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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보는 독도

생재(生財)

사료해설
『성호사설』은 조선 후기의 학자 이익(李瀷)의 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이익이 평소에 기록해 둔 글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그의 나이 80세에 이르렀을 때에 집안 조카들이 정리한 책이다. 「인사문(人事門)」의 생재(生財) 항목에서는 울릉도는 “삼척부(三陟府)에 속하며 대나무가 서까래처럼 굵고 미역이 아주 좋은데, 시기가 되면 채취한다”고 하여 울릉도를 풍요로운 섬으로 기술하였다.
번역문
우리나라는 서쪽으로 요동(遼東)과 인접하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왜(倭)와 통한다. 삼면의 바다 가운데 강토가 2천 리인데, 한강(漢江) 서쪽은 삼조선(三朝鮮)의 옛터이다. 기준(箕準)이 뱃길로 남쪽으로 가서, 마한(馬韓)의 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됨으로부터 삼한(三韓)의 호칭이 있게 되어 남과 북이 서로 교통하지 않았고, 삼국(三國)이 정립(鼎立)하여서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어 백성이 편히 산 날이 없었으며, 왕씨(王氏 고려)가 일어나서 삼국을 통일하고, 한강 하류 비옥한 곳에 서울을 정하였으나, 물자가 원(元) 나라로 들어가고 전쟁의 경보(警報)가 잦아 미처 번성할 겨를이 없었다.
성조(聖朝 당대의 왕조(王朝)를 백성들이 일컫는 존칭)가 도읍(都邑)으로 정한 한양(漢陽)은 옛날 백제(百濟) 땅으로서, 수륙(水陸)의 길이 사방으로 통하여 운반되지 않는 물화(物貨)가 없으니, 거의 요충(要衝)을 얻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황해도(黃海道)ㆍ평안도(平安道)의 부세(賦稅)는 대부분이 사신 접대에 소비되고, 그 나머지는 전포(錢布 돈과 베)로 바꾸어 쓸데없는 곳에 써버리며, 동남(東南)의 부세는 태반(太半)이 왜국(倭國)의 구호곡(救護穀)으로 들어가고, 오직 서남(西南 호서ㆍ호남ㆍ영남)의 부세만을 우리가 이용한다. 그러나 운반에 기술이 없어 계속 썩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국가에는 경비가 부족하고 백성에겐 저축이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사를 하여 입에 풀칠을 하지만, 아침에 저녁을 예측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서울 근방은 토지의 소출이 적은데 부역(賦役)은 많고, 바닷가에는 어염(魚鹽)의 이(利)가 있으며, 산중에는 땔나무와 재목(材木)을 팔아 이익을 본다. 그러나 백성들은 일정한 직업이 없어 도둑질하는 자가 많다. 대개 우리나라는 산과 늪[藪]이 국토(國土)의 7할(割)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메마른 곳이 비옥한 곳에 비하여 몇 곱절 정도 뿐이 아니다. 서남(西南)에 바다를 막아서 농지(農地)로 만들어서 많은 곡식을 생산하고 있으나, 가물이 들면 소출(所出)이 줄어들고 조수(潮水)가 넘치면 농사를 망친다.
또 벌열(閥閱)을 숭상하는 습속이 있어, 한 집안에 높은 벼슬을 한 자가 있으면 온 일가붙이가 농기구(農機具)를 버리고 일을 하지 않으며, 노비(奴婢)를 대대로 전하는 법이 있어서, 문관(文官)ㆍ무관(武官)도 아니며 고조(高祖)ㆍ증조(曾祖)가 벼슬을 하지 못하였는데도, 종을 부리며 편안하게 앉아서 여유있는 생활을 한다. 만일 몸소 농사일을 하는 자가 있으면, 대단한 수치로 여겨 서로 혼인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놀고 먹는 자가 반이 넘는다. 또 녹(祿)을 먹는 집마저도 그 녹이 농사에서 얻는 수입을 대충하기에 부족하며, 아전(衙前)들은 녹도 없이 공일만 한다. 그러므로 모두 뇌물로써 생계(生計)를 삼는다. 뇌물은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백성의 힘은 이미 고갈되었다.
또 경(卿)의 아들은 항상 경이 되어, 귀하고 현달(顯達)한 자가 모두 한미(寒微)한 집안에서 나오지 않으므로 백성의 어려운 사정을 알지 못하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사치와 교만을 날로 더해가는데, 그것을 보고 따르는 자들이 많다. 사치하면 부족하게 되고 부족하면 가난하게 되며, 가난하면 부득이 백성을 해치게 된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살 의욕을 상실하여 농사일에 전력(專力)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재물은 사가(私家)에도 저축되지 않고 국가에도 저축되지 않아, 천하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나라가 가난하면 백성은 더욱 곤란해지는 것이니, 이는 백성의 산업(産業)을 제정하는 이가 알아야 할 것들이다.
경기(京畿)는 토지(土地)가 메마른데도 인구(人口)가 밀집(密集)하였으며, 토지의 소출이 가장 낮은데도 서울로 수송(輸送)하기 때문에, 이곳 백성이 가장 가난하다. 서남은 감[柿]이 많이 나고, 동북은 배[梨]ㆍ밤[粟]ㆍ땔나무[柴木]ㆍ숯[炭]이 많이 난다. 여주(驪州)ㆍ이천(利川) 사이는 벼가 다른 고장보다 먼저 익으므로 매우 많은 이(利)를 본다. 인천(仁川)ㆍ남양(南陽) 사이는 그 지질(地質)이 붉은 찰흙인데 기름지지는 않으나, 보리가 잘되므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개성(開城)은 고려의 옛 서울로서 한양과 가깝고, 서쪽으로 중국의 물화를 무역(貿易)하여 화려한 것을 숭상하는 풍속이 있으니, 아직도 고려의 유풍(遺風)이 남아있다 하겠다. 성조(聖朝)가 건국한 뒤 고려의 유민(遺民)들이 복종하지 않자, 나라에서도 그들은 버려 금고(禁錮)하였으므로, 사대부(士大夫)의 후예들이 문학(文學)을 버리고 상업(商業)에 종사하여 몸을 숨겼다. 그러므로 손 재주 좋은 백성들이 많아, 그곳 물건의 편리함이 나라 안에서 으뜸이다.
충청도(忠淸道)ㆍ전라도(全羅道)는 옛 백제의 땅이다.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는 신라(新羅) 때 처음으로 만든, 나라 안에서 가장 큰 호수이다. 많은 농지에 수리(水利)의 혜택을 입혀주므로 백성들은 그 혜택으로 먹고 산다. 이 호수(湖水) 아래쪽을 호남(湖南), 오른쪽을 호서(湖西)라고 칭하는데, 지금은 조령(鳥嶺) 이북(以北)의 여러 고을까지 합하여 호서라고 칭하고, 조령 이남 경상도를 영남(嶺南)이라 칭하여 호서ㆍ호남과 함께 삼남(三南)이라고 한다. 호서ㆍ호남의 부세는 바다를 경유하여 한강으로 들어오고, 영남의 부세는 조령을 넘어서 한강으로 들어오며, 영북(嶺北) 여러 고을의 부세도 한강을 경유하여 서울로 온다. 삼남의 부세는 나라의 여러 가지 수요(需要)에 쓰인다.
충청도(忠淸道)는 서쪽은 바다에 닿고 남쪽은 호남, 서쪽은 경기와 인접하였다. 물산(物産)과 인구는 영남ㆍ호남과 비슷하나, 풍요(豊饒)함이 미치지 못할 뿐이다, 충주(忠州)는 한강 상류에 위치하여 영남과 통하는데, 장사꾼의 화물과 공물(貢物)ㆍ부세 등이 모두 이곳에 와서 수운(水運)되므로, 백성 중에는 농업을 버리고 배를 타는 자가 많다. 사대부(士大夫)들이 모여 살므로 약한 백성이 폐해를 입는다. 세속에서는 이곳을 인색한 고장이라고 한다.
공주(公州)는 감영(監營)이 있는 곳인데, 산수(山水)가 아름답고, 산농(山農 화전민)ㆍ야농(野農)이 모두 누에ㆍ모시ㆍ삼[麻]ㆍ목화에 힘써서, 사철 내내 일이 있으므로, 부녀들은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웅천(熊川)을 따라 흘러온 미선(米船 곡식을 싣는 작은 배)의 곡식을 이곳에 와서 해박(海舶 바다를 운항하는 큰 배)에 옮겨 싣기 때문에, 품삯이 비싸고 일거리도 많으므로 빈민들은 그것을 의지하여 살아간다. 청산(靑山)ㆍ보은(報恩) 사이는 깊은 산중이라서 별다른 산업이 없고 대추가 잘 되어 벌레먹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방의 장사꾼들이 모여든다. 은진(恩津)은 웅천(熊川) 상류에 위치하였는데, 상선(商船)이 모여들고 물화(物貨)가 많이 축적(畜積)되어 있으므로, 나라 안에서 이(利)가 가장 많은 곳이라고 한다. 임천(林川)ㆍ한산(韓山) 사이는 모시로 유명하다. 대진(大津) 서쪽을 내포(內浦)라고 하는데, 어염(魚鹽)으로 유명하다. 섬에는 소나무를 길러 도벌(盜伐)을 엄중히 금하는데, 전함(戰艦)을 건조(建造)하기 위함이다.
전라도(全羅道)는 서쪽과 남쪽은 모두 바다이고, 동쪽은 대령(大嶺)이 경계(境界)이다. 사람들은 방술(方術 방사(方士) 술법)을 좋아하고 과사(夸詐 큰소리치고 남을 속이는 것)를 잘한다. 논이 많으므로 물을 가두었다가 때가 되면 모를 내고, 농사일이 끝나면 백성은 모두 쌀밥을 먹으며 콩과 보리를 천하게 여긴다. 남쪽으로 제주(濟州)와 통한다. 제주는 약물(藥物)과 귤ㆍ단단한 재목ㆍ무늬목 등이 풍부하며, 산에는 사슴이 많다. 대개 사슴은 바다의 고기가 화하여 되는 것인 듯한데, 가죽과 용(茸)이 비싸다. 국가에서 목장(牧場)을 만들어서 많은 말을 길러, 해마다 허다한 말을 공마(貢馬)로 바친다. 서민들도 대개 말을 길러 온 나라를 상대로 장사를 하며, 또 소도 많이 길러 고기를 실컷 먹는다. 이 고장은 토맥(土脈 지층의 연속한 맥락)이 부천(浮淺 단단하지 못한 것)하여, 반드시 말을 몰아넣어 단단하게 밟힌 뒤에 비로소 씨를 뿌린다. 우황(牛黃)과 말총이 가장 값이 많이 나간다. 전라도에는 대밭[竹田]이 많으므로 강죽(杠竹 깃발을 다는 장대)ㆍ전죽(箭竹 화살을 만드는 대)ㆍ죽선(竹扇) 등을 공물로 바친다. 수령들은 죽선을 많이 만들어서 조정의 고관(高官)과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는데, 그 비용이 적지 않아서 백성들이 폐혜를 입는다. 우리나라 사람은 반드시 테가 있는 삿갓을 쓴다. 대를 엮어 테를 만드는데, 김제(金堤) 것이 으뜸이고 제주 것이 다음이다. 또 빗을 만들어내는데, 지금 우리나라 집집에서 쓰고 있는 빗은 모두 호남에서 만든 것이다. 행상(行商)을 좋아하는 풍속이 있기 때문에, 제주 가까이 갈수록 말 값이 도리어 비싸다.
전주(全州)는 감영(監營)이 있는 곳이다. 장사꾼이 더욱 많아 온갖 물화가 모여든다. 생강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데, 지금 우리나라 전역에서 쓰는 생강은 모두 전주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풍속이 사나워서 나그네가 잠자리를 얻을 수 없는데, 전주가 가장 심하고, 기질(氣質)이 나약해서 추위와 주림을 참지 못하는 것은 도내(道內)가 모두 마찬가지다. 곡식이 흔하기 때문에 강호(强豪)들이 재물 모으기가 쉬워서, 좋은 옷에 좋은 말 탄 호족(豪族)들이 곳곳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약한 백성을 괴롭히지만, 관(官)에서도 금할 수 없는 상대가 더러 있다. 그러므로 객호(客戶 타향에서 온 사람의 집 또는 사람)를 고용(雇傭)하여 제멋대로 종이라 칭하고, 갓 쓰고 도포(道袍) 입고서 선비[儒士]인 체하여 점병(點兵)에도 참여하지 않는 자가 3분의 2나 된다. 그 나머지 3분의 1만을 문부(文簿)에 적어 역사에 조발(調發)하므로, 그 역사가 과중하여 세민(細民 빈천한 백성)들은 제집 일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3형제를 둔 집에서는 아들 하나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역사를 피하게 하기 때문에 도내 곳곳에는 대소(大小)의 사찰(寺刹)이 널려 있다. 중들은 농사를 하지 않고 민가(民家)에서 얻어 먹으니, 농사를 해침이 더욱 심하다. 중들이 하는 일은 신을 삼고 종이를 만드는 것이 고작이다. 종이는 닥나무가 원료(原料)인데, 닥나무는 전주 만마동(萬馬洞) 것이 가장 좋아서 물화 축에 끼인다. 바닷가에 위치한 산에는 소나무를 기르는데, 제주도처럼 사슴이 많아서 백성들이 그것을 잡아서 돈을 마련한다고 한다.
경상도(慶尙道)는 동쪽과 남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대령(大嶺)을 사이에 두고 호남과 인접하였다. 낙동강(洛東江)이 도내(道內) 한복판으로 흘러가는데, 옛날에는 신라(新羅)가 이 강의 동쪽, 오가야(五伽倻)가 이 강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얼마 뒤에 가야는 신라에 통합되었다. 경주(慶州)는 진한(辰韓)의 옛터이다. 언어와 풍습이 중국과 흡사하여 예의를 숭상하고 길쌈을 부지런히 하며, 서울에서보다 더 많은 명현(名賢)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농부(農夫)는 적고 선비가 많으므로 경제(經濟)가 신장(伸長)되지 못하여, 사람들이 너무 인색해서 송사(訟事)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냥 넘기지 않는다. 벼슬아치도 탐묵(貪墨 욕심이 많고 하는 짓이 더러운 것)이 심하다.
남쪽으로 왜인(倭人)과 교역(交易)하는데, 국가에서 하는 공무(公貿)와 개인이 하는 사역(私易)이 있다. 공무는 우리의 쌀과 베[布]로써 저들의 동(銅)과 납(鑞)을 교역하고, 사무는 우리의 인삼(人蔘)ㆍ실[絲]ㆍ목화로써 저들의 은(銀)ㆍ칼ㆍ거울 등 기묘한 기구(器具)와 기이한 물건들을 교역한다. 우리나라 서북(西北) 지방의 은광(銀鑛)에서 생산한 많은 은을, 망그러지기 쉬운 중국 물건 사들이는 데에 다 써버리고 다시 왜인에게서 은을 수입한다. 동(銅)도 우리나라에서 생산된다. 동맥(銅脈)이 바둑알처럼 널려 있는 산이 왕왕 있으나, 제련(製鍊)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므로 하는 수 없이 외국에서 수입한다. 만약 천금(千金)을 들여, 솜 표백(漂白)하는 기술을 구한 것처럼 한다면 되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외국에서 수입만 하고 있으니 둔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누에를 치면서도 비단을 중국에서 수입하고 철(鐵)을 생산하면서도 칼과 거울이 왜인의 지혜를 따라가지 못하니, 천하에서 가장 형편 없는 솜씨가 될 뿐이다. 남초(南草 담배)도 왜(倭)로부터 들어와서 1백여 년 만에 온 나라 안에 유포되어 해를 끼친 것이 적지 않은데, 이는 으레 금하였어야 했던 것을 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주는 진한의 옛터이므로 아직도 방전(方田 정전(井田)으로 구획(區劃)한 네모 반듯한 밭)의 유지(遺址)가 남아 있다. 이는 필시 성지(聖智 기자(箕子))의 남은 뜻이었으리라. 그러나 천하에 미루어 행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부인(婦人)들이 여공(女功 길쌈하는 일)을 부지런히 하는 것도 아마 회소(會蘇)의 유풍(遺風)일 것이다.
영남의 여러 고을에서는 감나무를 재배(栽培)하여 곶감을 만들어 판다. 밀양(密陽)은 밤으로 유명하지만 돈이 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안동(安東)도 역시 한 도회지(都會地)인데, 그 풍속이 너무 검박하고 인색하다. 저축이 많아서 흉년에도 유리(流離)하는 사람이 없다. 고을이 매우 넓어서 여러 군(郡)과 견아(犬牙)처럼 물려 있다. 그 부(府)에 속하여 있는 자는 화성(華盛 화려하고 성한 것)함이 반드시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한다. 울산(蔚山)ㆍ장기(長鬐) 사이에는 청어(靑魚)가 난다. 청어는 북도(北道)에서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하여, 강원도(江原道)의 동해변(東海邊)을 따라 내려와서 11월에 이곳에서 잡히는데,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점점 작아진다. 어상(魚商)들이 멀리 서울로 수송하는데, 반드시 동지(冬至) 전에 서울에 도착시켜야 비싼 값을 받는다. 모든 연해(沿海)에는 청어가 있다. 청어는 서남해(西南海)를 경유하여 4월에 해주(海州)까지 와서는 더 북상(北上)하지 않고 멈춘다. 그러므로 어족(魚族)이 이곳처럼 많은 곳이 없다. 진주(晉州)는 변한(弁韓)의 옛터로서 풍요하고 화려함이 으뜸이다. 대개 해변에는 건어(乾魚)와 생선이 풍부하고 육지에는 명주ㆍ베ㆍ삼[麻]이 풍부하다. 우도(右道)가 더욱 풍요하여,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고장으로 이름나 있다. 그러나 문화(文化)에 있어서는 좌도(左道)에 크게 뒤져 있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들이 이 좌도를 선택하여 산다. 실로 동방(東方)의 낙토(樂土)이다. 태백(太白)ㆍ소백(小白) 사이는 난리가 들어온 적이 없는 서북의 국경과 가장 먼 곳이므로, 만일 외국의 침입이 있게 되면 사민(士民 사족과 평민)들은 반드시 이곳으로 피난할 것이다.
강원도(江原道)는 관동(關東)이라고 칭하는데, 예맥(濊貊)의 옛터이다. 한사군(漢四郡) 때에는 임둔(臨屯)이었고, 그 뒤 사군을 통합하여 2부(府)를 설치할 때는 낙랑(樂浪)에 소속되었으니, 낙랑은 곧 평안도(平安道)이다. 이때에 와서는 이곳도 평안도와 함께 낙랑이라 칭하였다. 고구려(高句麗)가 일어나자, 낙랑왕(樂浪王)이 이곳으로 도망와서 살았다. 이곳의 지세(地勢)는 대령(大嶺)이 북에서부터 남으로 뻗쳤는데, 북쪽은 함경(咸鏡) 요로(要路)의 관문(關門)이 되고 동쪽은 바다에 닿았다. 영(嶺)에 의지하여 고을이 설치되었는데, 영동(嶺東)의 9군(郡)이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옛날에 살던 실직(悉直)ㆍ압독(押督)의 유는 모두 남옥저(南沃沮)의 종족이다. 평해(平海)ㆍ울진(蔚珍)의 남쪽은 바로 경상도와 통한다. 영의 오른쪽은 영서(嶺西)라고 한다. 모든 물이 서쪽으로 흘러 한강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가는데, 물이 적은 데는 거룻배가 다닐 수 있고 물이 많은 데는 큰배가 다닐 수 있다. 영동(嶺東)의 바다에는 조수(潮水)가 없다. 그 이유는 대개 왜국은, 말갈(靺鞨)의 흑룡강(黑龍江) 밖으로부터 뻗어나온 한 가닥 지맥(支脈)이 동쪽으로 뻗쳐가다가 남쪽으로 구부러져 하이(蝦夷)와 맞닿아서 이룩된 나라인데, 하이는 왜의 북경(北境)이다. 왜는 지형(地形)이 동서로 기다랗다. 일기도(壹岐島)와 대마도(對馬島)가 우리나라와 서로 대치(對峙)하여 바다의 관문이 되었고, 그 중간에 큰 호수(湖水)가 있어 동남에서 오는 조수가 이 대호(大湖)에 막혀서 올라오지 못하기 때문에 동해에 조수가 없는 것인 듯하다. 그러므로 이 동해는 어족의 소굴이 되어 이곳만큼 해산물(海産物)이 풍부한 곳이 없다. 항상 파도가 일어 조운(漕運)이 불가능하므로, 어민(漁民)들은 작은 배를 만들어서, 고기잡고 기타 해산물 채취하는 것을 이로 삼아, 생선ㆍ건어(乾魚)ㆍ창난젓 등을 마소로 실어낸다. 지금 서울 어시장(魚市場)에 있는 별미(別味)도 대부분이 영동에서 수송하여 온 것들이다. 소금을 굽는데 소로 갈고 햇볕을 쏘이고 소금가마를 만드는 것 등의 일은 하지 않고, 곧바로 바닷물을 쇠가마에 퍼부어 많은 소금을 구워낸다. 농도(濃度) 등은 서해의 소금과 다름없으나 다만 맛이 약간 못할 뿐이다. 또 미역도 소중한 산물(産物)의 하나이다. 죽은 고래가 자주 표류하여 오는데, 그 고래에서 많은 기름을 채취한다. 울릉도(鬱陵島)는 곧 삼척부(三陟府)이다. 대나무가 서까래처럼 굵고 미역이 더욱 좋은데, 시기가 되면 채취한다고 한다. 영서(嶺西)의 소나무 재목이 좋기는 하나 영동 것만은 못하다. 오늘날 온 나라 안에서 쓰고 있는 관재(棺材)는 모두 영동과 영서에서 뗏목으로 만들어서 띄워 보낸 것들이다. 영동은 토지가 메마르지만 가뭄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 풍속이 호화하여 잔치를 벌여 놓고 놀기를 좋아한다. 영서는 넓은 들이 없고 오직 화전(火田)만이 있으므로, 조밥을 먹을 뿐, 쌀밥은 없다. 벌을 길러 꿀을 떠서 돈을 마련하며, 임목(林木)을 벌채(伐採)하여 서울로 운반하는 역사(役事)에서 벌어 먹는 백성이 많다.
황해도(黃海道)는 서변(西邊)의 관문(關門)으로서 서울과 거리가 가깝다. 동쪽은 산중의 산물(産物)이 있고 서쪽은 해산물의 이익이 많아서, 소금 굽는 사람도 소매가 큰 옷을 입고 가죽신을 끌며 유기(鍮器 놋그릇)를 사용한다. 4월이 되면 청어가 바다를 메워, 사방 1백리 안팎에서는 청어를 먹지 못하는 자가 없다. 해주(海州)ㆍ연안(延安)ㆍ배천(白川)ㆍ안악(安岳)ㆍ신천(信川)이 가장 부유하다고 이름이 나 있다. 이곳은 우차(牛車)를 사용하여 땔나무를 운반하는 것으로 생업을 삼는 백성이 많으며, 먹[墨]을 배합하는 기술이 있어서 나라 안에서 가장 좋은 먹을 만들고 있다. 황주(黃州)ㆍ봉산(鳳山)은 목화로 유명한데, 씨가 잘고 솜이 많아서 남쪽 지방에서 생산된 것에 비하여 우수하므로, 장사꾼들이 서로 교역(交易)하여 판다. 신계(新溪)ㆍ곡산(谷山)은 맛이 좋은 배[梨]로 유명한데, 일찍 익고 연하고 맛이 좋아서 조정 대신들이 칭찬한다. 문화(文化)는 잣[海松子]으로 유명하여, 강원도의 회양(淮陽)과 맞먹는다. 무력(武力)을 숭상하는 풍속이 있어 무거운 것을 들고 활을 멀리 쏘기를 좋아하는데, 다른 지방은 모두 이에 미치지 못한다.
평안도(平安道)는 아직도 고구려(高句麗)와 고조선(古朝鮮)의 유풍(遺風)이 남아 있다. 서쪽으로 중국과 교통하여, 복장(服裝)이 화사(華奢)하고 건물(建物)이 크고 화려하며 노래와 춤이 분잡(紛雜)하다. 평양의 부유하고 번성함은 오히려 서울보다 지나칠 정도이다. 여름이면 파리가 수저에까지 모여들어서 거의 밥을 먹을 수 없다. 이 고장에는 은광(銀鑛)이 많다. 압록강(鴨綠江) 연안(沿岸)에 사는 백성들은 농사 대신으로 삼(蔘)을 캔다. 강계(江界)의 영역(領域)인 폐사군(廢四郡)에는 인삼(人蔘)이 더욱 많이 생산되는데, 세상에서 강계삼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간사한 백성이 압록강을 건너가서 인삼을 캐다가 발각되어 죄를 받기도 하나, 워낙 이가 많기 때문에 금해도 되지 않는다. 풍속은 누에 치는 것을 힘써, 가는 명주실을 좋은 물화로 여긴다. 옻[漆]이 없어서 남쪽 지방에서 사다가 쓴다. 이곳에 옻나무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관부(官賦)가 두려워서 백성들이 옻나무를 재배(栽培)하지 않기 때문이다. 토지에는 일정한 장부(帳簿)가 없고, 관장(官長)이 서도(胥徒 아전)에게 맡기므로 잘잘못을 살필 수도 없다. 조정에서는 이 고장을 마치 외국과 같이 취급하여 감사에게 맡기므로 정당한 공물(貢物)이 올라오지 않으니, 이는 국법이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전은 그것을 인연하여 간사를 부리고 관원(官員)은 그 이익을 가로챈다. 그렇기 때문에 속담에 “원이 되면 반드시 서쪽 지방의 원으로 나가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원이 되어 서쪽으로 나아간 사람치고 재물을 많이 모으지 못한 자가 대개 드물기 때문에 이런 말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경내(境內)에는 큰 도둑이 많아 지친 백성들이 살 곳을 잃었다. 화전민(火田民)들은 일정한 거처가 없이 이리저리 옮겨다니기 때문에, 관에서 장리(長利)로 놓은 전곡(錢穀)을 회수할 수가 없어, 거주가 있는 백성에게 대신 내게 하므로, 집을 지니고 사는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는다.
함경도(咸鏡道)는 북관(北關)이라 한다. 함흥(咸興)ㆍ북청(北靑) 이북은 여러 번 숙신(肅愼)에게 함락(陷落)되었으나, 지금은 모두 우리의 군현(郡縣)이 되었으며, 1백여 년 동안 국경에 난리가 없어 백성이 편히 살며 자기 일에 열심히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수령(守令)들을 대부분 무신(武臣)에서 임용(任用)한 것만은 잘못이다. 무신은 대개가 염치(廉恥)를 불구하고 조정 대신들에게 뇌물을 바쳐, 영달의 지름길을 찾기만 힘쓰기 때문에 재물을 탐하여 지나치게 거두어들인다. 그러므로 백성이 편히 살 수가 없다. 이 고장에는 담비ㆍ수달ㆍ영양각(羚羊角)ㆍ녹비(鹿皮)ㆍ인삼ㆍ통포(筒布)와 여러 가지의 해산물이 생산된다. 이리의 꼬리털로 만든 붓은 천하에 유명하다. 서예가(書藝家)들이 중히 여기는 북황모(北黃毛)가 바로 이 고장에서 만든 붓이다. 삼수(三水)ㆍ갑산(甲山) 사이의 물은 모두 북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가는데, 쌀과 소금이 없는 별개의 구역(區域)이다. 육진(六鎭)은 서울과의 거리가 2천여 리인데, 어린아이들이 말을 타고 달리며 여자들이 강궁(强弓)을 당긴다. 겨울이면 썰매를 타고서 곰ㆍ범 사냥을 한다. 때로 숙신과 서로 물화를 교역(交易)하는데, 소와 철기(鐵器)를 가지고 많은 이익을 얻는다. 아교와 저지(楮紙 닥나무로 만든 종이)가 없고 칼처럼 예리한 돌과 화살 만들기에 알맞는 나무가 있기로는 서수라(西樹羅)가 유명하다. 이것은 옛날에 호시(楛矢)ㆍ석노(石砮)라고 칭하던 것인 듯하다. 그러나 대나무 살과 쇠로 만든 촉(鏃)에는 미치지 못한다. 기후가 차므로 개를 길러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데, 어린 개의 가죽으로 만든 갖옷은 서울의 귀족(貴族)들이 귀히 여기는 것이다. 남자들은 날마다 머리를 감아가며 머리털을 기르는데, 그 머리가 자라면 깎아서 다리를 만든다. 오늘날 여자들이 쓰고 있는 다리는 모두가 북쪽 지방에서 생산한 것이라고 한다.
대저 우리나라는 지역(地域)이 좁은데다가 물길이 사방으로 통하여 있기 때문에 경화(輕貨)가 필요치 않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돈[錢]을 사용하는 것이 불편하였다. 국초(國初)에는 종포(綜布)와 저화(楮貨)를 사용하였었다. 지금 돈을 사용한 지 겨우 70년 밖에 되지 않았으나, 폐단이 더욱 심하다. 돈은 탐관 오리(貪官汚吏)에게 편리하고, 사치하는 풍속에 편리하고, 도둑에 편리하나, 농민에게는 불편하다. 돈꿰미를 차고 저자에 나아가서 무수한 돈을 허비하는 자가 많으므로, 인심이 날로 투박하여진다. 이 문제는 지식이 있는 자와 함께 논할 일이다. 시골 읍에는 저자가 점점 더 많이 생겨나서 사방 수십 리 사이에 장이 서지 않는 날이 없으니, 이는 모두 놀고 먹는 자들의 이익이다. 그렇다고 이를 반드시 금지할 것이 아니라 옛날 해시(亥市)의 예에 의하여, 온 나라 안의 장을 같은 날에 서게 한다면, 그 중요하지 않은 장은 절로 없어질 것이다. 이것도 백성의 힘을 신장(伸長)시키는 한 가지의 계책이 될 수 있다.
대저 재물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백성의 피와 땀에서 얻어지는 것이고, 백성이 부유하면 나라도 따라서 부유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가 백성을 다스림에는, 백성을 인도하여 가난에서 벗어나 부유하게 되도록 할 뿐이다. 그 인도한다는 것도 말로 이르고 손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해치거나 겁탈하지 않고 죽음을 피하여 살길을 찾게 하고, 선을 행하고 악은 행하지 않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하면 저 백성들은 제각기 지능(智能)이 있으므로 산택(山澤)의 이(利)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마치 물을 도랑으로 인도하면 물 스스로가 웅덩이를 채워가며 멀리 흘러가고, 말을 목장으로 몰아넣으면 말 스스로가 풀을 뜯고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농토가 모두 권력가(權力家)의 소유가 되고, 호강(豪强)들이 강점(强占)하여 자기 소유로 삼았기 때문에, 백성은 일년 내내 열심히 노력하여도 소작료(小作料)를 주고 나면 소득은 겨우 반밖에 되지 않는다. 또 그 반에서 조용(租庸)과 잡부(雜賦)를 내고 나면, 농민의 차지는 겨우 4분의 1에 불과하다. 또 선전(羨田 남아도는 전지)을 얻어 경작하지 못하는 잔민(殘民 외롭고 가난한 백성)은 노력할 곳마저 없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사방 여러 고을을 지날 적에 촌가(村家)에서 자며 자세히 살펴보니, 방구석에는 쌓인 곡식이 없고 횃대에는 걸린 옷이 없으며, 남녀가 팔베개를 베고 주림을 참고 괴로움을 견디어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대저 보잘것없는 걸인(乞人)도 동냥을 주지 않으면 노여움을 품는데, 하물며 자기 힘으로 지은 농사를, 편히 앉아서 마음도 쓰지 않는 무리들에게 바치는데도, 그자들은 농민의 딱한 처지를 생각지도 않는다면 농민의 원망과 저주가 과연 어떠하랴! 국가에서 관원(官員)을 두는 것은 백성을 위하여 두는 것이다. 관원에게 그 직책을 물으면 백성의 부모(父母)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 행적(行迹)을 살펴보면 백성의 원수이다. 백성이 지혜와 힘을 다하여 지은 농사와 만든 기물(器物)로써 부모 처자를 봉양하지 못하고, 허리를 굽신거리며 원수에게 다 바치니, 이것이 다 익은 곡식을 참새가 쪼아먹고 창고의 곡식을 쥐가 파먹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우리나라가 비록 작으나 물산이 풍부하여 그 용도(用度)를 충당(充當)하기에 넉넉하다. 그러나 그 중요한 것은 청렴 결백한 관원을 등용하고 탐관 오리를 제거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상(賞)과 형벌로써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살인자(殺人者)를 죽이는 것은 고금에 공통된 법이다. 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칼과 몽둥이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한 탐관(貪官)이 법을 잘못 행하면 억울하게 죽는 자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므로 제 위왕(齊威王)이 아대부(阿大夫)를 삶아 죽인 것은 잘한 일이지 잘못한 일이 아니다. 지금 세상에는 제 위왕 같은 임금이 없으니, 백성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나 호소할 곳이 없게 되었다.
이러므로 나는 사방의 물산(物産)을 대략 기록하고, 재산을 늘리는 것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잘되려면 양리(良吏)를 등용해야 한다는 데로 귀결(歸結)짓고 이 글을 끝마쳤으니, 이는 곧 “해마(害馬)를 제거하라.”는 뜻이다.우리나라는 서쪽으로 요동(遼東)과 인접하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왜(倭)와 통한다. 삼면의 바다 가운데 강토가 2천 리인데, 한강(漢江) 서쪽은 삼조선(三朝鮮)의 옛터이다. 기준(箕準)이 뱃길로 남쪽으로 가서, 마한(馬韓)의 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됨으로부터 삼한(三韓)의 호칭이 있게 되어 남과 북이 서로 교통하지 않았고, 삼국(三國)이 정립(鼎立)하여서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어 백성이 편히 산 날이 없었으며, 왕씨(王氏 고려)가 일어나서 삼국을 통일하고, 한강 하류 비옥한 곳에 서울을 정하였으나, 물자가 원(元) 나라로 들어가고 전쟁의 경보(警報)가 잦아 미처 번성할 겨를이 없었다.
성조(聖朝 당대의 왕조(王朝)를 백성들이 일컫는 존칭)가 도읍(都邑)으로 정한 한양(漢陽)은 옛날 백제(百濟) 땅으로서, 수륙(水陸)의 길이 사방으로 통하여 운반되지 않는 물화(物貨)가 없으니, 거의 요충(要衝)을 얻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황해도(黃海道)ㆍ평안도(平安道)의 부세(賦稅)는 대부분이 사신 접대에 소비되고, 그 나머지는 전포(錢布 돈과 베)로 바꾸어 쓸데없는 곳에 써버리며, 동남(東南)의 부세는 태반(太半)이 왜국(倭國)의 구호곡(救護穀)으로 들어가고, 오직 서남(西南 호서ㆍ호남ㆍ영남)의 부세만을 우리가 이용한다. 그러나 운반에 기술이 없어 계속 썩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국가에는 경비가 부족하고 백성에겐 저축이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사를 하여 입에 풀칠을 하지만, 아침에 저녁을 예측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서울 근방은 토지의 소출이 적은데 부역(賦役)은 많고, 바닷가에는 어염(魚鹽)의 이(利)가 있으며, 산중에는 땔나무와 재목(材木)을 팔아 이익을 본다. 그러나 백성들은 일정한 직업이 없어 도둑질하는 자가 많다. 대개 우리나라는 산과 늪[藪]이 국토(國土)의 7할(割)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메마른 곳이 비옥한 곳에 비하여 몇 곱절 정도 뿐이 아니다. 서남(西南)에 바다를 막아서 농지(農地)로 만들어서 많은 곡식을 생산하고 있으나, 가물이 들면 소출(所出)이 줄어들고 조수(潮水)가 넘치면 농사를 망친다.
또 벌열(閥閱)을 숭상하는 습속이 있어, 한 집안에 높은 벼슬을 한 자가 있으면 온 일가붙이가 농기구(農機具)를 버리고 일을 하지 않으며, 노비(奴婢)를 대대로 전하는 법이 있어서, 문관(文官)ㆍ무관(武官)도 아니며 고조(高祖)ㆍ증조(曾祖)가 벼슬을 하지 못하였는데도, 종을 부리며 편안하게 앉아서 여유있는 생활을 한다. 만일 몸소 농사일을 하는 자가 있으면, 대단한 수치로 여겨 서로 혼인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놀고 먹는 자가 반이 넘는다. 또 녹(祿)을 먹는 집마저도 그 녹이 농사에서 얻는 수입을 대충하기에 부족하며, 아전(衙前)들은 녹도 없이 공일만 한다. 그러므로 모두 뇌물로써 생계(生計)를 삼는다. 뇌물은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백성의 힘은 이미 고갈되었다.
또 경(卿)의 아들은 항상 경이 되어, 귀하고 현달(顯達)한 자가 모두 한미(寒微)한 집안에서 나오지 않으므로 백성의 어려운 사정을 알지 못하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사치와 교만을 날로 더해가는데, 그것을 보고 따르는 자들이 많다. 사치하면 부족하게 되고 부족하면 가난하게 되며, 가난하면 부득이 백성을 해치게 된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살 의욕을 상실하여 농사일에 전력(專力)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재물은 사가(私家)에도 저축되지 않고 국가에도 저축되지 않아, 천하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나라가 가난하면 백성은 더욱 곤란해지는 것이니, 이는 백성의 산업(産業)을 제정하는 이가 알아야 할 것들이다.
경기(京畿)는 토지(土地)가 메마른데도 인구(人口)가 밀집(密集)하였으며, 토지의 소출이 가장 낮은데도 서울로 수송(輸送)하기 때문에, 이곳 백성이 가장 가난하다. 서남은 감[柿]이 많이 나고, 동북은 배[梨]ㆍ밤[粟]ㆍ땔나무[柴木]ㆍ숯[炭]이 많이 난다. 여주(驪州)ㆍ이천(利川) 사이는 벼가 다른 고장보다 먼저 익으므로 매우 많은 이(利)를 본다. 인천(仁川)ㆍ남양(南陽) 사이는 그 지질(地質)이 붉은 찰흙인데 기름지지는 않으나, 보리가 잘되므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개성(開城)은 고려의 옛 서울로서 한양과 가깝고, 서쪽으로 중국의 물화를 무역(貿易)하여 화려한 것을 숭상하는 풍속이 있으니, 아직도 고려의 유풍(遺風)이 남아있다 하겠다. 성조(聖朝)가 건국한 뒤 고려의 유민(遺民)들이 복종하지 않자, 나라에서도 그들은 버려 금고(禁錮)하였으므로, 사대부(士大夫)의 후예들이 문학(文學)을 버리고 상업(商業)에 종사하여 몸을 숨겼다. 그러므로 손 재주 좋은 백성들이 많아, 그곳 물건의 편리함이 나라 안에서 으뜸이다.
충청도(忠淸道)ㆍ전라도(全羅道)는 옛 백제의 땅이다.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는 신라(新羅) 때 처음으로 만든, 나라 안에서 가장 큰 호수이다. 많은 농지에 수리(水利)의 혜택을 입혀주므로 백성들은 그 혜택으로 먹고 산다. 이 호수(湖水) 아래쪽을 호남(湖南), 오른쪽을 호서(湖西)라고 칭하는데, 지금은 조령(鳥嶺) 이북(以北)의 여러 고을까지 합하여 호서라고 칭하고, 조령 이남 경상도를 영남(嶺南)이라 칭하여 호서ㆍ호남과 함께 삼남(三南)이라고 한다. 호서ㆍ호남의 부세는 바다를 경유하여 한강으로 들어오고, 영남의 부세는 조령을 넘어서 한강으로 들어오며, 영북(嶺北) 여러 고을의 부세도 한강을 경유하여 서울로 온다. 삼남의 부세는 나라의 여러 가지 수요(需要)에 쓰인다.
충청도(忠淸道)는 서쪽은 바다에 닿고 남쪽은 호남, 서쪽은 경기와 인접하였다. 물산(物産)과 인구는 영남ㆍ호남과 비슷하나, 풍요(豊饒)함이 미치지 못할 뿐이다, 충주(忠州)는 한강 상류에 위치하여 영남과 통하는데, 장사꾼의 화물과 공물(貢物)ㆍ부세 등이 모두 이곳에 와서 수운(水運)되므로, 백성 중에는 농업을 버리고 배를 타는 자가 많다. 사대부(士大夫)들이 모여 살므로 약한 백성이 폐해를 입는다. 세속에서는 이곳을 인색한 고장이라고 한다.
공주(公州)는 감영(監營)이 있는 곳인데, 산수(山水)가 아름답고, 산농(山農 화전민)ㆍ야농(野農)이 모두 누에ㆍ모시ㆍ삼[麻]ㆍ목화에 힘써서, 사철 내내 일이 있으므로, 부녀들은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웅천(熊川)을 따라 흘러온 미선(米船 곡식을 싣는 작은 배)의 곡식을 이곳에 와서 해박(海舶 바다를 운항하는 큰 배)에 옮겨 싣기 때문에, 품삯이 비싸고 일거리도 많으므로 빈민들은 그것을 의지하여 살아간다. 청산(靑山)ㆍ보은(報恩) 사이는 깊은 산중이라서 별다른 산업이 없고 대추가 잘 되어 벌레먹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방의 장사꾼들이 모여든다. 은진(恩津)은 웅천(熊川) 상류에 위치하였는데, 상선(商船)이 모여들고 물화(物貨)가 많이 축적(畜積)되어 있으므로, 나라 안에서 이(利)가 가장 많은 곳이라고 한다. 임천(林川)ㆍ한산(韓山) 사이는 모시로 유명하다. 대진(大津) 서쪽을 내포(內浦)라고 하는데, 어염(魚鹽)으로 유명하다. 섬에는 소나무를 길러 도벌(盜伐)을 엄중히 금하는데, 전함(戰艦)을 건조(建造)하기 위함이다.
전라도(全羅道)는 서쪽과 남쪽은 모두 바다이고, 동쪽은 대령(大嶺)이 경계(境界)이다. 사람들은 방술(方術 방사(方士) 술법)을 좋아하고 과사(夸詐 큰소리치고 남을 속이는 것)를 잘한다. 논이 많으므로 물을 가두었다가 때가 되면 모를 내고, 농사일이 끝나면 백성은 모두 쌀밥을 먹으며 콩과 보리를 천하게 여긴다. 남쪽으로 제주(濟州)와 통한다. 제주는 약물(藥物)과 귤ㆍ단단한 재목ㆍ무늬목 등이 풍부하며, 산에는 사슴이 많다. 대개 사슴은 바다의 고기가 화하여 되는 것인 듯한데, 가죽과 용(茸)이 비싸다. 국가에서 목장(牧場)을 만들어서 많은 말을 길러, 해마다 허다한 말을 공마(貢馬)로 바친다. 서민들도 대개 말을 길러 온 나라를 상대로 장사를 하며, 또 소도 많이 길러 고기를 실컷 먹는다. 이 고장은 토맥(土脈 지층의 연속한 맥락)이 부천(浮淺 단단하지 못한 것)하여, 반드시 말을 몰아넣어 단단하게 밟힌 뒤에 비로소 씨를 뿌린다. 우황(牛黃)과 말총이 가장 값이 많이 나간다. 전라도에는 대밭[竹田]이 많으므로 강죽(杠竹 깃발을 다는 장대)ㆍ전죽(箭竹 화살을 만드는 대)ㆍ죽선(竹扇) 등을 공물로 바친다. 수령들은 죽선을 많이 만들어서 조정의 고관(高官)과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는데, 그 비용이 적지 않아서 백성들이 폐혜를 입는다. 우리나라 사람은 반드시 테가 있는 삿갓을 쓴다. 대를 엮어 테를 만드는데, 김제(金堤) 것이 으뜸이고 제주 것이 다음이다. 또 빗을 만들어내는데, 지금 우리나라 집집에서 쓰고 있는 빗은 모두 호남에서 만든 것이다. 행상(行商)을 좋아하는 풍속이 있기 때문에, 제주 가까이 갈수록 말 값이 도리어 비싸다.
전주(全州)는 감영(監營)이 있는 곳이다. 장사꾼이 더욱 많아 온갖 물화가 모여든다. 생강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데, 지금 우리나라 전역에서 쓰는 생강은 모두 전주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풍속이 사나워서 나그네가 잠자리를 얻을 수 없는데, 전주가 가장 심하고, 기질(氣質)이 나약해서 추위와 주림을 참지 못하는 것은 도내(道內)가 모두 마찬가지다. 곡식이 흔하기 때문에 강호(强豪)들이 재물 모으기가 쉬워서, 좋은 옷에 좋은 말 탄 호족(豪族)들이 곳곳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약한 백성을 괴롭히지만, 관(官)에서도 금할 수 없는 상대가 더러 있다. 그러므로 객호(客戶 타향에서 온 사람의 집 또는 사람)를 고용(雇傭)하여 제멋대로 종이라 칭하고, 갓 쓰고 도포(道袍) 입고서 선비[儒士]인 체하여 점병(點兵)에도 참여하지 않는 자가 3분의 2나 된다. 그 나머지 3분의 1만을 문부(文簿)에 적어 역사에 조발(調發)하므로, 그 역사가 과중하여 세민(細民 빈천한 백성)들은 제집 일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3형제를 둔 집에서는 아들 하나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역사를 피하게 하기 때문에 도내 곳곳에는 대소(大小)의 사찰(寺刹)이 널려 있다. 중들은 농사를 하지 않고 민가(民家)에서 얻어 먹으니, 농사를 해침이 더욱 심하다. 중들이 하는 일은 신을 삼고 종이를 만드는 것이 고작이다. 종이는 닥나무가 원료(原料)인데, 닥나무는 전주 만마동(萬馬洞) 것이 가장 좋아서 물화 축에 끼인다. 바닷가에 위치한 산에는 소나무를 기르는데, 제주도처럼 사슴이 많아서 백성들이 그것을 잡아서 돈을 마련한다고 한다.
경상도(慶尙道)는 동쪽과 남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대령(大嶺)을 사이에 두고 호남과 인접하였다. 낙동강(洛東江)이 도내(道內) 한복판으로 흘러가는데, 옛날에는 신라(新羅)가 이 강의 동쪽, 오가야(五伽倻)가 이 강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얼마 뒤에 가야는 신라에 통합되었다. 경주(慶州)는 진한(辰韓)의 옛터이다. 언어와 풍습이 중국과 흡사하여 예의를 숭상하고 길쌈을 부지런히 하며, 서울에서보다 더 많은 명현(名賢)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농부(農夫)는 적고 선비가 많으므로 경제(經濟)가 신장(伸長)되지 못하여, 사람들이 너무 인색해서 송사(訟事)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냥 넘기지 않는다. 벼슬아치도 탐묵(貪墨 욕심이 많고 하는 짓이 더러운 것)이 심하다.
남쪽으로 왜인(倭人)과 교역(交易)하는데, 국가에서 하는 공무(公貿)와 개인이 하는 사역(私易)이 있다. 공무는 우리의 쌀과 베[布]로써 저들의 동(銅)과 납(鑞)을 교역하고, 사무는 우리의 인삼(人蔘)ㆍ실[絲]ㆍ목화로써 저들의 은(銀)ㆍ칼ㆍ거울 등 기묘한 기구(器具)와 기이한 물건들을 교역한다. 우리나라 서북(西北) 지방의 은광(銀鑛)에서 생산한 많은 은을, 망그러지기 쉬운 중국 물건 사들이는 데에 다 써버리고 다시 왜인에게서 은을 수입한다. 동(銅)도 우리나라에서 생산된다. 동맥(銅脈)이 바둑알처럼 널려 있는 산이 왕왕 있으나, 제련(製鍊)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므로 하는 수 없이 외국에서 수입한다. 만약 천금(千金)을 들여, 솜 표백(漂白)하는 기술을 구한 것처럼 한다면 되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외국에서 수입만 하고 있으니 둔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누에를 치면서도 비단을 중국에서 수입하고 철(鐵)을 생산하면서도 칼과 거울이 왜인의 지혜를 따라가지 못하니, 천하에서 가장 형편 없는 솜씨가 될 뿐이다. 남초(南草 담배)도 왜(倭)로부터 들어와서 1백여 년 만에 온 나라 안에 유포되어 해를 끼친 것이 적지 않은데, 이는 으레 금하였어야 했던 것을 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주는 진한의 옛터이므로 아직도 방전(方田 정전(井田)으로 구획(區劃)한 네모 반듯한 밭)의 유지(遺址)가 남아 있다. 이는 필시 성지(聖智 기자(箕子))의 남은 뜻이었으리라. 그러나 천하에 미루어 행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부인(婦人)들이 여공(女功 길쌈하는 일)을 부지런히 하는 것도 아마 회소(會蘇)의 유풍(遺風)일 것이다.
영남의 여러 고을에서는 감나무를 재배(栽培)하여 곶감을 만들어 판다. 밀양(密陽)은 밤으로 유명하지만 돈이 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안동(安東)도 역시 한 도회지(都會地)인데, 그 풍속이 너무 검박하고 인색하다. 저축이 많아서 흉년에도 유리(流離)하는 사람이 없다. 고을이 매우 넓어서 여러 군(郡)과 견아(犬牙)처럼 물려 있다. 그 부(府)에 속하여 있는 자는 화성(華盛 화려하고 성한 것)함이 반드시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한다. 울산(蔚山)ㆍ장기(長鬐) 사이에는 청어(靑魚)가 난다. 청어는 북도(北道)에서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하여, 강원도(江原道)의 동해변(東海邊)을 따라 내려와서 11월에 이곳에서 잡히는데,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점점 작아진다. 어상(魚商)들이 멀리 서울로 수송하는데, 반드시 동지(冬至) 전에 서울에 도착시켜야 비싼 값을 받는다. 모든 연해(沿海)에는 청어가 있다. 청어는 서남해(西南海)를 경유하여 4월에 해주(海州)까지 와서는 더 북상(北上)하지 않고 멈춘다. 그러므로 어족(魚族)이 이곳처럼 많은 곳이 없다. 진주(晉州)는 변한(弁韓)의 옛터로서 풍요하고 화려함이 으뜸이다. 대개 해변에는 건어(乾魚)와 생선이 풍부하고 육지에는 명주ㆍ베ㆍ삼[麻]이 풍부하다. 우도(右道)가 더욱 풍요하여,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고장으로 이름나 있다. 그러나 문화(文化)에 있어서는 좌도(左道)에 크게 뒤져 있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들이 이 좌도를 선택하여 산다. 실로 동방(東方)의 낙토(樂土)이다. 태백(太白)ㆍ소백(小白) 사이는 난리가 들어온 적이 없는 서북의 국경과 가장 먼 곳이므로, 만일 외국의 침입이 있게 되면 사민(士民 사족과 평민)들은 반드시 이곳으로 피난할 것이다.
강원도(江原道)는 관동(關東)이라고 칭하는데, 예맥(濊貊)의 옛터이다. 한사군(漢四郡) 때에는 임둔(臨屯)이었고, 그 뒤 사군을 통합하여 2부(府)를 설치할 때는 낙랑(樂浪)에 소속되었으니, 낙랑은 곧 평안도(平安道)이다. 이때에 와서는 이곳도 평안도와 함께 낙랑이라 칭하였다. 고구려(高句麗)가 일어나자, 낙랑왕(樂浪王)이 이곳으로 도망와서 살았다. 이곳의 지세(地勢)는 대령(大嶺)이 북에서부터 남으로 뻗쳤는데, 북쪽은 함경(咸鏡) 요로(要路)의 관문(關門)이 되고 동쪽은 바다에 닿았다. 영(嶺)에 의지하여 고을이 설치되었는데, 영동(嶺東)의 9군(郡)이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옛날에 살던 실직(悉直)ㆍ압독(押督)의 유는 모두 남옥저(南沃沮)의 종족이다. 평해(平海)ㆍ울진(蔚珍)의 남쪽은 바로 경상도와 통한다. 영의 오른쪽은 영서(嶺西)라고 한다. 모든 물이 서쪽으로 흘러 한강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가는데, 물이 적은 데는 거룻배가 다닐 수 있고 물이 많은 데는 큰배가 다닐 수 있다. 영동(嶺東)의 바다에는 조수(潮水)가 없다. 그 이유는 대개 왜국은, 말갈(靺鞨)의 흑룡강(黑龍江) 밖으로부터 뻗어나온 한 가닥 지맥(支脈)이 동쪽으로 뻗쳐가다가 남쪽으로 구부러져 하이(蝦夷)와 맞닿아서 이룩된 나라인데, 하이는 왜의 북경(北境)이다. 왜는 지형(地形)이 동서로 기다랗다. 일기도(壹岐島)와 대마도(對馬島)가 우리나라와 서로 대치(對峙)하여 바다의 관문이 되었고, 그 중간에 큰 호수(湖水)가 있어 동남에서 오는 조수가 이 대호(大湖)에 막혀서 올라오지 못하기 때문에 동해에 조수가 없는 것인 듯하다. 그러므로 이 동해는 어족의 소굴이 되어 이곳만큼 해산물(海産物)이 풍부한 곳이 없다. 항상 파도가 일어 조운(漕運)이 불가능하므로, 어민(漁民)들은 작은 배를 만들어서, 고기잡고 기타 해산물 채취하는 것을 이로 삼아, 생선ㆍ건어(乾魚)ㆍ창난젓 등을 마소로 실어낸다. 지금 서울 어시장(魚市場)에 있는 별미(別味)도 대부분이 영동에서 수송하여 온 것들이다. 소금을 굽는데 소로 갈고 햇볕을 쏘이고 소금가마를 만드는 것 등의 일은 하지 않고, 곧바로 바닷물을 쇠가마에 퍼부어 많은 소금을 구워낸다. 농도(濃度) 등은 서해의 소금과 다름없으나 다만 맛이 약간 못할 뿐이다. 또 미역도 소중한 산물(産物)의 하나이다. 죽은 고래가 자주 표류하여 오는데, 그 고래에서 많은 기름을 채취한다. 울릉도(鬱陵島)는 곧 삼척부(三陟府)이다. 대나무가 서까래처럼 굵고 미역이 더욱 좋은데, 시기가 되면 채취한다고 한다. 영서(嶺西)의 소나무 재목이 좋기는 하나 영동 것만은 못하다. 오늘날 온 나라 안에서 쓰고 있는 관재(棺材)는 모두 영동과 영서에서 뗏목으로 만들어서 띄워 보낸 것들이다. 영동은 토지가 메마르지만 가뭄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 풍속이 호화하여 잔치를 벌여 놓고 놀기를 좋아한다. 영서는 넓은 들이 없고 오직 화전(火田)만이 있으므로, 조밥을 먹을 뿐, 쌀밥은 없다. 벌을 길러 꿀을 떠서 돈을 마련하며, 임목(林木)을 벌채(伐採)하여 서울로 운반하는 역사(役事)에서 벌어 먹는 백성이 많다.
황해도(黃海道)는 서변(西邊)의 관문(關門)으로서 서울과 거리가 가깝다. 동쪽은 산중의 산물(産物)이 있고 서쪽은 해산물의 이익이 많아서, 소금 굽는 사람도 소매가 큰 옷을 입고 가죽신을 끌며 유기(鍮器 놋그릇)를 사용한다. 4월이 되면 청어가 바다를 메워, 사방 1백리 안팎에서는 청어를 먹지 못하는 자가 없다. 해주(海州)ㆍ연안(延安)ㆍ배천(白川)ㆍ안악(安岳)ㆍ신천(信川)이 가장 부유하다고 이름이 나 있다. 이곳은 우차(牛車)를 사용하여 땔나무를 운반하는 것으로 생업을 삼는 백성이 많으며, 먹[墨]을 배합하는 기술이 있어서 나라 안에서 가장 좋은 먹을 만들고 있다. 황주(黃州)ㆍ봉산(鳳山)은 목화로 유명한데, 씨가 잘고 솜이 많아서 남쪽 지방에서 생산된 것에 비하여 우수하므로, 장사꾼들이 서로 교역(交易)하여 판다. 신계(新溪)ㆍ곡산(谷山)은 맛이 좋은 배[梨]로 유명한데, 일찍 익고 연하고 맛이 좋아서 조정 대신들이 칭찬한다. 문화(文化)는 잣[海松子]으로 유명하여, 강원도의 회양(淮陽)과 맞먹는다. 무력(武力)을 숭상하는 풍속이 있어 무거운 것을 들고 활을 멀리 쏘기를 좋아하는데, 다른 지방은 모두 이에 미치지 못한다.
평안도(平安道)는 아직도 고구려(高句麗)와 고조선(古朝鮮)의 유풍(遺風)이 남아 있다. 서쪽으로 중국과 교통하여, 복장(服裝)이 화사(華奢)하고 건물(建物)이 크고 화려하며 노래와 춤이 분잡(紛雜)하다. 평양의 부유하고 번성함은 오히려 서울보다 지나칠 정도이다. 여름이면 파리가 수저에까지 모여들어서 거의 밥을 먹을 수 없다. 이 고장에는 은광(銀鑛)이 많다. 압록강(鴨綠江) 연안(沿岸)에 사는 백성들은 농사 대신으로 삼(蔘)을 캔다. 강계(江界)의 영역(領域)인 폐사군(廢四郡)에는 인삼(人蔘)이 더욱 많이 생산되는데, 세상에서 강계삼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간사한 백성이 압록강을 건너가서 인삼을 캐다가 발각되어 죄를 받기도 하나, 워낙 이가 많기 때문에 금해도 되지 않는다. 풍속은 누에 치는 것을 힘써, 가는 명주실을 좋은 물화로 여긴다. 옻[漆]이 없어서 남쪽 지방에서 사다가 쓴다. 이곳에 옻나무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관부(官賦)가 두려워서 백성들이 옻나무를 재배(栽培)하지 않기 때문이다. 토지에는 일정한 장부(帳簿)가 없고, 관장(官長)이 서도(胥徒 아전)에게 맡기므로 잘잘못을 살필 수도 없다. 조정에서는 이 고장을 마치 외국과 같이 취급하여 감사에게 맡기므로 정당한 공물(貢物)이 올라오지 않으니, 이는 국법이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전은 그것을 인연하여 간사를 부리고 관원(官員)은 그 이익을 가로챈다. 그렇기 때문에 속담에 “원이 되면 반드시 서쪽 지방의 원으로 나가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원이 되어 서쪽으로 나아간 사람치고 재물을 많이 모으지 못한 자가 대개 드물기 때문에 이런 말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경내(境內)에는 큰 도둑이 많아 지친 백성들이 살 곳을 잃었다. 화전민(火田民)들은 일정한 거처가 없이 이리저리 옮겨다니기 때문에, 관에서 장리(長利)로 놓은 전곡(錢穀)을 회수할 수가 없어, 거주가 있는 백성에게 대신 내게 하므로, 집을 지니고 사는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는다.
함경도(咸鏡道)는 북관(北關)이라 한다. 함흥(咸興)ㆍ북청(北靑) 이북은 여러 번 숙신(肅愼)에게 함락(陷落)되었으나, 지금은 모두 우리의 군현(郡縣)이 되었으며, 1백여 년 동안 국경에 난리가 없어 백성이 편히 살며 자기 일에 열심히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수령(守令)들을 대부분 무신(武臣)에서 임용(任用)한 것만은 잘못이다. 무신은 대개가 염치(廉恥)를 불구하고 조정 대신들에게 뇌물을 바쳐, 영달의 지름길을 찾기만 힘쓰기 때문에 재물을 탐하여 지나치게 거두어들인다. 그러므로 백성이 편히 살 수가 없다. 이 고장에는 담비ㆍ수달ㆍ영양각(羚羊角)ㆍ녹비(鹿皮)ㆍ인삼ㆍ통포(筒布)와 여러 가지의 해산물이 생산된다. 이리의 꼬리털로 만든 붓은 천하에 유명하다. 서예가(書藝家)들이 중히 여기는 북황모(北黃毛)가 바로 이 고장에서 만든 붓이다. 삼수(三水)ㆍ갑산(甲山) 사이의 물은 모두 북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가는데, 쌀과 소금이 없는 별개의 구역(區域)이다. 육진(六鎭)은 서울과의 거리가 2천여 리인데, 어린아이들이 말을 타고 달리며 여자들이 강궁(强弓)을 당긴다. 겨울이면 썰매를 타고서 곰ㆍ범 사냥을 한다. 때로 숙신과 서로 물화를 교역(交易)하는데, 소와 철기(鐵器)를 가지고 많은 이익을 얻는다. 아교와 저지(楮紙 닥나무로 만든 종이)가 없고 칼처럼 예리한 돌과 화살 만들기에 알맞는 나무가 있기로는 서수라(西樹羅)가 유명하다. 이것은 옛날에 호시(楛矢)ㆍ석노(石砮)라고 칭하던 것인 듯하다. 그러나 대나무 살과 쇠로 만든 촉(鏃)에는 미치지 못한다. 기후가 차므로 개를 길러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데, 어린 개의 가죽으로 만든 갖옷은 서울의 귀족(貴族)들이 귀히 여기는 것이다. 남자들은 날마다 머리를 감아가며 머리털을 기르는데, 그 머리가 자라면 깎아서 다리를 만든다. 오늘날 여자들이 쓰고 있는 다리는 모두가 북쪽 지방에서 생산한 것이라고 한다.
대저 우리나라는 지역(地域)이 좁은데다가 물길이 사방으로 통하여 있기 때문에 경화(輕貨)가 필요치 않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돈[錢]을 사용하는 것이 불편하였다. 국초(國初)에는 종포(綜布)와 저화(楮貨)를 사용하였었다. 지금 돈을 사용한 지 겨우 70년 밖에 되지 않았으나, 폐단이 더욱 심하다. 돈은 탐관 오리(貪官汚吏)에게 편리하고, 사치하는 풍속에 편리하고, 도둑에 편리하나, 농민에게는 불편하다. 돈꿰미를 차고 저자에 나아가서 무수한 돈을 허비하는 자가 많으므로, 인심이 날로 투박하여진다. 이 문제는 지식이 있는 자와 함께 논할 일이다. 시골 읍에는 저자가 점점 더 많이 생겨나서 사방 수십 리 사이에 장이 서지 않는 날이 없으니, 이는 모두 놀고 먹는 자들의 이익이다. 그렇다고 이를 반드시 금지할 것이 아니라 옛날 해시(亥市)의 예에 의하여, 온 나라 안의 장을 같은 날에 서게 한다면, 그 중요하지 않은 장은 절로 없어질 것이다. 이것도 백성의 힘을 신장(伸長)시키는 한 가지의 계책이 될 수 있다.
대저 재물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백성의 피와 땀에서 얻어지는 것이고, 백성이 부유하면 나라도 따라서 부유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가 백성을 다스림에는, 백성을 인도하여 가난에서 벗어나 부유하게 되도록 할 뿐이다. 그 인도한다는 것도 말로 이르고 손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해치거나 겁탈하지 않고 죽음을 피하여 살길을 찾게 하고, 선을 행하고 악은 행하지 않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하면 저 백성들은 제각기 지능(智能)이 있으므로 산택(山澤)의 이(利)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마치 물을 도랑으로 인도하면 물 스스로가 웅덩이를 채워가며 멀리 흘러가고, 말을 목장으로 몰아넣으면 말 스스로가 풀을 뜯고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농토가 모두 권력가(權力家)의 소유가 되고, 호강(豪强)들이 강점(强占)하여 자기 소유로 삼았기 때문에, 백성은 일년 내내 열심히 노력하여도 소작료(小作料)를 주고 나면 소득은 겨우 반밖에 되지 않는다. 또 그 반에서 조용(租庸)과 잡부(雜賦)를 내고 나면, 농민의 차지는 겨우 4분의 1에 불과하다. 또 선전(羨田 남아도는 전지)을 얻어 경작하지 못하는 잔민(殘民 외롭고 가난한 백성)은 노력할 곳마저 없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사방 여러 고을을 지날 적에 촌가(村家)에서 자며 자세히 살펴보니, 방구석에는 쌓인 곡식이 없고 횃대에는 걸린 옷이 없으며, 남녀가 팔베개를 베고 주림을 참고 괴로움을 견디어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대저 보잘것없는 걸인(乞人)도 동냥을 주지 않으면 노여움을 품는데, 하물며 자기 힘으로 지은 농사를, 편히 앉아서 마음도 쓰지 않는 무리들에게 바치는데도, 그자들은 농민의 딱한 처지를 생각지도 않는다면 농민의 원망과 저주가 과연 어떠하랴! 국가에서 관원(官員)을 두는 것은 백성을 위하여 두는 것이다. 관원에게 그 직책을 물으면 백성의 부모(父母)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 행적(行迹)을 살펴보면 백성의 원수이다. 백성이 지혜와 힘을 다하여 지은 농사와 만든 기물(器物)로써 부모 처자를 봉양하지 못하고, 허리를 굽신거리며 원수에게 다 바치니, 이것이 다 익은 곡식을 참새가 쪼아먹고 창고의 곡식을 쥐가 파먹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우리나라가 비록 작으나 물산이 풍부하여 그 용도(用度)를 충당(充當)하기에 넉넉하다. 그러나 그 중요한 것은 청렴 결백한 관원을 등용하고 탐관 오리를 제거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상(賞)과 형벌로써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살인자(殺人者)를 죽이는 것은 고금에 공통된 법이다. 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칼과 몽둥이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한 탐관(貪官)이 법을 잘못 행하면 억울하게 죽는 자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므로 제 위왕(齊威王)이 아대부(阿大夫)를 삶아 죽인 것은 잘한 일이지 잘못한 일이 아니다. 지금 세상에는 제 위왕 같은 임금이 없으니, 백성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나 호소할 곳이 없게 되었다.
이러므로 나는 사방의 물산(物産)을 대략 기록하고, 재산을 늘리는 것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잘되려면 양리(良吏)를 등용해야 한다는 데로 귀결(歸結)짓고 이 글을 끝마쳤으니, 이는 곧 “해마(害馬)를 제거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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