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무천황이 죽음
병오(9일)에 천황은 병이 쾌차하지 못하고 마침내 정궁주 001에서 죽었다(崩)주 002
번역주 002)

. 천무천황의 묘에 관해서는 『日本書紀』에는 천무천황의 사후 687년(지통 원년) 10월 임자조에 「처음으로 大内陵을 축조하다.」라는 기사가 있으며, 688년(지통 2) 11월에는 조사(誅;시노비고토)가 끝나고 천무천황이 매장되고 있다. 702년(대보 2)에는 붕어한 지통이 703년 12월 癸酉에 飛鳥岡에서 화장되어 同月 壬午에 「大内山陵에 合葬」되었다고 한다. 『延喜式』 諸陵寮에는 「檜隈大内陵, 在大和國高市郡. 兆域東西五町, 南北四町, 陵戸五姻.」이라 보이며, 『陵墓要覽』은 그 위치를 「高市郡 明日香村 大字野口」라 하고 있다. 천무·지통천황 합장릉인 野口王墓에 관해서는 조영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자료가 있는데, 현재 그 분구는 동서 약 58m, 남북 직경 45m, 높이 9m의 원분 형태이다. 본래의 분형은 8각형, 5단 축성이며 주변에 돌계단을 둘러쳤다고 한다. 2실로 구성된 切石으로 쌓은 석실이 있고, 천무천황의 夾紵棺과 지통천황의 金銅製骨蔵器가 매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고분은 천황이 매장된 고분으로 생각해도 좋으며, 피장자의 실제성도 문제가 없다. 治定을 신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고대의 능묘이다. 그러나 1235년에 도굴되어 대부분의 부장품이 없어졌다. 그때 천무천황의 관도 손상되고 유체도 관 밖으로 꺼내져 석실 내에는 천황의 유골과 백발이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지통천황의 유골은 화장했기 때문에 은제의 골호(骨壺)에 담겨져 있었으나 골호마저 사라지고 그 안에 있던 유골은 근처에 유기되어 있었다고 한다.
- 번역주 001)
-
번역주 002)
천무천황의 묘에 관해서는 『日本書紀』에는 천무천황의 사후 687년(지통 원년) 10월 임자조에 「처음으로 大内陵을 축조하다.」라는 기사가 있으며, 688년(지통 2) 11월에는 조사(誅;시노비고토)가 끝나고 천무천황이 매장되고 있다. 702년(대보 2)에는 붕어한 지통이 703년 12월 癸酉에 飛鳥岡에서 화장되어 同月 壬午에 「大内山陵에 合葬」되었다고 한다. 『延喜式』 諸陵寮에는 「檜隈大内陵, 在大和國高市郡. 兆域東西五町, 南北四町, 陵戸五姻.」이라 보이며, 『陵墓要覽』은 그 위치를 「高市郡 明日香村 大字野口」라 하고 있다. 천무·지통천황 합장릉인 野口王墓에 관해서는 조영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자료가 있는데, 현재 그 분구는 동서 약 58m, 남북 직경 45m, 높이 9m의 원분 형태이다. 본래의 분형은 8각형, 5단 축성이며 주변에 돌계단을 둘러쳤다고 한다. 2실로 구성된 切石으로 쌓은 석실이 있고, 천무천황의 夾紵棺과 지통천황의 金銅製骨蔵器가 매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고분은 천황이 매장된 고분으로 생각해도 좋으며, 피장자의 실제성도 문제가 없다. 治定을 신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고대의 능묘이다. 그러나 1235년에 도굴되어 대부분의 부장품이 없어졌다. 그때 천무천황의 관도 손상되고 유체도 관 밖으로 꺼내져 석실 내에는 천황의 유골과 백발이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지통천황의 유골은 화장했기 때문에 은제의 골호(骨壺)에 담겨져 있었으나 골호마저 사라지고 그 안에 있던 유골은 근처에 유기되어 있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