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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원의 남은 적구(賊寇)가 변경의 우환이 될 것이라 여겨 대장군 남옥 등으로 하여금 공격하여 항복 받은 일

  • 국가
    달단(韃靼)
납합출이 이미 항복했지만, 황제는 옛 의 남은 적구(賊寇)가 끝내는 변경의 우환이 될 것이라고 여겨 군중(軍中)의 남옥(藍玉)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하고, 당승(唐勝) 주 001
각주 001)
『太祖實錄』 卷184 洪武 20년 8월 壬申條 및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20년 9월 丁未條에는 唐勝宗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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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영(郭英) 주 002
각주 002)
郭英(1335~1403): 濠州(현재 安徽省 鳳陽) 사람으로, 郭興의 동생이다. 朱元璋 휘하에 있을 때 신임을 받아 그의 장막을 경호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朱元璋과 함께 武昌·淮安 등을 장악하는데 공을 세웠고, 徐達·常遇春과 함께 山西와 雲南 공략에서 활약하였다. 그 공으로 洪武 17년(1384)에 武定侯로 책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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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부(副)장군으로, 경충(耿忠)·손낙(孫恪)을 좌·우참장(左·右參將)주 003
각주 003)
參將: 明代 변경 지역을 수비하는 관직으로 정원은 없고, 지위는 總兵과 副總兵 다음으로 각각 路를 지켰다. 명청 시대 漕運 官員 중에는 參將이 있었는데, 식량 운반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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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삼아 군대 15만을 이끌고 가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주 004
각주 004)
이에 관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20년 9월 丁未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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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에 의 장군 태태(脫脫) 등이 남옥에게 항복하였다.주 005
각주 005)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祖實錄』 卷187 洪武 20년 11월 甲午條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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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1388) 봄에 남옥이 대군을 이끌고 대녕(大寧) 주 006
각주 006)
大寧: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赤峰市 寧城縣의 서쪽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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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경주(慶州)에 이르렀는데, 탈고사첩목아(脫古思帖木兒)포어아해(捕魚兒海) 주 007
각주 007)
捕魚兒海: 淸水泊, 湖泊이라고도 한다. 明 奴兒干都司 哈剌孩衛 境內(지금의 貝爾湖)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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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다는 걸 듣고 샛길로 빠르게 나아가 백안정(百眼井)에 이르렀지만, 척후가 적을 보지 못해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려고 하였다. 정원후(定遠侯) 왕필(王弼)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성주(聖主)의 위덕(威德)을 받들어 10만여 군대를 이끌고 여기까지 깊이 들어왔는데, 얻은 것이 없으면 어떻게 복명(復命)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남옥이 이에 땅에 구멍을 파고 밥을 지으며, 하룻밤에 빠르게 달려 포어아해에 이르렀다. 희미하게 날이 밝을 무렵, 적의 군영으로부터 80리 떨어져 있었다. 그때 큰 바람이 불고 모래가 날려 낮인데도 어두워 군대의 행진을 알아차리지 못해, 적이 대비를 하지 못했다. 왕필이 선봉(先鋒)이 되어 곧바로 [적] 가까이에 다가가 마침내 그 [적]군을 크게 격파하고, 태위(太尉)·만자(蠻子) 수천 명주 008
각주 008)
『太祖實錄』 卷190 洪武 21년 하4월 乙卯條에는 “其太尉·蠻子率從據戰敗之, 殺蠻子及其軍士數十人”이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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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참(斬)하였다. 탈고사첩목아는 그의 태자 천보노(天保奴)·지원(知院)주 009
각주 009)
知院: 樞密院의 업무를 주관하는 관직으로, 원래의 명칭은 知樞密院事인데 간략하게 知院이라고 불렀다. 樞密使의 통칭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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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겁래(捏怯來)·승상 실렬문(失烈門) 등 수십 기(騎)를 이끌고 달아났지만, 그의 둘째 아들 지보노(地保奴)와 후비(后妃) 및 공주(公主) 50여 명주 010
각주 010)
『太祖實錄』 卷190 洪武 21년 하4월 乙卯條에는 “妃子等六十四人”이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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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수(渠率)주 011
각주 011)
渠率: 渠帥, 渠魁라고도 하며, 악당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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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 [명]·남녀 7만여 [명], 말·낙타·소·양 10만주 012
각주 012)
『太祖實錄』 卷190 洪武 21년 하4월 乙卯條에는 “馬四萬七千匹, 駝四千八百四頭, 牛羊一十萬二千四百五十二頭”라고 되어 있다.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21년條에는 이때 획득한 사람과 물품에 대해서 “獲其次子地保奴·妃子等六十人, 及故太子妃·公主·吳王·代王等三千六十人, 軍士男女八萬, 得寶璽·金銀印·圖書·牌面百五十三, 車三千輛, 馬駝牛羊十餘萬”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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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를 포획하고, 적의 개갑(鎧甲)과 병기(兵器)를 모아 태워버렸다.주 013
각주 013)
藍玉이 慶州에 이르러 脫古思帖木兒를 토벌한 세부적인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21년 하4월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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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의 부장(部將) 합랄장(哈剌章)의 군영을 공격하여 그 무리를 모두 항복시켰다. 이에 막북(漠北)이 평정되었다. 전승(戰勝) 상주(上奏)가 도착하자,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지보노 등에게 초폐(鈔幣)를 하사하고, 담당 관원에게 명하여 생활용구를 지급하도록 하였다.주 014
각주 014)
『太祖實錄』 卷192 洪武 21년 추7월 戊寅條에는 “至京地保奴及后妃獻金印金牌, 賜鈔二百錠, 命有司給第宅廩餼”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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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어떤 사람이 남옥이 원 군주의 비(妃)와 사통(私通)한다고 말하였는데, [이에] 황제가 노하였고, [원 군주의] 비는 부끄럽고 두려워 자살하였다. 지보노가 원망하는 말을 하자 [홍무]제가 그를 유구(琉球) 주 015
각주 015)
琉球: 14세기 후반, 沖繩(오키나와) 본섬을 중심으로 北山, 中山, 南山의 세 세력(三山)이 형성되어 각기 명나라에 조공하였다. 고려와의 관계는 1389년에 中山王이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인 포로와 특산물을 바치면서 시작되었다. 1429년에 중산왕이 된 尙邑志가 三山을 통일하고 琉球 왕국을 성립시켰다. 琉球 왕국은 명조와의 조공책봉체제 하에서 室町막부, 朝鮮王朝와도 국교를 맺었으며, 명·조선·일본·타이·자바·수마트라 등을 잇는 중개무역지로 번영하였다. 중개 물품은 蘇木·胡椒·檀木·象牙 등 동남아시아 산물들이었다. 琉球의 중개무역은 16세기에 이르러 명의 해금정책이 완화되면서 중국 상인과 포르투갈 상인들이 활약하게 되자 쇠퇴하였다. 그 후 琉球 왕국은 1609년 江戶막부에 사실상 복속되는 한편 明과 淸에도 조공을 계속하였는데, 이것을 兩屬관계라고 한다. 근대에 들어 1879년에 琉球 왕국은 沖繩縣이 되어 일본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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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거주하게 하였다.주 016
각주 016)
같은 내용이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21년條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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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太祖實錄』 卷184 洪武 20년 8월 壬申條 및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20년 9월 丁未條에는 唐勝宗으로 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郭英(1335~1403): 濠州(현재 安徽省 鳳陽) 사람으로, 郭興의 동생이다. 朱元璋 휘하에 있을 때 신임을 받아 그의 장막을 경호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朱元璋과 함께 武昌·淮安 등을 장악하는데 공을 세웠고, 徐達·常遇春과 함께 山西와 雲南 공략에서 활약하였다. 그 공으로 洪武 17년(1384)에 武定侯로 책봉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參將: 明代 변경 지역을 수비하는 관직으로 정원은 없고, 지위는 總兵과 副總兵 다음으로 각각 路를 지켰다. 명청 시대 漕運 官員 중에는 參將이 있었는데, 식량 운반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4)
    이에 관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20년 9월 丁未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5)
    이와 관련한 내용은 『太祖實錄』 卷187 洪武 20년 11월 甲午條에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06)
    大寧: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赤峰市 寧城縣의 서쪽을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7)
    捕魚兒海: 淸水泊, 湖泊이라고도 한다. 明 奴兒干都司 哈剌孩衛 境內(지금의 貝爾湖)에 있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8)
    『太祖實錄』 卷190 洪武 21년 하4월 乙卯條에는 “其太尉·蠻子率從據戰敗之, 殺蠻子及其軍士數十人”이라고 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9)
    知院: 樞密院의 업무를 주관하는 관직으로, 원래의 명칭은 知樞密院事인데 간략하게 知院이라고 불렀다. 樞密使의 통칭으로 사용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0)
    『太祖實錄』 卷190 洪武 21년 하4월 乙卯條에는 “妃子等六十四人”이라고 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1)
    渠率: 渠帥, 渠魁라고도 하며, 악당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12)
    『太祖實錄』 卷190 洪武 21년 하4월 乙卯條에는 “馬四萬七千匹, 駝四千八百四頭, 牛羊一十萬二千四百五十二頭”라고 되어 있다.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21년條에는 이때 획득한 사람과 물품에 대해서 “獲其次子地保奴·妃子等六十人, 及故太子妃·公主·吳王·代王等三千六十人, 軍士男女八萬, 得寶璽·金銀印·圖書·牌面百五十三, 車三千輛, 馬駝牛羊十餘萬”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3)
    藍玉이 慶州에 이르러 脫古思帖木兒를 토벌한 세부적인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21년 하4월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14)
    『太祖實錄』 卷192 洪武 21년 추7월 戊寅條에는 “至京地保奴及后妃獻金印金牌, 賜鈔二百錠, 命有司給第宅廩餼”라고 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15)
    琉球: 14세기 후반, 沖繩(오키나와) 본섬을 중심으로 北山, 中山, 南山의 세 세력(三山)이 형성되어 각기 명나라에 조공하였다. 고려와의 관계는 1389년에 中山王이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인 포로와 특산물을 바치면서 시작되었다. 1429년에 중산왕이 된 尙邑志가 三山을 통일하고 琉球 왕국을 성립시켰다. 琉球 왕국은 명조와의 조공책봉체제 하에서 室町막부, 朝鮮王朝와도 국교를 맺었으며, 명·조선·일본·타이·자바·수마트라 등을 잇는 중개무역지로 번영하였다. 중개 물품은 蘇木·胡椒·檀木·象牙 등 동남아시아 산물들이었다. 琉球의 중개무역은 16세기에 이르러 명의 해금정책이 완화되면서 중국 상인과 포르투갈 상인들이 활약하게 되자 쇠퇴하였다. 그 후 琉球 왕국은 1609년 江戶막부에 사실상 복속되는 한편 明과 淸에도 조공을 계속하였는데, 이것을 兩屬관계라고 한다. 근대에 들어 1879년에 琉球 왕국은 沖繩縣이 되어 일본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6)
    같은 내용이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21년條에도 있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납합출, 남옥(藍玉), 당승(唐勝), 곽영(郭英), 경충(耿忠), 손낙(孫恪), 태태(脫脫), 남옥, 남옥, 탈고사첩목아(脫古思帖木兒), 왕필(王弼), 남옥, 왕필, 탈고사첩목아, 천보노(天保奴), 날겁래(捏怯來), 실렬문(失烈門), 지보노(地保奴), 합랄장(哈剌章), 태조, 지보노, 남옥, 지보노
지명
, , 대녕(大寧), 경주(慶州), 포어아해(捕魚兒海), 백안정(百眼井), 포어아해, 막북(漠北), 유구(琉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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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원의 남은 적구(賊寇)가 변경의 우환이 될 것이라 여겨 대장군 남옥 등으로 하여금 공격하여 항복 받은 일 자료번호 : jo.k_0024_0327_00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