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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조첩견이 세습 관직을 계승함

  • 국가
    용주(龍州)
홍무 2년(1369)에 용주 토관 조첩견(趙帖堅)이 사자(使者)를 보내 표문(表文)주 001
각주 001)
表文: 황제에게 바치는 문서를 가리킨다. 洪武 14년(1381)에 進賀表箋禮儀를 정하였는데, 황제의 생일인 天壽聖節과 正旦·冬至에 在外 각 아문은 미리 상주문(표문)을 바치고 賀禮하였다. 天壽聖節인 경우에 在外 五品 이상의 衙門은 단지 表文 1通을 바치고, 正旦·冬至에는 中宮과 皇太子에게 箋文 各 1通을 더 바쳤다. 조선·베트남 등도 명나라에 입조할 때 표문을 바쳤다. 명 초에 表文 등으로 인해 朝鮮과 明나라 사이에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그 실상에 대해서는 朴元熇, 2002: 6∼3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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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받들고 방물을 바쳤다. [이에] 조서를 내려 조첩견을 용주 지주(知州)로 삼아 세습토록 하였다.주 002
각주 002)
당시 廣西 右江의 田州府 土官 岑伯顔, 來安府의 岑漢忠, 向武州의 黃世鐵과 左江의 太平府 黃英衍, 思明府 黃忽都와 함께 龍州 趙帖堅이 각각 使者를 보내 表文을 받들고 와서 마필과 방물을 바쳤다. 洪武帝는 각각을 해당 지역의 知府 혹은 知州로 임명했는데, 특히 趙帖堅을 龍州知州 겸 萬戶로 삼고, 세습을 허락해 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太祖實錄』卷48 洪武 2년 6월 丁未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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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 8년(1375)에 바꾸어 광서포정사(廣西布政司)에 예속시켰다.주 003
각주 003)
左江의 太平府 所屬 龍州를 廣西布政司로 예속시킨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太祖實錄』卷106 洪武 9년 6월 壬子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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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첩견이 아뢰기를, “땅은 교지에 임하고, 지키는 바의 관애(關隘)주 004
각주 004)
關隘: 險要의 關口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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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27곳이 있는데, 위급 상황이 발발하면 반드시 태평(太平)에 보고하여 총사(總司)에 이르게 하는데, 답보(答報)가 내려짐에 미치면 이미 열흘 혹은 달포가 지나 일의 기미를 어그러뜨릴까 걱정이 되니, 청컨대 봉의(奉議)·사성(泗城)의 두 주(州)의 예에 따라 광서에 예속시켜 편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라 하니, [홍무제가] 이를 받아들였다.주 005
각주 005)
『太祖實錄』卷106 洪武 9년 6월 壬子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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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 16년(1383)에, 조첩견효자황후(孝慈皇后) 주 006
각주 006)
孝慈皇后(1332∼1382): 明太祖 朱元璋의 황후인 孝慈高皇后 馬氏를 가리킨다. 安徽 宿州 출신이다. 인자하고 총명하며 검소하고 見識이 뛰어난 황후로 알려져 있다. 부친 馬公이 평소 紅巾軍 수령과 친했는데, 喪妻 후에 결국 딸을 郭子興에게 양녀로 입양시켰다. 후에 곽자흥은 양녀를 주원장과 결혼시켰다. 朱元璋의 稱帝 전후로 馬氏는 주원장에게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讒言에 휘둘린 곽자흥이 주원장을 배제하려 할 때마다 馬氏가 보이지 않게 養父에게 잘 말해주어 오해를 풀어주었으며, 文書 정리 및 메모 방면에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여 주원장에게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주원장에게 ‘擾民’과 ‘濫殺’을 하지 말도록 간하여 주원장의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皇后가 된 뒤에는 內治에 힘쓰면 서 외척의 발호 여지를 차단하는 데에도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주원장이 功臣들을 대량 살해할 때에도 여러 차례 간하여 적지 않은 大臣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였다. 明初의 대학자 宋濂이 대표적인 예이다. 洪武 15년(1382)에 향년 51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주원장은 매우 비통해하며 다시는 황후를 두지 않았다. 그해 9월에 孝陵에 묻고 孝慈皇后의 시호를 내렸다. 永樂 원년(1403) 6월에 高皇后라는 尊號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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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상사(喪事)로 인하여 위로의 표문을 올리고 마필 및 방물을 바치니, [홍무제는] 비단과 초(鈔) 및 정(錠)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주 007
각주 007)
『太祖實錄』卷153 洪武 16년 4월 戊子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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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表文: 황제에게 바치는 문서를 가리킨다. 洪武 14년(1381)에 進賀表箋禮儀를 정하였는데, 황제의 생일인 天壽聖節과 正旦·冬至에 在外 각 아문은 미리 상주문(표문)을 바치고 賀禮하였다. 天壽聖節인 경우에 在外 五品 이상의 衙門은 단지 表文 1通을 바치고, 正旦·冬至에는 中宮과 皇太子에게 箋文 各 1通을 더 바쳤다. 조선·베트남 등도 명나라에 입조할 때 표문을 바쳤다. 명 초에 表文 등으로 인해 朝鮮과 明나라 사이에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그 실상에 대해서는 朴元熇, 2002: 6∼30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2)
    당시 廣西 右江의 田州府 土官 岑伯顔, 來安府의 岑漢忠, 向武州의 黃世鐵과 左江의 太平府 黃英衍, 思明府 黃忽都와 함께 龍州 趙帖堅이 각각 使者를 보내 表文을 받들고 와서 마필과 방물을 바쳤다. 洪武帝는 각각을 해당 지역의 知府 혹은 知州로 임명했는데, 특히 趙帖堅을 龍州知州 겸 萬戶로 삼고, 세습을 허락해 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太祖實錄』卷48 洪武 2년 6월 丁未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3)
    左江의 太平府 所屬 龍州를 廣西布政司로 예속시킨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太祖實錄』卷106 洪武 9년 6월 壬子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4)
    關隘: 險要의 關口를 가리킨다. 바로가기
  • 각주 005)
    『太祖實錄』卷106 洪武 9년 6월 壬子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6)
    孝慈皇后(1332∼1382): 明太祖 朱元璋의 황후인 孝慈高皇后 馬氏를 가리킨다. 安徽 宿州 출신이다. 인자하고 총명하며 검소하고 見識이 뛰어난 황후로 알려져 있다. 부친 馬公이 평소 紅巾軍 수령과 친했는데, 喪妻 후에 결국 딸을 郭子興에게 양녀로 입양시켰다. 후에 곽자흥은 양녀를 주원장과 결혼시켰다. 朱元璋의 稱帝 전후로 馬氏는 주원장에게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讒言에 휘둘린 곽자흥이 주원장을 배제하려 할 때마다 馬氏가 보이지 않게 養父에게 잘 말해주어 오해를 풀어주었으며, 文書 정리 및 메모 방면에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여 주원장에게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주원장에게 ‘擾民’과 ‘濫殺’을 하지 말도록 간하여 주원장의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皇后가 된 뒤에는 內治에 힘쓰면 서 외척의 발호 여지를 차단하는 데에도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주원장이 功臣들을 대량 살해할 때에도 여러 차례 간하여 적지 않은 大臣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였다. 明初의 대학자 宋濂이 대표적인 예이다. 洪武 15년(1382)에 향년 51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주원장은 매우 비통해하며 다시는 황후를 두지 않았다. 그해 9월에 孝陵에 묻고 孝慈皇后의 시호를 내렸다. 永樂 원년(1403) 6월에 高皇后라는 尊號를 올렸다. 바로가기
  • 각주 007)
    『太祖實錄』卷153 洪武 16년 4월 戊子條 참조.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조첩견(趙帖堅), 조첩견, 조첩견, 조첩견, 효자황후(孝慈皇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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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첩견이 세습 관직을 계승함 자료번호 : jo.k_0024_0319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