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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 서달(徐達) 등이 북방 변경을 어지럽히는 왕보보(王保保)의 무리들을 번번이 격파시킨 일

  • 국가
    달단(韃靼)
[홍무] 5년(1372) 봄에 [태조는] 대장군 서달·좌부장군 이문충·정서장군(征西將軍) 풍승에게 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세 갈래 길로 이들을 정벌하도록 하였다.주 001
각주 001)
洪武 5년(1370) 당시 大將軍 徐達이 중심이 된 和林을 공략하기 위한 北伐軍의 조직과 이들 북벌군이 거둔 구체적인 戰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5년條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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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 서달은 중로(中路)에서 안문(雁門) 주 002
각주 002)
雁門: 중국 山西省 雁門山의 좁고 험한 길에 있는 雁門關을 일컫는데, 西徑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唐나라 때 개통되어 宋나라 때에는 북방민족에 대한 중요한 방위지점이 되었다. 隋·唐나라 때에는 突厥·위구르·沙陀 등 북방민족과의 사이에 쟁탈전이 되풀이되었다. 元나라 때에는 廢棄되었으나 明나라 초에 복구되었으며, 關城이 지금의 장소에 건설되어 寧武關·偏頭關과 함께 外三關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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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나왔지만 전세(戰勢)가 불리하여 요새(邊塞)만 지켰다. 풍승의 군대는 서쪽으로 나아가 난주(蘭州) 주 003
각주 003)
蘭州: 甘肅省의 省都로, 중국 서북 지역의 중심도시이며, 옛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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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주둔(駐屯)하였다. 우부장군 부우덕(傅友德) 주 004
각주 004)
傅友德(?~1394): 明의 開國功臣으로, 安徽 碭山 사람이다. 元末에 柳福通의 軍에 참가하여 李喜喜를 따라 蜀에 들어갔다. 그 후 주원장에 歸依하여 신임을 얻어 大將이 되었다. 洪武 初에 徐達을 따라 北上하여 元을 정벌하였고, 후에 湯和와 함께 蜀을 얻고 雲南으로 내려가 元軍을 추격한 공으로 潁國公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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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먼저 나아가 이리저리 옮겨가며 싸우면서 소림산(埽林山)에 이르렀고, 풍승 등의 군대가 합류하여 평장 불화(不花)를 참하고 상도려(上都驢) 등이 관할하는 관리와 백성(吏民) 8,300여 호(戶)를 항복시켰고,주 005
각주 005)
『太祖實錄』 卷74 洪武 5년 6월 戊寅條에는 左副將軍의 이름이 陳德으로, 斬殺한 平章의 이름이 百花로, 上都驢 등이 관할하는 관리와 백성이 830戶로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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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역집내로(亦集乃路) 주 006
각주 006)
亦集乃路: 지금의 額濟納河의 下流 右岸으로, 索果泊 東南의 黑城(Khara-Khoto)에 위치했다. 元 至元 20년(1286)에 路를 설치하였는데, 治所는 지금의 內蒙古 額濟納旗 達賴庫布鎭의 동남쪽 35km 지점에 있었고, 지금의 額濟納旗 지역을 관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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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지나 과주(瓜州) 주 007
각주 007)
瓜州: 이전에는 安西로 불렸다. 河西走廊의 西端에 위치해 있으며, 甘肅·新疆·靑海·蒙古로 통하는 요충지로, 동으로는 玉門關, 서쪽으로는 敦煌, 南北으로는 蒙古族自治縣, 西北으로는 新疆 哈密市에 접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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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沙州) 주 008
각주 008)
沙州: 지금의 甘肅省 敦煌市 지역이며, 타클라마칸(Taklamakan) 沙漠의 東端에 위치한 곳이다. 秦나라 이전 이 일대에는 大月氏·烏孫人 등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前漢 초에 匈奴가 이 지역을 침입하여 점거하였으나 武帝는 흉노를 격파하고, 元鼎 6년(기원전 111)에 郡을 설치하였다. 이후 唐 武德 2년(619)에 沙州를 설치하고, 武德 5년(622)에 西沙州로 개편하였으며, 貞觀 7년(633)에 다시 沙州라 하였다. 唐 建中 2년(781)에 吐蕃에 함락되었으나 大中 2년(848)에 다시 唐은 이를 회복하여 이곳에 節度使를 두었다. 宋代에 西夏에 점거되었으나 元代에 다시 이를 회복하여 至元 12년(1277)에 沙州路로 승격시켜 沙州總管府를 설치하고, 甘肅行省에 예속시켰다. 明 永樂 3년(1405)에 安定·阿端·曲先·罕東·赤斤蒙古·哈密과 더불어 關西七衛(西北七衛 혹은 蒙古七衛라고도 함)의 하나로 沙州衛를 설치하였으나 正德 11년(1516)에 吐魯番에 점령되었다. 嘉靖 3년(1524)에 明朝는 嘉峪關을 폐쇄하고 關西의 백성을 관내로 이주시켰으며, 이후 200년간 이곳을 비워두었다. 그러다 淸 康熙 후반기에 이 지역을 점차 수복하여, 雍正 3년(1725)에 沙州衛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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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러 다시 그들(왕보보 군대)을 연이어 패배시켰다. 이문충은 동쪽으로 거용을 나와 구온(口溫)에 이르렀는데, 의 장수가 군영(軍營)을 버리고 달아나 이에 경기(輕騎)주 009
각주 009)
輕騎: 차림이 가볍고 날쌘 騎兵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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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이끌고 여구하(臚朐河) 주 010
각주 010)
臚朐河: 지금의 克鲁倫河를 말한다. 『漢書』에는 ‘弓盧水’, 『舊唐書』에는 ‘盧朐河’로 기재되어 있는데, 『遼史』에서 처음 ‘臚朐河’라고 하였다. 『金史』에서는 ‘龍駒河’라고 하다가 명대에 다시 臚朐河라고 하였다. 淸代에 이르러 현재와 같이 克鲁倫河라고 불렀다. 克鲁倫河는 额爾古納河의 지류로, 몽골 肯特山 동부에서 발원하여 동북으로 흘러 최종적으로 呼倫湖 西南部로 흘러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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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빠르게 달려 만자(蠻子) 합랄장(哈剌章)토랄하(土剌河) 주 011
각주 011)
土剌河: 지금의 內蒙古自治區에 있는 土拉(Tula)河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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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진격하여 패퇴시키고, 추격하여 아노운하(阿魯渾河) 주 012
각주 012)
阿魯渾河: 지금의 內蒙古自治區에 있는 鄂爾運河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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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고, 또 추격하여 칭해(稱海) 주 013
각주 013)
稱海: 和林의 북쪽에 위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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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러 그 관속(官屬)과 자손(子孫) 및 군사(軍士)와 가속(家屬) 1,800여 명을 붙잡아 경사(京師)주 014
각주 014)
京師는 당시 수도였던 應天府, 즉 오늘날의 南京을 가리킨다. 應天이란 명칭은 元 至正 16년(1356)에 朱元璋이 集慶路를 應天府로 개칭하면서 불렸으며, 明初에 이곳에 定都했다. 그러나 永樂 19년(1421)에 北京으로 遷都하면서 북경이 새로운 京師로 칭해졌고, 응천부는 이후 正統 6년(1441)에 南京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淸 順治 2년(1645)에는 江寧府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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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보냈다.주 015
각주 015)
이와 관련된 내용은 『太祖實錄』 卷74 洪武 5년 6월 甲辰條에 보이고,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5년 7월 乙未條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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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달 등은 곧 소환(召還)되었다. 이듬해(1373) 봄에 [태조는] 서달·이문충 등을 파견하여 서북 변방을 수비하게 하였다.주 016
각주 016)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6년 춘정월 壬子條에, “命魏國公徐達, 曹國公李文忠往山西北平練兵防邊”이라는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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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군대가 무주(武州) 주 017
각주 017)
武州: 지금의 山西 神池·五寨縣의 지역인데, 遼 重熙 9년(1040)에 세워졌으나 明初에 廢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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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주(朔州) 주 018
각주 018)
朔州: 中國 山西省 西北部 桑幹河 상류에 위치한다. 魏晉南北朝, 西晉 시기에 將峪嶺(현재 雁門關)以北 各縣의 백성들을 嶺南으로 이주시켜 그 지역은 代王 拓跋猗盧의 수중으로 돌아갔다. 北魏 시기에는 畿內에 속해 桑乾郡(현재 山陰縣의 東), 繁峙郡(현재 應縣의 東), 馬邑郡이 설치되었다. 北齊 天保 8년(557)에 馬邑郡을 招遠縣으로 개칭하고 朔州를 治所로 삼았는데 이때부터 삭주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北周 시기 삭주를 總管府로 변경하고, 明나라 때는 大同府 소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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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침범하여, 서달진덕(陳德) 주 019
각주 019)
陳德(1330~1378): 字는 至善이며, 濠(지금의 安徽 鳳陽) 사람이다. 定遠에서 朱元璋을 만나 따랐으며, 萬夫長으로 종군하여 많은 功을 세웠다. 張士誠을 대패시키고 天策衛 親軍指揮使가 되었고 이어 大都督府僉事에 올랐다. 이후 大將軍을 따라 元의 汴梁을 취한 후, 이어 平陽·太原·大同을 공략하였고, 鳳翔을 거쳐 秦州에 이르러 元의 守將 呂國公을 붙잡았으며, 徐達을 따라 張良臣을 격파하고 慶陽을 점령하였다. 또 古城에서 擴廓帖木兒를 대파하여 이 공로로 洪武 3년(1370)에 臨江侯에 봉해지고, 1,500石의 歲祿을 받았다. 이듬해 潁川侯 傅友德을 따라 蜀을 정벌하고 綿州로 들어가 龍德을 공격했다. 洪武 5년(1372)에는 左副將軍에 임명되어 馮勝과 함께 漠北정벌에 나서 別篤山에서 적을 멸하고, 亦集乃路를 취하였다. 洪武 10년(1377)에 鳳陽에 돌아왔지만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사후 杞國公에 追封되었으며, 諡號는 定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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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자흥(郭子興) 주 020
각주 020)
본문 중에서 언급된 郭子興은 바로 郭興(1330~1383)으로 濠州(현재 安徽省 鳳陽) 사람이며, 원말에 郭子興의 군대에서 활약하였다. 후에 朱元璋에게 투신하여 明 건국 초 정복활동에 참여하여 鞏昌侯에 책봉되었다. 그 동생은 武定侯 郭英이고, 여동생은 郭寧妃이다(『明史』 卷131 「郭興傳」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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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파견하여 그들(의 군대)을 격파하게 하였다.주 021
각주 021)
이 일은 洪武 6년 4월의 일로, 당시 陳德은 臨江侯, 郭子興은 鞏昌侯라는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6년條 참조). 이와 관련하여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6년 6월 甲申條에서는 ‘이때 徐達이 臨江侯 陳德과 鞏昌侯 郭興의 군대를 보내 이를 격퇴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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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서달 등이 다시 왕보보의 군대를 회유(懷柔) 주 022
각주 022)
懷柔: 현재 北京 동북부에 위치한 懷柔區 지역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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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크게 격파했다.주 023
각주 023)
이에 관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6년 11월 壬子條에 보이는데, 徐達은 懷柔 三角村에서 元兵을 격파하고, 平章 康同僉을 사로잡고, 李文忠은 朔州로 나가 元의 太尉 伯顔不花를 사로잡았다고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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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의 군대는 차례로 백등(白登) 주 024
각주 024)
白登: 白登山으로, 지금의 大同 동북쪽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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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保德) 주 025
각주 025)
保德: 山西省 서북쪽에 위치해 있는 保德縣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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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곡(河曲) 주 026
각주 026)
河曲: 忻州地區에 위치해 있는 河曲縣인데, 山西·陝西·內蒙古 三省의 交界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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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침범했지만 번번이 수장(守將)에게 패배를 당했는데, 유독 무녕(撫寧) 주 027
각주 027)
撫寧: 河北省 秦皇島市에 소속된 撫寧縣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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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瑞州) 주 028
각주 028)
瑞州: 지금의 江西省 高安市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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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피해를 입어 태조는 이에 그곳(무녕·서주)의 백성들을 내지(內地)로 이주시켰다.

  • 각주 001)
    洪武 5년(1370) 당시 大將軍 徐達이 중심이 된 和林을 공략하기 위한 北伐軍의 조직과 이들 북벌군이 거둔 구체적인 戰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5년條에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02)
    雁門: 중국 山西省 雁門山의 좁고 험한 길에 있는 雁門關을 일컫는데, 西徑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唐나라 때 개통되어 宋나라 때에는 북방민족에 대한 중요한 방위지점이 되었다. 隋·唐나라 때에는 突厥·위구르·沙陀 등 북방민족과의 사이에 쟁탈전이 되풀이되었다. 元나라 때에는 廢棄되었으나 明나라 초에 복구되었으며, 關城이 지금의 장소에 건설되어 寧武關·偏頭關과 함께 外三關이라고 불렸다. 바로가기
  • 각주 003)
    蘭州: 甘肅省의 省都로, 중국 서북 지역의 중심도시이며, 옛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4)
    傅友德(?~1394): 明의 開國功臣으로, 安徽 碭山 사람이다. 元末에 柳福通의 軍에 참가하여 李喜喜를 따라 蜀에 들어갔다. 그 후 주원장에 歸依하여 신임을 얻어 大將이 되었다. 洪武 初에 徐達을 따라 北上하여 元을 정벌하였고, 후에 湯和와 함께 蜀을 얻고 雲南으로 내려가 元軍을 추격한 공으로 潁國公에 봉해졌다. 바로가기
  • 각주 005)
    『太祖實錄』 卷74 洪武 5년 6월 戊寅條에는 左副將軍의 이름이 陳德으로, 斬殺한 平章의 이름이 百花로, 上都驢 등이 관할하는 관리와 백성이 830戶로 기재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亦集乃路: 지금의 額濟納河의 下流 右岸으로, 索果泊 東南의 黑城(Khara-Khoto)에 위치했다. 元 至元 20년(1286)에 路를 설치하였는데, 治所는 지금의 內蒙古 額濟納旗 達賴庫布鎭의 동남쪽 35km 지점에 있었고, 지금의 額濟納旗 지역을 관할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瓜州: 이전에는 安西로 불렸다. 河西走廊의 西端에 위치해 있으며, 甘肅·新疆·靑海·蒙古로 통하는 요충지로, 동으로는 玉門關, 서쪽으로는 敦煌, 南北으로는 蒙古族自治縣, 西北으로는 新疆 哈密市에 접해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8)
    沙州: 지금의 甘肅省 敦煌市 지역이며, 타클라마칸(Taklamakan) 沙漠의 東端에 위치한 곳이다. 秦나라 이전 이 일대에는 大月氏·烏孫人 등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前漢 초에 匈奴가 이 지역을 침입하여 점거하였으나 武帝는 흉노를 격파하고, 元鼎 6년(기원전 111)에 郡을 설치하였다. 이후 唐 武德 2년(619)에 沙州를 설치하고, 武德 5년(622)에 西沙州로 개편하였으며, 貞觀 7년(633)에 다시 沙州라 하였다. 唐 建中 2년(781)에 吐蕃에 함락되었으나 大中 2년(848)에 다시 唐은 이를 회복하여 이곳에 節度使를 두었다. 宋代에 西夏에 점거되었으나 元代에 다시 이를 회복하여 至元 12년(1277)에 沙州路로 승격시켜 沙州總管府를 설치하고, 甘肅行省에 예속시켰다. 明 永樂 3년(1405)에 安定·阿端·曲先·罕東·赤斤蒙古·哈密과 더불어 關西七衛(西北七衛 혹은 蒙古七衛라고도 함)의 하나로 沙州衛를 설치하였으나 正德 11년(1516)에 吐魯番에 점령되었다. 嘉靖 3년(1524)에 明朝는 嘉峪關을 폐쇄하고 關西의 백성을 관내로 이주시켰으며, 이후 200년간 이곳을 비워두었다. 그러다 淸 康熙 후반기에 이 지역을 점차 수복하여, 雍正 3년(1725)에 沙州衛를 설치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9)
    輕騎: 차림이 가볍고 날쌘 騎兵을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10)
    臚朐河: 지금의 克鲁倫河를 말한다. 『漢書』에는 ‘弓盧水’, 『舊唐書』에는 ‘盧朐河’로 기재되어 있는데, 『遼史』에서 처음 ‘臚朐河’라고 하였다. 『金史』에서는 ‘龍駒河’라고 하다가 명대에 다시 臚朐河라고 하였다. 淸代에 이르러 현재와 같이 克鲁倫河라고 불렀다. 克鲁倫河는 额爾古納河의 지류로, 몽골 肯特山 동부에서 발원하여 동북으로 흘러 최종적으로 呼倫湖 西南部로 흘러들어간다. 바로가기
  • 각주 011)
    土剌河: 지금의 內蒙古自治區에 있는 土拉(Tula)河를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12)
    阿魯渾河: 지금의 內蒙古自治區에 있는 鄂爾運河를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13)
    稱海: 和林의 북쪽에 위치했다. 바로가기
  • 각주 014)
    京師는 당시 수도였던 應天府, 즉 오늘날의 南京을 가리킨다. 應天이란 명칭은 元 至正 16년(1356)에 朱元璋이 集慶路를 應天府로 개칭하면서 불렸으며, 明初에 이곳에 定都했다. 그러나 永樂 19년(1421)에 北京으로 遷都하면서 북경이 새로운 京師로 칭해졌고, 응천부는 이후 正統 6년(1441)에 南京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淸 順治 2년(1645)에는 江寧府로 개칭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5)
    이와 관련된 내용은 『太祖實錄』 卷74 洪武 5년 6월 甲辰條에 보이고,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5년 7월 乙未條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16)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6년 춘정월 壬子條에, “命魏國公徐達, 曹國公李文忠往山西北平練兵防邊”이라는 내용이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17)
    武州: 지금의 山西 神池·五寨縣의 지역인데, 遼 重熙 9년(1040)에 세워졌으나 明初에 廢해졌다. 바로가기
  • 각주 018)
    朔州: 中國 山西省 西北部 桑幹河 상류에 위치한다. 魏晉南北朝, 西晉 시기에 將峪嶺(현재 雁門關)以北 各縣의 백성들을 嶺南으로 이주시켜 그 지역은 代王 拓跋猗盧의 수중으로 돌아갔다. 北魏 시기에는 畿內에 속해 桑乾郡(현재 山陰縣의 東), 繁峙郡(현재 應縣의 東), 馬邑郡이 설치되었다. 北齊 天保 8년(557)에 馬邑郡을 招遠縣으로 개칭하고 朔州를 治所로 삼았는데 이때부터 삭주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北周 시기 삭주를 總管府로 변경하고, 明나라 때는 大同府 소속이었다. 바로가기
  • 각주 019)
    陳德(1330~1378): 字는 至善이며, 濠(지금의 安徽 鳳陽) 사람이다. 定遠에서 朱元璋을 만나 따랐으며, 萬夫長으로 종군하여 많은 功을 세웠다. 張士誠을 대패시키고 天策衛 親軍指揮使가 되었고 이어 大都督府僉事에 올랐다. 이후 大將軍을 따라 元의 汴梁을 취한 후, 이어 平陽·太原·大同을 공략하였고, 鳳翔을 거쳐 秦州에 이르러 元의 守將 呂國公을 붙잡았으며, 徐達을 따라 張良臣을 격파하고 慶陽을 점령하였다. 또 古城에서 擴廓帖木兒를 대파하여 이 공로로 洪武 3년(1370)에 臨江侯에 봉해지고, 1,500石의 歲祿을 받았다. 이듬해 潁川侯 傅友德을 따라 蜀을 정벌하고 綿州로 들어가 龍德을 공격했다. 洪武 5년(1372)에는 左副將軍에 임명되어 馮勝과 함께 漠北정벌에 나서 別篤山에서 적을 멸하고, 亦集乃路를 취하였다. 洪武 10년(1377)에 鳳陽에 돌아왔지만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사후 杞國公에 追封되었으며, 諡號는 定襄이다. 바로가기
  • 각주 020)
    본문 중에서 언급된 郭子興은 바로 郭興(1330~1383)으로 濠州(현재 安徽省 鳳陽) 사람이며, 원말에 郭子興의 군대에서 활약하였다. 후에 朱元璋에게 투신하여 明 건국 초 정복활동에 참여하여 鞏昌侯에 책봉되었다. 그 동생은 武定侯 郭英이고, 여동생은 郭寧妃이다(『明史』 卷131 「郭興傳」참조). 바로가기
  • 각주 021)
    이 일은 洪武 6년 4월의 일로, 당시 陳德은 臨江侯, 郭子興은 鞏昌侯라는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6년條 참조). 이와 관련하여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6년 6월 甲申條에서는 ‘이때 徐達이 臨江侯 陳德과 鞏昌侯 郭興의 군대를 보내 이를 격퇴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22)
    懷柔: 현재 北京 동북부에 위치한 懷柔區 지역을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23)
    이에 관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10 「故元遺兵」 洪武 6년 11월 壬子條에 보이는데, 徐達은 懷柔 三角村에서 元兵을 격파하고, 平章 康同僉을 사로잡고, 李文忠은 朔州로 나가 元의 太尉 伯顔不花를 사로잡았다고 기재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24)
    白登: 白登山으로, 지금의 大同 동북쪽에 위치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25)
    保德: 山西省 서북쪽에 위치해 있는 保德縣을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26)
    河曲: 忻州地區에 위치해 있는 河曲縣인데, 山西·陝西·內蒙古 三省의 交界 지역이다. 바로가기
  • 각주 027)
    撫寧: 河北省 秦皇島市에 소속된 撫寧縣을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28)
    瑞州: 지금의 江西省 高安市를 말한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태조, 서달, 이문충, 풍승, 서달, 풍승, 부우덕(傅友德), 풍승, 불화(不花), 상도려(上都驢), 왕보보, 이문충, 합랄장(哈剌章), 서달, 태조, 서달, 이문충, 서달, 진덕(陳德), 곽자흥(郭子興), 서달, 왕보보, 태조
지명
안문(雁門), 난주(蘭州), 소림산(埽林山), 역집내로(亦集乃路), 과주(瓜州), 사주(沙州), 거용, 구온(口溫), , 여구하(臚朐河), 토랄하(土剌河), 아노운하(阿魯渾河), 칭해(稱海), , 무주(武州), 삭주(朔州), , 회유(懷柔), , 백등(白登), 보덕(保德), 하곡(河曲), 무녕(撫寧), 서주(瑞州), 무녕, 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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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 서달(徐達) 등이 북방 변경을 어지럽히는 왕보보(王保保)의 무리들을 번번이 격파시킨 일 자료번호 : jo.k_0024_0327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