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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단이 요동·영하(寧夏)·연수(延綏)지방 등 두루 변경을 침략한 설명

  • 국가
    달단(韃靼)
처음에 달단이 침입해 온 곳은, 어느 때는 요동(遼東) 주 001
각주 001)
遼東: 중국 遼河의 동쪽 지방. 지금의 遼寧省 동남부 일대를 일컬음. 戰國·秦·漢代부터 南北朝時期까지 遼東郡을 설치하였다. 또한 明初에는 軍鎭 이름이 되었는데, 관할 영역은 현재의 요녕성 대부분과 吉林省 일부였다.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고, 특히 중국으로 가는 중요한 육상 통로이기 때문에 각종 외교 사절과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기도 했음. 그 중요성 때문에 오래 전부터 이곳의 영유권을 놓고 우리나라와 중국, 그리고 북방 민족 간의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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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부(宣府) 주 002
각주 002)
宣府: 현재의 河北 宣化縣이다. 洪武 26년(1393)에 蒙古에 대한 방어를 위하여 宣府의 左·右·前 3衛를 설치하여 山西行都司에 예속토록 하였는데, 近畿의 방위상의 要地였다. 명대에 설치된 九邊鎭 중 하나로 전술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특히 明朝에서 수도를 북경으로 정한 이후 이 지역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永樂 7년(1409) 總兵官을 설치하면서 宣府鎭으로 칭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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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大同)에, 어느 때는 영하(寧夏) 주 003
각주 003)
寧夏: 현재의 寧夏回族自治區 지역으로 이 지역의 중심지는 銀川이다. 중국 서부 黃河 상류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섬서성에 근접해있고, 서북부는 몽골자치구, 남쪽은 감숙성과 이어져 있다. 고대부터 中原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서쪽으로는 西域, 북쪽으로는 고비사막과 이어져 있어서 여러 민족들이 번잡하게 섞여서 생활하던 지역이었다. 구석기 시대 말기 인류가 이 지역에서 생활하였던 흔적이 있고, 春秋戰國時代에는 羌族이나 匈奴族이 흩어져 생활하였다. 秦代에 이 지역은 北地郡에 속하였고, 漢·唐에서는 朔方, 宋代에는 西夏와 秦鳳路에 속하였으나 元代에 이르러 宁夏路가 설치되었다. 明代에는 寧夏衛가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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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랑(莊浪) 주 004
각주 004)
莊浪: 감숙성의 동부와 大盤山의 서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감숙과 영하의 交界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華亭에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張家川에 가까우며, 서쪽으로는 靜寧에, 북쪽으로는 隆德과 접하고 있다. 洪武 2년(1369)에 莊浪은 陝西布政使 관할로 鳳翔府에 예속되어 莊浪州라고 불렸다. 洪武 8년(1375)에 州에서 縣으로 강등되어 靜寧州에 예속되었고, 鞏昌府에 속하였다. 嘉靖 28년(1549) 다시 平凉府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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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숙(甘肅) 주 005
각주 005)
甘肅: 황하 상류에 위치하며, 先秦 시대 9州 가운데 雍州에 속한 지역으로 元代에 甘肅行中書省이 설치되었으며, 명대에 甘肅省으로 고쳤다. 東으로는 陝西, 南으로는 巴蜀·靑海, 西로는 新疆, 北으로는 內蒙古·寧夏와 연접해 있고, 甘肅이라는 명칭은 이 지역의 중심도시인 甘州(지금의 張掖)과 肅州(지금의 酒泉)의 명칭에서 비롯된 것이며, 簡稱하여 甘 혹은 隴으로도 불린다. 省都는 蘭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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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가고 오는 것이 일정치 않아 우환이 길지 않았다. 경태(景泰)주 006
각주 006)
景泰: 명 왕조 7대 황제인 景宗 朱祁鈺의 연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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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에 처음으로 연경(延慶) 주 007
각주 007)
延慶: 北京에서 74km 떨어진 3면이 산이고 다른 한 면은 물을 접하고 있는 생태환경이 아주 좋은 곳으로 기후가 독특하여 北京의 ‘夏都’로 이름이 높다. 首都 北京의 중요한 北大門으로, 交通의 요충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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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침범했으나 부락이 적어서 감히 깊이 들어오지 못했다. 천순(天順) 연간(1457~1464)에는 아라출(阿羅出)이라는 자가 부하를 이끌고 하투(河套) 주 008
각주 008)
河套: 內蒙古自治區와 寧夏回族自治區 안의 賀蘭山 동쪽의 狼山과 大靑山 이남의 황하가 흘러 지나가는 지역을 말한다. 황하가 흘러서 지나가면서 하나의 거대한 彎曲을 형성하였다. 烏拉山을 경계로 동쪽이 前套, 서쪽이 後套가 된다. 河套는 황하 중상류 河岸의 평원·고원지대로 농업 관개시설이 발달하여 河套灌區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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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몰래 들어와 거주했는데, 마침내 서쪽 변경지대에 매우 가까이 밀고 들어왔다. 하투는 옛 삭방군(朔方郡) 주 009
각주 009)
朔方郡: 漢代 北方 邊郡 중의 하나로, 內蒙古自治區 鄂爾多斯 지방에 설치되었다. 기원전 119년 漢 武帝 때 衛靑이 霍去病과 함께 甘肅으로 세 번째 출병해서 흉노족 수천 명을 토벌하고 이 군을 설치하였다. 이후 蘇建에게 삭방군 둘레에 朔方城을 세우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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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당(唐) 주 010
각주 010)
唐: 618년에 李淵이 건국하여 907년 哀帝 때 後梁의 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명의 황제에 의해 통치되었다. 건국 당시에는 돌궐의 막강한 군사력에 눌려 위축되었으나, 돌궐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당과 돌궐의 관계는 역전되었다. 이를 계기로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제국으로 성장하였으며, 이후 唐에서 발달한 文物 및 정비된 제도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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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원(張仁願) 주 011
각주 011)
張仁願(?~714): 唐朝의 大臣으로, 華州下(지금의 渭南市 臨渭區 下吉鎭) 사람이다. 殿中侍 御史, 檢校幽州 督都, 朔方軍 總管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同中書 門下三品을 받아 韓國公에 봉해졌다. 당시 東北 營州의 東突厥이 점차 강성해졌는데, 특히 唐 長壽 3년(694) 默啜이 스스로 可汗의 자리에 오른 후, 당의 北疆을 위협하는 우환이 되었다. 武周 聖曆 원년(698)에 突厥 묵철이 군대를 이끌고 打嬀, 檀州 등을 공격하고 河北을 점령하고자 定州, 趙州에 진격하여 함락시켰다. 唐 朝廷은 狄仁傑을 파견하여 突厥을 공격하여, 묵철이 대량의 재물을 약탈해서 북으로 돌아갔다. 幽州를 지나갈 때 장인원이 공격하여 묵철과 싸움을 벌여 돌궐이 크게 패하였다. 唐 中宗 神龍 2년(706)에 묵철이 鳴沙(黃河 靑銅峽 남부)를 침략하고 原州, 會州 등지를 약탈하여 상황이 아주 위급하였다. 이듬해(707) 황제가 장인원을 朔方軍 總管으로 임명하고 大軍을 통솔하여 적을 막도록 하였는데, 돌궐을 크게 물리치고 牧馬와 재물을 되찾았다. 당 중종 景龍 2년(708)에 장인원은 “묵철이 무리를 모두 이끌고 가 騎施, 營州 일대가 비어있는 것을 기회로 삼아 漠南 지역을 되찾고 黃河 北岸에 ‘受降城’을 쌓아 방비를 강화하고 돌궐과 南寇의 길을 단절시키자”고 朝廷에 奏請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돌궐 지역에 城을 쌓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장인원이 그 이해득실을 설명하여 중종의 동의를 얻어 2달 만에 3개의 성을 쌓았다. 中城은 拂雲祠에 있었는데, 이곳은 원래 돌궐이 남부로 출병할 때 의식을 거행했던 곳이다. 東城은 현재 內蒙古 托克托에, 西城은 五原 西北에 쌓았다. 3개의 성은 각각 4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黃河 北岸의 險要 지역에 있었다. 장인원의 築城은 常例와 달리 壅城, 曲敵, 戰格 등 성의 방어시설물이 없었지만, 이후로 突厥의 남침이 줄어 변방의 백성들이 평안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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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개의 수항성(受降城)을 쌓았던 곳이다. 지역이 황하(黃河) 남쪽에 있는데, 영하에서 편두관(偏頭關) 주 012
각주 012)
偏頭關: 偏關縣 黃河邊에 위치한다. 寧武關, 雁門關과 합해 ‘三關’이라 칭한다. 그 지세가 동쪽이 솟아있고 서쪽이 엎드려있는 형상이라 ‘편두관’이라 불렸다고 한다. 현존하는 關城은 明 洪武 13년(1390)에 만든 것으로, 그 후 여러 차례 重建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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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2천 리가 이어져있고, 수초(水草)가 풍부하며, [그] 밖은 동승위(東勝衛) 주 013
각주 013)
東勝衛: 명조가 北元을 방어하기 위해 지금의 內蒙古 鄂爾多斯 지역(托克托縣)에 설치했던 衛所이다. 洪武 4년(1371)에 처음 설치되었다가, 이듬해에 軍事上의 失利 때문에 大同 부근으로 옮겼다. 명조의 군사역량 강화에 따라 洪武 26년(1393) 2월에 다시 東勝左·右衛가 설치되었다. 洪武 35년(1402)에 ‘靖難의 役’을 통해 황제자리에 오른 朱棣가 軍事策略을 조정하여 邊地 衛所를 內遷하였는데, 이때 동승위도 河北으로 옮겨졌다. 동승위의 興廢과정은 명조와 몽골이 점차 長城을 경계로 남북에서 대치한 정황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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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동승위의 바깥은 토지가 평탄하여 적이 오면 기병 하나도 숨을 수가 없었는데, 명(明) 초기에는 그곳을 지켰으나, 후에 황폐해져 내지(內地)로 옮겼다. 이때에 이르러, 패래와 소왕자·모리해 등이 차례로 계속 이르렀는데, 붙잡은 중국인을 길잡이(鄕導)로 삼아 쉴 새 없이 연수(延綏) 지방을 침략하여 변경의 사무(邊事)가 급박해졌다.주 014
각주 014)
天順 연간(1457~1464)의 河套의 상황과 이곳에 阿羅出·孛來·小王子·毛里孩가 차례로 들어온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58 「議復河套」 天順 6년 춘정월條에 상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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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遼東: 중국 遼河의 동쪽 지방. 지금의 遼寧省 동남부 일대를 일컬음. 戰國·秦·漢代부터 南北朝時期까지 遼東郡을 설치하였다. 또한 明初에는 軍鎭 이름이 되었는데, 관할 영역은 현재의 요녕성 대부분과 吉林省 일부였다.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고, 특히 중국으로 가는 중요한 육상 통로이기 때문에 각종 외교 사절과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기도 했음. 그 중요성 때문에 오래 전부터 이곳의 영유권을 놓고 우리나라와 중국, 그리고 북방 민족 간의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지기도 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宣府: 현재의 河北 宣化縣이다. 洪武 26년(1393)에 蒙古에 대한 방어를 위하여 宣府의 左·右·前 3衛를 설치하여 山西行都司에 예속토록 하였는데, 近畿의 방위상의 要地였다. 명대에 설치된 九邊鎭 중 하나로 전술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특히 明朝에서 수도를 북경으로 정한 이후 이 지역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永樂 7년(1409) 總兵官을 설치하면서 宣府鎭으로 칭해졌다. 바로가기
  • 각주 003)
    寧夏: 현재의 寧夏回族自治區 지역으로 이 지역의 중심지는 銀川이다. 중국 서부 黃河 상류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섬서성에 근접해있고, 서북부는 몽골자치구, 남쪽은 감숙성과 이어져 있다. 고대부터 中原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서쪽으로는 西域, 북쪽으로는 고비사막과 이어져 있어서 여러 민족들이 번잡하게 섞여서 생활하던 지역이었다. 구석기 시대 말기 인류가 이 지역에서 생활하였던 흔적이 있고, 春秋戰國時代에는 羌族이나 匈奴族이 흩어져 생활하였다. 秦代에 이 지역은 北地郡에 속하였고, 漢·唐에서는 朔方, 宋代에는 西夏와 秦鳳路에 속하였으나 元代에 이르러 宁夏路가 설치되었다. 明代에는 寧夏衛가 설치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莊浪: 감숙성의 동부와 大盤山의 서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감숙과 영하의 交界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華亭에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張家川에 가까우며, 서쪽으로는 靜寧에, 북쪽으로는 隆德과 접하고 있다. 洪武 2년(1369)에 莊浪은 陝西布政使 관할로 鳳翔府에 예속되어 莊浪州라고 불렸다. 洪武 8년(1375)에 州에서 縣으로 강등되어 靜寧州에 예속되었고, 鞏昌府에 속하였다. 嘉靖 28년(1549) 다시 平凉府에 속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5)
    甘肅: 황하 상류에 위치하며, 先秦 시대 9州 가운데 雍州에 속한 지역으로 元代에 甘肅行中書省이 설치되었으며, 명대에 甘肅省으로 고쳤다. 東으로는 陝西, 南으로는 巴蜀·靑海, 西로는 新疆, 北으로는 內蒙古·寧夏와 연접해 있고, 甘肅이라는 명칭은 이 지역의 중심도시인 甘州(지금의 張掖)과 肅州(지금의 酒泉)의 명칭에서 비롯된 것이며, 簡稱하여 甘 혹은 隴으로도 불린다. 省都는 蘭州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6)
    景泰: 명 왕조 7대 황제인 景宗 朱祁鈺의 연호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7)
    延慶: 北京에서 74km 떨어진 3면이 산이고 다른 한 면은 물을 접하고 있는 생태환경이 아주 좋은 곳으로 기후가 독특하여 北京의 ‘夏都’로 이름이 높다. 首都 北京의 중요한 北大門으로, 交通의 요충지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8)
    河套: 內蒙古自治區와 寧夏回族自治區 안의 賀蘭山 동쪽의 狼山과 大靑山 이남의 황하가 흘러 지나가는 지역을 말한다. 황하가 흘러서 지나가면서 하나의 거대한 彎曲을 형성하였다. 烏拉山을 경계로 동쪽이 前套, 서쪽이 後套가 된다. 河套는 황하 중상류 河岸의 평원·고원지대로 농업 관개시설이 발달하여 河套灌區라고도 불린다. 바로가기
  • 각주 009)
    朔方郡: 漢代 北方 邊郡 중의 하나로, 內蒙古自治區 鄂爾多斯 지방에 설치되었다. 기원전 119년 漢 武帝 때 衛靑이 霍去病과 함께 甘肅으로 세 번째 출병해서 흉노족 수천 명을 토벌하고 이 군을 설치하였다. 이후 蘇建에게 삭방군 둘레에 朔方城을 세우게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10)
    唐: 618년에 李淵이 건국하여 907년 哀帝 때 後梁의 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명의 황제에 의해 통치되었다. 건국 당시에는 돌궐의 막강한 군사력에 눌려 위축되었으나, 돌궐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당과 돌궐의 관계는 역전되었다. 이를 계기로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제국으로 성장하였으며, 이후 唐에서 발달한 文物 및 정비된 제도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바로가기
  • 각주 011)
    張仁願(?~714): 唐朝의 大臣으로, 華州下(지금의 渭南市 臨渭區 下吉鎭) 사람이다. 殿中侍 御史, 檢校幽州 督都, 朔方軍 總管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同中書 門下三品을 받아 韓國公에 봉해졌다. 당시 東北 營州의 東突厥이 점차 강성해졌는데, 특히 唐 長壽 3년(694) 默啜이 스스로 可汗의 자리에 오른 후, 당의 北疆을 위협하는 우환이 되었다. 武周 聖曆 원년(698)에 突厥 묵철이 군대를 이끌고 打嬀, 檀州 등을 공격하고 河北을 점령하고자 定州, 趙州에 진격하여 함락시켰다. 唐 朝廷은 狄仁傑을 파견하여 突厥을 공격하여, 묵철이 대량의 재물을 약탈해서 북으로 돌아갔다. 幽州를 지나갈 때 장인원이 공격하여 묵철과 싸움을 벌여 돌궐이 크게 패하였다. 唐 中宗 神龍 2년(706)에 묵철이 鳴沙(黃河 靑銅峽 남부)를 침략하고 原州, 會州 등지를 약탈하여 상황이 아주 위급하였다. 이듬해(707) 황제가 장인원을 朔方軍 總管으로 임명하고 大軍을 통솔하여 적을 막도록 하였는데, 돌궐을 크게 물리치고 牧馬와 재물을 되찾았다. 당 중종 景龍 2년(708)에 장인원은 “묵철이 무리를 모두 이끌고 가 騎施, 營州 일대가 비어있는 것을 기회로 삼아 漠南 지역을 되찾고 黃河 北岸에 ‘受降城’을 쌓아 방비를 강화하고 돌궐과 南寇의 길을 단절시키자”고 朝廷에 奏請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돌궐 지역에 城을 쌓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장인원이 그 이해득실을 설명하여 중종의 동의를 얻어 2달 만에 3개의 성을 쌓았다. 中城은 拂雲祠에 있었는데, 이곳은 원래 돌궐이 남부로 출병할 때 의식을 거행했던 곳이다. 東城은 현재 內蒙古 托克托에, 西城은 五原 西北에 쌓았다. 3개의 성은 각각 4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黃河 北岸의 險要 지역에 있었다. 장인원의 築城은 常例와 달리 壅城, 曲敵, 戰格 등 성의 방어시설물이 없었지만, 이후로 突厥의 남침이 줄어 변방의 백성들이 평안해졌다고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12)
    偏頭關: 偏關縣 黃河邊에 위치한다. 寧武關, 雁門關과 합해 ‘三關’이라 칭한다. 그 지세가 동쪽이 솟아있고 서쪽이 엎드려있는 형상이라 ‘편두관’이라 불렸다고 한다. 현존하는 關城은 明 洪武 13년(1390)에 만든 것으로, 그 후 여러 차례 重建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3)
    東勝衛: 명조가 北元을 방어하기 위해 지금의 內蒙古 鄂爾多斯 지역(托克托縣)에 설치했던 衛所이다. 洪武 4년(1371)에 처음 설치되었다가, 이듬해에 軍事上의 失利 때문에 大同 부근으로 옮겼다. 명조의 군사역량 강화에 따라 洪武 26년(1393) 2월에 다시 東勝左·右衛가 설치되었다. 洪武 35년(1402)에 ‘靖難의 役’을 통해 황제자리에 오른 朱棣가 軍事策略을 조정하여 邊地 衛所를 內遷하였는데, 이때 동승위도 河北으로 옮겨졌다. 동승위의 興廢과정은 명조와 몽골이 점차 長城을 경계로 남북에서 대치한 정황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바로가기
  • 각주 014)
    天順 연간(1457~1464)의 河套의 상황과 이곳에 阿羅出·孛來·小王子·毛里孩가 차례로 들어온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58 「議復河套」 天順 6년 춘정월條에 상세하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아라출(阿羅出), 장인원(張仁願), 패래, 모리해
지명
달단, 요동(遼東), 선부(宣府), 대동(大同), 영하(寧夏), 장랑(莊浪), 감숙(甘肅), 연경(延慶), 하투(河套), 하투, 삭방군(朔方郡), 당(唐), 황하(黃河), 영하, 편두관(偏頭關), 동승위(東勝衛), 동승위, 명(明), 연수(延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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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단이 요동·영하(寧夏)·연수(延綏)지방 등 두루 변경을 침략한 설명 자료번호 : jo.k_0024_0327_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