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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증선(曾銑)과 하언(夏言) 등이 하투(河套)를 회복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황제에게 죄를 얻어 참살되었음

  • 국가
    달단(韃靼)
증선하투를 회복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대학사(大學士) 하언(夏言) 주 001
각주 001)
夏言(1482~1548): 字는 公謹으로, 江西 廣信府 貴溪縣 사람이다. 그는 正德 12년(1517)의 진사로 行人에 제수되었고, 禮部尙書·首輔를 역임하였다. 嘉靖 25년(1546)에 타타르의 알탄칸이 변방을 침범하자, 陝西總督 曾銑이 河套(오르도스)를 수복하자는 상소를 올렸는데, 夏言이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러나 당시 夏言과 동향인 嚴嵩은 夏言을 무고하였으며, 入閣하자 夏言의 親黨을 모두 축출하였다. 시호는 文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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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것을 주관하였다. 황제가 마침 하언을 신임하였기 때문에, 증선에게 방략(方略)을 계획하여 올리도록 하고 편의에 따라 처리하도록 하였다.주 002
각주 002)
당시 三邊侍郞 曾銑은 八議를 제시했다. “一曰定廟謨, 二曰立綱紀, 三曰審機宜, 四曰選將材, 五曰任賢能, 六曰足芻餉, 七曰明賞罰, 八曰修長技” 등 萬餘言을 올렸고, 황제는 兵部에 이를 내려 의논하여 행하도록 했다(『明史紀事本末』 卷58 「議復河套」 嘉靖 25년 추8월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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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1547) 여름에 옹만달이 다시 아뢰기를, “적이 겨울부터 봄까지 여러 차례 공물 바치기를 청하는데, 언사가 공손하니 마땅히 허락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고, 옹만달을 기만하고 업신여겼다고 질책하였다. 증선은 병사를 모으고 요새를 정비하여 번번이 적을 물리쳤다.주 003
각주 003)
曾銑이 塞를 나가 河套를 습격하여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둔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58 「議復河套」 正德 26년 하5월條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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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황제의 마음이 변하였으며, 하언증선은 결국 죄를 얻어 서시(西市)에서 참살(斬殺)되었다. 적은 더욱 분노가 쌓이고 강성해졌으며, 조정 대신들은 하투를 회복하는 일을 감히 말하지 않았다.주 004
각주 004)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58 「議復河套」 正德 27년 춘정월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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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夏言(1482~1548): 字는 公謹으로, 江西 廣信府 貴溪縣 사람이다. 그는 正德 12년(1517)의 진사로 行人에 제수되었고, 禮部尙書·首輔를 역임하였다. 嘉靖 25년(1546)에 타타르의 알탄칸이 변방을 침범하자, 陝西總督 曾銑이 河套(오르도스)를 수복하자는 상소를 올렸는데, 夏言이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러나 당시 夏言과 동향인 嚴嵩은 夏言을 무고하였으며, 入閣하자 夏言의 親黨을 모두 축출하였다. 시호는 文愍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2)
    당시 三邊侍郞 曾銑은 八議를 제시했다. “一曰定廟謨, 二曰立綱紀, 三曰審機宜, 四曰選將材, 五曰任賢能, 六曰足芻餉, 七曰明賞罰, 八曰修長技” 등 萬餘言을 올렸고, 황제는 兵部에 이를 내려 의논하여 행하도록 했다(『明史紀事本末』 卷58 「議復河套」 嘉靖 25년 추8월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3)
    曾銑이 塞를 나가 河套를 습격하여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둔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58 「議復河套」 正德 26년 하5월條에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58 「議復河套」 正德 27년 춘정월條에 있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증선, 하언(夏言), 하언, 증선, 옹만달, 옹만달, 증선, 하언, 증선
지명
하투, 서시(西市), 하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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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선(曾銑)과 하언(夏言) 등이 하투(河套)를 회복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황제에게 죄를 얻어 참살되었음 자료번호 : jo.k_0024_0327_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