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단이 요동·영하(寧夏)·연수(延綏)지방 등 두루 변경을 침략한 설명
처음에 달단이 침입해 온 곳은, 어느 때는 요동(遼東)
주 001·선부(宣府)
주 002·대동(大同)에, 어느 때는 영하(寧夏)
주 003
각주 003)

·장랑(莊浪)
주 004·감숙(甘肅)
주 005에, 가고 오는 것이 일정치 않아 우환이 길지 않았다. 경태(景泰)주 006 초에 처음으로 연경(延慶)
주 007을 침범했으나 부락이 적어서 감히 깊이 들어오지 못했다. 천순(天順) 연간(1457~1464)에는 아라출(阿羅出)이라는 자가 부하를 이끌고 하투(河套)
주 008에 몰래 들어와 거주했는데, 마침내 서쪽 변경지대에 매우 가까이 밀고 들어왔다. 하투는 옛 삭방군(朔方郡)
주 009으로, 당(唐)
주 010의 장인원(張仁願)
주 011寧夏: 현재의 寧夏回族自治區 지역으로 이 지역의 중심지는 銀川이다. 중국 서부 黃河 상류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섬서성에 근접해있고, 서북부는 몽골자치구, 남쪽은 감숙성과 이어져 있다. 고대부터 中原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서쪽으로는 西域, 북쪽으로는 고비사막과 이어져 있어서 여러 민족들이 번잡하게 섞여서 생활하던 지역이었다. 구석기 시대 말기 인류가 이 지역에서 생활하였던 흔적이 있고, 春秋戰國時代에는 羌族이나 匈奴族이 흩어져 생활하였다. 秦代에 이 지역은 北地郡에 속하였고, 漢·唐에서는 朔方, 宋代에는 西夏와 秦鳳路에 속하였으나 元代에 이르러 宁夏路가 설치되었다. 明代에는 寧夏衛가 설치되었다.
각주 011)

이 세 개의 수항성(受降城)을 쌓았던 곳이다. 지역이 황하(黃河) 남쪽에 있는데, 영하에서 편두관(偏頭關)
주 012까지 2천 리가 이어져있고, 수초(水草)가 풍부하며, [그] 밖은 동승위(東勝衛)
주 013張仁願(?~714): 唐朝의 大臣으로, 華州下(지금의 渭南市 臨渭區 下吉鎭) 사람이다. 殿中侍 御史, 檢校幽州 督都, 朔方軍 總管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同中書 門下三品을 받아 韓國公에 봉해졌다. 당시 東北 營州의 東突厥이 점차 강성해졌는데, 특히 唐 長壽 3년(694) 默啜이 스스로 可汗의 자리에 오른 후, 당의 北疆을 위협하는 우환이 되었다. 武周 聖曆 원년(698)에 突厥 묵철이 군대를 이끌고 打嬀, 檀州 등을 공격하고 河北을 점령하고자 定州, 趙州에 진격하여 함락시켰다. 唐 朝廷은 狄仁傑을 파견하여 突厥을 공격하여, 묵철이 대량의 재물을 약탈해서 북으로 돌아갔다. 幽州를 지나갈 때 장인원이 공격하여 묵철과 싸움을 벌여 돌궐이 크게 패하였다. 唐 中宗 神龍 2년(706)에 묵철이 鳴沙(黃河 靑銅峽 남부)를 침략하고 原州, 會州 등지를 약탈하여 상황이 아주 위급하였다. 이듬해(707) 황제가 장인원을 朔方軍 總管으로 임명하고 大軍을 통솔하여 적을 막도록 하였는데, 돌궐을 크게 물리치고 牧馬와 재물을 되찾았다. 당 중종 景龍 2년(708)에 장인원은 “묵철이 무리를 모두 이끌고 가 騎施, 營州 일대가 비어있는 것을 기회로 삼아 漠南 지역을 되찾고 黃河 北岸에 ‘受降城’을 쌓아 방비를 강화하고 돌궐과 南寇의 길을 단절시키자”고 朝廷에 奏請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돌궐 지역에 城을 쌓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장인원이 그 이해득실을 설명하여 중종의 동의를 얻어 2달 만에 3개의 성을 쌓았다. 中城은 拂雲祠에 있었는데, 이곳은 원래 돌궐이 남부로 출병할 때 의식을 거행했던 곳이다. 東城은 현재 內蒙古 托克托에, 西城은 五原 西北에 쌓았다. 3개의 성은 각각 4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黃河 北岸의 險要 지역에 있었다. 장인원의 築城은 常例와 달리 壅城, 曲敵, 戰格 등 성의 방어시설물이 없었지만, 이후로 突厥의 남침이 줄어 변방의 백성들이 평안해졌다고 한다.
각주 013)

이다. 동승위의 바깥은 토지가 평탄하여 적이 오면 기병 하나도 숨을 수가 없었는데, 명(明) 초기에는 그곳을 지켰으나, 후에 황폐해져 내지(內地)로 옮겼다. 이때에 이르러, 패래와 소왕자·모리해 등이 차례로 계속 이르렀는데, 붙잡은 중국인을 길잡이(鄕導)로 삼아 쉴 새 없이 연수(延綏) 지방을 침략하여 변경의 사무(邊事)가 급박해졌다.주 014
東勝衛: 명조가 北元을 방어하기 위해 지금의 內蒙古 鄂爾多斯 지역(托克托縣)에 설치했던 衛所이다. 洪武 4년(1371)에 처음 설치되었다가, 이듬해에 軍事上의 失利 때문에 大同 부근으로 옮겼다. 명조의 군사역량 강화에 따라 洪武 26년(1393) 2월에 다시 東勝左·右衛가 설치되었다. 洪武 35년(1402)에 ‘靖難의 役’을 통해 황제자리에 오른 朱棣가 軍事策略을 조정하여 邊地 衛所를 內遷하였는데, 이때 동승위도 河北으로 옮겨졌다. 동승위의 興廢과정은 명조와 몽골이 점차 長城을 경계로 남북에서 대치한 정황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 각주 001)
-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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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3)
寧夏: 현재의 寧夏回族自治區 지역으로 이 지역의 중심지는 銀川이다. 중국 서부 黃河 상류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섬서성에 근접해있고, 서북부는 몽골자치구, 남쪽은 감숙성과 이어져 있다. 고대부터 中原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서쪽으로는 西域, 북쪽으로는 고비사막과 이어져 있어서 여러 민족들이 번잡하게 섞여서 생활하던 지역이었다. 구석기 시대 말기 인류가 이 지역에서 생활하였던 흔적이 있고, 春秋戰國時代에는 羌族이나 匈奴族이 흩어져 생활하였다. 秦代에 이 지역은 北地郡에 속하였고, 漢·唐에서는 朔方, 宋代에는 西夏와 秦鳳路에 속하였으나 元代에 이르러 宁夏路가 설치되었다. 明代에는 寧夏衛가 설치되었다.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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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1)
張仁願(?~714): 唐朝의 大臣으로, 華州下(지금의 渭南市 臨渭區 下吉鎭) 사람이다. 殿中侍 御史, 檢校幽州 督都, 朔方軍 總管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同中書 門下三品을 받아 韓國公에 봉해졌다. 당시 東北 營州의 東突厥이 점차 강성해졌는데, 특히 唐 長壽 3년(694) 默啜이 스스로 可汗의 자리에 오른 후, 당의 北疆을 위협하는 우환이 되었다. 武周 聖曆 원년(698)에 突厥 묵철이 군대를 이끌고 打嬀, 檀州 등을 공격하고 河北을 점령하고자 定州, 趙州에 진격하여 함락시켰다. 唐 朝廷은 狄仁傑을 파견하여 突厥을 공격하여, 묵철이 대량의 재물을 약탈해서 북으로 돌아갔다. 幽州를 지나갈 때 장인원이 공격하여 묵철과 싸움을 벌여 돌궐이 크게 패하였다. 唐 中宗 神龍 2년(706)에 묵철이 鳴沙(黃河 靑銅峽 남부)를 침략하고 原州, 會州 등지를 약탈하여 상황이 아주 위급하였다. 이듬해(707) 황제가 장인원을 朔方軍 總管으로 임명하고 大軍을 통솔하여 적을 막도록 하였는데, 돌궐을 크게 물리치고 牧馬와 재물을 되찾았다. 당 중종 景龍 2년(708)에 장인원은 “묵철이 무리를 모두 이끌고 가 騎施, 營州 일대가 비어있는 것을 기회로 삼아 漠南 지역을 되찾고 黃河 北岸에 ‘受降城’을 쌓아 방비를 강화하고 돌궐과 南寇의 길을 단절시키자”고 朝廷에 奏請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돌궐 지역에 城을 쌓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장인원이 그 이해득실을 설명하여 중종의 동의를 얻어 2달 만에 3개의 성을 쌓았다. 中城은 拂雲祠에 있었는데, 이곳은 원래 돌궐이 남부로 출병할 때 의식을 거행했던 곳이다. 東城은 현재 內蒙古 托克托에, 西城은 五原 西北에 쌓았다. 3개의 성은 각각 4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黃河 北岸의 險要 지역에 있었다. 장인원의 築城은 常例와 달리 壅城, 曲敵, 戰格 등 성의 방어시설물이 없었지만, 이후로 突厥의 남침이 줄어 변방의 백성들이 평안해졌다고 한다.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색인어
- 이름
- 아라출(阿羅出), 장인원(張仁願), 패래, 모리해
- 지명
- 달단, 요동(遼東), 선부(宣府), 대동(大同), 영하(寧夏), 장랑(莊浪), 감숙(甘肅), 연경(延慶), 하투(河套), 하투, 삭방군(朔方郡), 당(唐), 황하(黃河), 영하, 편두관(偏頭關), 동승위(東勝衛), 동승위, 명(明), 연수(延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