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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조정대신과 논의 끝에 황제가 왕숭고의 상소대로 암달을 순의왕(順義王)에 봉하는 등 상언을 받아들인 설명

  • 국가
    달단(韃靼)
[왕숭고의] 상소(上疏)가 들어오자 조정 대신에게 내려 논의하였다. 황제는 결국 왕숭고의 상언(上言)을 받아들여, 조서를 내려 엄답을 순의왕(順義王)에 봉하고 홍망의(紅蟒衣)주 001
각주 001)
蟒衣: 明代 만들어진 일종의 繡蟒 官服을 말한다. 蟒은 龍과 비슷하나 발톱이 작아 “五龍四蟒”으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옷 위에 金線 자수를 놓는다. 明初에 皇帝 左右의 宦官과 寵臣, 一·二品官만 사용할 수 있었으나, 후에는 群臣에 널리 하사되었다. 天順 연간(1457~1464)·弘治 연간(1470~1505)에 이르러 官民 衣服에 蟒龍과 飛魚, 鬪牛 등의 도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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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습(襲)을 하사하였으며, 곤도력합(昆都力哈) 주 002
각주 002)
昆都力哈(1510~1572): Bayisqal Köndelen qayan의 音譯이다. 본명은 巴雅思哈勒이며, 老把都兒台吉 또는 把都台吉(Bayatur tayiji)라고도 칭한다. 明代 蒙古 應紹不萬戶哈喇嗔部의 部主이다. 答言罕의 손자이자 俺答汗의 동생이다. 張家口 東北의 獨石, 開平 일대에 駐牧하면서, 吉襄·俺答과 함께 명의 변경을 침범하여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嘉靖 30년(1551) 俺答을 따라 明朝와 和議하고 新開口堡에서 互市를 열었다. 隆慶 5년(1571)에 俺答이 明朝와 다시 화의할 때, 昆都力哈을 위해 王號를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都督同知를 除授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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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길은 도독동지(都督同知)주 003
각주 003)
指揮同知: 명의 조정에서 변경의 소수민족 수령들에게 수여한 칭호이다. 명의 북부와 서북부의 소수민족 지역에 衛所를 설치하고 그 수령들에게 指揮同知의 직함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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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제수하고, 각각 붉은 사자의(獅子衣) 1습·채폐(綵幣) 4표리(表裏)주 004
각주 004)
表裏: 옷을 만드는데 쓰이는 비단이나 천의 겉과 안감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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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하사하였으며, 빈토태길(賓兎台吉) 등 10명은 지휘동지(指揮同知)를 제수하고, 나목아태길(那木兒台吉) 등 19명은 지휘첨사(指揮僉事)주 005
각주 005)
指揮僉事: 종3품의 관직으로 京衛指揮使司가 관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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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제수하고, 타아한태길(打兒漢台吉) 등 18명은 정천호(正千戶)를 제수하고, 아배태길(阿拜台吉) 등 12명은 부천호(副千戶)를 제수하였으며, 흡태길(恰台吉) 등 2명은 백호(百戶)를 제수하였다. 곤도력합은 바로 노파도(老把都)이다. 병부(兵部)주 006
각주 006)
兵部: 隋唐 시대에 설치되었고, 武官의 임용, 兵籍, 軍械, 軍令 등을 담당하였다. 淸末까지 존속하였으나, 그 職權은 시대에 따라서 변화가 있었다. 宋·遼·金·元에서는 兵政을 관할하지 않았다. 明代의 兵部尙書는 ‘本兵’이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권한은 가장 컸다. 淸代의 兵部에서는 武官의 임용이나 驛站의 관리는 담당하였지만 兵權은 갖지 못하였다. 光緖 32년(1906)에 새로운 정치제도를 시행하면서 兵部라는 명칭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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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숭고의 건의를 받아들여 호시(互市)의 법령을 정하였다. 추시(秋市)가 끝나고 무릇 말 500여 필을 얻자, 엄답 등에게 채폐를 차등하여 하사하였다. 서부의 길능과 그의 조카 절진(切盡) 주 007
각주 007)
切盡(1540~1586): Chechen의 음역이다. 蒙古語 Sechen과 같은 의미로 ‘현명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명대 몽골의 襖兒都司部의 귀족이다. 지금 내몽골의 鄂爾多斯 지역에서 유목하였다. 1562년에 무리를 이끌고 額爾齊斯河(Irtysh강)에서 瓦剌을 공격하였고, 1566년에는 청해로 진격하였다. 1571년에 俺答과 명조가 화의를 맺은 후, 명조에 通貢互市를 청하여 성사시켰다. 명 조정으로부터 指揮僉事를 제수받았고, 이후 指揮同知로 승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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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도 또한 개시(開市)를 청하니, 조서를 내려 홍산돈(紅山墩)청수영(淸水營)에서 개시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교역이 끝나고 역시 길능을 도독동지에 봉하였다. 얼마 후 엄답이 금자경(金字經)주 008
각주 008)
金字經: 泥金으로 글씨를 써서 만든 佛經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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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라마승(剌麻僧)주 009
각주 009)
剌麻: 티베트어의 bla-ma를 음역한 것으로 喇嘛라고도 표기한다. bla는 ‘上’의 의미이고, ma는 ‘人’이라는 뜻이므로 직역하면 ‘윗사람’이다. 원래 출가한 승려를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일반적으로 ‘스승’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신앙자의 중간자적, 매개자적인 존재로서 尊崇되었는데, 이 라마를 통해서 佛·法·僧과 결합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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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청하니, 조서를 내려 [요청한 것들을] 주었다. 왕숭고가 다시 옥인(玉印)을 청하니, 조서를 내려 도금은인(鍍金銀印)주 010
각주 010)
명이 다른 나라에 수여하는 인장은 金印과 鍍金銀印이 있는데, 금인은 朝鮮과 日本에만 주었고, 琉球·安南·占城·爪哇 등지에는 도금은인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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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주었다. 엄답이 연로하여 불교에 미혹되어 다시 해남(海南)에 절을 짓기를 청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앙화(仰華)라는 사액(寺額)을 하사하였다.주 011
각주 011)
이후 萬曆 7년(1579) 가을에도 俺答은 寺額을 청했고, 이에 詔書를 내려 ‘弘慈’라는 寺額을 하사했다(『明史紀事本末』 卷60 「俺答封貢」 萬曆 7년條 참조). 이들이 요청한 사원 건축에 대한 내용은 『神宗實錄』 卷60 萬曆 5년 3월 甲辰條와 『神宗實錄』 卷61 萬曆 5년 4월 癸亥條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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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답은 늘 멀리 떨어진 청산(靑山)에 거주하였고 아들이 둘 있는데, 하나는 빈토(賓兎)라고 하며 송산(松山)에 거주하였는데 [송산은] 난주(蘭州)의 북쪽에 있고, [다른 아들은] 병토(丙兎) 주 012
각주 012)
丙兎와 賓兎에 대해서는 漢譯의 차이일 뿐 같은 인물로 보는 경우도 있다(張鴻翔, 195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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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며 서해(西海)에 거주하였는데 [서해는] 하주(河州) 주 013
각주 013)
河州: 지금의 甘肅省 臨夏의 위구르自治州로, 여러 세대에 걸쳐 回族·漢族·東鄕族·撒拉族 등이 함께 거주하였다. 이 지역명은 晉나라 때 지은 것으로 漢朝에서는 大夏라고 불렀으며, 隋朝에서는 枹罕, 唐朝에서는 安鄕, 宋朝에서는 寧河라고 하였는데, 明朝에서는 晉의 명칭을 계승하였다(『秦邊紀略』 卷中 참조). 洪武 4년(1371)에 衛를 두었고, 홍무 6년(1373)에 府로 바꾸었으며, 홍무 7년(1374)에 陝西行都指揮使司를 두었는데, 홍무 12년(1379)에는 都司 및 府를 폐지하고, 河州衛를 두었다(『明史』 卷42 「地理」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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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서쪽에 있고, 모두 호시(互市)주 014
각주 014)
互市: 中原에 세워진 王朝와 주변 민족이 경제적 수단을 상호 교환했던 장소이자 시장을 지칭하며, 북방 민족과의 사이에서는 馬市라고도 부른다. 주로 中原 지역에 부족한 말을 북방 지역에서 가져오는 대가로 돈·비단·차·소금 등을 교환했기에 통상적으로 馬市라고 불렸을 뿐, 반드시 말만을 교역하는 장소라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은 북방 민족이나 왜구의 무력을 동원한 약탈을 방지하기 위해 정기적인 물물교환 창구로서 互市 혹은 馬市를 개설하였다. 즉 互市(馬市)를 통해 주변 민족은 그들의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였고, 중원의 왕조는 군사적 평화를 확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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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청하였으나주 015
각주 015)
丙兎와 賓兎가 開市를 요청하고 그것을 허가받은 내용은 『神宗實錄』 卷33 萬曆 2년 윤12월 己丑條와 『神宗實錄』 卷43 萬曆 3년 10월 壬申條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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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포악하고 오만하였다. 엄답이 그들을 효유하여 또한 점차 순복(馴服)하였다.주 016
각주 016)
관련 내용은 『明史』 卷330 「西域」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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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蟒衣: 明代 만들어진 일종의 繡蟒 官服을 말한다. 蟒은 龍과 비슷하나 발톱이 작아 “五龍四蟒”으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옷 위에 金線 자수를 놓는다. 明初에 皇帝 左右의 宦官과 寵臣, 一·二品官만 사용할 수 있었으나, 후에는 群臣에 널리 하사되었다. 天順 연간(1457~1464)·弘治 연간(1470~1505)에 이르러 官民 衣服에 蟒龍과 飛魚, 鬪牛 등의 도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2)
    昆都力哈(1510~1572): Bayisqal Köndelen qayan의 音譯이다. 본명은 巴雅思哈勒이며, 老把都兒台吉 또는 把都台吉(Bayatur tayiji)라고도 칭한다. 明代 蒙古 應紹不萬戶哈喇嗔部의 部主이다. 答言罕의 손자이자 俺答汗의 동생이다. 張家口 東北의 獨石, 開平 일대에 駐牧하면서, 吉襄·俺答과 함께 명의 변경을 침범하여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嘉靖 30년(1551) 俺答을 따라 明朝와 和議하고 新開口堡에서 互市를 열었다. 隆慶 5년(1571)에 俺答이 明朝와 다시 화의할 때, 昆都力哈을 위해 王號를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都督同知를 除授받았다. 바로가기
  • 각주 003)
    指揮同知: 명의 조정에서 변경의 소수민족 수령들에게 수여한 칭호이다. 명의 북부와 서북부의 소수민족 지역에 衛所를 설치하고 그 수령들에게 指揮同知의 직함을 주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表裏: 옷을 만드는데 쓰이는 비단이나 천의 겉과 안감을 일컫는다. 바로가기
  • 각주 005)
    指揮僉事: 종3품의 관직으로 京衛指揮使司가 관할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6)
    兵部: 隋唐 시대에 설치되었고, 武官의 임용, 兵籍, 軍械, 軍令 등을 담당하였다. 淸末까지 존속하였으나, 그 職權은 시대에 따라서 변화가 있었다. 宋·遼·金·元에서는 兵政을 관할하지 않았다. 明代의 兵部尙書는 ‘本兵’이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권한은 가장 컸다. 淸代의 兵部에서는 武官의 임용이나 驛站의 관리는 담당하였지만 兵權은 갖지 못하였다. 光緖 32년(1906)에 새로운 정치제도를 시행하면서 兵部라는 명칭은 없어졌다. 바로가기
  • 각주 007)
    切盡(1540~1586): Chechen의 음역이다. 蒙古語 Sechen과 같은 의미로 ‘현명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명대 몽골의 襖兒都司部의 귀족이다. 지금 내몽골의 鄂爾多斯 지역에서 유목하였다. 1562년에 무리를 이끌고 額爾齊斯河(Irtysh강)에서 瓦剌을 공격하였고, 1566년에는 청해로 진격하였다. 1571년에 俺答과 명조가 화의를 맺은 후, 명조에 通貢互市를 청하여 성사시켰다. 명 조정으로부터 指揮僉事를 제수받았고, 이후 指揮同知로 승진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8)
    金字經: 泥金으로 글씨를 써서 만든 佛經을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9)
    剌麻: 티베트어의 bla-ma를 음역한 것으로 喇嘛라고도 표기한다. bla는 ‘上’의 의미이고, ma는 ‘人’이라는 뜻이므로 직역하면 ‘윗사람’이다. 원래 출가한 승려를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일반적으로 ‘스승’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신앙자의 중간자적, 매개자적인 존재로서 尊崇되었는데, 이 라마를 통해서 佛·法·僧과 결합될 수 있다고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10)
    명이 다른 나라에 수여하는 인장은 金印과 鍍金銀印이 있는데, 금인은 朝鮮과 日本에만 주었고, 琉球·安南·占城·爪哇 등지에는 도금은인을 주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1)
    이후 萬曆 7년(1579) 가을에도 俺答은 寺額을 청했고, 이에 詔書를 내려 ‘弘慈’라는 寺額을 하사했다(『明史紀事本末』 卷60 「俺答封貢」 萬曆 7년條 참조). 이들이 요청한 사원 건축에 대한 내용은 『神宗實錄』 卷60 萬曆 5년 3월 甲辰條와 『神宗實錄』 卷61 萬曆 5년 4월 癸亥條에 보인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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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丙兎와 賓兎에 대해서는 漢譯의 차이일 뿐 같은 인물로 보는 경우도 있다(張鴻翔, 1957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13)
    河州: 지금의 甘肅省 臨夏의 위구르自治州로, 여러 세대에 걸쳐 回族·漢族·東鄕族·撒拉族 등이 함께 거주하였다. 이 지역명은 晉나라 때 지은 것으로 漢朝에서는 大夏라고 불렀으며, 隋朝에서는 枹罕, 唐朝에서는 安鄕, 宋朝에서는 寧河라고 하였는데, 明朝에서는 晉의 명칭을 계승하였다(『秦邊紀略』 卷中 참조). 洪武 4년(1371)에 衛를 두었고, 홍무 6년(1373)에 府로 바꾸었으며, 홍무 7년(1374)에 陝西行都指揮使司를 두었는데, 홍무 12년(1379)에는 都司 및 府를 폐지하고, 河州衛를 두었다(『明史』 卷42 「地理」2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14)
    互市: 中原에 세워진 王朝와 주변 민족이 경제적 수단을 상호 교환했던 장소이자 시장을 지칭하며, 북방 민족과의 사이에서는 馬市라고도 부른다. 주로 中原 지역에 부족한 말을 북방 지역에서 가져오는 대가로 돈·비단·차·소금 등을 교환했기에 통상적으로 馬市라고 불렸을 뿐, 반드시 말만을 교역하는 장소라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은 북방 민족이나 왜구의 무력을 동원한 약탈을 방지하기 위해 정기적인 물물교환 창구로서 互市 혹은 馬市를 개설하였다. 즉 互市(馬市)를 통해 주변 민족은 그들의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였고, 중원의 왕조는 군사적 평화를 확보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5)
    丙兎와 賓兎가 開市를 요청하고 그것을 허가받은 내용은 『神宗實錄』 卷33 萬曆 2년 윤12월 己丑條와 『神宗實錄』 卷43 萬曆 3년 10월 壬申條에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16)
    관련 내용은 『明史』 卷330 「西域」2 참조.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왕숭고, 왕숭고, 엄답, 곤도력합(昆都力哈), 황태길, 빈토태길(賓兎台吉), 나목아태길(那木兒台吉), 타아한태길(打兒漢台吉), 아배태길(阿拜台吉), 흡태길(恰台吉), 곤도력합, 노파도(老把都), 왕숭고, 엄답, 길능, 절진(切盡), 길능, 엄답, 왕숭고, 엄답, 엄답, 빈토(賓兎), 병토(丙兎), 엄답
지명
홍산돈(紅山墩), 청수영(淸水營), 해남(海南), 청산(靑山), 송산(松山), 송산, 난주(蘭州), 서해(西海), 서해, 하주(河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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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대신과 논의 끝에 황제가 왕숭고의 상소대로 암달을 순의왕(順義王)에 봉하는 등 상언을 받아들인 설명 자료번호 : jo.k_0024_0327_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