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울릉도·독도 학술조사 활동

Scientific Expedition Activities of Ulleungdo-Dokdo

독도 표목과 표석의 설치

조사단의 중요한 활동 중 하나는 독도에 우리 땅임을 표시한 시설물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1947년 1차 조사단은 독도의 동도에 ‘조선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독도(朝鮮慶尙北道鬱陵郡南面獨島)’, ‘울릉도학술조사대 독도 탐사기념(鬱陵島學術調査隊獨島探査紀念)’이라고 쓰인 두 개의 표목을 세웠다.

1952년 2차 조사단은 한글, 한자, 영어로 독도의 명칭이 새겨진 영토표석을 설치하고자 했으나, 폭격사건으로 독도에 입도하지 못하고 표석은 울릉도에 보관했다.

1953년 독도 입도에 성공한 3차 조사단은 일본이 설치한 표목을 제거하고, 1952년 설치하지 못했던 표석을 독도조난어민위령비 근처에 설치했다.

제1차 학술조사단이 설치한 독도 표목 | 1947. 8.
제1차 학술조사단이 설치한 독도 표목 | 1947. 8.

① 울릉도학술조사대 독도 탐사 기념
 (鬱陵島學術調査隊 獨島 探査 記念)
② 조선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독도
 (朝鮮 慶尙北道 鬱陵郡 南面 獨島)

표석 설치 후 홍종인 한국산악회 회장 | 1953. 10. 15. | 촬영 김한용
표석 설치 후 홍종인 한국산악회 회장 | 1953. 10. 15. | 촬영 김한용

학술반의 조사활동

조사단은 다양한 학문 분야의 권위자들로 학술반을 편성했다. 학술반은 전공별로 인문과학(역사, 고고, 지리, 민속,언어 등), 사회과학(경제, 사회 등), 자연과학(지질, 광물, 동식물,농림 등) 등으로 팀을 나누고 각 팀별로 조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기록으로 남기고자 보도반을 통해 사진과 영상을 찍었다.

독도 | 1953. 10. 15. | 촬영 김한용
독도 | 1953. 10. 15. | 촬영 김한용

울릉도의 마을별 제사와 제신명, 울릉도 동제 축문 등 울릉도 민속에 대해 조사, 기록한 자료이다.

울릉도의 지세, 기후, 교통, 통신, 교육, 산업, 종교, 행정기구 등에 대해 정리한 자료이다.

034 울릉도 수토관 박석창 각석문 탁본 | 1947년 탁본 추정(1711년 각석) | 48.4×58.8
034 울릉도 수토관 박석창 각석문 탁본 | 1947년 탁본 추정(1711년 각석) | 48.4×58.8

1711년 5월 울릉도 수토관으로 파견된 삼척영장 박석창 일행이 수토의 행적을 남기기 위해 바위에 새긴 글을 탁본한 것이다. 울릉도에 남아있는 수토관의 각석문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47년 조선산악회의 제1차 울릉도학술조사 때 탁본한 것으로 추정된다.

035 울릉도 수토관 구억의 각석문 탁본 | 1947년 탁본 추정(1735년 각석) | 38×58.3
035 울릉도 수토관 구억의 각석문 탁본 | 1947년 탁본 추정(1735년 각석) | 38×58.3

1735년 울릉도 수토관 구억이 울릉도에 수토를 나와 새긴 각석문의 탁본이다.
1947년 제1차 학술조사 활동 중 울릉도에서 탁본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남일보, 2면 | 1947. 8. 28.
영남일보, 2면 | 1947. 8. 28.

“울릉도 학술조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본사 특파기자 김득룡 기(記) (3)”

역사적으로 문헌이 전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닌 만큼 본반(本班)의 탐사는 처녀 탐사라 하겠다.
… 동국여지승람, 삼국사기 등으로 본도의 인지는 신라 지증왕 12년(거금(距金) 435년 전) 당시의 강릉군 군주 이사부(異斯夫)가 목조 사자로 우산국(본도)을 토평(討平)한 것이 첫 사적(史蹟)이며 …
고적(古蹟) 토기(土器)로는 누석총(累石塚)은 각처에서 발굴되었으며 석기시대의 유물 토기 등이 발굴되었다 …

독립신보, 2면 | 1947. 10. 15.
독립신보, 2면 | 1947. 10. 15.

“독도는 우리 것!
악랄한 왜적의 촉수
증빙자료가 엄연히 증명”

… 또 한 가지 중대한 발견은 조선과 대륙, 대만에만 분포되어 있고 일본에는 절대로 없는 ‘대만 흰 나비’가 이 섬에 있는 것은 동물학상으로도 조선의 섬인 것을 확실히 증명해 준다 …

영남일보, 2면 | 1947. 8. 24.
영남일보, 2면 | 1947. 8. 24.
영남일보 1947년 8월 24일

독도서 해구(海狗) 3두를 포획

【울릉도에서 본사 특파원 김득룡(金得龍) 발】
20일 조(朝) 학술조사단 일행은 독도에 도착 진지한 조사에 착수한 후 해안에서 ‘옷또세이’ 세 마리를 포획하여 석각(夕刻)에 숙박지인 울릉도 도동항(道洞港)에 귀환하였다 …

자유신문, 2면 | 1947. 8. 24
자유신문, 2면 | 1947. 8. 24
자유신문 1947년 8월 24일

동해 신비경인 독도의 생태에 황홀 산악회 조사대

… 특히 이 섬에 흥미를 끌 때 생물반(生物班)도 환성을 올린다.
이 절해고도에 백합꽃과 나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각 반의 짧은 간시 중 눈부신 활동의 결과 이익물은 약 50여 종 그 계통은 역시 울릉도와 완전히 연결되는 것임은 알 수 있다는 것이고 …

측지반과 등반반의 독도 측량

독도의 측지반은 제2차 학술조사 때부터 조사단에 포함되었다. 독도 측량이 2차 학술조사의 주요 과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조사단이 독도 입도를 시도한 1952년 9월 22일과 24일 미군기의 폭격 연습으로 입도 할 수는 없었지만, 계속되는 폭격 속에서도 측지반 박병주는 폭탄이 터지는 불빛과 음속, 그리고 협각법을 통해 독도의 높이를 계산하고 목측과 사진으로 모양을 그렸다.
1953년 3차 조사 때도 독도 측량이 중요한 목적이었다. 3차 조사단의 측지반은 독도의 절벽을 기어오르며 측량용 폴을 세워준 등반반의 협조로 독도를 측량하고, 결국 독도 지도를 그려낼 수 있었다.

1952년 제2차 학술조사의 독도 측량

… 그러나 독도폭격은 그치질 않았고 … 독도를 눈앞에 두고 상륙은 커녕
도피하여 돌아와야 할 지경이었다 … 독도를 똑똑히 보아야겠다.
폭탄이 독도가에 떨어져 물기둥을 만들고 있다.

음속으로 거리를 측정할 작정을 했다 … 마침 서도 한 모퉁이에 맞아 불꽃이 났다. 하나 둘 셋 넷 … 아홉 열 하나 둘 … 아홉 열 하나 둘 「꽝」 소리가 났다.
스물 두번 헤아리는 동안에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 약 6초이다.
(이것은 내가 평소부터 1에서 10까지 3초 동안 헤아리는 연습이 되어있어 거의 정확하게 시간을 측정할 수 있었다) …
여하튼 6초에 340m를 곱했다. (소리는 섭씨0도에 있어 331m의 속도니까)
약 2km의 거리가 된다 …

계속해서 서도의 높이를 협각법으로 측정했다.
내 눈에서 손까지 61cm인데 독도가 4cm로 보였다.
계산해보니 약 130m였다 …

다음은 섬의 꼴을 입체사진에 의해 나타내려고 생각하곤 방위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것도 못 믿어져서 내 자신 종횡의 차를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하게 스케치를 했다. 이와 같이 지극히 애매한 방법으로 발표하기에는 부끄러운 이런 정도 밖에는 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

박병주, 「독도의 측량」 중에서

1953년 제3차 학술조사의 독도 측량

… 스케치 판을 든 채 독도에 뛰어 내렸다 … 측량이다. 순간적으로 일어서자 트랜싯을 상자에서 꺼내고 삼각에다 붙여 “어서 착수요” 호령하면서 타고 온 그 배에 도로 몸을 싣고 제1 측점으로 향했다 … 수평각을 읽고 수직각을 일고 스타디아법으로 함척(자)을 읽고 신속하고도 정확한 작업이어야 한다 … 구자원 선생은 함척을 가리키고 기록계는 복창을 해가면서 기록을 한다. 무전사는 옆에 붙어 본선과의 연락을 하고 선부는 힘껏 노를 저어야 했다 … 등반대원은 줄을 달고 경사 75도의 산을 기어 올라가는 눈물겨운 일이 시작되었다. 7시에는 벌써 해발 72m의 동도 낮은 봉우리에 표식간 제 7호(럭키세븐)이 세워졌다. 트랜싯 망원경의 십자선상에 럭키세븐의 표식이 나타났을 때 “오-라이” 있는 고함을 다하여 소리를 쳤다 …

박병주, 「독도의 측량」 중에서

울릉도 실태조사

조사단은 독도의 실태를 밝히기 위해서는 독도와 울릉도의 관계를 연구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제1차 학술조사에서는 각 분야별로 울릉도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울릉도청에 보관되어 있던 1906년 울도(울릉도) 군수 심흥택이 작성한 「심흥택보고서」의 부본을 발견했다. 또한 울릉도 주민과의 면담을 통해 독도가 우리 땅임을 밝히는 중요 증언을 채록하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한편, 당시 울릉도 주민들의 생활 실태를 살피는 것은 학술조사 계획서의 목적과 과제에 별도로 적혀 있을 만큼 조사단의 중요한 임무였다. 특히 의학반은 울릉도민과 독도 출어민의 의학적인 조사와 무료진료를 실시했다.

제1차 울릉도학술조사대 | 1947. 8.
제1차 울릉도학술조사대 | 1947. 8.
036 울릉도 관계자 명단 | 1947년 추정 | 14.8×22
036 울릉도 관계자 명단 | 1947년 추정 | 14.8×22

1947년 제1차 울릉도학술조사 활동 중 재직하고 있던 울릉도 관계자 명단이다.

037 울릉도 주민 위문품 수탁 문서 서식 | 1947. 8. | 19.3×26.8
037 울릉도 주민 위문품 수탁 문서 서식 | 1947. 8. | 19.3×26.8

1947년 제1차 울릉도학술조사대가 울릉도 주민들에게 전달할 위문품을 기탁받기 위한 작성한 문서의 서식이다.

성별과 나이에 따라 1946년 울릉도 학생들의 신장과 체중, 흉위를 측정·정리한 통계표이다.

영남일보 1947년 8월 28일

울릉도 학술조사를 마치고 돌아와서(3)
본사 특파기자 김득룡 기(記)

… 약품 부족 관계로 전 도민의 요구에 응하지 못한 것은 만분 유감이라 하겠다. 그러나 본 반이 닿는 곳마다 도민은 몰려들어 적은 반원(班員)으로는 눈코 뜰 사이가 없는 정도이다. 현지서 치료는 약 3백명 가량이며 가정에 출장 치료검진도 하였는데, 결과로 나타난 기현상은 의외로 환자의 다수가 결핵 환자이며 …

영남일보, 2면 | 1947. 8. 28.
남선경제신문 1947년 8월 28일

독도는 이런 곳

… 그 후 광무 10년(1906년) 한국 통감부가 설치되자 은기도사, 세무감독국장, 경관, 의사 등 10여인을 태운 일본 관원이 울릉도에 상륙, 도사(울릉도청)를 방문하고 독도를 자기네 것임을 주장하였으므로 도사는 그 익일(다음날) 정부에 보고한 통첩문이 지금 울릉도에 귀중히 보관되고 있다 …

남선경제신문, 2면 | 1947. 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