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鬱陵島)
사료해설
『성호사설』은 조선 후기의 학자 이익(李瀷)의 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이익이 평소에 기록해 둔 글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그의 나이 80세에 이르렀을 때에 집안 조카들이 정리한 책이다. 여기에는 천지문(天地門)·만물문(萬物門)·인사문(人事門)·경사문(經史門)·시문문(詩文門)의 다섯 가지 문(門)으로 크게 분류해 총 3,007편의 항목에 관한 글이 실려 있는데, 울릉도에 대해서는 권3, 천지문에 기술되어 있다.
울릉도에 대해 “울릉도는 동해 가운데 있는데 우산국(于山國)이라고도 한다. 육지에서의 거리가 7백리 내지 8백리쯤 되며, 강릉·삼척 등지의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면 세 봉우리가 가물거린다”고 하여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명칭이 우릉도(羽陵島)라고 하든 의죽도(礒竹島)라고 하든 울릉도는 조선 땅이며, 그 부근에 있는 섬도 또한 울릉도의 부속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또한 ‘울릉도쟁계’의 도화선이 되었던 안용복에 대해서 미천한 일개 군졸로 죽음을 무릅쓰고 하마터면 잃을 뻔 했던 울릉도를 되찾게 해준 ‘영웅호걸’로 높이 평가하였다.
울릉도에 대해 “울릉도는 동해 가운데 있는데 우산국(于山國)이라고도 한다. 육지에서의 거리가 7백리 내지 8백리쯤 되며, 강릉·삼척 등지의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면 세 봉우리가 가물거린다”고 하여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명칭이 우릉도(羽陵島)라고 하든 의죽도(礒竹島)라고 하든 울릉도는 조선 땅이며, 그 부근에 있는 섬도 또한 울릉도의 부속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또한 ‘울릉도쟁계’의 도화선이 되었던 안용복에 대해서 미천한 일개 군졸로 죽음을 무릅쓰고 하마터면 잃을 뻔 했던 울릉도를 되찾게 해준 ‘영웅호걸’로 높이 평가하였다.
원문
鬱陵島
鬱陵島在東海中一名于山國遠可七八百里自江陵三陟等地登高望之三峯縹緲隱見
新羅智證王十二年其人恃强不服何瑟羅州軍主異師〔斯〕夫以木獅威服何瑟羅卽今江陵也
高麗初來獻方物
毅宗十一年遣金柔立往審羽陵島從山頂東行至海一萬餘步西行一萬三千餘步南行萬五千步北行八千步有村落基地七所有石佛鐵鍾石塔地多岩石不可居然則是時已成空地矣本朝逋民多入居
太宗世宗時皆往搜盡俘還之芝峯類說云鬱陵島壬辰後被倭焚掠無復人烟近聞倭占據礒竹島或謂礒竹卽鬱陵也倭以漁氓安龍福犯越事來爭以芝峯類說及禮曹回答有貴界竹島之語爲證朝廷遣武臣張漢相往審之南北七十里東西六十里木有冬栢紫擅側栢黃蘖槐椵桑楡無桃李松橡禽獸有烏鵲描鼠水族有嘉支魚穴居巖磧無鱗有尾魚身四足而後足甚短陸不能善走水行如飛聲如嬰兒脂可以燃燈云於是朝廷費辭往復彌縫乃止余謂此事非難判當時明不曰鬱陵之服屬新羅自智證王始時卽貴邦繼體之六年未知威德遠被史乘特書有可以考見者耶至於高麗或獻方物或空其地史不絶書今千有餘年今者何故突然惹此爭端卽無論羽陵礒竹之何指鬱陵之屬我邦則百分明白而其旁近島嶼亦不過鬱陵之屬島與貴邦絶遠其乘隙占據所宜羞吝而不合誇言者也設或中間爲貴邦冒奪兩國約和誠信之後悉宜還其舊田之不暇況未曾著在貴邦之版籍也耶旣在我界則我氓之漁獵往來理固宜然何與於貴邦如是則彼雖巧黠將無復容其喙矣安龍福者東萊府戰船櫓軍也出入倭館善倭語我
肅廟十九年癸酉夏漂泊鬱陵島倭船七艘先到時倭已惹爭島之端龍福與倭辨詰倭怒執以歸拘五浪島龍福謂其島主曰鬱陵芋山本屬朝鮮朝鮮近而日本遠何故拘執我不歸島主送諸伯耆州伯耆島主待以賓禮賚銀許多辭不受島主問汝欲何爲龍福又言其故曰禁山侵擾以厚交隣是吾願也島主許之稟于江戶成契券與之遂遣還行到長椅島島主黨馬島奪其券送之馬島馬島主囚之聞于江戶江戶復爲書契令勿侵兩島且令護送馬島主復奪其書契囚五十日押送東萊倭館又留之四十日送之東萊府龍福悉訴之府使不以聞以杞越刑之二年乙亥夏龍福憤鬱不已誘販僧五人及掉工四人復至鬱陵我國三商船先泊漁採斫竹有倭船適至龍福令諸人縛執諸人懼不從倭云我等漁採松島偶至此卽去龍福曰松島本我芋山島明日追至芋山島倭擧帆走龍福追之漂泊于玉岐島轉至伯耆州島主款迎龍福自稱鬱陵搜捕將乘轎入與島主抗禮言前後事甚詳且云我國歲輸米一石必十五斗綿布一匹三十五尺紙一卷二十張馬島偸損謂米石七斗布匹二十尺截紙爲三卷吾將欲直達于關伯〔白〕治斯誑之罪同行有稍解文字者製疏示島主馬島主父聞之乞憐於伯耆州事遂已慰諭送還曰爭地事悉如汝言有不如約者當重罰之秋八月還泊襄陽方伯狀聞拿致龍福等于京諸人納供如一朝議以犯起挑釁將斬之惟領敦寧尹趾完曰龍福雖有罪馬島從前欺詐者徒以我國不得專通江戶故耳今知別有他路勢必恐怯今誅龍福非計也領中樞南九萬曰馬島之欺詐非龍福無以畢露其罪之有無姑置爭島事不可不因此機會明辨痛斥之書問馬島曰朝廷將別遣使直探其虛實云爾則馬島必大恐服罪然後龍福事徐議其輕重未晩此上策也不然使萊府送書島中先陳龍福擅自呈文之罪次陳本島假稱竹島奪取公文之失待其回答而龍福斷罪之意決不可及於書■此中策也至若不問馬島奸欺之狀而先殺龍福以快其心彼必以此藉口侮我脅我將何以堪之此下策也於是朝廷用中策島主果自服歸罪於前島主不復往來鬱陵朝廷乃減龍福死配去云愚按安龍福直是英雄儔匹以一卒之賤出萬死之計爲國家抗强敵折奸萌息累世之爭復一州之土比諸傳介子陳湯其事尤難非傑然者不能也朝廷不惟不之賞前刑後配摧陷之不暇哀哉鬱陵縱云土薄馬島亦土無數尺而爲倭所窟宅歷世爲患一或見奪是增一馬島也方來之禍何可勝言以此論之龍福非特一世之功也歟古今稱張循王花園老卒爲人豪然其所辦不過大賈販殖之間其於國家計策未必優焉若龍福者當危難之際拔之行伍借之翼角得行其志則所就豈止於此
鬱陵島在東海中一名于山國遠可七八百里自江陵三陟等地登高望之三峯縹緲隱見
新羅智證王十二年其人恃强不服何瑟羅州軍主異師〔斯〕夫以木獅威服何瑟羅卽今江陵也
高麗初來獻方物
毅宗十一年遣金柔立往審羽陵島從山頂東行至海一萬餘步西行一萬三千餘步南行萬五千步北行八千步有村落基地七所有石佛鐵鍾石塔地多岩石不可居然則是時已成空地矣本朝逋民多入居
太宗世宗時皆往搜盡俘還之芝峯類說云鬱陵島壬辰後被倭焚掠無復人烟近聞倭占據礒竹島或謂礒竹卽鬱陵也倭以漁氓安龍福犯越事來爭以芝峯類說及禮曹回答有貴界竹島之語爲證朝廷遣武臣張漢相往審之南北七十里東西六十里木有冬栢紫擅側栢黃蘖槐椵桑楡無桃李松橡禽獸有烏鵲描鼠水族有嘉支魚穴居巖磧無鱗有尾魚身四足而後足甚短陸不能善走水行如飛聲如嬰兒脂可以燃燈云於是朝廷費辭往復彌縫乃止余謂此事非難判當時明不曰鬱陵之服屬新羅自智證王始時卽貴邦繼體之六年未知威德遠被史乘特書有可以考見者耶至於高麗或獻方物或空其地史不絶書今千有餘年今者何故突然惹此爭端卽無論羽陵礒竹之何指鬱陵之屬我邦則百分明白而其旁近島嶼亦不過鬱陵之屬島與貴邦絶遠其乘隙占據所宜羞吝而不合誇言者也設或中間爲貴邦冒奪兩國約和誠信之後悉宜還其舊田之不暇況未曾著在貴邦之版籍也耶旣在我界則我氓之漁獵往來理固宜然何與於貴邦如是則彼雖巧黠將無復容其喙矣安龍福者東萊府戰船櫓軍也出入倭館善倭語我
肅廟十九年癸酉夏漂泊鬱陵島倭船七艘先到時倭已惹爭島之端龍福與倭辨詰倭怒執以歸拘五浪島龍福謂其島主曰鬱陵芋山本屬朝鮮朝鮮近而日本遠何故拘執我不歸島主送諸伯耆州伯耆島主待以賓禮賚銀許多辭不受島主問汝欲何爲龍福又言其故曰禁山侵擾以厚交隣是吾願也島主許之稟于江戶成契券與之遂遣還行到長椅島島主黨馬島奪其券送之馬島馬島主囚之聞于江戶江戶復爲書契令勿侵兩島且令護送馬島主復奪其書契囚五十日押送東萊倭館又留之四十日送之東萊府龍福悉訴之府使不以聞以杞越刑之二年乙亥夏龍福憤鬱不已誘販僧五人及掉工四人復至鬱陵我國三商船先泊漁採斫竹有倭船適至龍福令諸人縛執諸人懼不從倭云我等漁採松島偶至此卽去龍福曰松島本我芋山島明日追至芋山島倭擧帆走龍福追之漂泊于玉岐島轉至伯耆州島主款迎龍福自稱鬱陵搜捕將乘轎入與島主抗禮言前後事甚詳且云我國歲輸米一石必十五斗綿布一匹三十五尺紙一卷二十張馬島偸損謂米石七斗布匹二十尺截紙爲三卷吾將欲直達于關伯〔白〕治斯誑之罪同行有稍解文字者製疏示島主馬島主父聞之乞憐於伯耆州事遂已慰諭送還曰爭地事悉如汝言有不如約者當重罰之秋八月還泊襄陽方伯狀聞拿致龍福等于京諸人納供如一朝議以犯起挑釁將斬之惟領敦寧尹趾完曰龍福雖有罪馬島從前欺詐者徒以我國不得專通江戶故耳今知別有他路勢必恐怯今誅龍福非計也領中樞南九萬曰馬島之欺詐非龍福無以畢露其罪之有無姑置爭島事不可不因此機會明辨痛斥之書問馬島曰朝廷將別遣使直探其虛實云爾則馬島必大恐服罪然後龍福事徐議其輕重未晩此上策也不然使萊府送書島中先陳龍福擅自呈文之罪次陳本島假稱竹島奪取公文之失待其回答而龍福斷罪之意決不可及於書■此中策也至若不問馬島奸欺之狀而先殺龍福以快其心彼必以此藉口侮我脅我將何以堪之此下策也於是朝廷用中策島主果自服歸罪於前島主不復往來鬱陵朝廷乃減龍福死配去云愚按安龍福直是英雄儔匹以一卒之賤出萬死之計爲國家抗强敵折奸萌息累世之爭復一州之土比諸傳介子陳湯其事尤難非傑然者不能也朝廷不惟不之賞前刑後配摧陷之不暇哀哉鬱陵縱云土薄馬島亦土無數尺而爲倭所窟宅歷世爲患一或見奪是增一馬島也方來之禍何可勝言以此論之龍福非特一世之功也歟古今稱張循王花園老卒爲人豪然其所辦不過大賈販殖之間其於國家計策未必優焉若龍福者當危難之際拔之行伍借之翼角得行其志則所就豈止於此
번역문
울릉도(鬱陵島)
울릉도는 동해 가운데 있는데, 우산국(于山國)이라고도 한다. 육지에서의 거리가 7백 리 내지 8백 리쯤 되며, 강릉ㆍ삼척 등지의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면 세 봉우리가 가물거린다.
신라 지증왕(智證王) 12년(511)에 그곳의 주민들이 힘을 믿고 복종하지 않자,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軍主) 이사부(異斯夫)가 나무로 만든 사자의 위력으로 이를 정복했으니, 하슬라는 지금의 강릉이다.
고려 초기에 방물(方物)을 바친 일이 있었으며, 의종(毅宗) 11년(1157)에 김 유립(金柔立)을 우릉도(羽陵島)에 보내어 탐사하게 하였는데, 산마루에서 바다까지 동쪽으로 1만여 보요, 서쪽으로 1만 3천여 보이며, 남쪽으로 1만 5천 보요, 북쪽으로 8천 보였다.
마을의 빈 터가 일곱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석불(石拂)ㆍ철종(鐵鍾)ㆍ석탑이 있었으며, 땅에는 바위가 많아 사람이 살 수 없었으니, 그렇다면 이때에 벌써 공허지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미쳐 죄인들이 도망해 와서 사는 자가 많으므로 태종(太宗)과 세종(世宗) 때에 낱낱이 수색하여 모두 잡아온 일도 있었다.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울릉도는 임진왜란 후에 왜적의 분탕(焚蕩)과 노략질을 겪어 다시 인적이 없었는데, 근자에 들으니 왜적이 의죽도(礒竹島)를 점거했다 하며, 혹자의 말에 의죽도는 곧 울릉도라고 한다.” 하였다.
왜인들이 어부 안용복(安龍福)이 월경(越境)한 일로써 와서 쟁론할 때 《지봉유설》과 예조(禮曹)의 회답 가운데 ‘귀계(貴界)’니, ‘죽도(竹島)’니 하는 말이 있는 것으로 증거를 삼았다.
조정에서 이에 무신 장한상(張漢相)을 울릉도로 보내어 살피게 했는데, 그의 복명에, “남북은 70리요, 동서는 60리이며, 나무는 동백ㆍ자단(紫檀)ㆍ측백ㆍ황벽(黃蘖)ㆍ괴목(槐木)ㆍ유자ㆍ뽕나무ㆍ느릅나무 등이 있고, 복숭아ㆍ오얏ㆍ소나무ㆍ상수리나무 등은 없었습니다. 새는 까마귀ㆍ까치가 있고 짐승은 고양이와 쥐가 있으며, 물고기는 가지어(嘉支魚)가 있는데, 바위틈에 서식하며 비늘은 없고 꼬리가 있습니다. 몸은 물고기와 같고 다리가 넷이 있는데, 뒷다리는 아주 짧으며, 육지에서는 빨리 달리지 못하나 물에서 나는 듯이 빠르고 소리는 어린 아이와 같으며 그 기름은 등불에 사용합니다.”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누차 서신을 왕복하여 무마시켰던 것이다.
나는 생각건대, 이 일은 담판하기 어려울 것이 없으니, 그 당시에 “울릉도가 신라에 예속된 것은 지증왕 때부터 시작된 일이며, 그 당시 귀국은 계체(繼體) 6년(512, 신라 지중왕 13)이었는데 위덕(威德)이 멀리까지 미친 일이 있는지 나는 들은 적이 없으니, 역사에 상고할 만한 특이한 기록이 있는가?
고려로 논한다면 혹은 방물을 바친 적이 있으며 혹은 그 섬을 비운 일도 사기에 기록이 끊어진 적이 없었는데, 일천여 년을 내려 온 오늘에 와서 무슨 이유로 갑자기 이 분쟁을 일으키는가?
우릉도(羽陵島)라고 하든, 의죽도라고 하든, 어느 칭호를 막론하고 울릉도가 우리나라에 속하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며, 그 부근의 섬도 또한 울릉도의 부속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귀국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졌는데, 그 틈을 타서 점령한 것은 이치에 어긋난 일이니, 자랑할 말이 못되는 것이다. 가령 중간에 귀국의 약탈한 바 되었더라도 두 나라가 신의로써 화친을 맺은 후에는 옛 경계에 의하여 서둘러 돌려주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일찍이 귀국의 판도에 들지 않았음에랴?
이미 우리나라의 강토인 이상 우리 백성들이 왕래하며 고기잡이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귀국이 무슨 관여할 권리가 있는가?”라고 왜 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이 말했다면 저들이 비록 간사할지라도 다시 입을 열지 못했을 것이다.
안용복은 동래부(東萊府) 전선(戰船)에 예속된 노군(櫓軍)이니, 왜관에 출입하여 왜어에 능숙하였다.
숙종(肅宗) 19년 계유 여름에 풍랑으로 울릉도에 표류했는데, 왜선 7척이 먼저 와서 섬을 다투는 분쟁이 일고 있었다. 이에 용복이 왜인들과 논란하니, 왜인들이 노하여 잡아가지고 오랑도(五浪島)로 돌아가 구금하였다.
용복이 도주에게 “울릉 우산은 원래 조선에 예속되어 있으며, 조선은 가깝고 일본은 멀거늘 어찌 나를 구금하고 돌려보내지 않는가?” 하니, 도주가 백기주(伯耆州)로 돌려보냈다.
이에 백기도주(伯耆島主)가 빈례(賓禮)로 대우하고 많은 은자(銀子)를 주니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도주가 “그대의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니 용복이 전후 사실을 말하고 이르기를, “침략을 금지하고 이웃 나라끼리 친선을 도모함이 소원이다.”고 하니, 도주가 이를 승낙하고 강호 막부(江戶幕府)에 품하여 계권(契券)을 출급하고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출발하여 장기도에 이르니 도주가 대마도와 부동(符同)하여 그 계권을 빼앗고 대마도로 압송하였다. 대마도주가 또 구금하고 강호 막부로 보고하니, 강호에서 다시 서계를 보내고 울릉 우산 두 섬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또 본국으로 호송하라는 지령이 있었다. 그런데 대마도주는 다시 그 서계를 빼앗고 50일을 구금하였다가 동래부 왜관으로 보냈는데, 왜관에서 또 40일을 유련(留連)시켰다가 동래부로 돌려보냈다.
이에 용복이 이 사실을 모두 호소하니, 부사가 상부에 보고하지도 않고 월경(越境)한 일로 2년의 형벌을 내렸다. 을해(1695, 숙종 21) 여름에 용복이 울분을 참을 수 없어 떠돌이 중 5인과 사공(沙工) 4인과 배를 타고 다시 울릉도에 이르니, 우리나라 상선 3척이 먼저 와서 정박하고 고기를 잡으며 대나무를 벌채하고 있었는데, 왜선이 마침 당도하였다.
용복이 여러 사람을 시켜 왜인들을 포박하려 했으나 여러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좇지 않았으며, 왜인들이 “우리들은 송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우연히 이곳에 왔을 뿐이다.” 하고 곧 물러갔다. 용복이, ‘송도도 원래 우리 우산도’라 하고 다음날 우산도로 달려가니, 왜인들이 돛을 달고 달아나거늘 용복이 뒤쫓아 옥기도(玉岐島)로 갔다가 백기주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도주가 나와 환영하거늘, 용복이 울릉도 수포장(搜捕將)이라 자칭하고 교자를 타고 들어가 도주와 대등한 예로 대하고 전후의 일을 소상히 말하였다.
그리고 또 “우리나라에서 해마다 쌀 1석에 반드시 15두요, 면포 1필은 35척이며, 종이 1권에 20장으로 충수(充數)해 보냈는데, 대마도에서 빼먹고 쌀 1석은 7두, 면포 1필에 20척, 종이는 3권으로 절단하여 강호로 올려보냈으니, 내가 장차 이 사실을 관백(關白)에게 곧장 전달하여 그 속인 죄상을 다스리게 하겠소.” 하고 동행 가운데 문학에 능통한 자를 시켜 소장을 지어 도주에게 보여 주었다.
대마도주의 부친된 자가 이 말을 듣고 백기주에 달려와 용서해 주기를 애걸하므로 그 일은 이로써 결말을 지었다. 그리고 과거의 일을 사과하고 돌려보내며, “섬을 가지고 다툰 일은 모두 그대의 말대로 준행할 것이요, 만약 이 약속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중벌에 처하겠소.”라고 하였다.
추(秋) 8월에 양양에 다다르니, 방백(方伯)이 이 사실을 장계로써 보고하고 용복 등 일행을 서울로 압송하였다. 여러 사람의 공초가 한결같이 나오니 조정의 의론이 월경하여 이웃 나라와 쟁단을 일으켰다 하여 장차 참형에 처하려 하였다.
오직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지완(尹趾完)이 “용복이 비록 죄는 있으나 대마도가 예전부터 속여온 것은 한갓 우리나라가 강호와 직통하지 않은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별달리 통하는 길을 알았으니 대마도에서 반드시 두려워할 것인데, 오늘날 용복을 참형에 처하는 것은 국가의 좋은 계책이 아니옵니다.”라고 하였다.
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남구만(南九萬)은 “대마도에서 속여온 일은 용복이 아니면 탄로되지 않았을 것이니, 그 죄상이 있고 없는 것은 아직 논할 것이 없고, 섬을 다투는 일에 대하여는 이 기회에 밝게 변론하고 중엄하게 물리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즉 대마도에 서계를 보내어 ‘조정에서 장차 강호에 직접 사신을 보내어 그 허실을 탐지하겠다.’ 한다면 대마도에서 반드시 크게 두려워하여 복죄(服罪)할 것입니다. 그런 후에 용복의 일은 그 경중을 서서히 논의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요, 그렇지 않다면 동래부를 시켜 대마도에 서계를 보내어 먼저 용복이 임의로 글을 올린 죄상을 말하고, 다음에 울릉도를 죽도(竹島)라고 가칭한 것과 공문을 탈취한 도주의 과실을 밝혀 그 회답을 기다릴 것이요, 용복을 죄줄 뜻은 서계 가운데 미치지 않을 것이니, 이는 중책이요, 만약 대마도의 속여 온 죄상을 묻지도 않고 먼저 용복을 죽여 저들의 마음을 쾌하게 해준다면 저들이 반드시 이로써 구실을 삼고 우리를 업신여기며 우리를 협박할 것이니, 장차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이것이 하책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중책을 채용하니, 도주가 과연 자복(自服)하여 허물을 전도주(前島主)에게 돌리고 다시 울릉도에 왕래하지 않았으며, 조정에서는 용복을 극형에서 감하여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나는 생각건대, 안용복은 곧 영웃 호걸인 것이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서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를 위하여 강적과 겨루어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토지를 회복했으니 부개자(傅介子)와 진탕(陳湯)에 비하여 그 일이 더욱 어려운 것이니 영특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상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에는 형벌을 내리고 뒤에는 귀양을 보내어 꺾어버리기에 주저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울릉도가 비록 척박하다고 하나, 대마도도 또한 한 조각의 농토가 없는 곳으로서 왜인의 소굴이 되어 역대로 내려오면서 우환거리가 되고 있는데, 울릉도를 한 번 빼앗긴다면 이는 또 하나의 대마도가 불어나게 되는 것이니 앞으로 오는 앙화를 어찌 이루 말하겠는가?
이로써 논하건대, 용복은 한 세대의 공적을 세운 것뿐이 아니었다. 고금에 장순왕(張循王)의 화원노졸(花園老卒)을 호걸이라고 칭송하나, 그가 이룩한 일은 대상 거부(大商巨富)에 지나지 않았으며, 국가의 큰 계책에는 도움이 없었던 것이다.
용복과 같은 자는 국가의 위급한 때를 당하여 항오에서 발탁하여 장수급으로 등용하고 그 뜻을 행하게 했다면, 그 이룩한 바가 어찌 이에 그쳤겠는가?
울릉도는 동해 가운데 있는데, 우산국(于山國)이라고도 한다. 육지에서의 거리가 7백 리 내지 8백 리쯤 되며, 강릉ㆍ삼척 등지의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면 세 봉우리가 가물거린다.
신라 지증왕(智證王) 12년(511)에 그곳의 주민들이 힘을 믿고 복종하지 않자,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軍主) 이사부(異斯夫)가 나무로 만든 사자의 위력으로 이를 정복했으니, 하슬라는 지금의 강릉이다.
고려 초기에 방물(方物)을 바친 일이 있었으며, 의종(毅宗) 11년(1157)에 김 유립(金柔立)을 우릉도(羽陵島)에 보내어 탐사하게 하였는데, 산마루에서 바다까지 동쪽으로 1만여 보요, 서쪽으로 1만 3천여 보이며, 남쪽으로 1만 5천 보요, 북쪽으로 8천 보였다.
마을의 빈 터가 일곱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석불(石拂)ㆍ철종(鐵鍾)ㆍ석탑이 있었으며, 땅에는 바위가 많아 사람이 살 수 없었으니, 그렇다면 이때에 벌써 공허지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미쳐 죄인들이 도망해 와서 사는 자가 많으므로 태종(太宗)과 세종(世宗) 때에 낱낱이 수색하여 모두 잡아온 일도 있었다.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울릉도는 임진왜란 후에 왜적의 분탕(焚蕩)과 노략질을 겪어 다시 인적이 없었는데, 근자에 들으니 왜적이 의죽도(礒竹島)를 점거했다 하며, 혹자의 말에 의죽도는 곧 울릉도라고 한다.” 하였다.
왜인들이 어부 안용복(安龍福)이 월경(越境)한 일로써 와서 쟁론할 때 《지봉유설》과 예조(禮曹)의 회답 가운데 ‘귀계(貴界)’니, ‘죽도(竹島)’니 하는 말이 있는 것으로 증거를 삼았다.
조정에서 이에 무신 장한상(張漢相)을 울릉도로 보내어 살피게 했는데, 그의 복명에, “남북은 70리요, 동서는 60리이며, 나무는 동백ㆍ자단(紫檀)ㆍ측백ㆍ황벽(黃蘖)ㆍ괴목(槐木)ㆍ유자ㆍ뽕나무ㆍ느릅나무 등이 있고, 복숭아ㆍ오얏ㆍ소나무ㆍ상수리나무 등은 없었습니다. 새는 까마귀ㆍ까치가 있고 짐승은 고양이와 쥐가 있으며, 물고기는 가지어(嘉支魚)가 있는데, 바위틈에 서식하며 비늘은 없고 꼬리가 있습니다. 몸은 물고기와 같고 다리가 넷이 있는데, 뒷다리는 아주 짧으며, 육지에서는 빨리 달리지 못하나 물에서 나는 듯이 빠르고 소리는 어린 아이와 같으며 그 기름은 등불에 사용합니다.”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누차 서신을 왕복하여 무마시켰던 것이다.
나는 생각건대, 이 일은 담판하기 어려울 것이 없으니, 그 당시에 “울릉도가 신라에 예속된 것은 지증왕 때부터 시작된 일이며, 그 당시 귀국은 계체(繼體) 6년(512, 신라 지중왕 13)이었는데 위덕(威德)이 멀리까지 미친 일이 있는지 나는 들은 적이 없으니, 역사에 상고할 만한 특이한 기록이 있는가?
고려로 논한다면 혹은 방물을 바친 적이 있으며 혹은 그 섬을 비운 일도 사기에 기록이 끊어진 적이 없었는데, 일천여 년을 내려 온 오늘에 와서 무슨 이유로 갑자기 이 분쟁을 일으키는가?
우릉도(羽陵島)라고 하든, 의죽도라고 하든, 어느 칭호를 막론하고 울릉도가 우리나라에 속하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며, 그 부근의 섬도 또한 울릉도의 부속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귀국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졌는데, 그 틈을 타서 점령한 것은 이치에 어긋난 일이니, 자랑할 말이 못되는 것이다. 가령 중간에 귀국의 약탈한 바 되었더라도 두 나라가 신의로써 화친을 맺은 후에는 옛 경계에 의하여 서둘러 돌려주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일찍이 귀국의 판도에 들지 않았음에랴?
이미 우리나라의 강토인 이상 우리 백성들이 왕래하며 고기잡이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귀국이 무슨 관여할 권리가 있는가?”라고 왜 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이 말했다면 저들이 비록 간사할지라도 다시 입을 열지 못했을 것이다.
안용복은 동래부(東萊府) 전선(戰船)에 예속된 노군(櫓軍)이니, 왜관에 출입하여 왜어에 능숙하였다.
숙종(肅宗) 19년 계유 여름에 풍랑으로 울릉도에 표류했는데, 왜선 7척이 먼저 와서 섬을 다투는 분쟁이 일고 있었다. 이에 용복이 왜인들과 논란하니, 왜인들이 노하여 잡아가지고 오랑도(五浪島)로 돌아가 구금하였다.
용복이 도주에게 “울릉 우산은 원래 조선에 예속되어 있으며, 조선은 가깝고 일본은 멀거늘 어찌 나를 구금하고 돌려보내지 않는가?” 하니, 도주가 백기주(伯耆州)로 돌려보냈다.
이에 백기도주(伯耆島主)가 빈례(賓禮)로 대우하고 많은 은자(銀子)를 주니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도주가 “그대의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니 용복이 전후 사실을 말하고 이르기를, “침략을 금지하고 이웃 나라끼리 친선을 도모함이 소원이다.”고 하니, 도주가 이를 승낙하고 강호 막부(江戶幕府)에 품하여 계권(契券)을 출급하고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출발하여 장기도에 이르니 도주가 대마도와 부동(符同)하여 그 계권을 빼앗고 대마도로 압송하였다. 대마도주가 또 구금하고 강호 막부로 보고하니, 강호에서 다시 서계를 보내고 울릉 우산 두 섬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또 본국으로 호송하라는 지령이 있었다. 그런데 대마도주는 다시 그 서계를 빼앗고 50일을 구금하였다가 동래부 왜관으로 보냈는데, 왜관에서 또 40일을 유련(留連)시켰다가 동래부로 돌려보냈다.
이에 용복이 이 사실을 모두 호소하니, 부사가 상부에 보고하지도 않고 월경(越境)한 일로 2년의 형벌을 내렸다. 을해(1695, 숙종 21) 여름에 용복이 울분을 참을 수 없어 떠돌이 중 5인과 사공(沙工) 4인과 배를 타고 다시 울릉도에 이르니, 우리나라 상선 3척이 먼저 와서 정박하고 고기를 잡으며 대나무를 벌채하고 있었는데, 왜선이 마침 당도하였다.
용복이 여러 사람을 시켜 왜인들을 포박하려 했으나 여러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좇지 않았으며, 왜인들이 “우리들은 송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우연히 이곳에 왔을 뿐이다.” 하고 곧 물러갔다. 용복이, ‘송도도 원래 우리 우산도’라 하고 다음날 우산도로 달려가니, 왜인들이 돛을 달고 달아나거늘 용복이 뒤쫓아 옥기도(玉岐島)로 갔다가 백기주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도주가 나와 환영하거늘, 용복이 울릉도 수포장(搜捕將)이라 자칭하고 교자를 타고 들어가 도주와 대등한 예로 대하고 전후의 일을 소상히 말하였다.
그리고 또 “우리나라에서 해마다 쌀 1석에 반드시 15두요, 면포 1필은 35척이며, 종이 1권에 20장으로 충수(充數)해 보냈는데, 대마도에서 빼먹고 쌀 1석은 7두, 면포 1필에 20척, 종이는 3권으로 절단하여 강호로 올려보냈으니, 내가 장차 이 사실을 관백(關白)에게 곧장 전달하여 그 속인 죄상을 다스리게 하겠소.” 하고 동행 가운데 문학에 능통한 자를 시켜 소장을 지어 도주에게 보여 주었다.
대마도주의 부친된 자가 이 말을 듣고 백기주에 달려와 용서해 주기를 애걸하므로 그 일은 이로써 결말을 지었다. 그리고 과거의 일을 사과하고 돌려보내며, “섬을 가지고 다툰 일은 모두 그대의 말대로 준행할 것이요, 만약 이 약속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중벌에 처하겠소.”라고 하였다.
추(秋) 8월에 양양에 다다르니, 방백(方伯)이 이 사실을 장계로써 보고하고 용복 등 일행을 서울로 압송하였다. 여러 사람의 공초가 한결같이 나오니 조정의 의론이 월경하여 이웃 나라와 쟁단을 일으켰다 하여 장차 참형에 처하려 하였다.
오직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지완(尹趾完)이 “용복이 비록 죄는 있으나 대마도가 예전부터 속여온 것은 한갓 우리나라가 강호와 직통하지 않은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별달리 통하는 길을 알았으니 대마도에서 반드시 두려워할 것인데, 오늘날 용복을 참형에 처하는 것은 국가의 좋은 계책이 아니옵니다.”라고 하였다.
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남구만(南九萬)은 “대마도에서 속여온 일은 용복이 아니면 탄로되지 않았을 것이니, 그 죄상이 있고 없는 것은 아직 논할 것이 없고, 섬을 다투는 일에 대하여는 이 기회에 밝게 변론하고 중엄하게 물리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즉 대마도에 서계를 보내어 ‘조정에서 장차 강호에 직접 사신을 보내어 그 허실을 탐지하겠다.’ 한다면 대마도에서 반드시 크게 두려워하여 복죄(服罪)할 것입니다. 그런 후에 용복의 일은 그 경중을 서서히 논의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요, 그렇지 않다면 동래부를 시켜 대마도에 서계를 보내어 먼저 용복이 임의로 글을 올린 죄상을 말하고, 다음에 울릉도를 죽도(竹島)라고 가칭한 것과 공문을 탈취한 도주의 과실을 밝혀 그 회답을 기다릴 것이요, 용복을 죄줄 뜻은 서계 가운데 미치지 않을 것이니, 이는 중책이요, 만약 대마도의 속여 온 죄상을 묻지도 않고 먼저 용복을 죽여 저들의 마음을 쾌하게 해준다면 저들이 반드시 이로써 구실을 삼고 우리를 업신여기며 우리를 협박할 것이니, 장차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이것이 하책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중책을 채용하니, 도주가 과연 자복(自服)하여 허물을 전도주(前島主)에게 돌리고 다시 울릉도에 왕래하지 않았으며, 조정에서는 용복을 극형에서 감하여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나는 생각건대, 안용복은 곧 영웃 호걸인 것이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서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를 위하여 강적과 겨루어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토지를 회복했으니 부개자(傅介子)와 진탕(陳湯)에 비하여 그 일이 더욱 어려운 것이니 영특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상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에는 형벌을 내리고 뒤에는 귀양을 보내어 꺾어버리기에 주저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울릉도가 비록 척박하다고 하나, 대마도도 또한 한 조각의 농토가 없는 곳으로서 왜인의 소굴이 되어 역대로 내려오면서 우환거리가 되고 있는데, 울릉도를 한 번 빼앗긴다면 이는 또 하나의 대마도가 불어나게 되는 것이니 앞으로 오는 앙화를 어찌 이루 말하겠는가?
이로써 논하건대, 용복은 한 세대의 공적을 세운 것뿐이 아니었다. 고금에 장순왕(張循王)의 화원노졸(花園老卒)을 호걸이라고 칭송하나, 그가 이룩한 일은 대상 거부(大商巨富)에 지나지 않았으며, 국가의 큰 계책에는 도움이 없었던 것이다.
용복과 같은 자는 국가의 위급한 때를 당하여 항오에서 발탁하여 장수급으로 등용하고 그 뜻을 행하게 했다면, 그 이룩한 바가 어찌 이에 그쳤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