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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암달이 강화(講化)를 청하였는데 황제가 거절하였고, 이후 암달과 제농이 석령관(石嶺關) 등지를 침입 약탈한 내용

  • 국가
    달단(韃靼)
[그해] 가을에, 엄답과 그의 부하 아불해(阿不孩) 주 001
각주 001)
『明史』에서는 “엄답과 그의 부하 아불해”라고 2명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世宗實錄』 卷251 嘉靖 20년 7월 丁酉條를 보면 “北虜俺答阿不孩, 遣夷使石天爵, 旨切款大同陽和塞, 求貢言”이라고 되어 있다. 蒙古語로 Abuyai(阿不孩)는 어른에 대한 尊稱이다. 알탄 일가의 중심인 長兄 吉囊이 사망하여 알탄이 대신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존칭을 붙여서 말한 것으로 보인다. 『世宗實錄』에는 嘉靖 20년(1541)부터 25년(1546)까지 “俺答阿不孩”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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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사신 석천작(石天爵)을 파견하여 대동 변경에서 강화(講和)하고자 하였고, 순무 사도(史道) 주 002
각주 002)
史道(1485~1553): 字는 克弘, 號는 鹿野로, 北直隸 涿州 사람이다. 正德 12년(1517)에 進士가 되어 兵科 給事中이 되었다. 嘉靖 15년(1536)에 左僉都御史로 大同을 巡撫하여, 城堡를 創建하고 耕地 數萬 頃을 개간하여 兵部侍郞이 되어 大同과 宣府의 馬市를 담당하였다. 가정 30년(1551)에 北京으로 돌아와 관직이 太子少保, 兵部尙書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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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이를 보고하였는데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를 거절하였다.주 003
각주 003)
『殊域周咨錄』 卷20 「韃靼」 嘉靖 20년條를 보면, 阿不孩에 대해서 “虜酋俺答阿不孩者, 小王子別部也”라고, 또한 石天爵은 납치되었던 漢人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 史道가 보고한 俺答 측의 요청은 다음과 같다: “累年犯塞, 兵刃殘傷, 所得諸畜出塞輒死失. 且北部素通中國, 進貢不絶, 後因小失乖異, 今願入貢, 獻馬駝, 貢道得通, 則兩不猜忌. 中國可出二邊, 墾田北部. 自於礙北畜牧. 請飮血爲盟, 以示誠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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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 번계조(樊繼祖) 주 004
각주 004)
樊繼祖(?~1558): 字는 孝甫, 號는 雙岩으로, 鄆城縣 사람이다. 正德 6년(1511)에 進士가 되어 臨穎 知縣에 부임하여 流賊을 막아낸 공으로 御史가 되었다. 황제의 명으로 莊田을 조사하여 侵占당한 民田 2萬餘 頃을 찾아냈다. 河南 副使, 江西 參政을 역임하고, 大同 兵變이 발생했을 때 兵部 左僉都御史가 되어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嘉靖 16년(1537)에 兵部 左侍郞, 가정 19년(1540)에는 兵部尙書가 되었다. 가정 22년(1543)에는 工部尙書 겸 都察院 右副督御史가 되었고, 太子少保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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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부·대동의 병사를 독솔(督率)하였는데, 엄답·아불해의 머리에 현상금을 내걸었다. 마침내 대거 내지(內地)를 침범하여 엄답석령관(石嶺關) 주 005
각주 005)
石嶺關: 지금의 山西 陽曲 東北 쪽에 있었던 關城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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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태원(太原) 주 006
각주 006)
太原: 지금의 山西省 省會를 말한다. 汾河에 임해있고, 3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예부터 “錦繡太原城”이라고 불렸다. 일찍이 『尙書』 禹貢篇 등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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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향했다. 길낭평로위(平虜衛) 주 007
각주 007)
平魯衛: 지금의 山西 平魯縣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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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평정(平定) 주 008
각주 008)
平定: 지금의 山西 平定縣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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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壽陽) 주 009
각주 009)
壽陽: 지금의 山西 壽陽縣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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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여러 곳에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총병 정장(丁璋)·유격 주우(周宇)가 전사하고, 여러 장수들이 대부분 벌을 받았는데 번계조만이 홀로 상을 받았다.

  • 각주 001)
    『明史』에서는 “엄답과 그의 부하 아불해”라고 2명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世宗實錄』 卷251 嘉靖 20년 7월 丁酉條를 보면 “北虜俺答阿不孩, 遣夷使石天爵, 旨切款大同陽和塞, 求貢言”이라고 되어 있다. 蒙古語로 Abuyai(阿不孩)는 어른에 대한 尊稱이다. 알탄 일가의 중심인 長兄 吉囊이 사망하여 알탄이 대신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존칭을 붙여서 말한 것으로 보인다. 『世宗實錄』에는 嘉靖 20년(1541)부터 25년(1546)까지 “俺答阿不孩”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史道(1485~1553): 字는 克弘, 號는 鹿野로, 北直隸 涿州 사람이다. 正德 12년(1517)에 進士가 되어 兵科 給事中이 되었다. 嘉靖 15년(1536)에 左僉都御史로 大同을 巡撫하여, 城堡를 創建하고 耕地 數萬 頃을 개간하여 兵部侍郞이 되어 大同과 宣府의 馬市를 담당하였다. 가정 30년(1551)에 北京으로 돌아와 관직이 太子少保, 兵部尙書에 이르렀다. 바로가기
  • 각주 003)
    『殊域周咨錄』 卷20 「韃靼」 嘉靖 20년條를 보면, 阿不孩에 대해서 “虜酋俺答阿不孩者, 小王子別部也”라고, 또한 石天爵은 납치되었던 漢人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 史道가 보고한 俺答 측의 요청은 다음과 같다: “累年犯塞, 兵刃殘傷, 所得諸畜出塞輒死失. 且北部素通中國, 進貢不絶, 後因小失乖異, 今願入貢, 獻馬駝, 貢道得通, 則兩不猜忌. 中國可出二邊, 墾田北部. 自於礙北畜牧. 請飮血爲盟, 以示誠信.” 바로가기
  • 각주 004)
    樊繼祖(?~1558): 字는 孝甫, 號는 雙岩으로, 鄆城縣 사람이다. 正德 6년(1511)에 進士가 되어 臨穎 知縣에 부임하여 流賊을 막아낸 공으로 御史가 되었다. 황제의 명으로 莊田을 조사하여 侵占당한 民田 2萬餘 頃을 찾아냈다. 河南 副使, 江西 參政을 역임하고, 大同 兵變이 발생했을 때 兵部 左僉都御史가 되어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嘉靖 16년(1537)에 兵部 左侍郞, 가정 19년(1540)에는 兵部尙書가 되었다. 가정 22년(1543)에는 工部尙書 겸 都察院 右副督御史가 되었고, 太子少保에 봉해졌다. 바로가기
  • 각주 005)
    石嶺關: 지금의 山西 陽曲 東北 쪽에 있었던 關城을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6)
    太原: 지금의 山西省 省會를 말한다. 汾河에 임해있고, 3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예부터 “錦繡太原城”이라고 불렸다. 일찍이 『尙書』 禹貢篇 등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7)
    平魯衛: 지금의 山西 平魯縣을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8)
    平定: 지금의 山西 平定縣을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9)
    壽陽: 지금의 山西 壽陽縣을 말한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엄답, 아불해(阿不孩), 석천작(石天爵), 사도(史道), 번계조(樊繼祖), 엄답, 아불해, 엄답, 길낭, 정장(丁璋), 주우(周宇), 번계조
지명
대동, 선부, 대동, 석령관(石嶺關), 태원(太原), 평로위(平虜衛), 평정(平定), 수양(壽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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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달이 강화(講化)를 청하였는데 황제가 거절하였고, 이후 암달과 제농이 석령관(石嶺關) 등지를 침입 약탈한 내용 자료번호 : jo.k_0024_0327_05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