에서 확인된 건물은 총 11개이다. 또한 성내에서 모두 38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는데, 36기는 돌무지무덤이고, 2기는 봉토분이다.

 

 

고구려의 왕도는 평지의 왕성과 배후의 산성을 함께 파악해야 한다. 고구려는 도성의 경우, 평상시에는 평지성에 거주하다가 비상시에 인근의 산성으로 피난하는 평지성·산성의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는데, 산성자산성은 고구려 초기 도성의 하나로서 고구려는 이 지역을 수도로 하였던 당시 적군이 침입하면 국내성에서 산성자산성으로 거처를 옮겨 방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우산하 고분군 5회분 5호묘
우산하 고분군 5회분 5호묘

우산하고분군은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위치한 고구려시대의 고분군이다. 집안의 고분과 기타 유적들은 일반적으로 6개의 지역군(하해방고분군, 우산하고분군, 산성하고분군, 만보정고분군, 칠성산고분군, 마선구고분군)으로 나뉘어 설명되고 있는데, 그 중 우산하고분군지도 보기은 6대 고분군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고분군이다.

 

 

모두 3,900여 기가 넘는 고분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이 고분군에서는 특히 고구려 말기에 유행한 봉토석실묘의 비중이 크게 나타나므로 이 고분군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후반에 걸치는 기간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우산하고분군에 속해 있는 고분들 중에 잘 알려진 고분으로는, 우선 왕릉급의 대형계단돌무지무덤으로서 장군총, 태왕릉, 임강묘, 우산하 992호분, 우산하 2110호분가 있으며, 벽화고분무덤으로는 각저총, 무용총, 통구 12호분, 산연화총, 삼실총, 통구 사신총, 오회분 등이 있다.

 

장군총의 들여쌓기
장군총의 들여쌓기
장군총 정면
장군총 정면

국내성에는 현재 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해 장군총지도 보기과 태왕릉, 무용총, 각저총 등 많은 유물이 보존되어 고구려의 영화를 잘 알려주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이 장군총이다. 1905년 일본인 학자가 버려져 있는 무덤을 처음 조사해 주목을 받았다. 발견 당시에 누구의 무덤인지 몰라서 ‘장군의 무덤’이라는 뜻으로 장군총이라고 했다.

 

무덤의 밑넓이는 960m²이며, 무덤을 쌓은 1,100여 개의 장대석(밑을 받치는 돌)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5.7m, 너비가 1.12m, 두께는 1.1m나 된다. 맨 꼭대기는 둥근 돔형으로 모양을 만들고 석회와 자갈을 섞어서 마무리했다. 무덤의 내부에는 채색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벽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군총의 높이는 아파트 5층 높이와 비슷한 12.4m에 달한다. 장군총을 살펴보면 정면은 서남쪽을 향하고, 네 모서리는 각기 동서남북에 맞는 방향에 자리를 잡았다. 화강암을 모나게 잘 다듬어 만든 단을 계단처럼 7층으로 쌓아올렸고, 그 꼭대기에는 접시 모양의 무덤무지를 만들어 마무리했다. 위의 단을 받쳐 주는 맨 아래의 기단은 4층으로 만들었다. 기단 아래와 주변에는 5m쯤 되는 여러 개의 토대석이 깔려 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가 줄어들게 했으며 측면에서 바라보면 반원 모양을 하고 있다. 아래 단의 돌들에는 윗돌을 받쳐 주는 턱이 고여 있어서 서로 견고하게 맞물려 있다.주1)

 

 

장군총은 무덤 주변의 유물과 유적이 없어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없는 상태이지만 건물을 이었던 기와 조각을 찾아내어 무덤의 형식과 기와의 연대를 추적해 본 결과, 4세기와 5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또 무덤이 거대하여 임금의 무덤일 것이라는 추정 아래 북한의 학자들이나 중국의 학자들은 장군총을 장수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아직까지 장수왕릉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 주장을 따르고 있다.

 

태왕릉 전경
태왕릉 전경
태왕릉 입구
태왕릉 입구

태왕릉지도 보기은 중국의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의 왕릉급 돌무지무덤이다. 태왕릉은 통구평야의 비교적 높은 언덕에 위치하며 언뜻 보기에도 집안 지역의 어떤 고분보다 규모가 크다. 태왕릉의 고분 형태는 제단과 배총을 갖춘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다. 이 무덤으로부터 동북쪽으로 200여 미터 떨어진 지점에는 유명한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가 서 있다.주1)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벽돌이 여러 차례 발견되었고, 주변의 왕릉급 고분 가운데 광개토왕비와의 거리가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의 고분으로 알려져 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호대왕(好大王)’이라 새겨진 청동방울이 발견되기도 하여, 고분의 주인공이 광개토왕일 것이라는 확신을 더해 주고 있다.

 

 

태왕릉은 장군총의 4배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로, 하단부 한 변의 길이가 66m에 이르고 현재 높이가 14.8m나 된다. 거대한 석재로 정사각형의 기단을 쌓고 기단 안에는 깬돌과 자갈을 섞어 채워 넣었다. 현재는 많이 허물어지고 파손되었으나, 원래는 7단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 주위에는 커다란 둘레돌이 5개 배치되어 있으며, 무덤방은 맨 꼭대기층에 자리잡은 널길이 딸린 한칸무덤이다. 무덤 안은 매끈하게 다듬은 석재로 축조하였는데, 평면은 정방형에 가까우며 천장은 맞배지붕 형태를 하였다.

 

 

2003년도 조사에서 여러 종류의 유물이 수습되었는데, 분구 중에서는 기와와 와당, 벽돌 등이 출토되었다. 연화문와당은 연꽃을 표현한 것으로 특히 연봉우리를 형상한 와당은 태왕릉에서만 보고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남쪽 계단의 입석판과 버팀석 근처에서는 금동제 마구도 출토되었다. 발걸이는 나무를 금동판으로 쌓은 후 발을 거는 부분에는 용문이 투각된 금동판을 덧대었으며, 말띠드리내 장식은 호랑이를 대칭으로 투각한 금동판을 덧대었다. 띠걸이 장식에도 호랑이를 투각하여, 고구려 금동기술의 우수함을 잘 보여준다. 버팀석 아래에서는 청동제 부뚜막과, 조금 떨어져서 상을 받치는 다리와 관에 사용된 장식, 마구 등 30여 점의 금공품이 수습되었다. 이외에도 빗물이 튀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시설 근처에서는 ‘辛卯年 如太王 造鈴 九十六’이 새겨진 청동방울이 출토되었다.

 

서대총 전경
서대총 전경

서대총지도 보기은 중국 길림성 집안시 국내성에서 5.5km 떨어져 있으며 통구하를 건너 서쪽에 자리한다. 초대형 무덤 중 가장 서쪽에 자리하여 서대총이라 불렀으며, 중국측에서는 마선구 500호로 편호하였다. 동쪽으로 2km 거리에 천추총이 있으며, 1.5km 거리에 마선구 626호분이 있다. 능원이 있는 계단적 석총이었으나, 일찍이 도굴되어 무덤 중간에서부터 바닥에 이르는 긴 도랑이 생겼고, 도굴시 나온 석재들이 무덤 남쪽으로 흘러 내려서 현재는 장타원형의 돌무지 형상이다.

 

 

무덤은 1.5m 두께의 황색 점토층 위에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계단 축조에는 큰 것은 길이 2.7~1.5m, 높이 1~0.6m, 작은 것은 길이 1, 높이 0.5m 크기의 돌이 사용되었고, 계단 내부에는 깨진 돌들을 채워 넣었다. 계단에 사용된 돌 중에는 예서체로 ‘大吉’ 두 글자를 새긴 것도 있다. 현재 계단은 동북모서리에서 11층, 동남모서리는 4층, 서북모서리는 5층, 서남모서리는 4층이 확인된다. 여섯째 층부터는 깨진 기와가 많이 흩어져 있어서 무덤 상층부에 목조가옥형 구조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광개토대왕비 제1면
광개토대왕비 제1면
현재 비각과 광개토대왕비의 모습
현재 비각과 광개토대왕비의 모습
광개토대왕비 전경
광개토대왕비 전경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제19대 임금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가리기 위해 414년에 국내성에 아들인 장수왕이 세운 비석으로, 묘호(廟號)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마지막 세 글자를 본떠서 호태왕비(好太王碑)지도 보기라고도 부른다. 조선 후기까지 확인되지 않다가 청의 만주에 대한 봉금제도(封禁制度)가 해제된 뒤에야 비로소 발견되었다. 비석이 발견된 후 수많은 탁본들이 제작되었으나 먹을 칠하거나, 비석 표면을 손상시키거나, 석회를 발라 탁본 글자를 선명하게 하거나 하는 등의 문제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비는 높이가 6.39m로, 자연석을 직사각형으로 조금 다듬어 만들었다. 본디 비석을 받치는 대석과 몸통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 대석은 흙바닥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비석의 네 면에는 모두 44줄, 1,775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서언(序言) 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기록하였고, 이어서 본문 격으로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끝에는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특히 고구려 건국신화의 내용을 담은 서언 부분에서는 고구려인들의 천하관을 엿볼 수 있고, 광개토왕의 업적 부분에서는 당시 고구려의 영역 확장 상태와 고구려와 주변국가 간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어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크다.

 

 

비문의 내용 가운데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논쟁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킨 것은 둘째 부분의 ‘백제와 신라는 이제 우리의 속민이 되었다’는 신묘년 기사(辛卯年記事)이다. 주1)

 

현재 신묘년 기사의 문자 판독이나 기사 성격에 대한 논의는 결론이 나 있지 않은 상태이나, 이는 신묘년(391)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적은 기사라기보다는 대체로 영락 6년의 백제 정벌 및 8년의 신라 정토의 명분을 나타내는 전제문인 동시에 영락 6년에서 17년에 걸쳐 진행된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집약 기술한 집약문일 것으로 추정되며, ‘해(海)’자를 비롯한 일부 문자가 변조 내지 오독(誤讀)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평양지도 보기 지역은 고구려 장수왕대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후 고구려 멸망 때까지 수도였던 지역이다. 장수왕은 427년에 도읍을 남쪽의 평양으로 옮겼다. 이때 천도한 곳은 대동강 연안 지역이었는데 이 지역은 고조선 이래 선진문화가 발달해 왔던 지역이기도 하다. 이때의 왕성은 이전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의 왕성구조를 재현했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즉 평지성과 산성의 양성 구조를 옮겨서 대성산성(大聖山城)과 청암동토성(淸巖洞土城)을 중심으로 하여 왕도(王都)를 구성하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는 국내외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왕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4세기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고구려는 인구와 영토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귀족세력 기반을 약화시키고 보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 필요성 때문에 새로운 도읍의 건설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울러 장수왕 재위기간 동안의 국제정세는 주변세력이 복잡하게 어우러져 있었는데, 특히 백제, 왜, 신라로 이루어진 고구려의 남쪽 방면에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정치·경제적인 체제의 정비를 가져왔다. 천도 이후 고구려는 한동안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중국의 북위(北魏)는 외교사절 가운데 고구려를 또 남제(南齊)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정치세력으로 인정하였다.

 

한편 고구려의 천도는 남쪽 백제, 신라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후 475년 장수왕의 한성 함락과 한강유역 장악은 백제의 웅진천도(熊津遷都)로 이어졌고, 이에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평양천도를 통해 강성한 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으나 삼국의 대립이 본격화되는 양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대성산성
대성산성
복원된 대성산성 남문
복원된 대성산성 남문
청암동토성 위치도
청암동토성 위치도
청암동토성 안의 금강사터 건물 주춧돌(ⓒ『조선고적도보』 I)
청암동토성 안의 금강사터 건물 주춧돌(ⓒ『조선고적도보』 I)

평양성 복원도
평양성 복원도
평양성 내성 북문
평양성 내성 북문
평양성 전경
평양성 전경

평양성지도 보기은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호로, 고구려시대에 처음 조성되었고 고려 초에 다시 고쳐 쌓았으며 조선시대에도 지속적으로 개보수가 이뤄졌다.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때는 427년이다. 이 당시의 왕궁은 평양시 대성산 기슭의 안학궁이었다. 안학궁 뒤편에 대성산성을 축조해 전쟁 때는 이곳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이런 경우, 산성으로 피란하면 평지성은 훼손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586년(평원왕 28)에 수도를 장안성(長安成)으로 옮기는데, 이곳이 현재 평양 시가를 둘러싸고 있는 평양성이다. 안학궁과 대성산성을 전기 평양성, 장안성을 후기 평양성이라고도 한다.

 

 

평양성은 평지성의 장점과 산성의 장점을 종합해 축성했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대동강이, 서쪽으로는 보통강이 감싸고 있어 자연 해자(垓字) 역할을 해준다. 성벽은 바깥 둘레만 16km, 안쪽 성벽까지 포함하면 23km에 이르는 거대한 도성이다. 대동문(大同門) 아래에서 서북쪽으로 만수대(萬壽臺) 끝까지는 내성이고, 그 북쪽으로 가장 높은 모란봉(牡丹峰)을 중심으로 한 북성이 있으며, 내성의 남쪽으로 대동교(大同橋)에서 안산(按山)까지 연장된 중성과 평지로 대동강과 보통강으로 둘러싸인 외성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 경사가 약간 있는 석축인데, 기초 부분과 성벽 부분 사이를 점토와 자갈로 굳게 다져놓았다. 형식상으로 보아 산성과 평지성이 결합된 것으로 평지인 나성 부분은 일정한 구획을 갖춘 계획적인 시가지를 형성하였다. 평양성은 왕궁, 산성, 서민들이 사는 곳이 모두 성안에 있는 최초의 성이었고 이러한 도성의 모습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평양성 내부에는 고구려시대의 유적이 다수 남아 있는데, 북한 국보유적 제1호로 지정된 평양성 외에도 칠성문(七星門)지도 보기, 을밀대(乙密臺)지도 보기, 전금문(轉錦門), 청류정(淸流亭)지도 보기, 연광정(練光亭)지도 보기, 대동문지도 보기, 보통문지도 보기 등이 존재한다. 이 외에도 성석편(城石片)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축성연대와 축성에 5부 사람들이 동원된 사실 및 공사의 담당 구간, 담당자의 이름과 관직이 알려졌다.

 

동명왕릉과 그 부근의 고분군 분포도
동명왕릉과 그 부근의 고분군 분포도
진파리 1호분 석실 실측도
진파리 1호분 석실 실측도

진파리 고분군지도 보기은 평양 동남쪽 제령산 서편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이 고분군은 전 동명왕릉(傳東明王陵: 진파리 구 10호분)을 중심으로 모두 20기의 고분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모두 돌칸흙무덤이며 안길(羨道)과 안칸(玄室)으로 이뤄진 외칸무덤(單室墓)이다. 그중 진파리 고분을 유명하게 한 것은 제1호분과 제4호분에 그려진 벽화이다.

 

진파리 1호분과 4호분은 동일한 구조와 유사한 벽화를 지닌 고구려 후기의 사신도 고분에 속한다. 진파리 1호분이 사신을 네 벽에 단독상으로 표현하고 있는 반면 4호분은 사신도를 신선, 달 모양 등과 함께 배치하였고 사신도에 현무가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4호분이 1호분보다 시대가 앞서는 6세기 초·중반 양상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고분군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후반에 이르는 기간에 조성된 듯하다.

 

 

진파리 1호분은 벽면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다. 부분적으로 손상이 있으나 벽면 상층부 벽화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먹선과 함께 주색·주황색·황색·청색·녹색·자색 등을 사용하였다. 널방의 네 벽에 활달한 구름무늬를 전면에 깔고 그 사이에 연화문, 인동문, 나무를 배치하고 벽면 중앙에 방위에 따라 사신(四神)을 그렸다. 천장에는 당초문과 운문을 합친 것 같은 문양을 그리고 천장석에는 해와 달을 비롯한 별자리를 나란히 배치하였다.

 

 

널길 좌우 벽에는 수문장격인 수호신을 그렸는데 불교적인 사천왕상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널방 내부에서는 금동관모가 출토되었는데 당시의 뛰어난 투조세공술을 보여준다. 특히 내부에 장식된 무늬는 진파리 1호분의 율동적인 벽화와 상통하는 것으로 중앙에는 삼족오(三足烏)가 있고 그 주변을 세 마리의 용이 감싸고 있는데 불꽃 형태의 동적인 곡선으로 표현되어 고구려의 활달한 특징을 보여준다.

 

진파리 4호분은 1호분의 서북쪽 산기슭 능선에 위치하며 고분군에서 가장 후방에 있다. 널방의 벽면 하단에는 장식무늬를 채운 사신도, 상단에는 해 모양·달 모양·천인상(天人像) 등을 그렸으며 천장에는 연화문·인동문과 함께 금가루(金粉)로 별자리를 그려 넣었다. 널길 좌우벽에는 연지도가 있는데 이 고분에서 가장 이색적인 것이다.

 

 

전 동명왕릉은 진파리 고분군에 속한 돌방무덤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진주묘로도 불린다. 북한학계에서는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할 때, 시조인 동명왕의 무덤을 이장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덤의 방향은 남향이며 무덤 밑 둘레에 1.5m 높이로 돌기단을 계단식으로 쌓았다. 널방의 벽과 천장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가로, 세로로 일정한 간격마다 6개의 겹꽃잎을 도안화한 연꽃을 그렸다.

 

덕흥리벽화고분 앞칸 서벽 태수 배례도
덕흥리벽화고분 앞칸 서벽 태수 배례도
덕흥리벽화고분 앞칸 북벽 벽화 구성도
덕흥리벽화고분 앞칸 북벽 벽화 구성도
덕흥리벽화고분 널방 북벽 구성도
덕흥리벽화고분 널방 북벽 구성도
덕흥리 고분지도 보기은 북한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에 위치하고 있다. 무학산 서쪽의 옥녀봉 남단 구릉 위에 자리잡은 흙무지돌방무덤으로 1976년 발굴되었다. 무덤의 방향은 남향이며, 널길, 앞방,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 방무덤이다. 무덤 안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으며, 주제는 생활풍속이다. 앞방 북벽 상단에 14행 154자의 묘지명(墓誌銘)이 있으며, 장면마다 직명(職名)이나 설명문이 적혀 있다. 묘지명을 포함하여 모두 600여 자의 글자가 남아 있다.

 

 

덕흥리 벽화고분은 광개토대왕 재위 기간인 408년에 만들어졌다. 무덤 주인인 진(鎭)은 고구려의 장군직과 태수직을 거친 인물로 유주자사 경력이 있으며 77세에 죽어 음력으로 408년(영락 18년) 12월 25일 무덤에 묻힌 인물이다. 4세기 중국의 현 하북성과 요령성 일부를 걸쳐 설치되었던 유주(幽州)의 13군태수(郡太守)가 자사(刺史) 진에게 나아와 배례(拜禮)를 하는 장면, 60여 개의 별자리 견우, 직녀를 비롯해 신화, 전설상의 존재로 가득한 천장고임의 하늘세계 그림은 풍부한 벽화내용 가운데에도 특히 주목받는 장면이다.

 

 

진의 고향인 신도에 대해 평안북도 또는 중국 하북 지역으로 보기도 하고, 유주자사란 직명이 고구려의 것인지, 중국의 것인지에 따라서 고구려의 판도를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달라지기 때문에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덕흥리벽화고분은 주인공과 축조연대가 밝혀진 중요한 유적이면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 고구려의 정세 및 다양한 풍속을 파악하게 해주는 자료의 보고로 가치가 높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쌍영총 묘실 북벽 주인 부부의 모습
쌍영총 묘실 북벽 주인 부부의 모습
쌍영총 묘실 내부 투시도
쌍영총 묘실 내부 투시도

쌍영총지도 보기은 평안남도 남포시 용강군 용강읍에 위치한다. 용강읍 북쪽의 구릉 위에 자리잡은 흙무지돌방무덤으로 발견 당시에는 진지동 1호분으로 불렸다. 무덤 안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는데, 주제는 생활풍속과 사신이다. 쌍영총은 전형적인 두 방무덤이면서도 앞방과 널방 사이에 두 개의 팔각기둥을 세우고 무덤칸의 벽과 모서리에 목조가옥의 기둥이 묘사되는 등 5세기 전반과 후반으로 편년될 수 있는 벽화고분의 특징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쌍영총은 1910년 발견 당시 이미 도굴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널길 양 벽에 남아 있던 우차(牛車)들과 기마대(騎馬隊), 악대(樂隊)를 포함한 60여 명의 인물들 가운데 대부분은 부실한 조사과정과 뒤처리로 말미암아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였다. 널길 양 벽에 묘사되었던 문지기 역사도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앞방 남벽의 동측 및 서측 벽에는 문지기가 두 사람 입구 쪽을 향해 마주 보듯이 서 있는 모습이 묘사되었으나 역시 현재는 모사도로만 원 형태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상태이다. 앞방 동벽의 청룡, 서벽의 백호 가운데 청룡은 머리와 상체 일부만 모사도로 남게 되었으며, 백호 역시 현재는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이다. 기둥의 몸체에는 포효하며 하늘로 치솟은 용을 그렸는데, 기둥을 감고 꿈틀거리며 머리를 쳐든 모습이 매우 역동적이고 생생하다. 기둥머리와 주춧돌에는 연꽃을 묘사하였다.

 

널방 동벽에 비교적 또렷하게 남아 있던 공양 행렬도 역시 발굴 이후 벽화의 퇴색이 계속되어 이제는 간신히 각 인물의 흔적만 확인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발굴 보고 및 모사도에 의하면 행렬은 향을 사른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로를 머리에 받쳐 든 여인과 화려한 가사장삼(袈裟長衫) 차림의 승려를 앞세운 귀족부인 외 그 앞뒤의 6명의 시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앞방 천장고임에는 연꽃, 꽃병, 불꽃, 구름과 같은 장식무늬와 서조를 그려 넣었고, 천정석에는 활짝 핀 연꽃을 묘사하였다. 널방 천정석 한가운데에는 활짝 친 연꽃을 그리고 삼각고임 2층 밑면에는 강한 기운의 흐름을 세모꼴로 모아 나타냈으며, 1층 동측과 서측 밑면에는 해와 달을, 남측과 북측 밑면에는 2층 밑면과 같은 강한 시운의 흐름을 묘사하였다.

 

쌍영총은 후기 벽화고분처럼 앞방 동벽과 서벽에 청룡, 백호를 벽 가득히 묘사했지만 초기 및 중기 고분벽화의 특징인 인물행렬도를 널방 동벽에, 무덤주인부부 장방생활도를 널방 북벽에 배치하였다. 또한 활짝 핀 연꽃을 무덤칸 천정석에 그려 넣은 것도 5세기 중엽 고분벽화에서 자주 확인되는 양식이다. 이렇듯 5세기에 고구려에서 유행하던 주요한 내세관들과 관련된 제재들을 모두 동원하여 벽화 구성을 시도한 사례는 쌍영총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주1)

 

안악3호분(安岳 3號墳) 내 묘주 초상
안악3호분(安岳 3號墳) 내 묘주 초상
묘주 부인 초상
묘주 부인 초상

안악 3호분지도 보기은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으로 1949년 1호분이 발견된 이후 2, 3호분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북한의 국보 67호로 지정되었다. 길이 33m, 동서너비 30m, 높이 6m의 회랑식 봉토석실분이다.

 

이 무덤에서는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 묵서명(먹으로 쓴 글씨)이 발견되었는데 무덤의 주인과 그의 주요한 관직내용을 알 수 있다. 명문에 보이는 ‘永和十三年’은 동진의 연호로서 357년(고국원왕 27)을 나타낸다.

 

현무암과 석회암의 큰 판석으로 짜여진 돌방무덤으로 남쪽 앞에서부터 널길·연실·앞방·뒷방으로 이어지며, 앞방은 좌우에 조그만 옆방이 하나씩 달려 있다. 한편, 앞방과 뒷방은 4개의 팔각돌기둥으로 구분되어 서로 투시할 수 있고, 주실 즉 뒷방은 동벽과 뒷벽의 안쪽에 판석벽과 돌기둥을 각각 세워 회랑부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각방의 천장은 네 귀에 각각 삼각형 돌을 얹어 천장공간을 좁히기를 두 번 반복하고 그 위에 뚜껑돌을 얹는 모줄임천장으로 되어 있다.

 

벽화는 널길벽에 위병, 앞방의 동쪽 옆방에 부엌·도살실·우사·차고 등, 서쪽 옆방에 주인공 내외의 좌상, 앞방 남벽에 무악의장도와 묵서묘지, 뒷방 동벽·서벽에 각각 무악도, 회랑벽에 대행렬도가 그려져 있다. 결국 벽화내용은 무악대와 장송대에 둘러싸인 주실 앞에 주인 내외의 초상도를 모신 혼전과 하인들이 있는 부엌·우사·마구고 등을 두고 맨 앞은 위병이 지키는 설계로, 이것은 왕족이나 귀족들의 생전 주택을 재현시키고 있는 것이다. 벽화는 벽의 면적 81㎡, 천장의 면적 58㎡나 되는 넓은 널방에 가득 차게 그려져 있다.

 

묵서명의 주인인 동수가 무덤의 주인공인지, 아니면 묘지기였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고구려 후기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정복사업을 크게 일으키고 백제를 침공함으로써 한강지도 보기 유역을 둘러싼 쟁탈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이 본격화된 것은 광개토왕 다음 왕인 장수왕 때로, 장수왕은 427년(장수왕 15)에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남하정책을 단행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475년(개로왕 21) 고구려의 장수왕이 군사 3만명으로 침입하여 왕도 한성을 포위하자, 개로왕이 성문을 빠져 나와 달아나다가 고구려군에게 살해당하였다. 그리하여 백제의 왕도 한성은 함락되고 한강 유역은 고구려에게 점령당하였다. 고구려는 이곳에 한산군(漢山郡)을 설치하고 북한성(北漢城)에 남평양(南平壤)을 설치하여 별도(別都)를 삼아 뒤에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길 때까지 77년간 영토로 삼았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阿且山 一帶 堡壘群) 발굴현장
아차산 일대 보루군(阿且山 一帶 堡壘群) 발굴현장
아차산 4보루 온돌 세부 모습
아차산 4보루 온돌 세부 모습

이처럼 남평양 일대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의 상징으로, 호로고루성(瓠蘆古壘城)이나 아차산 일대의 보루군(堡壘群) 등 당시의 군사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백제와 고구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례대로 점령하면서 삼국의 유물과 유적이 고루 분포해 삼국시대의 생활상과 전략적 요충지로서 이 일대가 지닌 위상을 여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호로고루 성 동벽 세부
호로고루 성 동벽 세부
호로고루 성벽 이전의 목책열과 토광시설의 모습
호로고루 성벽 이전의 목책열과 토광시설의 모습

사적 제467호로 임진강 북안에 있는 연천 호로고루는 현무암 대지 위에 구축되어 있는 삼각형 모양의 강안 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지도 보기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 일대의 임진강은 『삼국사기』에도 여러 차례의 전투기사가 등장할 정도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 또한 위계가 높은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단순한 군사적 요충지가 아닌 고구려 국경 방어사령부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호로고루에서는 토기와 기와류, 석기, 철기 등 다양한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기와이다. 고대사회에서 매우 귀한 건축자재인 기와가 이처럼 많이 출토된다는 것은 호로고루가 기능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기와류 이외의 유물로는 남성용 소변기인 호자(虎子)를 비롯하여, ‘상고(相鼓)’라는 명문이 새겨진 고구려 악기, 가로손잡이가 달린 동이류와 접시, 시루, 저울추, 세 개의 다리가 달린 벼루도 출토되었다.

 

이 성은 동벽을 구축함에 있어 성벽의 기저부와 중간부분은 판축(版築)을 하고, 성벽 내외부는 석축으로 마감하였는데 체성벽 내부에서 기둥홈이 있는 내벽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목주(木柱)를 활용하여 성벽 내부의 석축을 쌓은 후 체성벽을 덧붙여 쌓았으며, 체성벽 바깥쪽에는 보축성벽을 쌓은 후 보강토를 쌓은 복잡한 공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토성과 석성의 장점을 결합한 축성 공법은 중국 집안의 국내성(國內城)과 평양의 대성산성(大城山城) 및 남한의 고구려 보루에서도 확인되는 고구려의 특징적인 축성공법이다.

 

아차산 1보루 전경
아차산 1보루 전경

서울특별시 광진구·노원구 및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 있는 아차산 일대에 구축된 고구려 보루군이다.지도 보기 보루는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봉우리에 구축한 소형 석축산성으로, 산성에 비해 규모가 작은 군사시설을 말한다. 이 아차산 일대의 보루군은 고구려가 5세기 후반에 한강 유역을 점령한 후 551년(양원왕7)에 신라와 백제에 의해 한강 유역을 상실하기까지의 역사를 밝혀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면적은 약 924,599㎡로, 2004년 10월 27일 사적 제455호로 지정되어 경기도 구리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은 아차산을 비롯하여 용마산·시루봉·수락산·망우산 등 17여 개의 보루로 이루어진 유적이다. 그 중 일부를 제외한 10여 개의 보루가 고구려의 보루로 추정된다.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킨 고구려는 한동안 몽촌토성지도 보기에 군대를 주둔시키다가 6세기 초 무렵 진지를 한강 이북으로 후퇴시킨 뒤 아차산 일대에 보루를 쌓고 한강과 중랑천, 왕숙천 유역을 감시한 것으로 짐작된다.

 

홍련봉 1보루지도 보기에서 당시 고구려 궁궐 등에 사용된 기와 등이 나왔고, 수락산 보루 일대에서는 철제 마구와 고구려 토기조각이 출토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차산보루에서는 고구려 건물터, 돌널무덤, 온돌, 토기, 철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 유물들은 고고학적 자료가 부족하여 연구가 부진했던 고구려 관련 연구에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고구려 국경지대 요새의 구조와 성격, 국경방위체계, 군 편제 등을 밝혀주는 귀중한 역사 유적이다.

 

장미산성 성벽
장미산성 성벽

장미산성지도 보기은 충주시 가금면 장미산 능선을 따라 둘러쌓은 둘레 약 2.9km의 삼국시대 산성이다. 남한강을 따라 남북교통의 요충지를 차단하는 위치여서 전략적으로도 중요시되었지만, 산성의 남쪽 입석리에서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가 발견되어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국경 근방에 축조된 요새로 주목되었다.

 

성벽은 할석(割石)을 대강 다듬어 네모난 면을 바깥으로 정연하게 쌓아올렸는데, 성벽의 모습은 서쪽과 서남쪽에 원래의 웅장한 모습이 남아 있다. 높이는 4∼6m이고 아랫돌보다 윗돌을 조금씩 물려쌓아 안정감이 있다. 성벽의 대부분은 산의 비탈면을 최대한 이용하고 있다. 충주 지역은 원래 백제의 영역에 속해 있다가 5세기 말경 고구려의 영역으로 바뀌었고, 이후 신라가 557년(진흥왕 18)에 국원 소경으로 삼고, 이듬해 귀족의 자제와 육부의 호민을 이주시키면서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장미산성은 백제-고구려-신라로 이어지는 소속국의 변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임을 알 수 있다.

 

충주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 모습
충주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 모습

충주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지도 보기는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에 서 있는 고구려 비석이다. 일반적으로 신라시대 충주의 옛 지명에서 비롯된 ‘중원고구려비’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81년 3월 18일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으며, 원본은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에 위치한 충주고구려비 전시관에 보존되어 있다. 비석은 오랜 동안 용전리 선돌마을의 마을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선돌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오랜 동안 이 돌을 빨래판으로 썼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4면 가운데 2면의 글자는 마모되어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이다. 이 돌은 높이는 203cm, 폭은 55cm이다.

 

비문의 판독 결과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와 ‘대사자(大使者)’ ‘대형(大兄)’ 등 고구려 관직 이름이 등장함으로써 고구려비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고구려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을 따라 영역을 넓히고 국경을 표시한 비로, 400여 자를 새긴 것으로 추정되었다. 최근에 495년(문자명왕 4)으로 보는 견해와, 449년(장수왕 37)으로 보는 견해가 폭넓게 지지를 받고 있다. 비는 대체로 고구려의 중원 진출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그 영토가 충주 지역에까지 확장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비문의 내용 중에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형제관계임을 천명하는 의식을 치루고, 고구려왕이 신라왕인 東夷寐錦(동이매금)과 신하들에게 의복 등을 하사했음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신라를 동이라고 부른 표현은 당시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 평가되고 있다. 특히 ‘新羅土內幢主(신라토내당주)’라는 기록은 당시 신라의 영토 안에 고구려 군대가 주둔했던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前部大使者(전부대사자)’·‘諸位(제위)’·‘使者(사자)’ 등 고구려 관등명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 등의 글자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충주고구려비는 5세기 고구려의 남진(南進)과 신라와의 관계를 알려주어 사료(史料)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특히 고구려의 금석문(金石文)은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등 매우 일부만 전해지고 있는데, 이 석비는 한반도의 중부 지역인 남한강 유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더 높게 평가된다.

 

중국 길림성 돈화지도 보기 지역은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지역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발해의 건국 장소인 동모산이 있으며 첫 도성이었던 동모산성(東牟山城)이 있었던 곳이다. 698년 대조영(大祚榮)이 발해를 건국한 뒤 제3대 문왕 때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도읍을 옮기기까지 56년간 발해의 수도였다. 오늘날 길림성 돈화성(敦化城) 밖의 육정산(六頂山)에 있는 오동산성(敖東山城)이 그 유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지방은 이전 고구려 영역의 동북부에 해당하는 곳이며, 이 부근을 『구당서(舊唐書)』 「발해전」이나 『책부원구(冊府元龜)』에는 모두 ‘계루(고구려를 구성했던 5부족 중 한 부족의 이름)의 옛 땅[桂婁之故地]’으로 적고 있다. 동모산은 백두산에서 북쪽으로 300여 리 되는 지점에 위치하며, 사방이 험준한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동모산 동쪽 4km 지점에는 목단강(牡丹江)지도 보기 상류가 흐르고 있고, 산의 북쪽을 끼고는 대석하(大石河)가 흐르고 있는데, 이 강은 수도의 북쪽 방어선이었다. 원래 이곳 주민은 말갈족이 대부분이었으나 대조영이 이곳을 근거지로 선정한 것은 외적들의 침입에 대해 유리한 방어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에서는 발해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었으며, 이곳에서 동북으로 10km 정도에 발해 왕족과 평민들이 묻혀 있는 육정산(六頂山) 고분군이 있다.

 

돈화 오동성 전경
돈화 오동성 전경

오동성(敖東城)지도 보기은 중국 길림성 돈화시 동남쪽인 목단강 북안에 있다. 현재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근거하면, 오동성은 발해왕국 초기도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오동성이라는 이름은 발해시기의 명칭이 아니라 명나라 말 동북에서 만주족이 세력을 떨친 이후에 불리어진 호칭이다.

 

성 평면은 장방형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나뉜다. 『길림통지(吉林通志)』에는 ‘외성은 둘레가 4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벽은 보루 형태의 구조물인 치를 남벽에 3개, 북벽에 2개, 서쪽에 2개 쌓았으나, 동벽은 파괴되어 분명하지 않다. 내성은 정방형으로 각 변의 길이는 약 80m이다. 그 위치는 외성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내성 서벽은 외성 서벽과 90m 떨어져 있고, 내성 동벽은 외성 동벽과 220m 떨어져 있다. 내성은 지세가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며 주위에 해자(城壕)가 있다.주1)

 

그간의 발굴 조사를 통해 많은 동전·돌절구·도기·무기·철솥·수레 휘갑쇠(車穿)·벽돌·기와 등 귀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일부 유물은 분명하게 발해 초기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은 발해 초기의 정치·경제·군사·문화와 사회생활을 연구하는 데 신뢰할 만한 자료를 제공한다.

 

오동성 주변으로는 통구령산성과 성산자산성 등을 비롯한 여러 성곽이 자리하고 있으며, 육정산고분군과 강동 24개석과 같은 발해 시기의 여러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오동성은 지금까지 발해의 첫 도읍인 ‘구국(舊國)’의 도성으로 이해되고 있다.

 

동모산 전경
동모산 전경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지도 보기은 돈화시(敦化市)에서 서남쪽으로 12.5km 떨어진 목단강 지류 대석하(大石河) 남안의 높은 산 위에 있다. 해발이 600m에 달하는 성산자산(城山子山)은 비교적 넓은 대지에 있다. 성산자산성은 대체로 발해 초기의 유적으로 판단되는데, 특히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동모산성(東牟山城)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산자산성의 평면 형태는 불규칙한 타원형이다. 성벽은 해발 600m에 이르는 성산자의 산봉우리와 산허리를 감싸고 있는데, 흙과 돌을 섞어 쌓았다. 성벽 둘레는 약 2km이며, 남아 있는 높이는 1.5~2.5m이다. 성벽의 아래 너비는 5~7m인데 어떤 구간은 10m가 넘는 곳도 있다. 그러나 산성의 북쪽은 수면에서 약 40m 높이의 절벽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북벽은 상대적으로 낮은 높이로 축조되었다.

 

성문은 동문과 서문이 있다. 개구부(開口部)는 각각 3m와 4m로 서문의 크기가 약간 크며, 두 성문 안쪽은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휘어지는 둥근고리 형태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남벽에는 3개의 치(雉)가 남아 있다.

 

동문 안쪽에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친 경사가 완만한 평지에는 반지하식 집터가 50여 기 이상 확인되었다. 집터는 긴네모 모양으로, 크기가 큰 것은 8×6m, 작은 것은 6×4m 정도이다. 집터는 성 안의 비탈을 따라 북쪽을 향해 경사져 있다. 집터는 북쪽으로 경사져 있으며 남아 있는 벽의 높이는 20~40cm이다. 각 방은 모두 하나씩의 문이 나 있는데 대부분 동쪽을 향해 있으나 일부는 북쪽을 향해 나 있는 것도 있다. 산성의 남쪽 경사지와 약간 서쪽에 치우친 곳에도 집터가 일부 남아 있다.

 

성 안 편서북쪽, 서문에서 100m 떨어진 곳에는 지름은 4.6m의 돌로 만든 연못이 있다. 솥 밑바닥 모양으로 깊이는 1m이며 바닥에 돌을 깔았다. 북쪽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홈이 있으며, 작은 도랑을 북쪽으로 끌어 절벽 아래로 지나가게 한다. 성 동쪽에는 대규모 주거지에 인접하여 커다란 저수지가 있다. 성 중간에는 몇 곳의 평평하게 깎은 운동장 형태의 연병장이 있는데 큰 것은 100여m에 이른다. 성 안팎에서 일찍이 창끝·쇠칼·철화살촉·개원통보(開元通寶) 등이 출토되었다.주1)

 

정혜공주묘 표지석
정혜공주묘 표지석
정혜공주묘지도 보기는 발해 제3대 문왕 대흠무(大欽茂)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의 무덤으로 돈화현 남쪽 약 5km의 거리에 있는 육정산(六頂山) 고분군에서 1949년 8월 중국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다. 비문의 내용에서 40세로 보력(寶曆) 4년(777) 4월 14일에 죽은 공주에게 ‘정혜(貞惠)’라는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보력 7년 11월 24일에야 진릉(珍陵) 서원(西原)에 매장된 사실이 판명되었다.

 

정혜공주묘가 중요하게 된 것은 이 묘에서 출토된 묘지가 사료가 극히 부족한 발해사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묘지를 통해 밝혀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문왕의 존호가 ‘대흥보력효금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聖法大王)’이었던 것은 이 비문 제3행의 문왕과 공주와의 관계를 설명한 구절에서 밝혀졌다. 둘째, ‘대흥(大興) 보력(寶曆)’은 모두 문왕 때의 연호이며, 대흥 37년에 보력으로 개원(改元)되었다가 왕의 말년에는 다시 대흥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셋째, 대조영의 건국지가 발해사에서 가장 이설이 많은 문제였다. 그러나 이 정혜공주묘와 그 비문의 출토로 제2대 무왕 대무예(大武藝)의 능이 진짜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건국지는 돈화진의 오동산성으로 거의 정설화되고 있다. 넷째, 정혜공주묘비에 음각으로 되어 있는 비석 주변의 변초문과 상단의 운문, 그리고 비석문과 더불어 출토한 2기의 석사자를 통해 그들이 지녔던 석각예술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정혜공주묘의 묘지는 이후 발굴된 정효공주묘의 묘비문과 대조해 본 결과 문장이 거의 같다는 점에서 발해 왕실에서 사용하던 묘지, 묘비문은 미리 마련해 놓았다는 점도 또 하나의 특징이 될 수 있다.

 

정혜공주묘가 발해왕국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에서 남으로 300리나 떨어진 돈화현의 육정산에 있는 것은 까닭이 있다. 고조 대조영(大祚榮)이 영주(營州)에서 동으로 빠져 나와 건국의 기틀을 잡아 두만강 유역의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로 천도하는 문왕의 시대까지 그 나라의 수도로 삼았던 곳이 바로 돈화진의 오동산성(敖東山城)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발해 초기의 능묘가 육정산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중국 흑룡강성 영안 지역지도 보기은 발해의 주요 도시였던 5경 가운데 하나인 상경용천부가 있던 지역이다. 상경용천부는 발해 당시에는 상경성 또는 홀한성이라고도 불렀다. 제3대 문왕이 757년 처음으로 수도로 삼았고 이후 동경용원부로 잠시 수도를 이전했다가 성왕 때 다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발해 전시기를 걸쳐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수도로 있었으나, 발해 멸망 이후 유민들이 강제 이주당한 뒤부터는 폐허가 되어 청나라 때까지 방치되었다. 일제 강점기 발굴보고서 등에 동경성으로 많이 알려졌으나 동경용원부와 혼동하기가 쉬워 현재는 상경성으로 부른다. 1909년 이후 일본, 러시아, 북한 학자들이 여러 차례 발굴을 했고 1980년대 초부터는 중국 흑룡강성에서 발굴을 지속하고 있다.

 

상경성 주변에는 삼릉둔 고분군, 대주둔 고분군, 홍준어장 고분군, 칠공교, 오공교, 행산 가마터 등 많은 발해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영안 상경성 항공사진(ⓒ『육정산과 발해진』)
영안 상경성 항공사진(ⓒ『육정산과 발해진』)
영안 상경성 제1궁전지
영안 상경성 제1궁전지
발해 5경 중의 하나인 상경용천부성지도 보기 이다. 지금의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현(寧安縣)에 있다. 발해의 제3대 문왕 대흠무(大欽茂)가 755년 무렵 이곳으로 천도하였다. 785년 무렵 다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천도하더니 제5대 성왕 대화여(大華璵)에 이르러 다시 수도를 이곳으로 옮겨 발해국이 망할 때까지의 수도였다.

 

『요사(遼史)』에는 ‘홀한성(忽汗城)’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상경용천부가 홀한하(忽汗河), 즉 지금의 목단강(牧丹江) 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거란에 의해 발해가 멸망되고, 동단국이라는 국가가 잠시 들어섰다가 그 뒤에는 폐허가 되었다. 성터와 왕궁터가 남아 있다.

 

성터는 외성, 궁성, 황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성(外城)은 동서 4,650m, 남북 3,530m의 긴 네모꼴로서 높이 4m의 토성으로 두르고, 중앙 북방에 다시 황성(皇城: 內城)을 쌓았다. 성 밖에는 해자를 만들었고, 네 모퉁이에는 각루의 흔적도 남아 있다. 외성에는 모두 11개의 성문이 있었다.

 

궁성은 북쪽 중심에 긴 네모형으로 만들고, 전체 둘레는 3,986m이다. 각루와 해자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궁성 정문은 오봉루라고 하고 축대와 주춧돌이 남아 있다. 궁성 내부는 크게 4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지며 제2궁전지 옆에 있는 팔보유리정이란 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또한 어화원이라는 정원 터가 보존되어 있다.

 

황성 남문에서 외성 남문까지 연(連)한 일직선의 주작대로(朱雀大路)를 중심으로 좌경(左京)·우경(右京)으로 갈리고, 이것을 다시 여러 조방(條坊)으로 나누었다. 황성 안에는 궁전터가 여섯이 남아 있고, 그 가운데 하나에는 오늘날의 온돌시설을 하였음이 발견되었다. 석사자(石獅子), 보상화무늬(寶相華文)의 장전(長塼), 유리·기와·석등(石燈) 등은 발해의 독자적인 문화양식을 보여준다.

 

외성 안에는 11개의 도로가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도시 전체가 바둑판 모양의 방(坊)을 이루었다. 방의 전체 숫자는 81개 이상으로 추정되며, 4개의 방이 한 단위를 이루어 전(田)자 모양을 하였다. 여기에는 일반 주택뿐 아니라 시장과 절도 자리잡고 있었다. 사지는 성 안팎에서 10여 기가 발견되었고, 2호 사지(南大廟)에는 발해시대의 석등(石燈)과 석불(石佛)이 전해진다. 또 상경성 안에 있는 토대자촌(土台子村)지도 보기. 백묘자촌(白廟子村)지도 보기 등에서 지금까지 4개의 사리함이 출토되었다.

 

삼릉둔 1호분 전경
삼릉둔 1호분 전경
삼릉둔 2호분 벽화
삼릉둔 2호분 벽화
삼릉둔지도 보기 마을은 목단강(牧丹江) 가까이에 있다. 이 목단강에 가까운 언덕 위에 3기의 고분이 있다. 지방민들에 의하면 3기의 고분 때문에 이 곳 지명을 삼릉둔(三陵屯) 또는 삼령둔(三靈屯)으로 부른다고 한다. 삼릉둔 부근에는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 유적을 비롯한 승리촌의 성지, 대주둔, 남양 등지에 발해고분들이 가까이 산재해 있다.

 

1호묘는 남쪽을 향하여 반지하식으로 축조하였고, 널방(玄室), 널길(羨道), 무덤길(墓道)로 구성되어 있다. 무덤길은 약 7m로서 바닥을 경사지게 만들고 길 좌우를 돌로 쌓아 올렸다. 현무암을 정교하게 가공하여 서로 맞물리면서 남북으로 긴네모형의 널방을 쌓았는데, 벽에는 회칠한 흔적이 있다. 널방 크기는 길이, 너비, 높이가 3.9×2.1×2.4m이며, 꺾음식천장을 하였다. 봉토 위에는 주춧돌이 동서로 길게 줄지어 각각 4개씩 있고, 주변에 기와편들이 널려 있어서 건물이 세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호묘는 남쪽을 향하여 지하식으로 축조하였고, 구성 양식은 1호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널길 바닥에는 현무암 판돌을 깔았고, 널방은 현무암으로 7층 정도를 쌓아 축조했다. 널방 규모는 3.9×3.3×2.45m로 1호묘보다 다소 크다. 널방 천장은 3층의 말각천장(抹角天障)이고, 널길은 1층의 평행고임천장을 하였다. 널방 벽에 인물을, 천장에는 꽃잎을 그린 벽화도 확인되었다. 이런 점에서 벽에 인물만 그린 정효공주 벽화와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널방을 지하에 수축하면서 현무암을 벽돌처럼 깎아 쌓은 점은 당나라 벽돌무덤의 영향을 느끼게 해준다. 널방 벽에 정효공주 무덤과 동일한 양식의 인물을 그린 점도 당나라 영향이다. 그러나 무덤을 돌로 쌓고 말각천장을 구축한 점을 보면 고구려의 전통도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삼릉둔 고분은 고구려 양식의 정혜공주 무덤에서 당나라 양식의 정효공주 무덤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양상인 듯하다.

 

이 유적은 지금까지 알려진 발해시대의 고분 중 규모가 크고 화려한 건물과 묘역 시설을 가진 점에서 의의가 크다. 또한 둔화현 육정산의 정혜공주(貞惠公主) 무덤보다 더 화려하고 발해의 수도를 가까운 거리에 둔 것으로 보아 어느 왕릉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고구려의 고분들과도 유사하다. 특히, 현무암으로 쌓은 널길과 널방으로 구성된 묘실, 묘실 내부에 회를 바른 것, 수집된 유물인 와당 제작수법 등에서 고구려의 고분구조 및 와당과 유사하다. 따라서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임을 문화적으로 입증해주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중국 길림성 화룡지도 보기 지역은 발해 5경 중의 하나인 중경현덕부가 있던 지역이다. 자세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서고성자(西古城子)가 가장 확실시되고 있다. 발해국 제3대 문왕(文王) 대흠무(大欽茂)가 747년(문왕 11)∼751년 사이에 국초 이래 수도였던 돈화분지(敦化盆地)에서 이곳으로 천도해, 775년까지 발해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원래 중경현덕부의 위치는 1915년 일본학자 쓰다 소키치가 길림성 돈화로 비정하면서 그렇게 믿어져 왔으나 1933년 이후 상경용천부의 발굴성과에 따라서 재검토하게 되었다. 1934년부터 상경용천부와 같은 규모의 도성 유지(遺址)를 찾으면서 두만강 북안에서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해란하(海蘭河) 기슭의 화룡현(和龍縣) 서고성자(西古城子)라는 설이 유력해졌다.

 

서고성자는 1930~40년대 일본 학자들에 의해 발굴이 되면서 중경현덕부설이 제기되었고, 1980년대 말 서고성자 부근에서 정효공주묘가 발견되면서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중경현덕부의 소속 주(州)로는 노주(盧州)·현주(顯州)·철주(鐵州)·탕주(湯州)·영주(榮州)·흥주(興州) 등 6주가 있었으며, 현주의 포(布), 노주의 도(稻), 그리고 철주의 속현(屬縣)인 위성의 철(鐵)은 발해의 기간산업으로 당나라에까지 알려졌다.

 

서고성자 궁전지 전경
서고성자 궁전지 전경
서고성자 항공사진
서고성자 항공사진
서고성지도 보기은 발해 중경현덕부성으로 추정되는 성이다. 길림성 화룡에 있으며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 가에 있다. 성 주위에는 구릉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두도평야의 서쪽에서 북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있다.

 

성은 토성으로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으로 되어 있는데, 외성은 장방형이며 동서 길이가 600m, 남북 길이가 720m, 둘레는 2,713m이다. 성벽 파괴가 심하여 동・서 양벽과 남벽 일부는 도로가 되었고 나머지 성벽 정상부도 대부분 길이 되어 있다. 성벽 밖에는 해자를 내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내성은 외성 중간에서 북쪽에 치우친 곳에 위치해 있으며, 남북 길이는 310m, 동서는 190m의 긴네모형이다. 내성에는 5개의 궁지(宮址)가 있고 3개의 궁지는 남북 중심선에 한 줄로 배열되어 있다.

 

서고성 주변에는 하남둔 고성, 해란 고성 등이 있고 정효공주묘가 있는 용두산 고분군, 순금제 장식들이 출토된 하남둔 고분군, 발해 삼채가 출토된 북대 고분군 등이 있다. 성 안에서도 건물터, 연못, 우물, 도로와 같은 유구들과 함께 막새기와, 문자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최근에는 1942년 무렵의 항공사진이 확인됨으로써 서고성지 및 그 주변의 하남둔 고성(河南屯 古城)과 인근 고분군들의 당시 모습까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정효공주묘 벽화
정효공주묘 벽화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수향 용해촌 서쪽의 용두산지도 보기에 있는 발해 정효공주의 무덤이다. 정효공주(貞孝公主)는 제3대 문왕(文王)의 넷째 딸로서, 757년에 태어나 792년 6월에 3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묘도는 남쪽에 계단식으로 두 번에 걸쳐 만들었다. 묘문은 벽돌로 쌓아 막았고, 그 뒤에 널길이 있다. 중간에는 판석과 나무로 만든 이중의 문이, 문 뒤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관대의 남쪽 측면에서 사자머리 같은 그림이 확인되었다. 무덤에서 남녀 각 1인의 인골(人骨)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곳에 공주와 남편의 관이 각각 올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네 벽은 벽돌로 쌓았고, 그 위에 벽돌과 장대석을 쌓아 계단식으로 공간을 줄여나갔다. 그 뒤에 몇 개의 판석을 동서 방향으로 덮은 말각조정 천장을 만들었다. 따라서 벽돌로 무덤 벽을 쌓는 당나라 양식과 돌로 공간을 줄여 나가면서 천장을 쌓는 고구려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이 무덤은 일찍이 도굴되어 유물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발굴 과정에서 벽화와 묘비(墓碑)를 비롯해 도용(陶俑) 조각, 도금한 구리 장식품과 구리못, 쇠못, 칠기 조각, 글씨가 새겨진 벽돌 등이 발견되었다.

 

널방의 동·서·북쪽 벽과 널길의 동·서쪽 벽에 그려진 벽화는 처음으로 발해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두 12명인 인물상은 무사(武士), 시위(侍衛), 내시(內侍), 악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주인공은 그려져 있지 않다. 인물은 대체로 뺨이 둥글고 얼굴이 통통한 당나라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정효공주묘비문은 앞면에만 모두 18행 728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 중 719자가 판독 가능하다. 비문에서는 다양한 중국의 유교 경전과 역사서들을 두루 인용하고 있으며, 변려체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 발해 국왕과 공주의 덕을 칭송하는 구절들에 다양한 유교적인 수사를 사용하고 있어 문왕(文王) 이후 발해사회에 유학(儒學)이 널리 보급·확산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동경(혼춘) 팔련성 일대 위성사진(Google)
동경(혼춘) 팔련성 일대 위성사진(Google)
중국 길림성 혼춘 지역지도 보기은 발해 5경의 하나인 동경용원부가 있던 지역이다. 발해 전 시기를 걸쳐 약 9년 정도 발해의 수도였던 곳으로 신라와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여겨지는 곳이다.

 

동경용원부의 중심지는 현재 팔련성이라 불리는 고성이었고, 이곳은 혼춘하 평야의 서쪽 끝 지점으로 성의 서쪽으로는 두만강이 흐르고 있다. 지세는 평탄하고 주위에는 여러 산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동남쪽으로는 동해에 접해 있어서 신라와 일본과의 해상교통에 적합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발해에서는 신라로 가는 신라도와 일본으로 가는 일본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모두 이곳 동경용원부가 중심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아울러 팔련성 주변에는 온특혁부성 등 발해 유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는 것도 다른 발해 5경과 비슷하다.

 

팔련성 표지석
팔련성 표지석
중국 길림성 혼춘현에 있는 발해시대의 성터로, 발해 5경의 하나인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가 있던 곳이다. 고토성(古土城)·반랍성자(半拉城子)·팔뢰성(八磊城)·팔련성(八連城)이라고도 한다. 성은 혼춘분지의 넓은 들 가운데에 있다.지도 보기 성 앞으로는 두만강이 흐른다.

 

성은 네모형으로 외성과 여러 개의 내성으로 이루어졌다. 외성의 둘레는 약 2,775m 정도이다. 네 벽의 길이는 612m~739m로 이루어져 있다. 벽마다 그 가운데에 문터로 보이는 흔적이 있다. 성 안은 성벽에 의해 다시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북벽에서 132m 되는 곳에 동서로 북벽과 평행하는 서벽이 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그 안은 하나의 커다란 구역을 이룬다. 이 곳을 성의 북쪽 구역으로 볼 수 있다.

 

북쪽구역의 남벽 중심부에 잇닿아서 3개의 작은 구역이 남북방향으로 줄지어 있다. 이것은 제1·2·3의 작은 구역이다. 작은 구역마다 남벽에는 문터가 있어 서로 통할 수 있게 되었다. 이 3개의 작은 구역은 이 성의 중심을 이룬다. 중심 구역의 좌우에는 네모지게 성벽을 쌓은 동쪽구역과 서쪽 구역이 있다. 동서 2구역은 크게 2개의 작은 구역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다시 여러 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있다.

 

결국, 성은 북쪽 구역·중심 구역(작은 구역 3개)·동쪽 구역(작은 구역 2개)·서쪽 구역(작은 구역 2개)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혼춘현지(渾春縣誌)』에는 ‘이 성 안에 북대성(北大城)과 7개의 작은 성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 8개의 성이 서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성의 이름을 ‘팔련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각 구역에는 여러 개의 집터가 있으며 기와 파편들이 널려 있다. 성 밖에는 3개의 절터가 있고 여기서 불상 파편들이 발견되었다.

 

성 안에서는 다량의 기와와 전돌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는 화문전, 연화문 와당, 녹유기와, 문자기와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밖에 쇠칼, 쇠화살촉, 불상, 장신구 등도 출토되었다. 특히 석가와 다보를 함께 안치한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이 특징적으로 발견되었다. 주변에 혼춘하를 따라 온특혁부성, 신생사지, 마적달탑지 등 발해시대 유적이 많이 흩어져 있다.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 일대 항공사진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 일대 항공사진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 쪽구들 주거지(2005년)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 쪽구들 주거지(2005년)
러시아 연해주(沿海州)의 하산 지방에 있는 발해시대의 성터이다.지도 보기 크라스키노 마을로부터 남동쪽으로 2∼3km 떨어진 곳에 있다. 이 성은 야니치헤강 계곡의 우안(右岸)으로 심하게 습지화된 지역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이곳은 바다로부터도 가까운 곳이다.

 

크라스키노성은 평면이 불규칙한 원형으로 3개의 입구가 있는데 북쪽과 동쪽, 남쪽에 각기 한 개씩 있다. 성벽은 낮은데 심하게 붕괴되어 있어서 현존 높이는 1.5∼2m이다. 3개의 성문은 옹성(甕城)으로 보호되고 있다.

 

이 성터는 발해 62주(州)의 하나인 염주(鹽州)의 중심 유적지로 판단되는데, 이 추측은 어느 정도 이곳의 지명과도 부합된다. 왜냐하면 야니치헤강이라는 현재의 명칭은 염주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염주의 항구로부터 일본으로 떠나는 ‘일본도(日本道)’가 시작한다.

 

이곳에서 수집된 자료들로 발해시대의 형식을 보이고 있는 녹로[輪製]의 도기(陶器) 파편, 십자 모양으로 된 청동제의 수식(垂飾), 황갈색 색조를 띤 녹유(綠釉)의 자기(磁器) 파편, 기와 파편 등을 들 수 있다.

 

연해주 스쵸클랴누하 성터 위성사진(Google)
연해주 스쵸클랴누하 성터 위성사진(Google)
연해주 스쵸클랴누하 성터 내부 전경(ⓒ『조선유적유물도감』)
연해주 스쵸클랴누하 성터 내부 전경(ⓒ『조선유적유물도감』)
러시아 연해주 쉬코토보 강변에 있는 스쵸클랴누하지도 보기 마을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옛 성터이다. 1980년대 후반에 발굴 조사된 이 성은 전체 둘레가 약 1.1km 가량 되는 평지성이다. 성벽의 높이는 5~7m이며, 성 주변으로는 너비 5m 가량의 해자가 돌아간다.

 

스쵸클랴누하-1로 불리는 이 성터의 평면은 방형으로 전체 둘레는 1,000m 정도이고, 성벽 높이는 5~7m이다. 성벽에서 자라는 나무 때문에 위성사진에서도 윤곽이 뚜렷이 드러난다. 네 개의 성문에 옹성이 잘 남아 있고, 성벽 밖으로 해자도 잘 보존되어 있다.

 

아직 정식으로 발굴되지는 않았지만, 초기 철기시대부터 발해를 거쳐 금나라 때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규모로 보아서 발해 때에는 현급(縣級) 행정구역의 소재지였을 것이다.

 

이 성으로부터 북동쪽으로 500m 떨어진 곳에 스쵸클랴누하-2로 불리는 산성이 있다. 돌로 쌓은 성벽의 전체 길이는 250~300m이다. 축조 형식으로 보아 금나라 때 것으로 추정되지만, 내부에서 초기 철기시대 유물도 수습되었다.

 

청해토성 북문지(ⓒ국립중앙박물관)
청해토성 북문지(ⓒ국립중앙박물관)
청해토성 북벽(ⓒ국립중앙박물관)
청해토성 북벽(ⓒ국립중앙박물관)
청해토성지도 보기은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에 있었던 8세기 후반 발해의 성으로, 신창토성·북청토성·하호토성이라고도 한다. 옛날 발해 영역의 남단, 동해에 면한 평야에 그 터가 남아 있다.

 

발해 5경의 도성은 방형 또는 장방형의 토성이나 토석성(土石城)으로 축성하고, 성안에는 남북과 동서로 교차되는 대로를 설정하는 것이 특징이며, 특히 남북의 대로인 주작로(朱雀路)는 너비가 동서대로보다 넓었다 한다.

 

발해는 국토의 중요 지역에 상경·중경·동경·서경·남경의 5경을 두었는데, 이 중 남경의 도성 위치에 대하여는 함흥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이 토성을 발굴하고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함경남도 북청의 동남방 16km에 위치하고 있는 청해토성이 남해부라고 보고 있다.

 

성 주변에 용전리산성, 안곡산성, 거산성 등이 있는데 험한 산세를 이용하여 청해토성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는 위성 역할을 하였다. 또 야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북쪽에 감대봉·화삼봉·대덕산(1,416m)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청해토성에서 살던 사람들이 묻힌 것으로 전해지는 600여 기의 평리무덤떼, 가마터, 오매리절터를 중심으로 한 절골유적, ‘발해고도지’라고 새긴 비석이 서 있고 성의 북쪽에 커다란 호수가 가로놓여 있다.

 

발해가 일본과 교류할 때인 776년(문왕 40)에 단 한번 남경을 거쳐 토호포(吐號浦: 新昌)에서 배가 떴다고 하는데 이때 풍랑을 만나 167명 중 120명이 실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부거리 전경
부거리 전경
연대봉 봉수대 전경
연대봉 봉수대 전경
청진 부거리 일대 유적지도 보기 은 북한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부거리 일대의 발해 유적으로 2008년부터 발굴 조사가 되었다. 그 결과 성터 유적으로는 부거석성(평지성), 부거토성(산성), 독동토성(산성) 등과 고분군으로는 독동 고분군, 옥생동 고분군, 다래골 고분군, 합전 고분군, 토성 고분군, 연천골 고분군 등 그리고 봉수대 유적으로 연대봉 봉수대 등이 확인되었다. 부거리는 남으로는 청진시와 45km, 북으로는 나진과 50km 거리에 있고 동으로 바다와 8km 거리이다. 부거천에 의해 형성된 부거리 일대는 동서 2,000~3,000m의 폭을 가진 평지대를 이루면서 강물의 흐름을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어 높은 산들과 산줄기들에 의해 에워싸여진 비옥한 땅이 펼쳐져 있는 지형이다.

 

교통의 요충지이며 농업활동에 유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부거리 일대에는 발해 시기의 유적들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먼저 성터 유적으로 부거석성이 있다. 석축으로 조성된 부거석성은 평지성으로 형태는 반월성이다. 성문은 현재 서문만이 확인되며 구전에 의하면 4개의 문이 있었다고 하고, 성에는 배수구 시설의 존재가 확인된다. 석성 남쪽에는 장방형의 부거토성이 산성의 형태로 존재한다. 남북 길이 93m, 동서 너비 60m의 소규모 성이지만 벌판에 우뚝 솟은 형태로 주변에 대한 조망이 모두 가능하다. 이 성은 청진에서 회령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는 차단성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부거리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4km 떨어진 독동산성은 현재 흔적만 남아 있다. 이 성은 타원형의 석성과 장방형의 토성, 두 개의 성으로 구분되어 있다.

 

성터 유적과 아울러 주목되는 것은 봉수대 유적이다. 이 일대에 현재 11개의 봉수대 유적이 확인되나, 그 가운데 연대봉 봉수대는 부거석성의 동쪽 연대봉 정상에 있는 봉수대로 오롯이 보전되고 있다. 연대봉 봉수대는 차단 홈과 기단, 화독 시설로 구성되어 있으며, 비화로시기의 봉수로 한 개의 봉수만 올렸던 것으로 파악된다. 독동 봉수대는 흙 봉분 위에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계단식으로 석축을 한 봉수이다. 중심에는 직경 1m의 불가마가 존재하고 있다.

 

부거리 유적에서 가장 많은 존재가 확인된 것이 고분이다. 먼저 다래골 고분군은 전부 지상으로 축조되어 지면에서 1.5m~2m 높이의 봉분을 갖고 있는 고분군이다. 총 50여 기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연차골 고분군은 부거리 소재지의 서남쪽에 있으며 제1지구에 16기, 제2지구에서 10여 기가 확인되었다. 합전 고분군은 모두 51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는데, 횡혈식 석실봉토분과 수혈식 석관묘, 석곽묘 등의 형태로 축조되었다. 옥생동 고분군은 부거리 소재지의 동쪽 골짜기에 위치하며 총 15기가 확인되었다. 토성 고분군은 부거토성 서남쪽 언덕에 있으며 총 200여 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독동 고분군은 부거리 고분군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으며 독동성 서쪽에 100여 기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다.

 

부거리 일대 유적은 평지성-산성-봉수대라는 발해 당시 완벽한 방어체제를 갖추고 있는 유적이다. 이는 영안 상경성이나 화룡 서고성, 훈춘 팔련성 등 일련의 발해 성곽 유적들이 갖고 있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부거석성 일대의 고분군들도 발해 무덤의 전형적 형식인 석실봉토분, 석곽봉토분, 석관봉토분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 유물도 타질이나, 제작방법, 기물의 형태 등이 여타 발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과 흡사하여 발해 유적임을 뚜렷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 유적에서는 평지석성의 존재와 지상 봉토분의 구축, 목관의 미사용 등 발해만의 독특한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역사와 유적』, 2008.

박혁문, 『고구려 발해 역사기행』, 정보와사람, 2007.

이이화, 『찬란했던 700년 역사 고구려』, 언어세상.

이영훈 외, 『한국 미의 재발견 - 고분미술』, 솔출판사, 2005.

전호태, 「고구려 쌍영총 연구」, 高句麗渤海硏究 第46輯, 2013.7, 83-119.

김진광, 『북국발해탐험』, 박문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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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이렇게 중국은 만리장성을 고무줄처럼 늘려 고구려 성까지 포함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의 일부로…
남동생 :
누나, 고구려는 우리 역사잖아. 중국이 왜 저러는 거야?
누나 :
음, 그건 말이지… 함께 찾아보자.
누나 :
동북공정은 중국의 동북 3성인 랴오닝 성, 지린 성, 헤이룽장 성의 역사 지리, 민족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사업이래.
남동생 :
무슨 근거로 그러는데?
누나 :
중국은 현재 중국 땅에 있던 모든 나라의 역사를 모두 자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기 때문이야.
남동생 :
음… 그럼 옛날 고구려는 어디에 있었는데?
누나 :
지도로 봐볼까?
누나 :
고구려보다 오래된 고조선부터 보자.
남동생 :
와아! 엄청 넓네!
누나 :
고구려는 여기…
남동생 :
전부 한반도 북쪽과 만주 쪽에 있었네?
누나 :
그래. 아까 얘기한 대로 지금은 중국 땅인 곳도 있어.
남동생 :
흠! 이 나라의 땅이었던 곳을 현재 중국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역사라고 주장한다 이거지.
누나 :
그래.
남동생 :
음, 그러면 우리나라의 역사라고 하려면 어떻게 중국과 싸워야 해?
누나 :
싸우긴. 우린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반론을 제시하면 돼.
남동생 :
역사적 사실이라면… 어떤 거?
누나 :
흐음!
남동생 :
어떻게 다른데?
누나 :
고구려 사람들은 성을 쌓을 때 대부분 돌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긴 쐐기돌을 많이 사용해서… 이런 모습이 되는데,
남동생 :
그렇구나. 고구려성이 훨씬 강하네.
누나 :
그렇지!
누나 :
또,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영락’이라는 고구려만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 대왕의 치적을 기록한 내용과 건국신화가 새겨져 있지.
남동생 :
아하!
누나 :
그러니까, 고구려는 그 옛날 고조선부터 이어온 역사를 계승하고 있고, 신라에 멸망한 이후에도 고려, 조선 등이 고구려를 이어받았다는 계승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분명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란 말이지
남동생 :
휴! 증거가 있어서 다행이다.
누나 :
역사는 언제나 밝혀지게 되어 있어.
남동생 :
추리 소설의 범인처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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