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대신과 논의 끝에 황제가 왕숭고의 상소대로 암달을 순의왕(順義王)에 봉하는 등 상언을 받아들인 설명
[왕숭고의] 상소(上疏)가 들어오자 조정 대신에게 내려 논의하였다. 황제는 결국 왕숭고의 상언(上言)을 받아들여, 조서를 내려 엄답을 순의왕(順義王)에 봉하고 홍망의(紅蟒衣)주 001 1습(襲)을 하사하였으며, 곤도력합(昆都力哈)
주 002
각주 002)

·황태길은 도독동지(都督同知)주 003를 제수하고, 각각 붉은 사자의(獅子衣) 1습·채폐(綵幣) 4표리(表裏)주 004를 하사하였으며, 빈토태길(賓兎台吉) 등 10명은 지휘동지(指揮同知)를 제수하고, 나목아태길(那木兒台吉) 등 19명은 지휘첨사(指揮僉事)주 005를 제수하고, 타아한태길(打兒漢台吉) 등 18명은 정천호(正千戶)를 제수하고, 아배태길(阿拜台吉) 등 12명은 부천호(副千戶)를 제수하였으며, 흡태길(恰台吉) 등 2명은 백호(百戶)를 제수하였다. 곤도력합은 바로 노파도(老把都)이다. 병부(兵部)주 006가 왕숭고의 건의를 받아들여 호시(互市)의 법령을 정하였다. 추시(秋市)가 끝나고 무릇 말 500여 필을 얻자, 엄답 등에게 채폐를 차등하여 하사하였다. 서부의 길능과 그의 조카 절진(切盡)
주 007 등도 또한 개시(開市)를 청하니, 조서를 내려 홍산돈(紅山墩)와 청수영(淸水營)에서 개시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교역이 끝나고 역시 길능을 도독동지에 봉하였다. 얼마 후 엄답이 금자경(金字經)주 008과 라마승(剌麻僧)주 009을 청하니, 조서를 내려 [요청한 것들을] 주었다. 왕숭고가 다시 옥인(玉印)을 청하니, 조서를 내려 도금은인(鍍金銀印)주 010을 주었다. 엄답이 연로하여 불교에 미혹되어 다시 해남(海南)에 절을 짓기를 청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앙화(仰華)라는 사액(寺額)을 하사하였다.주 011
엄답은 늘 멀리 떨어진 청산(靑山)에 거주하였고 아들이 둘 있는데, 하나는 빈토(賓兎)라고 하며 송산(松山)에 거주하였는데 [송산은] 난주(蘭州)의 북쪽에 있고, [다른 아들은] 병토(丙兎)
주 012라고 하며 서해(西海)에 거주하였는데 [서해는] 하주(河州)
주 013昆都力哈(1510~1572): Bayisqal Köndelen qayan의 音譯이다. 본명은 巴雅思哈勒이며, 老把都兒台吉 또는 把都台吉(Bayatur tayiji)라고도 칭한다. 明代 蒙古 應紹不萬戶哈喇嗔部의 部主이다. 答言罕의 손자이자 俺答汗의 동생이다. 張家口 東北의 獨石, 開平 일대에 駐牧하면서, 吉襄·俺答과 함께 명의 변경을 침범하여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嘉靖 30년(1551) 俺答을 따라 明朝와 和議하고 新開口堡에서 互市를 열었다. 隆慶 5년(1571)에 俺答이 明朝와 다시 화의할 때, 昆都力哈을 위해 王號를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都督同知를 除授받았다.
각주 013)

의 서쪽에 있고, 모두 호시(互市)주 014河州: 지금의 甘肅省 臨夏의 위구르自治州로, 여러 세대에 걸쳐 回族·漢族·東鄕族·撒拉族 등이 함께 거주하였다. 이 지역명은 晉나라 때 지은 것으로 漢朝에서는 大夏라고 불렀으며, 隋朝에서는 枹罕, 唐朝에서는 安鄕, 宋朝에서는 寧河라고 하였는데, 明朝에서는 晉의 명칭을 계승하였다(『秦邊紀略』 卷中 참조). 洪武 4년(1371)에 衛를 두었고, 홍무 6년(1373)에 府로 바꾸었으며, 홍무 7년(1374)에 陝西行都指揮使司를 두었는데, 홍무 12년(1379)에는 都司 및 府를 폐지하고, 河州衛를 두었다(『明史』 卷42 「地理」2 참조).
각주 014)

를 청하였으나주 015 매우 포악하고 오만하였다. 엄답이 그들을 효유하여 또한 점차 순복(馴服)하였다.주 016
互市: 中原에 세워진 王朝와 주변 민족이 경제적 수단을 상호 교환했던 장소이자 시장을 지칭하며, 북방 민족과의 사이에서는 馬市라고도 부른다. 주로 中原 지역에 부족한 말을 북방 지역에서 가져오는 대가로 돈·비단·차·소금 등을 교환했기에 통상적으로 馬市라고 불렸을 뿐, 반드시 말만을 교역하는 장소라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은 북방 민족이나 왜구의 무력을 동원한 약탈을 방지하기 위해 정기적인 물물교환 창구로서 互市 혹은 馬市를 개설하였다. 즉 互市(馬市)를 통해 주변 민족은 그들의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였고, 중원의 왕조는 군사적 평화를 확보하였다.
-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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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昆都力哈(1510~1572): Bayisqal Köndelen qayan의 音譯이다. 본명은 巴雅思哈勒이며, 老把都兒台吉 또는 把都台吉(Bayatur tayiji)라고도 칭한다. 明代 蒙古 應紹不萬戶哈喇嗔部의 部主이다. 答言罕의 손자이자 俺答汗의 동생이다. 張家口 東北의 獨石, 開平 일대에 駐牧하면서, 吉襄·俺答과 함께 명의 변경을 침범하여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嘉靖 30년(1551) 俺答을 따라 明朝와 和議하고 新開口堡에서 互市를 열었다. 隆慶 5년(1571)에 俺答이 明朝와 다시 화의할 때, 昆都力哈을 위해 王號를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都督同知를 除授받았다.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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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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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3)
河州: 지금의 甘肅省 臨夏의 위구르自治州로, 여러 세대에 걸쳐 回族·漢族·東鄕族·撒拉族 등이 함께 거주하였다. 이 지역명은 晉나라 때 지은 것으로 漢朝에서는 大夏라고 불렀으며, 隋朝에서는 枹罕, 唐朝에서는 安鄕, 宋朝에서는 寧河라고 하였는데, 明朝에서는 晉의 명칭을 계승하였다(『秦邊紀略』 卷中 참조). 洪武 4년(1371)에 衛를 두었고, 홍무 6년(1373)에 府로 바꾸었으며, 홍무 7년(1374)에 陝西行都指揮使司를 두었는데, 홍무 12년(1379)에는 都司 및 府를 폐지하고, 河州衛를 두었다(『明史』 卷42 「地理」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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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4)
互市: 中原에 세워진 王朝와 주변 민족이 경제적 수단을 상호 교환했던 장소이자 시장을 지칭하며, 북방 민족과의 사이에서는 馬市라고도 부른다. 주로 中原 지역에 부족한 말을 북방 지역에서 가져오는 대가로 돈·비단·차·소금 등을 교환했기에 통상적으로 馬市라고 불렸을 뿐, 반드시 말만을 교역하는 장소라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은 북방 민족이나 왜구의 무력을 동원한 약탈을 방지하기 위해 정기적인 물물교환 창구로서 互市 혹은 馬市를 개설하였다. 즉 互市(馬市)를 통해 주변 민족은 그들의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였고, 중원의 왕조는 군사적 평화를 확보하였다.
- 각주 015)
- 각주 016)
색인어
- 이름
- 왕숭고, 왕숭고, 엄답, 곤도력합(昆都力哈), 황태길, 빈토태길(賓兎台吉), 나목아태길(那木兒台吉), 타아한태길(打兒漢台吉), 아배태길(阿拜台吉), 흡태길(恰台吉), 곤도력합, 노파도(老把都), 왕숭고, 엄답, 길능, 절진(切盡), 길능, 엄답, 왕숭고, 엄답, 엄답, 빈토(賓兎), 병토(丙兎), 엄답
- 지명
- 홍산돈(紅山墩), 청수영(淸水營), 해남(海南), 청산(靑山), 송산(松山), 송산, 난주(蘭州), 서해(西海), 서해, 하주(河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