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첩견이 세습 관직을 계승함
홍무 2년(1369)에 용주 토관 조첩견(趙帖堅)이 사자(使者)를 보내 표문(表文)주 001을 받들고 방물을 바쳤다. [이에] 조서를 내려 조첩견을 용주 지주(知州)로 삼아 세습토록 하였다.주 002 [홍무] 8년(1375)에 바꾸어 광서포정사(廣西布政司)에 예속시켰다.주 003 당시 조첩견이 아뢰기를, “땅은 교지에 임하고, 지키는 바의 관애(關隘)주 004는 27곳이 있는데, 위급 상황이 발발하면 반드시 태평(太平)에 보고하여 총사(總司)에 이르게 하는데, 답보(答報)가 내려짐에 미치면 이미 열흘 혹은 달포가 지나 일의 기미를 어그러뜨릴까 걱정이 되니, 청컨대 봉의(奉議)·사성(泗城)의 두 주(州)의 예에 따라 광서에 예속시켜 편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라 하니, [홍무제가] 이를 받아들였다.주 005 [홍무] 16년(1383)에, 조첩견이 효자황후(孝慈皇后)
주 006
각주 006)

의 상사(喪事)로 인하여 위로의 표문을 올리고 마필 및 방물을 바치니, [홍무제는] 비단과 초(鈔) 및 정(錠)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주 007
孝慈皇后(1332∼1382): 明太祖 朱元璋의 황후인 孝慈高皇后 馬氏를 가리킨다. 安徽 宿州 출신이다. 인자하고 총명하며 검소하고 見識이 뛰어난 황후로 알려져 있다. 부친 馬公이 평소 紅巾軍 수령과 친했는데, 喪妻 후에 결국 딸을 郭子興에게 양녀로 입양시켰다. 후에 곽자흥은 양녀를 주원장과 결혼시켰다. 朱元璋의 稱帝 전후로 馬氏는 주원장에게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讒言에 휘둘린 곽자흥이 주원장을 배제하려 할 때마다 馬氏가 보이지 않게 養父에게 잘 말해주어 오해를 풀어주었으며, 文書 정리 및 메모 방면에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여 주원장에게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주원장에게 ‘擾民’과 ‘濫殺’을 하지 말도록 간하여 주원장의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皇后가 된 뒤에는 內治에 힘쓰면 서 외척의 발호 여지를 차단하는 데에도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주원장이 功臣들을 대량 살해할 때에도 여러 차례 간하여 적지 않은 大臣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였다. 明初의 대학자 宋濂이 대표적인 예이다. 洪武 15년(1382)에 향년 51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주원장은 매우 비통해하며 다시는 황후를 두지 않았다. 그해 9월에 孝陵에 묻고 孝慈皇后의 시호를 내렸다. 永樂 원년(1403) 6월에 高皇后라는 尊號를 올렸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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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6)
孝慈皇后(1332∼1382): 明太祖 朱元璋의 황후인 孝慈高皇后 馬氏를 가리킨다. 安徽 宿州 출신이다. 인자하고 총명하며 검소하고 見識이 뛰어난 황후로 알려져 있다. 부친 馬公이 평소 紅巾軍 수령과 친했는데, 喪妻 후에 결국 딸을 郭子興에게 양녀로 입양시켰다. 후에 곽자흥은 양녀를 주원장과 결혼시켰다. 朱元璋의 稱帝 전후로 馬氏는 주원장에게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讒言에 휘둘린 곽자흥이 주원장을 배제하려 할 때마다 馬氏가 보이지 않게 養父에게 잘 말해주어 오해를 풀어주었으며, 文書 정리 및 메모 방면에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여 주원장에게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주원장에게 ‘擾民’과 ‘濫殺’을 하지 말도록 간하여 주원장의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皇后가 된 뒤에는 內治에 힘쓰면 서 외척의 발호 여지를 차단하는 데에도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주원장이 功臣들을 대량 살해할 때에도 여러 차례 간하여 적지 않은 大臣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였다. 明初의 대학자 宋濂이 대표적인 예이다. 洪武 15년(1382)에 향년 51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주원장은 매우 비통해하며 다시는 황후를 두지 않았다. 그해 9월에 孝陵에 묻고 孝慈皇后의 시호를 내렸다. 永樂 원년(1403) 6월에 高皇后라는 尊號를 올렸다.
- 각주 007)
색인어
- 이름
- 조첩견(趙帖堅), 조첩견, 조첩견, 조첩견, 효자황후(孝慈皇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