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군 서달(徐達) 등이 북방 변경을 어지럽히는 왕보보(王保保)의 무리들을 번번이 격파시킨 일
[홍무] 5년(1372) 봄에 [태조는] 대장군 서달·좌부장군 이문충·정서장군(征西將軍) 풍승에게 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세 갈래 길로 이들을 정벌하도록 하였다.주 001 대장군 서달은 중로(中路)에서 안문(雁門)
주 002을 나왔지만 전세(戰勢)가 불리하여 요새(邊塞)만 지켰다. 풍승의 군대는 서쪽으로 나아가 난주(蘭州)
주 003에 주둔(駐屯)하였다. 우부장군 부우덕(傅友德)
주 004이 먼저 나아가 이리저리 옮겨가며 싸우면서 소림산(埽林山)에 이르렀고, 풍승 등의 군대가 합류하여 평장 불화(不花)를 참하고 상도려(上都驢) 등이 관할하는 관리와 백성(吏民) 8,300여 호(戶)를 항복시켰고,주 005 마침내 역집내로(亦集乃路)
주 006를 지나 과주(瓜州)
주 007·사주(沙州)
주 008
각주 008)

에 이르러 다시 그들(왕보보 군대)을 연이어 패배시켰다. 이문충은 동쪽으로 거용을 나와 구온(口溫)에 이르렀는데, 원의 장수가 군영(軍營)을 버리고 달아나 이에 경기(輕騎)주 009를 이끌고 여구하(臚朐河)
주 010에서 빠르게 달려 만자(蠻子) 합랄장(哈剌章)을 토랄하(土剌河)
주 011에서 진격하여 패퇴시키고, 추격하여 아노운하(阿魯渾河)
주 012에 이르고, 또 추격하여 칭해(稱海)
주 013에 이르러 그 관속(官屬)과 자손(子孫) 및 군사(軍士)와 가속(家屬) 1,800여 명을 붙잡아 경사(京師)주 014로 보냈다.주 015
서달 등은 곧 소환(召還)되었다. 이듬해(1373) 봄에 [태조는] 서달·이문충 등을 파견하여 서북 변방을 수비하게 하였다.주 016
원의 군대가 무주(武州)
주 017·삭주(朔州)
주 018를 침범하여, 서달이 진덕(陳德)
주 019沙州: 지금의 甘肅省 敦煌市 지역이며, 타클라마칸(Taklamakan) 沙漠의 東端에 위치한 곳이다. 秦나라 이전 이 일대에는 大月氏·烏孫人 등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前漢 초에 匈奴가 이 지역을 침입하여 점거하였으나 武帝는 흉노를 격파하고, 元鼎 6년(기원전 111)에 郡을 설치하였다. 이후 唐 武德 2년(619)에 沙州를 설치하고, 武德 5년(622)에 西沙州로 개편하였으며, 貞觀 7년(633)에 다시 沙州라 하였다. 唐 建中 2년(781)에 吐蕃에 함락되었으나 大中 2년(848)에 다시 唐은 이를 회복하여 이곳에 節度使를 두었다. 宋代에 西夏에 점거되었으나 元代에 다시 이를 회복하여 至元 12년(1277)에 沙州路로 승격시켜 沙州總管府를 설치하고, 甘肅行省에 예속시켰다. 明 永樂 3년(1405)에 安定·阿端·曲先·罕東·赤斤蒙古·哈密과 더불어 關西七衛(西北七衛 혹은 蒙古七衛라고도 함)의 하나로 沙州衛를 설치하였으나 正德 11년(1516)에 吐魯番에 점령되었다. 嘉靖 3년(1524)에 明朝는 嘉峪關을 폐쇄하고 關西의 백성을 관내로 이주시켰으며, 이후 200년간 이곳을 비워두었다. 그러다 淸 康熙 후반기에 이 지역을 점차 수복하여, 雍正 3년(1725)에 沙州衛를 설치하였다.
각주 019)

·곽자흥(郭子興)
주 020을 파견하여 그들(원의 군대)을 격파하게 하였다.주 021 얼마 후 서달 등이 다시 왕보보의 군대를 회유(懷柔)
주 022에서 크게 격파했다.주 023 당시 원의 군대는 차례로 백등(白登)
주 024·보덕(保德)
주 025·하곡(河曲)
주 026을 침범했지만 번번이 수장(守將)에게 패배를 당했는데, 유독 무녕(撫寧)
주 027·서주(瑞州)
주 028만 피해를 입어 태조는 이에 그곳(무녕·서주)의 백성들을 내지(內地)로 이주시켰다.陳德(1330~1378): 字는 至善이며, 濠(지금의 安徽 鳳陽) 사람이다. 定遠에서 朱元璋을 만나 따랐으며, 萬夫長으로 종군하여 많은 功을 세웠다. 張士誠을 대패시키고 天策衛 親軍指揮使가 되었고 이어 大都督府僉事에 올랐다. 이후 大將軍을 따라 元의 汴梁을 취한 후, 이어 平陽·太原·大同을 공략하였고, 鳳翔을 거쳐 秦州에 이르러 元의 守將 呂國公을 붙잡았으며, 徐達을 따라 張良臣을 격파하고 慶陽을 점령하였다. 또 古城에서 擴廓帖木兒를 대파하여 이 공로로 洪武 3년(1370)에 臨江侯에 봉해지고, 1,500石의 歲祿을 받았다. 이듬해 潁川侯 傅友德을 따라 蜀을 정벌하고 綿州로 들어가 龍德을 공격했다. 洪武 5년(1372)에는 左副將軍에 임명되어 馮勝과 함께 漠北정벌에 나서 別篤山에서 적을 멸하고, 亦集乃路를 취하였다. 洪武 10년(1377)에 鳳陽에 돌아왔지만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사후 杞國公에 追封되었으며, 諡號는 定襄이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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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8)
沙州: 지금의 甘肅省 敦煌市 지역이며, 타클라마칸(Taklamakan) 沙漠의 東端에 위치한 곳이다. 秦나라 이전 이 일대에는 大月氏·烏孫人 등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前漢 초에 匈奴가 이 지역을 침입하여 점거하였으나 武帝는 흉노를 격파하고, 元鼎 6년(기원전 111)에 郡을 설치하였다. 이후 唐 武德 2년(619)에 沙州를 설치하고, 武德 5년(622)에 西沙州로 개편하였으며, 貞觀 7년(633)에 다시 沙州라 하였다. 唐 建中 2년(781)에 吐蕃에 함락되었으나 大中 2년(848)에 다시 唐은 이를 회복하여 이곳에 節度使를 두었다. 宋代에 西夏에 점거되었으나 元代에 다시 이를 회복하여 至元 12년(1277)에 沙州路로 승격시켜 沙州總管府를 설치하고, 甘肅行省에 예속시켰다. 明 永樂 3년(1405)에 安定·阿端·曲先·罕東·赤斤蒙古·哈密과 더불어 關西七衛(西北七衛 혹은 蒙古七衛라고도 함)의 하나로 沙州衛를 설치하였으나 正德 11년(1516)에 吐魯番에 점령되었다. 嘉靖 3년(1524)에 明朝는 嘉峪關을 폐쇄하고 關西의 백성을 관내로 이주시켰으며, 이후 200년간 이곳을 비워두었다. 그러다 淸 康熙 후반기에 이 지역을 점차 수복하여, 雍正 3년(1725)에 沙州衛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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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德(1330~1378): 字는 至善이며, 濠(지금의 安徽 鳳陽) 사람이다. 定遠에서 朱元璋을 만나 따랐으며, 萬夫長으로 종군하여 많은 功을 세웠다. 張士誠을 대패시키고 天策衛 親軍指揮使가 되었고 이어 大都督府僉事에 올랐다. 이후 大將軍을 따라 元의 汴梁을 취한 후, 이어 平陽·太原·大同을 공략하였고, 鳳翔을 거쳐 秦州에 이르러 元의 守將 呂國公을 붙잡았으며, 徐達을 따라 張良臣을 격파하고 慶陽을 점령하였다. 또 古城에서 擴廓帖木兒를 대파하여 이 공로로 洪武 3년(1370)에 臨江侯에 봉해지고, 1,500石의 歲祿을 받았다. 이듬해 潁川侯 傅友德을 따라 蜀을 정벌하고 綿州로 들어가 龍德을 공격했다. 洪武 5년(1372)에는 左副將軍에 임명되어 馮勝과 함께 漠北정벌에 나서 別篤山에서 적을 멸하고, 亦集乃路를 취하였다. 洪武 10년(1377)에 鳳陽에 돌아왔지만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사후 杞國公에 追封되었으며, 諡號는 定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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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 이름
- 태조, 서달, 이문충, 풍승, 서달, 풍승, 부우덕(傅友德), 풍승, 불화(不花), 상도려(上都驢), 왕보보, 이문충, 합랄장(哈剌章), 서달, 태조, 서달, 이문충, 서달, 진덕(陳德), 곽자흥(郭子興), 서달, 왕보보, 태조
- 지명
- 안문(雁門), 난주(蘭州), 소림산(埽林山), 역집내로(亦集乃路), 과주(瓜州), 사주(沙州), 거용, 구온(口溫), 원, 여구하(臚朐河), 토랄하(土剌河), 아노운하(阿魯渾河), 칭해(稱海), 원, 무주(武州), 삭주(朔州), 원, 회유(懷柔), 원, 백등(白登), 보덕(保德), 하곡(河曲), 무녕(撫寧), 서주(瑞州), 무녕, 서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