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855-70 신드 측량지도 (맥도날드)
5. 1855-70 신드 측량지도 (맥도날드)
1855-70 기간 동안 신드지방의 측량을 신드 집정관의 요청으로 인디아 정부의 명령 아래 인디아측량국의 전문적 측량자가 수행하였다.
측량담당 부감독관 도날드 맥도날드 대위가 이 측량의 마지막 4년간 (1866-70) 측량과 지도 작성 책임자였다. 본 사건과 관련된 당해 지역이 측량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바로 이런 이유로 1855-70년에 걸쳐 신드의 측량작업은 본 사건 진행절차 상에서와 같이 맥도날드 측량으로 알려졌다.
인도 변론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측량과 관련된 인도의 입장을 개진한다:
측량담당 부감독관 도날드 맥도날드 대위가 이 측량의 마지막 4년간 (1866-70) 측량과 지도 작성 책임자였다. 본 사건과 관련된 당해 지역이 측량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바로 이런 이유로 1855-70년에 걸쳐 신드의 측량작업은 본 사건 진행절차 상에서와 같이 맥도날드 측량으로 알려졌다.
인도 변론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측량과 관련된 인도의 입장을 개진한다:
“신드의 정복이 끝난 후 어떤 시점에, 신드의 세수조사가 인도측량국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 측량은 1855-66년 기간에 개시되었고 1869-70 년에 종지되었다. 이 측량의 결과로, 신드 지도가 여러 장으로 제작되었고 인도총측량관(인도측량국 총책임자)의 지시 아래 인도측량국이 발간하였다. 그 당시 신드는 카라치(Karachi), 히데라바드(Hyderabad) 및 시카르푸르(Sikarpoor) 라는 세 징수 구역과, 상부 신드 국경 구역과 타르 파르카르(Thar Parkar) 구역 이라는 두 정치적 감독지역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지도 제 91-97 쪽 [일련의 인도 지도들] (B-2)은 신드의 남쪽 부분, 이름하여, 카라치 세수구역의 남쪽 부분, 히데라바드 세수구역 및 타르 파르카르 정치적 감독지역 등을 커버한다. 이러한 지역적 경계선은 이런 지면 위에서 ‥‥‥ 이라는 표식으로 되었다; 카라치 징수구역의 한계는 녹색 밴드(띠)로 표시되었고, 히데라바드 세수구역은 노란색 띠로 그리고 타르 파르카르 정치적 감독지역은 보라색으로 되었다. 이 같은 지도들은 신드의 남쪽 경계는 란의 북쪽 끝 모서리를 따라 대략 지나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1877년에는 신드 지도가 앞서 언급한 측량을 근거로 하여 한 장으로 만들어졌다. 그 지도 [인도 지도] (B-3)는 파키스탄이 주장하고 있는 란의 어느 부분도 신드 내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도 변론서, 124문.)
맥도날드 측량지도에 따라, 란의 가장자리 가장 동쪽 끝 부분을 흑백으로 보여주는 나머지 지도 제 79쪽이, 구술변론과정 중에 파키스탄이 증거로 제출하였다 (파키스탄 지도 137). 일련의 인도 지도 B-2 속에서와 같이 동일한 경계선 표식이 그 가장자리를 따라 나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에, 파키스탄은, 란의 가장자리를 따라 있는 경계선 표식은 신드와 조드푸르 간 정치적 경계선과 그 간격과 크기에 있어서 상이하였다고 덧붙였다. 인도는 를 지적한다. 뛰이에(Tuillier)의 표식목록(Chart of Symbols) (파키스탄 자료 B.248)은 두껍고 끊어진 선 또는 두꺼운 대쉬(하이픈)들을 분할하는 경계선으로 규정하였고 이 표식은 인도 지도 TB-17A 및 TB-17B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 지도 137 속에서 란의 북쪽 가장자리를 따라 있는 것과 적확하게 동일한 방법으로 신드와 라자스탄 간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된다.
인도는 다음과 같이 계속 한다: 인도측량총책임자의 권위로 발간되었기 때문에 인도의B-2 일련의 지도들, 그리고 파키스탄 지도 137은 “진본” 지도들이었다. 그것들은, 뒤에 인도 지도 B-47 및 파키스탄 지도 39 속에서 쿠취 측량단이 그랬던 것처럼, 구역과 공국들에게 뛰이에의 공식적 경계선 표식(파키스탄 자료 B.278)을 사용하였다. 맥도날드는 뛰이에의 표식목록을 1865년 11월 15일 이전에 접수하였음에 틀림없다. 수직선과 란의 북쪽 가장자리를 따라 있는 맥도날드 경계선은, 쿠취의 권위적 실체들은 그러한 권위적 측량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쿠취는 바로 구속하지 않더라도 신드에게는 강권적으로 적용되는, 신드-쿠취 경계에 접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분쟁이 있는 부분에 관하여 그리고 1937-38년 실시된 신드 일부분에 대한 측량기간(오스마스톤의 측량 기간) 동안은 제외하고, 최초 혹은 그 이후 판에 있는 맥도날드 라인에 대한 쿠취 측의 공식적 동의는 인도 지도 B-44을 승인함에 따라 1914년에 있었다. 따라서, 측량단 일행을 책임지고 있는 관리에게 보낸 1938년 1월 22일 자 편지 속에서, 쿠취 공국의 측량감독관은 다음과 같이 썼다: “쿠취와 타르 파르카르 구역 간 영토적 경계선은 ... 다음과 같다. 경계선은 카라치, 히데라바드, 쿠취 등 세 지역이 만나는 지점(접합점, 교차점 trijuction)에서 출발하여, 삼각작도 지도(1885-86년 기간에 수행된 측량)와 조드푸르, 쿠취 및 와브 세 지역이 만나는 지점으로 나 있는 녹색으로 표식된 선(라인)이 있는 일련의 지도 가운데 40L 및 40P 지도 내에서 보이는 선을 따라, 라훔카바자르(Rahumkabazar), 물키아리(Mulkiaree)로 향한다.” (파키스탄 자료 B.23.) 그리고 잠시 뒤에 1938년 3월 5일에는 쿠취의 데완(Dewan)이 서인도 공국의 주재관리(British Resident)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썼다:
인도는 다음과 같이 계속 한다: 인도측량총책임자의 권위로 발간되었기 때문에 인도의B-2 일련의 지도들, 그리고 파키스탄 지도 137은 “진본” 지도들이었다. 그것들은, 뒤에 인도 지도 B-47 및 파키스탄 지도 39 속에서 쿠취 측량단이 그랬던 것처럼, 구역과 공국들에게 뛰이에의 공식적 경계선 표식(파키스탄 자료 B.278)을 사용하였다. 맥도날드는 뛰이에의 표식목록을 1865년 11월 15일 이전에 접수하였음에 틀림없다. 수직선과 란의 북쪽 가장자리를 따라 있는 맥도날드 경계선은, 쿠취의 권위적 실체들은 그러한 권위적 측량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쿠취는 바로 구속하지 않더라도 신드에게는 강권적으로 적용되는, 신드-쿠취 경계에 접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분쟁이 있는 부분에 관하여 그리고 1937-38년 실시된 신드 일부분에 대한 측량기간(오스마스톤의 측량 기간) 동안은 제외하고, 최초 혹은 그 이후 판에 있는 맥도날드 라인에 대한 쿠취 측의 공식적 동의는 인도 지도 B-44을 승인함에 따라 1914년에 있었다. 따라서, 측량단 일행을 책임지고 있는 관리에게 보낸 1938년 1월 22일 자 편지 속에서, 쿠취 공국의 측량감독관은 다음과 같이 썼다: “쿠취와 타르 파르카르 구역 간 영토적 경계선은 ... 다음과 같다. 경계선은 카라치, 히데라바드, 쿠취 등 세 지역이 만나는 지점(접합점, 교차점 trijuction)에서 출발하여, 삼각작도 지도(1885-86년 기간에 수행된 측량)와 조드푸르, 쿠취 및 와브 세 지역이 만나는 지점으로 나 있는 녹색으로 표식된 선(라인)이 있는 일련의 지도 가운데 40L 및 40P 지도 내에서 보이는 선을 따라, 라훔카바자르(Rahumkabazar), 물키아리(Mulkiaree)로 향한다.” (파키스탄 자료 B.23.) 그리고 잠시 뒤에 1938년 3월 5일에는 쿠취의 데완(Dewan)이 서인도 공국의 주재관리(British Resident)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썼다:
“측량감독관은 나가르 파르커(Nagar Parker)에서 돌아와서 쿠취, 신드 및 와오(Wao)의 대표자들이 경계선 조정에 합의하지 않았던 관계로 당해 측량관청은 그 측량작업을 진행시키지 않았다고 보고한다. 신드의 대표자는 또한 란의 절반은 신드의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보고한다. 이것은 다르바르(Darbar)에게는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신드와 쿠취 간 경계선은 이미 정해졌고 지형적 측량 조사 지면에 이미 나타난 바 있다. 또 다시, 봄베이 지방 정부와 쿠취의 다르바르 간 경계선 분쟁은 한참 전에 해결되었고, 경계선 표석(pillar)이 분쟁 중이었던 경계선 지역에 1924년에 세워졌다. 다르바르는 그럼에 따라 신드의 지금의 주장은 효력이 없고 란의 전체가 쿠취에게 속한다는데 결코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파키스탄 자료 B.167/인디아)
인도는 맥도날드 측량은 파키스탄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단지 마을의 정착된 혹은 경작된 부분의 경계선만을 보여주는 대강 이루어진 세수조사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신드 집정관은 인도측량국의 신드 전체에 걸친 지형측량에 호의를 가졌는데 그것은 모든 경계선을 대축척으로 마을의 경계선까지 보여주는 지도를 제공될 것이고, 그리하여 지형측량에 기반을 둔 훌륭한 세수조사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과학적 지형측량 이전에 하나의 조치로 신드 정착담당조직에 의해 수행된 사전적 대략조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따라서 마을의 경계조사와 그 획정(한계설정)이 먼저 수행된다고 명령하였다. 그는 이 작업은 또한 어느 정도의 세수조사의 필요성을 가져올 것이고 완전한 지형측량과 훌륭한 세수조사가 만들어질 때에는 세수관련 공무원에게 아주 귀중한 것이 될 것이라고 느꼈다. 그것에 따라서, 그는 당해 지역의 세 징수관에게 “신드 내 대략측량조사와 정착을 위한 규칙”라고 지칭한 규정 한 질(세트)를 회람시켰다. 그는 또한 인도측량총책임자에게 “당해 지방의 훌륭한 지형적 조사(측량)의 긴급한 필요성”이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었고 그에 따라 인도측량국은 1855-70기간 동안 측량을 수행하였다. 이 측량은 비록 이 조사 역시 지형적 뿐만 아니라 세수적 상세점까지 제공하였음에도 신드 관리들이 이전에 수행했던 세수조사와는 구별되었다. 푼잡 세수조사국의 한 부서에서 이 측량 수행에 이의제기를 했던 까닭에 그것은 세수조사라고 일컬어졌다.
인도는 또한 맥도날드는 신드 전체에 걸쳐서 효과적인 조사측량을 해서, 그렇게 되지 않은 황무지 및 버려진 또는 비경착 부분을 남겨두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면에서 인도는 다음 것들을 의존한다: 1869-70 마지막 맥도날드 측량보고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드의 측량이 지금 끝났다. 나는 델리(Delhi)와 푼자웁(Punjaub)의 히사르(Hissar) 구역 측량을 위해 나의 부서를 이동시킬 것을 명령 받았다.” 더군다나, “인도측량위원회(Indian Survey Committee)는, 1904-05, 다음과 같은 새로운 측량을 제안하였다: “신드 전체는 1855년에서 1870년에 걸쳐 세수측량부서에서 처음으로 4인치, 2인치 및 1인치 축척으로 측량된 바 있었다. 이러한 측량작업들은 1인치 축척으로 발간되었다...”. 인도는 더 나아가 단순히 정착지역 뿐만 아니라 경계선 안쪽 및 그 주변지역(변방지역)에 있는 비경작된, 버려진(황무지) 땅들도 조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 자신의 측량작업에 대한 많은 연간보고서들을 인용한다.
인도는 맥도날드는 심지어 신드의 한계 너머까지 갔었다고 덧붙인다. 카이르푸르(Khairpur) 공국을 측량할 때는 기술적 이유로 맥도날드는 또한, 알라분드(Allah Bund)를 포함하여 “란 하부행정조직 (Rann Sub-Circuit)” 같은, 여러 가지 “중첩된” 지역들을 조사해야 했다. 그는 또한 칸자르코트(Kanjarkot)의 버려진 요새를 묘사했다. 1850년에는 한 회람이 모든 세수조사측량가들에게 있었는데, 그 내용은 “서로 다른 측량단 일행이 조사할 때에는, 인접하는 모든 구역 지도들 간 좀 더 완전한 연결성(접합)을 위해서, 푸르구나(Purgunnah)와 구역 경계선 밖에 있는 몇몇 마을들과 모든 특징적인 대상물 및 지리적 세목의 위치는 그것으로부터 합리적인 거리 내에 기재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878년에는, 측량국은, 측량은 행정적 경계선에서 멈추지 말고 “모든 마을, 사원, 혹은 인접하고 또는 정해진 지형적 측량의 경계선 바깥쪽에 있는 영구적 목적물 등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해서, 인접하는 지도와 훌륭한 연결(스무스한 연결)을 확보해야 한다”는 공식적 명령을 발하였다.
경계선이 보이지 않는 파키스탄 57-67 지도들에 대하여, 인도는 그것들은 준비(예비)적 지도이거나 특별한 목적상 제작된 지도들이라고 말한다. 맥도날드 보고서 내에서는 이런 지도들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인도는 맥도날드가 서명한 집촌 지도들 뭉치(Volumes of Congregated Village Maps)에 의존하는데, 이것들은 신드 영토의 경계선을 보여 준다 (인도 BBB 일련지도). 이 지도들은 매년 보고서가 보여주듯이, 민간단체로 보내졌다. 인도는 또한 맥도날드가 서명한 두 지도, 인도지도 TB-18 및 TB-18(a)를 제시하였는데, 이것들 역시 정치적 경계선을 보여준다. 인도는 이 경계선들이 몇몇 승인받지 않은 이들에 의해 인도지도 B-2 시리즈(일련지도) 속에서 그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진술한다.
맥도날드가 코리(Khori) 샛강(개울, 시내)의 최상단으로부터 키리아(Kirria) 마을 인접 지역까지에 걸친 수직선을 그렸던 방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인도는, 샤 분더(노모 Bunder) 구역의 자티 탈루카 지역 내 작업을 다루면서, 1868-69년 맥도날드 보고서를 언급한다. 거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자티 안에서는 경계선들이 모두 돌로 표시되었고, 탁버스트 지도에서는, 평면과 사슬 형태로 대강 스케치 되었다. 분쟁이 있는 경계는 없었다.” 인도는 또한 그 수직선은 한때 몇몇 자연적 형상들과 부합되었던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인도지도 TB-8 및 TB-9와 같은 몇몇 지도들은 그 수직선의 동쪽과 서쪽 간 지리적 상이점들을 더 나아가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적으로, 인도는 주장하기를, 당해 수직선은, 신드의 집정관이었던 루카스 (W. H. Lucas)가 1910년 2월 28일자로, 봄베이 정부 정치성 장관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에서 증명되듯이 최소한 1837년까지 분명히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인도는 또한 맥도날드는 신드 전체에 걸쳐서 효과적인 조사측량을 해서, 그렇게 되지 않은 황무지 및 버려진 또는 비경착 부분을 남겨두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면에서 인도는 다음 것들을 의존한다: 1869-70 마지막 맥도날드 측량보고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드의 측량이 지금 끝났다. 나는 델리(Delhi)와 푼자웁(Punjaub)의 히사르(Hissar) 구역 측량을 위해 나의 부서를 이동시킬 것을 명령 받았다.” 더군다나, “인도측량위원회(Indian Survey Committee)는, 1904-05, 다음과 같은 새로운 측량을 제안하였다: “신드 전체는 1855년에서 1870년에 걸쳐 세수측량부서에서 처음으로 4인치, 2인치 및 1인치 축척으로 측량된 바 있었다. 이러한 측량작업들은 1인치 축척으로 발간되었다...”. 인도는 더 나아가 단순히 정착지역 뿐만 아니라 경계선 안쪽 및 그 주변지역(변방지역)에 있는 비경작된, 버려진(황무지) 땅들도 조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 자신의 측량작업에 대한 많은 연간보고서들을 인용한다.
인도는 맥도날드는 심지어 신드의 한계 너머까지 갔었다고 덧붙인다. 카이르푸르(Khairpur) 공국을 측량할 때는 기술적 이유로 맥도날드는 또한, 알라분드(Allah Bund)를 포함하여 “란 하부행정조직 (Rann Sub-Circuit)” 같은, 여러 가지 “중첩된” 지역들을 조사해야 했다. 그는 또한 칸자르코트(Kanjarkot)의 버려진 요새를 묘사했다. 1850년에는 한 회람이 모든 세수조사측량가들에게 있었는데, 그 내용은 “서로 다른 측량단 일행이 조사할 때에는, 인접하는 모든 구역 지도들 간 좀 더 완전한 연결성(접합)을 위해서, 푸르구나(Purgunnah)와 구역 경계선 밖에 있는 몇몇 마을들과 모든 특징적인 대상물 및 지리적 세목의 위치는 그것으로부터 합리적인 거리 내에 기재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878년에는, 측량국은, 측량은 행정적 경계선에서 멈추지 말고 “모든 마을, 사원, 혹은 인접하고 또는 정해진 지형적 측량의 경계선 바깥쪽에 있는 영구적 목적물 등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해서, 인접하는 지도와 훌륭한 연결(스무스한 연결)을 확보해야 한다”는 공식적 명령을 발하였다.
경계선이 보이지 않는 파키스탄 57-67 지도들에 대하여, 인도는 그것들은 준비(예비)적 지도이거나 특별한 목적상 제작된 지도들이라고 말한다. 맥도날드 보고서 내에서는 이런 지도들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인도는 맥도날드가 서명한 집촌 지도들 뭉치(Volumes of Congregated Village Maps)에 의존하는데, 이것들은 신드 영토의 경계선을 보여 준다 (인도 BBB 일련지도). 이 지도들은 매년 보고서가 보여주듯이, 민간단체로 보내졌다. 인도는 또한 맥도날드가 서명한 두 지도, 인도지도 TB-18 및 TB-18(a)를 제시하였는데, 이것들 역시 정치적 경계선을 보여준다. 인도는 이 경계선들이 몇몇 승인받지 않은 이들에 의해 인도지도 B-2 시리즈(일련지도) 속에서 그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진술한다.
맥도날드가 코리(Khori) 샛강(개울, 시내)의 최상단으로부터 키리아(Kirria) 마을 인접 지역까지에 걸친 수직선을 그렸던 방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인도는, 샤 분더(노모 Bunder) 구역의 자티 탈루카 지역 내 작업을 다루면서, 1868-69년 맥도날드 보고서를 언급한다. 거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자티 안에서는 경계선들이 모두 돌로 표시되었고, 탁버스트 지도에서는, 평면과 사슬 형태로 대강 스케치 되었다. 분쟁이 있는 경계는 없었다.” 인도는 또한 그 수직선은 한때 몇몇 자연적 형상들과 부합되었던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인도지도 TB-8 및 TB-9와 같은 몇몇 지도들은 그 수직선의 동쪽과 서쪽 간 지리적 상이점들을 더 나아가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적으로, 인도는 주장하기를, 당해 수직선은, 신드의 집정관이었던 루카스 (W. H. Lucas)가 1910년 2월 28일자로, 봄베이 정부 정치성 장관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에서 증명되듯이 최소한 1837년까지 분명히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이 언급 [모리스 집정관이 1905년에 한] 속에 요약된 권위적 실체(통치 당국)들은, 1837년 이래로 신드와 쿠취 간 경계선은, 그 날짜부터 지금까지 작성되었던 모든 지도들이 보여주듯이, 히데라바드 구역의 바딘 탈루카, 카라치 구역의 자티 탈루카 및 쿠취의 룬(Runn of Cutch) 등 세 영역이 만나는 지점으로부터 남쪽으로 직선으로 그어져 내려와 코트리에 있는 모사피르크하나 동쪽 코리 냇가(개울)의 북쪽 하안에 있는 한 지점에 까지, 그리고 그 지점으로부터 코리 냇가는 아라비아 해에 닿을 때까지 그 개울이 경계선이 된다는 의미를 갖는 매우 커다란 증거를 만든다.
“1904-05 기간에 새로운 삼각작도법에 따른 측량지도들 또한 동일한 경계선을 보여 주며, 또한 인도 공국들에 대한 1909년 공식적 메모(비망록)에 담긴 쿠취를 포함한 봄베이 관구 지도에서도 그렇다. 본인은 또한 1843년 신드 정복 이래로 한 번도 문제된 바 없었던 이 경계선의 정확성에 관한 귀중한 부가적 증거를 얻은 바 있다.
“지금, 갑자기, 쿠취의 라오가 1,000평방 마일에 해당되는 영국 영토의 한 조각(slice)을 주장한다.” (인도자료 AA-10.)
“1904-05 기간에 새로운 삼각작도법에 따른 측량지도들 또한 동일한 경계선을 보여 주며, 또한 인도 공국들에 대한 1909년 공식적 메모(비망록)에 담긴 쿠취를 포함한 봄베이 관구 지도에서도 그렇다. 본인은 또한 1843년 신드 정복 이래로 한 번도 문제된 바 없었던 이 경계선의 정확성에 관한 귀중한 부가적 증거를 얻은 바 있다.
“지금, 갑자기, 쿠취의 라오가 1,000평방 마일에 해당되는 영국 영토의 한 조각(slice)을 주장한다.” (인도자료 AA-10.)
맥도날드 측량에 관한 파키스탄의 입장은 다르게 진행된다. 파키스탄에 따르면, 맥도날드가 제작한 원래의 지도들은 신드의 남쪽 경계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또는 란과 관련하여 신드-쿠취 간 경계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맥도날드가 측량했던 지역의 범주는 신드의 정착 관리들에 의해서 그를 위해 윤곽이 잡혀졌었다(계획되었었다). 이것은 인도측량국총책임자(측량총관)가 1863년에 한 다음의 의견으로부터 분명하다:
p.109
“민사 혹은 정착담당부서는 마을 경계선의 입안(결정)만 책임지고 있고, 동시에 그것은 그의 계획안이 지침으로 만들어져 그에게 넘겨진 허드버스트 혹은 획정지도들과 정확하게 부합하는 지를 살피는 전문적 측량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한다; 그리하여 만약 그가 측량 이전에 그런 지침을 충분히 제공받지 못한다면 경계측량의 정확성은 신뢰할 수 없다.” (파키스탄 자료 B.355, 1면.)
정책업무와 관련하는 한, 신드 내 영국 지배조직체들이 합리적인 선 위에 당해 지역의 세수행정을 조직하기를 원했었다. 신드의 이전 통치자들은 세수 단위에서 매우 자유 변화를 주었다, 1843년 영국의 신드 정복 당시에는 세수행정은 엉망이었다. 남쪽의 신드의 몇몇 지역은 댐 건설과 여타 자연적 원인으로 인해 지형적 변화를 또한 거쳤었다. 신드 사람들의 이주 경향은 1820년의 윌리암스와 1855년의 프레레를 포함한 많은 저자들이 인식한 바 있었다. 결과적으로, 육지 내 신드의 버려진 상당수의 마을들이 환형지역(loop) 밑에 칸자르코트 주변에 있었다 (예를 들어 인도지도 B-2의 제 91쪽 참조).
파키스탄은, 맥도날드 측량 절차에 따르면, 정착 당국은 먼저 칼호라스 (1783년 이전) 왕조 때에 존재했던 대로 있는 마을(dehs)의 경계선을 마을 사람들의 회상에 근거해서 다시 만들어야 했다고 한 여러 영국 관리들 (예를 들자면, 프레레, 전게서, 10-13면.)의 언급에 의존한다. 파키스탄에 따르면, 이런 절차가 불가피하게 암시하는 바는 다음과 같았다:
(a) 인구가 밀집한 마을들만 재건립할 것이다. 따라서 버려진 마을들 (예를 들어 환형지역(loop) 밑에 것들)은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이다;
(b) 란과 근접해 있는 마지막 마을(deh)의 외부 한계 밖에 남겨진 지역들은 그럼에 따라 자동적으로 란 안으로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c) 재건립되는 마지막 마을 바깥 한계는 당해 지역의 바깥 쪽 주변지역으로 드러날 것이다.
파키스탄은 란 그 자체는 육지가 아니라고 보았고, 경작과 세수 목적으로는 비생산적인 것으로 그곳에서 정착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또한 주장한다. 맥도날드는 단지 정착 당국이 정해준 지역만을 측량했기 때문에 따라서 란을 측량하지는 않았다. 이런 맥락으로, 파키스탄은 또한 현대적 측량규칙 (1848년의 파키스탄 자료 353/인디아)에 역시 의존하는데, 여기서 구역 간 경계를 어떤 강이 이루고 있는 경우에는 마지막으로 그 강에 접근했던 이가 측량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맥도날드는 란을 측량하지 않았고, 10년 후에 란의 반대편 쪽을 측량하였던 풀란(Pullan)은 그 작업의 한 부분으로 그것을 측량하였다.
인도는, 만일 이 규칙이 란에 적용되고 란이 강으로 취급받았다면, 문제는 왜 경계선이 써(Sir) 만과 다른 만(creek)들에서와 같이 란의 한가운데를 따라서 있지 않았는가 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경계선은 란의 중간을 따라 나지 않았다.
란 하부행정구역(란써브써큐트 Rann Sub-Circuit)에 해당되는 지역은 사실 맥도날드가 측량하였으나, 그것은 단순한 중첩된 작업이었고 신드의 경계 밖에서 이루어졌다. 풀란은 큰 강에 대한 규칙에 따르지 않고, 쿠취의 일부분으로써 측량했다.
파키스탄 자료 B.355와 관련해서, 인도는 파키스탄이 인용한 내용은 탁버스트 지도가 지침에 따른 측량 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측량자는 그것을 확인하였고 정확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기능의 한계가 아니었다. 그것이 단순한 정착지도였더라면,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맥도날드는 신드 전체를 조사하는 중이었다; 그것이 그의 임무였다. 혹자가 전체 지역을 측량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을에 대한 측량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타르 파르카르의 5,000평방마일을 측량하였다; 타르 파르카르에서 탁버스트 지도 문제는 없었다고 말하는 것인 불가능하다. 숲, 언덕, 버려진 땅 그리고 그 이외 모든 것을 측량했다. 그런 사실 속에서 마을과 마을이 아닌 것 또는 마을의 바깥에 방치된 것들과 구분하는 선을 그으려하는 것은 지금 너무 늦었다. 측량은 신드 전체에 걸쳐 있었지 마을들만 한 것이 아니었다. 길, 거주, 비거주, 황무지, 버려진 땅, 언덕, 방치된 땅 등의 속성이 무엇이든지 간에, 신드 전체에 걸쳐 사실상 측량조사가 이루어졌다.
인도지도 BBB-7, BBB-8, BBB-9 및 BBB-9A 등이 모두 “마호메드 칸의 (Mahomed Kahn’s) 탄다(Tanda) 구역”라는 표제를 달고 해당 영토와 다루고 있다는 파키스탄의 주장에 대하여 인도는 경계선은 표식에 의해 명료하게 획정되고 만약 모든 지도 면이 함께 정비된다면 그것은 그 지도면 내에 무엇이 있건 간에 그것은 마호메드 칸의 탄다 구역이 아닌 것으로 판명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맥도날드가 세지역접합점(trijunction)에서 쿠취 영토로 진입하고 있는 중이었다는 답사기록지 속에 분명히 적혀있다. 1867-68 맥도날드 보고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란 하부행정지역을 바딘(Badin) 남쪽에 있는 것으로 그렸는데, 이것은 측량된 란은 바딘의 한 부분으로 조사되지 않았다 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도는 맥도날드 지도가 오메르코트(Omerkot) 구역을 보여준다는 것을 지적하고, 라자스탄(Rajasthan) 영역 내에 있는 것으로 승인되고 있는 오메르코트 부근 지역은 신드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지도는 이성적으로 숙지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 표제만 보고 그 지도의 경계선 내 모든 것은 그 지역 내에 있지 다른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파키스탄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드 내 측량은 제한된 목적을 가졌다. 의도한 바는 세수목적을 위한 대강의 측량조사였다. 그러므로, 맥도날드 지도 속에서 보이는 경계선은 마을 경계, 좀 더 정확하게 본다면, 마을에서 세금 징수가 가능한 정착된(사람들이 정주하고 있는) 혹은 경작된 부분의 경계선이다. 맥도날드는 결코 신드 내 아미르 또는 영국세력의 관할권의 범주를 조사하라고 요청받은 바 없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란서브써큐트를 측량할 때 국외지역(쿠취Kutch)에 진입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맥도날드는 자신의 보고서 1869-70 속에서 코리 샛강 남쪽을 외국 영토라고 지칭하였다. 그는 이런 용어를 다른 어느 곳에서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샤 분더 구역, 코리 샛강에 의해 분할된, 신드와 쿠취 간 경계선이 인접한 것으로 승인된 지역에 접근하면서, 불가피하게 중첩된 부분 (인도자료 A-84)를 살펴보는 목적으로 그 라오 영토에 들어가는 승인을 요청하였다. 결과적으로, 란은 완전히 “쿠취의 룬(Runn of Cutch)”라고 표시되어 있는 반면에, 맥도날드 지도 속에 “쿠취(Cutch)”라는 단어는 단지 라크푸트 지역 내에 나타난다. 더군다나, 맥도날드 지도의 라인은 여타 유사한 신드 구역들 간 경계와 마찬가지로, 비록 그런 리본이 만일 란이 쿠취에게 속한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의 전체 둘레 길이를 따라서 그런 리본으로 되어있는 것이 적절했을지 모르긴 해도, 단지 샤 분더 구역과 마호메드 칸의 탄다의 란서브써큐트 구역 간에만 이중으로 칠해진 밴드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또한 맥도날드의 상이한 지도에서 사용한 경계선 표식들의 의미를 검증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측면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의도는 인도지도 B.3 및 BB-3 속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데, 그 안에서 란의 타르파르카르 경계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그리고 코리 샛강을 따라서 발견되는 경계선 표식은 전혀 없다. 그렇지만, 인도측량국은, 권한 없이, 후일 지도 내에서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지방 경계로 드러날 때까지 그 선 위에 더 높은 지위를 부여하였다.
파키스탄은 계속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도지도 B-3 속에서는, 란서브써큐트가 정확하게 신드 측량 구역으로 표시된다. 파키스탄은 그 값비싼 4인치 측량조사와 환형지역 남쪽이 겹쳐졌다(중첩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이 같은 “중첩”을 다시 만들어내는 지도는, 그들은 쿠취 영역을 커버한다(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일체의 암시적 언급을 하지 않는다. 비록, 예를 들자면, 인도지도 BBB-7, BBB-8, BBB-9, BBB-9a (-TB 12) 등 전부가 인도 측 주장에 따르면 쿠취의 것이었을런지도 모르는 영역을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모두 표제를 신드 내 한 오래된 구역 이름인 “마호메드 칸의 탄다 구역”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이 지역에 그은 맥도날드의 수직선은 란과 육지 (또는 마호메드 칸의 탄다 구역과 샤 분더 구역을) 인위적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두 환형지대를 따라 있는 세지역접속지점으로부터 난 경계선은 이런 한계 밖에 있는 비경작지와 정착된 마을(deh)을 구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맥도날드는, 만약 그것들은 란의 권력으로부터 구분되는 지역이라고 적절하게 정보를 제공받았다고 한다면, 란서브써큐트(란 하부행정지역)와 마찬가지로, 다리 반니(Dhara Banni)와 취하드 베트(Chhad Bet)를 측량했을런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맥도날드 라인은 그 배후 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잘 알려진 신드 도시(town) 라힘 키 바자르(Rahim ki Bazar)을 가로지른다는 사실은 인지할만한 값어치가 있다. 만약 그 경계선 표식과 그 색깔 리본이 인도가 제안하는 것으로 의미한다면, 라힘 키 바자르는 쿠취에게 속할 것이고 이것은 어느 누구도 여태까지 주장한 바가 없었다.
파키스탄은 맥도날드가 만든 인도지도 BBB-1 및 파키스탄 지도 57은 환형지대(loop)의 밑에 있는 신드의 아미르의 하나의 타나를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만약 그 둥근고리형태(loop)가 신드-쿠취 경계라면 신드의 아미르는 쿠취 안쪽으로 카나를 가졌던 것이 될 것이다. 파키스탄은 그 원형태는 신드의 경계선으로 표시될 수 없었다는 의견이다.
파키스탄은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루카스 집정관이 그 수직선은 1837년 이래로 정치적 경계선으로 인정되어 왔다고 말한 것은 전적으로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없고, 따라서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수직선은 1871년 이전에 제작된 어떤 지도 속에서도 보이지 않으며, 따라서 “역사적인(역사적으로 의미 있게 중요한)” 성격까지 인정할 수는 없다. 신드 전체가 측량된 바가 있었다고 언급하는 보고서들은 신드의 부분들 일체가 측량될 예정이라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고 보기 어렵다. 맥도날드 라인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신드와 쿠취 간 경계선이 분명 아니다. 이것은 신드 행정부에서 늘 그렇게 이해해 왔던 것이고, 1875년 정도 이전 시기에 신드의 집정관은 봄베이 정부에게 쿠취의 정치고문은 타르 파르카르의 정치감독관을 만나서 타르 파르카르와 쿠취 간 “룬(Runn)에 관하여” 정확한 경계선을 정할 것을 요청받기를 (파키스탄 자료 B.7, 및 이 글 제8장, 1) 권고하였다는 사실로 명확히 증명된다. 더 나아가서, 한때 맥도날드 측량작업에 몸을 담기도 했던 신드의 이후 집정관이었던 에어스킨(Erskine)이 당시 “카티와르와 쿠취 측량 조사”를 책임지고 있는 풀란에게 보낸 1844년 11월 21일 편지 속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파키스탄은, 맥도날드 측량 절차에 따르면, 정착 당국은 먼저 칼호라스 (1783년 이전) 왕조 때에 존재했던 대로 있는 마을(dehs)의 경계선을 마을 사람들의 회상에 근거해서 다시 만들어야 했다고 한 여러 영국 관리들 (예를 들자면, 프레레, 전게서, 10-13면.)의 언급에 의존한다. 파키스탄에 따르면, 이런 절차가 불가피하게 암시하는 바는 다음과 같았다:
(a) 인구가 밀집한 마을들만 재건립할 것이다. 따라서 버려진 마을들 (예를 들어 환형지역(loop) 밑에 것들)은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이다;
(b) 란과 근접해 있는 마지막 마을(deh)의 외부 한계 밖에 남겨진 지역들은 그럼에 따라 자동적으로 란 안으로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c) 재건립되는 마지막 마을 바깥 한계는 당해 지역의 바깥 쪽 주변지역으로 드러날 것이다.
파키스탄은 란 그 자체는 육지가 아니라고 보았고, 경작과 세수 목적으로는 비생산적인 것으로 그곳에서 정착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또한 주장한다. 맥도날드는 단지 정착 당국이 정해준 지역만을 측량했기 때문에 따라서 란을 측량하지는 않았다. 이런 맥락으로, 파키스탄은 또한 현대적 측량규칙 (1848년의 파키스탄 자료 353/인디아)에 역시 의존하는데, 여기서 구역 간 경계를 어떤 강이 이루고 있는 경우에는 마지막으로 그 강에 접근했던 이가 측량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맥도날드는 란을 측량하지 않았고, 10년 후에 란의 반대편 쪽을 측량하였던 풀란(Pullan)은 그 작업의 한 부분으로 그것을 측량하였다.
인도는, 만일 이 규칙이 란에 적용되고 란이 강으로 취급받았다면, 문제는 왜 경계선이 써(Sir) 만과 다른 만(creek)들에서와 같이 란의 한가운데를 따라서 있지 않았는가 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경계선은 란의 중간을 따라 나지 않았다.
란 하부행정구역(란써브써큐트 Rann Sub-Circuit)에 해당되는 지역은 사실 맥도날드가 측량하였으나, 그것은 단순한 중첩된 작업이었고 신드의 경계 밖에서 이루어졌다. 풀란은 큰 강에 대한 규칙에 따르지 않고, 쿠취의 일부분으로써 측량했다.
파키스탄 자료 B.355와 관련해서, 인도는 파키스탄이 인용한 내용은 탁버스트 지도가 지침에 따른 측량 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측량자는 그것을 확인하였고 정확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기능의 한계가 아니었다. 그것이 단순한 정착지도였더라면,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맥도날드는 신드 전체를 조사하는 중이었다; 그것이 그의 임무였다. 혹자가 전체 지역을 측량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을에 대한 측량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타르 파르카르의 5,000평방마일을 측량하였다; 타르 파르카르에서 탁버스트 지도 문제는 없었다고 말하는 것인 불가능하다. 숲, 언덕, 버려진 땅 그리고 그 이외 모든 것을 측량했다. 그런 사실 속에서 마을과 마을이 아닌 것 또는 마을의 바깥에 방치된 것들과 구분하는 선을 그으려하는 것은 지금 너무 늦었다. 측량은 신드 전체에 걸쳐 있었지 마을들만 한 것이 아니었다. 길, 거주, 비거주, 황무지, 버려진 땅, 언덕, 방치된 땅 등의 속성이 무엇이든지 간에, 신드 전체에 걸쳐 사실상 측량조사가 이루어졌다.
인도지도 BBB-7, BBB-8, BBB-9 및 BBB-9A 등이 모두 “마호메드 칸의 (Mahomed Kahn’s) 탄다(Tanda) 구역”라는 표제를 달고 해당 영토와 다루고 있다는 파키스탄의 주장에 대하여 인도는 경계선은 표식에 의해 명료하게 획정되고 만약 모든 지도 면이 함께 정비된다면 그것은 그 지도면 내에 무엇이 있건 간에 그것은 마호메드 칸의 탄다 구역이 아닌 것으로 판명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맥도날드가 세지역접합점(trijunction)에서 쿠취 영토로 진입하고 있는 중이었다는 답사기록지 속에 분명히 적혀있다. 1867-68 맥도날드 보고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란 하부행정지역을 바딘(Badin) 남쪽에 있는 것으로 그렸는데, 이것은 측량된 란은 바딘의 한 부분으로 조사되지 않았다 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도는 맥도날드 지도가 오메르코트(Omerkot) 구역을 보여준다는 것을 지적하고, 라자스탄(Rajasthan) 영역 내에 있는 것으로 승인되고 있는 오메르코트 부근 지역은 신드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지도는 이성적으로 숙지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 표제만 보고 그 지도의 경계선 내 모든 것은 그 지역 내에 있지 다른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파키스탄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드 내 측량은 제한된 목적을 가졌다. 의도한 바는 세수목적을 위한 대강의 측량조사였다. 그러므로, 맥도날드 지도 속에서 보이는 경계선은 마을 경계, 좀 더 정확하게 본다면, 마을에서 세금 징수가 가능한 정착된(사람들이 정주하고 있는) 혹은 경작된 부분의 경계선이다. 맥도날드는 결코 신드 내 아미르 또는 영국세력의 관할권의 범주를 조사하라고 요청받은 바 없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란서브써큐트를 측량할 때 국외지역(쿠취Kutch)에 진입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맥도날드는 자신의 보고서 1869-70 속에서 코리 샛강 남쪽을 외국 영토라고 지칭하였다. 그는 이런 용어를 다른 어느 곳에서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샤 분더 구역, 코리 샛강에 의해 분할된, 신드와 쿠취 간 경계선이 인접한 것으로 승인된 지역에 접근하면서, 불가피하게 중첩된 부분 (인도자료 A-84)를 살펴보는 목적으로 그 라오 영토에 들어가는 승인을 요청하였다. 결과적으로, 란은 완전히 “쿠취의 룬(Runn of Cutch)”라고 표시되어 있는 반면에, 맥도날드 지도 속에 “쿠취(Cutch)”라는 단어는 단지 라크푸트 지역 내에 나타난다. 더군다나, 맥도날드 지도의 라인은 여타 유사한 신드 구역들 간 경계와 마찬가지로, 비록 그런 리본이 만일 란이 쿠취에게 속한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의 전체 둘레 길이를 따라서 그런 리본으로 되어있는 것이 적절했을지 모르긴 해도, 단지 샤 분더 구역과 마호메드 칸의 탄다의 란서브써큐트 구역 간에만 이중으로 칠해진 밴드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또한 맥도날드의 상이한 지도에서 사용한 경계선 표식들의 의미를 검증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측면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의도는 인도지도 B.3 및 BB-3 속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데, 그 안에서 란의 타르파르카르 경계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그리고 코리 샛강을 따라서 발견되는 경계선 표식은 전혀 없다. 그렇지만, 인도측량국은, 권한 없이, 후일 지도 내에서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지방 경계로 드러날 때까지 그 선 위에 더 높은 지위를 부여하였다.
파키스탄은 계속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도지도 B-3 속에서는, 란서브써큐트가 정확하게 신드 측량 구역으로 표시된다. 파키스탄은 그 값비싼 4인치 측량조사와 환형지역 남쪽이 겹쳐졌다(중첩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이 같은 “중첩”을 다시 만들어내는 지도는, 그들은 쿠취 영역을 커버한다(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일체의 암시적 언급을 하지 않는다. 비록, 예를 들자면, 인도지도 BBB-7, BBB-8, BBB-9, BBB-9a (-TB 12) 등 전부가 인도 측 주장에 따르면 쿠취의 것이었을런지도 모르는 영역을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모두 표제를 신드 내 한 오래된 구역 이름인 “마호메드 칸의 탄다 구역”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이 지역에 그은 맥도날드의 수직선은 란과 육지 (또는 마호메드 칸의 탄다 구역과 샤 분더 구역을) 인위적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두 환형지대를 따라 있는 세지역접속지점으로부터 난 경계선은 이런 한계 밖에 있는 비경작지와 정착된 마을(deh)을 구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맥도날드는, 만약 그것들은 란의 권력으로부터 구분되는 지역이라고 적절하게 정보를 제공받았다고 한다면, 란서브써큐트(란 하부행정지역)와 마찬가지로, 다리 반니(Dhara Banni)와 취하드 베트(Chhad Bet)를 측량했을런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맥도날드 라인은 그 배후 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잘 알려진 신드 도시(town) 라힘 키 바자르(Rahim ki Bazar)을 가로지른다는 사실은 인지할만한 값어치가 있다. 만약 그 경계선 표식과 그 색깔 리본이 인도가 제안하는 것으로 의미한다면, 라힘 키 바자르는 쿠취에게 속할 것이고 이것은 어느 누구도 여태까지 주장한 바가 없었다.
파키스탄은 맥도날드가 만든 인도지도 BBB-1 및 파키스탄 지도 57은 환형지대(loop)의 밑에 있는 신드의 아미르의 하나의 타나를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만약 그 둥근고리형태(loop)가 신드-쿠취 경계라면 신드의 아미르는 쿠취 안쪽으로 카나를 가졌던 것이 될 것이다. 파키스탄은 그 원형태는 신드의 경계선으로 표시될 수 없었다는 의견이다.
파키스탄은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루카스 집정관이 그 수직선은 1837년 이래로 정치적 경계선으로 인정되어 왔다고 말한 것은 전적으로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없고, 따라서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수직선은 1871년 이전에 제작된 어떤 지도 속에서도 보이지 않으며, 따라서 “역사적인(역사적으로 의미 있게 중요한)” 성격까지 인정할 수는 없다. 신드 전체가 측량된 바가 있었다고 언급하는 보고서들은 신드의 부분들 일체가 측량될 예정이라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고 보기 어렵다. 맥도날드 라인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신드와 쿠취 간 경계선이 분명 아니다. 이것은 신드 행정부에서 늘 그렇게 이해해 왔던 것이고, 1875년 정도 이전 시기에 신드의 집정관은 봄베이 정부에게 쿠취의 정치고문은 타르 파르카르의 정치감독관을 만나서 타르 파르카르와 쿠취 간 “룬(Runn)에 관하여” 정확한 경계선을 정할 것을 요청받기를 (파키스탄 자료 B.7, 및 이 글 제8장, 1) 권고하였다는 사실로 명확히 증명된다. 더 나아가서, 한때 맥도날드 측량작업에 몸을 담기도 했던 신드의 이후 집정관이었던 에어스킨(Erskine)이 당시 “카티와르와 쿠취 측량 조사”를 책임지고 있는 풀란에게 보낸 1844년 11월 21일 편지 속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귀하가 작년에 본인에게 귀하가 신드와 쿠취(Cutch) 간 경계선 측량에 귀하의 부하들 중 한 사람에게 위임하였다고 알려주었던 것처럼 – 본인은 지역 관리들에게 본인이 확인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는 실제로 한 번도 측량된 바 없었던 그 경계선에 관한 정보를 요구했다. 본인은 본인이 생각했던 대로, 통상 삼각작도측량 지도라고 불리는 그 지도는 신드 지방 쿠취의 룬(Runn of Cutch of the Province of Sind)을 향하고 있는 한계선을 보여주지 않았고 단지 이것들 넘어 모래 등과 같은 완전히 버려진 그리고 비정착 지역(stretch 넓게 펼쳐진 지면) - 물이나 경작행위가 없는 지역 - 에 있는 데(deh) 또는 마을 영역(땅)의 한계를 보여줄 뿐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렇지만 이른바 룬(Runn)이라는 실제적 경계선은 경계선으로는 표시되어 있으나 쿠취의 어느 부분도 란의 북쪽 편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념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 될 것이다. 본인은 이 같은 사실을 단지 문제들의 실제 상태 – 의심할 여지없이 그런 문제들은 이미 귀하에게 잘 알려진 바 있습니다 - 에 관하여 일체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언급한다.” (파티스탄 자료 B. 376; “삼각작도측량지도”는 인도의 일련지도 B-2에 해당된다고 합의된 바 있었다.)
파키스탄은, 비록 뒤에 가서 수정되었긴 했어도, 란은 그 자체로써 경계를 이룬다는 에어스틴의 생각은, 나라 벳츠를 란 안에 어떤 둘러쌓인 곳에 속한다는 맥도날드의 첫 번째 측량에 의해 보강된다고 첨언한다. (인도지도 B-2 일련지도 96쪽; 그리고 인도 변론서, 124문).
파키스탄은, 맥도날드 지도의 의미는 신드 지역 내에서는 분명하게 유지되었으나, 그것들은 하나의 혼란의 요소 – 란의 북쪽 가장자리를 따라 있는 경계선 표식 – 를 만들어 냈고, 그것들은 곧 측량국 부서가 오해하였거나 잘못 해석하였다고 결론짓는다.
긴 토의 끝에, 당사자들은 맥도날드 측량지도은 세수와 지형조사를 통합한 것이었다는데 합의한다; 인도는 그렇지만, 그것은 1864년 3월 31일자 인도국무장관으로부터의 외교문서를 특별히 의거한 지형적 조사측량이라는 성격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인도자표 TA43)는 점을 부가해서 말한다. 다음 계속되는 사실 또한 합의하였다: 지도제작을 위한 최초 작업은 “정착관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지역 조사를 수행하였고, 그 다음에 마을 사람들에게 경계선 표식, 타크스 (통상적으로 진흙 기둥)를 세울 것을 요구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그들 마을 둘레에 타크스(thaks) 모두를 설치하자마자, 그들은 “탁버스트”하였다; 정착관리들은 그 다음에 당해 마을을 종이 위해 “탁버스트(thakbust)”지도를 만들었다 (1861년 신드 상부지역에 대한 한 샘플이 인도지도 TB-18B에 있다); 이 같은 타크버스트 지도에 바탕을 두고 전문 측량가들이 실제로 측량을 하였고 마을 지도(deh plans)를 작성하였다, 통상 4인치 대 1 마일 축척으로 (“집촌지도”이 인도지도 BBB1-9 및 인도지도 TB-12에서 볼수 있다; 그렇지만 당사자들 누구도 맥도날드가 이들 지도 속에서 사용하였던 전통적 표식에 대해 언급하지 못했다). 또한 탁버스트 표주들은 카라치와 히데라바드 세수구역 (즉, 수직선과 두 동그라미를 따라서 있는)과 관련된 지역 내에 세워졌지만, 타르 파르카르 감독지역 안은 아니었는데, 이 지역은 맥도날드의 라인이 대략 어떤 흔적 또는 란의 북쪽 가장자리 끝을 따라 나 있었다는 것이 상식적 논거이다.
측량가들의 최종 조사결과물에 맥도날드가 서명해야 했고 그에 따라 “일체의 변경이나 부가사항이 없이” 인쇄된 “표준지도”들은, 그것을 보는 관점이 상이하다. 파키스탄은 비록 그것들이 인쇄판이라 해도, 인도지도 TB-18 및 TB-18A 속에 있는 “표준지도들”은 승인받지 않은 변경사항을 담고 있는 인도 B-2 일련지도로 보고 있다. 인도는 진정한 표준지도라는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의견이다; 인도지도 TB-18 및 TB-18A 는 이것들을 위한 단순한 준비작업이었다. 파키스탄은, 비록 그것이 칼카타 소재 측량국총책임자의 관청(사무실)에서 인쇄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드의 징수관들이 사용하기 위해서라 할지라도, 아무런 경계선을 담고 있지 않은 파키스탄 지도 66-68과 파키스탄 지도 70-71 역시 표준지도라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 위해서 언급된 바와 같이, 인도는 이런 지도들을, 그것들이 징수관들에게 갈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반박하지 않으면서, 단순한 예비적 지도로 취급한다.
인도는 결론 내린다: 1866-67 맥도날드 보고서는 진흙 표주로 돌 표식이 바뀌는 것은 그 경계선이 영구적 성격을 부여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맥도날드가 남부 지역에 당도했을 때에 그곳에서는 이미 모하메드 캉의 탄다의 바딘 탈루카 지역 내에 두 고리형태의 경계를 획정하는 기존의 진흙 표주가 있었다; 그럼에 따라서 두 동그라미에는 지면에 물리적 획정이 존재하였고, 그 수직선이, 서쪽 경계선으로, 당해 측량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던 당시에 표주에 의거해 정해진 바 있었다. 타르 파르카르 경계선에 관한 한, 표주는 없었으나 지상 경계획정이라는 측면에서 표주의 기능을 했던 자연적 형상은 존재하였다. 이런 관련성 속에서, 인도는 프레레(Frere)가 정한 신드 내 대략측량과 정착을 위한 규칙 28에 유념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많은 경우에, 영구적 경계선은 불필요할 것이다: 강, 혹은 수로 또는 탱크, 돌 또는 모래로 된 언덕, 길 등은 자주 원하던 바대로 훌륭한 경계를 만들어준다.” 1867-68 보고서는, 맥도날드는 석주(돌기둥)으로 영구적으로 표시된 세지역접합지점 마을을 가로질러 왔고, 그것들을 경위도(경도위도)상 기준점(station)으로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869-70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긴 토의 끝에, 당사자들은 맥도날드 측량지도은 세수와 지형조사를 통합한 것이었다는데 합의한다; 인도는 그렇지만, 그것은 1864년 3월 31일자 인도국무장관으로부터의 외교문서를 특별히 의거한 지형적 조사측량이라는 성격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인도자표 TA43)는 점을 부가해서 말한다. 다음 계속되는 사실 또한 합의하였다: 지도제작을 위한 최초 작업은 “정착관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지역 조사를 수행하였고, 그 다음에 마을 사람들에게 경계선 표식, 타크스 (통상적으로 진흙 기둥)를 세울 것을 요구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그들 마을 둘레에 타크스(thaks) 모두를 설치하자마자, 그들은 “탁버스트”하였다; 정착관리들은 그 다음에 당해 마을을 종이 위해 “탁버스트(thakbust)”지도를 만들었다 (1861년 신드 상부지역에 대한 한 샘플이 인도지도 TB-18B에 있다); 이 같은 타크버스트 지도에 바탕을 두고 전문 측량가들이 실제로 측량을 하였고 마을 지도(deh plans)를 작성하였다, 통상 4인치 대 1 마일 축척으로 (“집촌지도”이 인도지도 BBB1-9 및 인도지도 TB-12에서 볼수 있다; 그렇지만 당사자들 누구도 맥도날드가 이들 지도 속에서 사용하였던 전통적 표식에 대해 언급하지 못했다). 또한 탁버스트 표주들은 카라치와 히데라바드 세수구역 (즉, 수직선과 두 동그라미를 따라서 있는)과 관련된 지역 내에 세워졌지만, 타르 파르카르 감독지역 안은 아니었는데, 이 지역은 맥도날드의 라인이 대략 어떤 흔적 또는 란의 북쪽 가장자리 끝을 따라 나 있었다는 것이 상식적 논거이다.
측량가들의 최종 조사결과물에 맥도날드가 서명해야 했고 그에 따라 “일체의 변경이나 부가사항이 없이” 인쇄된 “표준지도”들은, 그것을 보는 관점이 상이하다. 파키스탄은 비록 그것들이 인쇄판이라 해도, 인도지도 TB-18 및 TB-18A 속에 있는 “표준지도들”은 승인받지 않은 변경사항을 담고 있는 인도 B-2 일련지도로 보고 있다. 인도는 진정한 표준지도라는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의견이다; 인도지도 TB-18 및 TB-18A 는 이것들을 위한 단순한 준비작업이었다. 파키스탄은, 비록 그것이 칼카타 소재 측량국총책임자의 관청(사무실)에서 인쇄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드의 징수관들이 사용하기 위해서라 할지라도, 아무런 경계선을 담고 있지 않은 파키스탄 지도 66-68과 파키스탄 지도 70-71 역시 표준지도라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 위해서 언급된 바와 같이, 인도는 이런 지도들을, 그것들이 징수관들에게 갈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반박하지 않으면서, 단순한 예비적 지도로 취급한다.
인도는 결론 내린다: 1866-67 맥도날드 보고서는 진흙 표주로 돌 표식이 바뀌는 것은 그 경계선이 영구적 성격을 부여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맥도날드가 남부 지역에 당도했을 때에 그곳에서는 이미 모하메드 캉의 탄다의 바딘 탈루카 지역 내에 두 고리형태의 경계를 획정하는 기존의 진흙 표주가 있었다; 그럼에 따라서 두 동그라미에는 지면에 물리적 획정이 존재하였고, 그 수직선이, 서쪽 경계선으로, 당해 측량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던 당시에 표주에 의거해 정해진 바 있었다. 타르 파르카르 경계선에 관한 한, 표주는 없었으나 지상 경계획정이라는 측면에서 표주의 기능을 했던 자연적 형상은 존재하였다. 이런 관련성 속에서, 인도는 프레레(Frere)가 정한 신드 내 대략측량과 정착을 위한 규칙 28에 유념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많은 경우에, 영구적 경계선은 불필요할 것이다: 강, 혹은 수로 또는 탱크, 돌 또는 모래로 된 언덕, 길 등은 자주 원하던 바대로 훌륭한 경계를 만들어준다.” 1867-68 보고서는, 맥도날드는 석주(돌기둥)으로 영구적으로 표시된 세지역접합지점 마을을 가로질러 왔고, 그것들을 경위도(경도위도)상 기준점(station)으로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869-70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측량 시, 평면 위에 그려진 탁버스트 지도와 잘 부합되는 경계선을 파악(흔적을 찾는 일 trace)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모든 경계 표주들이 돌이었으므로 본인은 그것을 경위도선의 근거로 활용하였고 그리하여 우리의 여정 중에 있었던 기준점 일체는 지면 위에 석주로 영구히 표시된다.”
그에 따라, 인도는, 전체 또는 거의 전체에 걸친, 신드와 쿠취 간 인접하는 경계선은 – 수직선과 표주들과 함께 한 두 개의 동그라미 형태, 그리고 란의 가장자리와 도로로 난 타르 파르카르 경계선 – 획정되었다고 말한다.
인도는 만약 다라 반니, 샤하드 벳 그리고 비슷한 지역들 가운데 어떠한 벳츠라도 신드에게 진정코 속했었더라면, 그들은 신드의 영토 속에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인도는 맥도날드 측량과 관련하여 다음 6 가지 의견을 개진한다:
(a)맥도날드 측량지도 이전에는 신드에 관한 정확하고 신뢰할만한 지도가 없었다; 최고 통치자(당국)는 훌륭한 지도의 부재로 인하여 그들은 불리한 입지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b) 맥도날드 측량은 지형학적 및 세수적 차원에서 수행되었고, 마지막 4 년간은, 지형적 측량이 우세하였다. 신드 지방에 대한 지형적 측량이 있으면서, 신드와 그의 주요지역, 구역 그리고 마을들의 정치적 경계선들을 그려야 했다; 신드의 지형지도는 이런 정치적 경계선들이 그려지지 않았다면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혼동”은 오로지 마을 경계 또는 푸르가나 경계선들과 같이, 신드의 안 쪽 지역과 관련해서 있었지만, 신드의 정치적 경계선과 관련해서는 없었다.
(c) 인도의 B-2 및 BBB 등 일련(연속)지도 내에서 지도상 보여주는 경계선들은 몇몇 승인받지 않은 이들에 의해 포함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맥도날드가 그려넣은 것이었다. 부서의 방침은 그것들은 책임자가 기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d) 신드 경계선은 (i) 최고로 주의 깊게 조사한 이후에, (ii) 신드 당국 자체가 승인하고 제시한 바 대로, (iii) 출판 이후에는 국무장관으로부터 신드의 징수관에 걸쳐 모든 관리들이 승인하였고 그 경계선을 담은 지도들이 그들에게 송부되었으며, 그리고 (iv) 그 이후에 최고위 당국의 지도 속에 약간의 변화와 함께 재제작 되었고, 1914년 이후에는 개정되었다.
(e) 신드 주(지방) 전체가 당해 지역을 이루고 있는 어떤 영역도 남김없이 측량되었다.
(f) 파키스탄이 지금 주장하고 있는 란의 어느 부분도 측량은 신드의 부분이라고 보여주지 않는다; 란써브써큐트(란 내 부수적 행정지역)는 신드 경계선에 밖에 있는 것으로 명료하게 보여준다.
인도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자잘한 변화와는 별개로, 맥도날드 라인은 시간적 시험에서 살아남았고 그것은 뒤에 두 구역에 대한 검증을 통과하였으며, 이들 두 개를 거치고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첫 번째 검증은 서쪽 지역에 대한 에어스킨(에어스카인)이 하였고, 중간 부분은 풀란이 그리고 동쪽은 오스마스톤이 담당하였다; 그들은 맥도날드 라인에 몇 개의 가한 채 재확인 하였다. 두 번째 검증은 신드 당국이 준비한 신드의 탈루카(taluka 세수목적으로 몇 개씩 조직된 마을들 단위) 지도 형식 내에서 진행되었다. 그들은 또 다시 맥도날드가 보여준 경계선들을 재차 확인하였다. 탈루카 지도들은 인디아 정부가 한 측량지도의 기계적 반복이 아니었으나, 지역적 당국은 필요한 경우에는 당해 경계선을 고친다는 견지에서 그들의 생각을 그것에 적용하였다(실체화 내지는 투영 하였다).
100년에 걸친 역사적 증거 일체는 – 신드의 경계과와 쿠취의 인접하는 경계선에 대한 승인, 인지 등은 파키스탄의 생각 즉 신드의 몇 부분들은 측량 바깥에 남겨져 있었다는 생각과 반대로 제시된다; 그것은 이 중재재판 절차 속에서 처음으로 개진된 의견이다.
파키스탄은, 그 이후에 즉각 델리 측량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맥도날드가, 인도가 언급한 것처럼, 이들 인도지도 TB-18 및 TB-18A 등을 “윤이 나게 했을(윤색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다. 파키스탄에 따르면, 맥도날드에 대한 그 같은 기본적 주장(논거)는 그럼에 따라 입증되는데, 즉 바꿔 말하면 인도지도 B-2 일련지도 내에 있는 인쇄된 지도들은 맥도날드 자신의 작업 속에 승인받지 않은 변경을 담고 있었다는 점이다. 파키스탄은 맥도날드가 서명한 최초의 지도 종이 (표준지도)는 인도지도 B-3에 해당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한 관심이 맥도날드 측량지도에서 나온 답사일지(Field Books)에 표명되었다. 단지 란 뿐만 아니라 쿠취 공국이 맥도날드 라인까지 확장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인도는 모하메드 칸의 탄다 지역 답사일지 3 개를 보여주었는데, 그 책은, 그 수직선의 북쪽에 있는 세지역접합점(트라이정션)은 카라치, 히데라바드 그리고 라크파트Lakhpat (인도자료 TA75)간 교차지점 또는 “쿠취(Kutch)”가 자티 탈루카 (인도자료 TB 74)에 연결되었던 지점이었고, 그리고 두 환형고리 간 세지역접합점은 “쿠취의 부지Bhuj(까지) 란 탈렉Talek”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파키스탄은 이런 설명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었으나, 그것을 반박하기 위하여 샤분더 구역(Shahbunder District)의 답사기록지를 제출하였는데 여기서 그 지역 내 수직선 맨 꼭대기에 있는 트라이졍션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들은 다음과 같이 표시되어 있다: “마호메드 칸의 탄다 구역, 탈루카(talooka) 바딘, 주행정구역 37호 (Main Circuit No. 37), 데 다룬(Deh Darun), 샤분더 구역, 탈루카 자티 주행정구역 9호, 란부수행정지역(Rann Sub-Circuit), 쿠취의 란”; 여기에서 수직선은 남쪽으로 내려와서, 근거지(기준점station)T에 와서는 그 수직선 서쪽 편에, “써 간드호 주행정구역 13호 (Sir Gandho Main Circuit No. 13)” 그리고 “써 간드호 주행정구역 15호”라고 적시되었다; 그리고 그 수직선의 동쪽에 쿠취의 란으로 언급된다 (파키스탄 자료 B.388/인디아). 파키스탄은 맥도날드의 측량계산집 (파키스탄 자료 B.389/인디아)을 또한 증거로 제출하였는데, 거기서는 수직선의 동쪽 편으로 가로지르는 기준점 U로부터 세지역접점과 가로지르는 기준점 G와 T 사이에 “쿠취의 룬(Runn of Cutch)”이라고 적혀 있었다.
파키스탄은 말한다: 맥도날드는 그의 보고서 혹은 그 자신의 행위 속에서 그가 바딘 탈루카를 측량하는 동안에 쿠취 영역을 어떤 지점이 되었든지 지나갈 수 있었다는 인식을 저버리지 않는다. (파키스탄 자료 B.358/인디아 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이러한 진입 사실이 발견되는 부하의 답사기록지에 관해서, 그는 실제 답사관으로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어떤 자료, 지도 혹은 기타 기록물에서도 쿠취 탈루카 락파트(Kutch Taluka Lakhpat)를 세지역교차점을 향하여 북쪽으로 팽창하는 실체로 묘사한 적이 없었다. 맥도날드가 제작한 어떤 지도 속에서도 문제가 된 그 지역을 라크파트 또는 쿠취라고 표시한다. 그것은 변함없이 또는 란(Rann) 또는 란서브써큐트(Rann Sur-Circuit 란하부행정지역)이라고 표시된다. 1883-84 동안에, 탄다 지역 부징수관이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지역과 쿠취 공국 간 경계선이 어디인가를 파악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그것은 룬(Runn) 내에 어떤 곳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 넘어 어떠한 정보도 얻지 못했다.
인도는 답한다: 1867-68 맥도날드 보고서는 란서브써큐트를 바딘 지역의 남쪽에 그렸는데 이것은 란서브써큐트에 해당되는 영역은 바딘의 일부분으로 측량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계선이 인접하고 있는 까닭에, 맥도날드 지도는 신드와 쿠취 간 경계선을 보여준다. 심지어 답사일지 속에서 당해 지역에 진입한 것으로 기록된 로프티 씨가 일정한 오류를 범했다고 해도, 궁극적으로 측량팀을 책임지고 있는 관리는 그 정확성에 대한 책임이 있고 추정하건대 맥도날드가 모든 것을 검토하였고 정확한 것이라고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당해 징수관은 히데라바드 구역의 탄디 하부행정지역이 쿠취의 란과 경계를 했었고 그것은 바딘 탈루카였지 란에 접하고 있는 탄다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인도 B-2 지도세트(일련 혹은 시리즈 지도)를 알고 있었다.
아래 6.과 7.에서 보겠지만, 인도 B-2 시리즈지도 속에 있는 맥도날드 선(라인)은, 누구의 입장을 대변했는지는 몰라도, 1904-05년에 걸쳐 에어스킨이 다시 측량하였고 (아라비아 해부터 디플로(Diplo) 탈루카 서쪽 경계선에 있는 도로 프란(Dhoro Pran)까지) 1938-39년에 걸쳐 오스마스톤이 또 다시 하였다 (인도 B-2 일련지도의 94쪽 속에 있는 나히르 베로(Nahir Vero)의 남쪽에 한 지점으로부터 조드푸르 경계선까지). 맥도날드 라인의 나머지 부분에 관해서는, 그의 조정(정렬)이, 덜 구불구불하게, 인도지도 TB-26, 1872년 인도지도책(Atlas Map), 그리고 뒤에 가서 인도지도 B-44(파키스탄 결의안 지도와 유사함)에 포함된 인디아(인도)와 그에 인접하는 지역들에 대한 지도, 1928 (인도지도 B-16) 등등 속에서 되풀이 되었다. 라힘 키 바자르와 그 남쪽 지역은 그 선의 북쪽에 보였다. 이 경계선 조정은 1921년, 1936년 및 1943년의 각도지도(degree sheet) 속에 계속 보인다 (인도지도 B-18, B-30 및 B-37; 1945년의 모자이크 지도, 인도지도 B-40을 또한 참조하시오). 여전히 라힘 키 바자르의 남쪽에 상당한 영역이 단 하나의 지도, 인도지도 B-29, 1927년 신드의 측량및육지기록물 감독관이 준비한 디플로 탈루카의 지도, 그리고 1933년에 교정과 변경을 하고 다시 인쇄된 지도 속에서는 디플로 탈루카 내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34년 경계선 조정(정렬)의 가능하지만 불확실한 출처는 에어스킨의 인도지도 B-11 속에서 혹은 그의 총천연색판인 파키스탄 지도 115 안에서 찾을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것은, 1931년의 대축척지도 인도지도 B-26인데 (1947년에 다시 인쇄됨), 그 안에서 인도지도 B-11인 에어스킨의 지도가 맥도날드 개정지도 제 92쪽과 합쳐졌다. 이 새로운 지도 속에서 지방 또는 공국의 경계: “쿠취의 란(Rann of Kutch)”, “서인도 공국들”의 남쪽에 -‥- (dash-two dots-dash) 라고 표시된다.
이 섹션(5.)은 구술변론 동안 맥도날드 측량지도와 그의 산출물들이 반복되어 그리고 철처하게 토의되었다는 말과 함께 마치고자 한다.
인도는 만약 다라 반니, 샤하드 벳 그리고 비슷한 지역들 가운데 어떠한 벳츠라도 신드에게 진정코 속했었더라면, 그들은 신드의 영토 속에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인도는 맥도날드 측량과 관련하여 다음 6 가지 의견을 개진한다:
(a)맥도날드 측량지도 이전에는 신드에 관한 정확하고 신뢰할만한 지도가 없었다; 최고 통치자(당국)는 훌륭한 지도의 부재로 인하여 그들은 불리한 입지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b) 맥도날드 측량은 지형학적 및 세수적 차원에서 수행되었고, 마지막 4 년간은, 지형적 측량이 우세하였다. 신드 지방에 대한 지형적 측량이 있으면서, 신드와 그의 주요지역, 구역 그리고 마을들의 정치적 경계선들을 그려야 했다; 신드의 지형지도는 이런 정치적 경계선들이 그려지지 않았다면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혼동”은 오로지 마을 경계 또는 푸르가나 경계선들과 같이, 신드의 안 쪽 지역과 관련해서 있었지만, 신드의 정치적 경계선과 관련해서는 없었다.
(c) 인도의 B-2 및 BBB 등 일련(연속)지도 내에서 지도상 보여주는 경계선들은 몇몇 승인받지 않은 이들에 의해 포함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맥도날드가 그려넣은 것이었다. 부서의 방침은 그것들은 책임자가 기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d) 신드 경계선은 (i) 최고로 주의 깊게 조사한 이후에, (ii) 신드 당국 자체가 승인하고 제시한 바 대로, (iii) 출판 이후에는 국무장관으로부터 신드의 징수관에 걸쳐 모든 관리들이 승인하였고 그 경계선을 담은 지도들이 그들에게 송부되었으며, 그리고 (iv) 그 이후에 최고위 당국의 지도 속에 약간의 변화와 함께 재제작 되었고, 1914년 이후에는 개정되었다.
(e) 신드 주(지방) 전체가 당해 지역을 이루고 있는 어떤 영역도 남김없이 측량되었다.
(f) 파키스탄이 지금 주장하고 있는 란의 어느 부분도 측량은 신드의 부분이라고 보여주지 않는다; 란써브써큐트(란 내 부수적 행정지역)는 신드 경계선에 밖에 있는 것으로 명료하게 보여준다.
인도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자잘한 변화와는 별개로, 맥도날드 라인은 시간적 시험에서 살아남았고 그것은 뒤에 두 구역에 대한 검증을 통과하였으며, 이들 두 개를 거치고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첫 번째 검증은 서쪽 지역에 대한 에어스킨(에어스카인)이 하였고, 중간 부분은 풀란이 그리고 동쪽은 오스마스톤이 담당하였다; 그들은 맥도날드 라인에 몇 개의 가한 채 재확인 하였다. 두 번째 검증은 신드 당국이 준비한 신드의 탈루카(taluka 세수목적으로 몇 개씩 조직된 마을들 단위) 지도 형식 내에서 진행되었다. 그들은 또 다시 맥도날드가 보여준 경계선들을 재차 확인하였다. 탈루카 지도들은 인디아 정부가 한 측량지도의 기계적 반복이 아니었으나, 지역적 당국은 필요한 경우에는 당해 경계선을 고친다는 견지에서 그들의 생각을 그것에 적용하였다(실체화 내지는 투영 하였다).
100년에 걸친 역사적 증거 일체는 – 신드의 경계과와 쿠취의 인접하는 경계선에 대한 승인, 인지 등은 파키스탄의 생각 즉 신드의 몇 부분들은 측량 바깥에 남겨져 있었다는 생각과 반대로 제시된다; 그것은 이 중재재판 절차 속에서 처음으로 개진된 의견이다.
파키스탄은, 그 이후에 즉각 델리 측량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맥도날드가, 인도가 언급한 것처럼, 이들 인도지도 TB-18 및 TB-18A 등을 “윤이 나게 했을(윤색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다. 파키스탄에 따르면, 맥도날드에 대한 그 같은 기본적 주장(논거)는 그럼에 따라 입증되는데, 즉 바꿔 말하면 인도지도 B-2 일련지도 내에 있는 인쇄된 지도들은 맥도날드 자신의 작업 속에 승인받지 않은 변경을 담고 있었다는 점이다. 파키스탄은 맥도날드가 서명한 최초의 지도 종이 (표준지도)는 인도지도 B-3에 해당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한 관심이 맥도날드 측량지도에서 나온 답사일지(Field Books)에 표명되었다. 단지 란 뿐만 아니라 쿠취 공국이 맥도날드 라인까지 확장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인도는 모하메드 칸의 탄다 지역 답사일지 3 개를 보여주었는데, 그 책은, 그 수직선의 북쪽에 있는 세지역접합점(트라이정션)은 카라치, 히데라바드 그리고 라크파트Lakhpat (인도자료 TA75)간 교차지점 또는 “쿠취(Kutch)”가 자티 탈루카 (인도자료 TB 74)에 연결되었던 지점이었고, 그리고 두 환형고리 간 세지역접합점은 “쿠취의 부지Bhuj(까지) 란 탈렉Talek”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파키스탄은 이런 설명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었으나, 그것을 반박하기 위하여 샤분더 구역(Shahbunder District)의 답사기록지를 제출하였는데 여기서 그 지역 내 수직선 맨 꼭대기에 있는 트라이졍션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들은 다음과 같이 표시되어 있다: “마호메드 칸의 탄다 구역, 탈루카(talooka) 바딘, 주행정구역 37호 (Main Circuit No. 37), 데 다룬(Deh Darun), 샤분더 구역, 탈루카 자티 주행정구역 9호, 란부수행정지역(Rann Sub-Circuit), 쿠취의 란”; 여기에서 수직선은 남쪽으로 내려와서, 근거지(기준점station)T에 와서는 그 수직선 서쪽 편에, “써 간드호 주행정구역 13호 (Sir Gandho Main Circuit No. 13)” 그리고 “써 간드호 주행정구역 15호”라고 적시되었다; 그리고 그 수직선의 동쪽에 쿠취의 란으로 언급된다 (파키스탄 자료 B.388/인디아). 파키스탄은 맥도날드의 측량계산집 (파키스탄 자료 B.389/인디아)을 또한 증거로 제출하였는데, 거기서는 수직선의 동쪽 편으로 가로지르는 기준점 U로부터 세지역접점과 가로지르는 기준점 G와 T 사이에 “쿠취의 룬(Runn of Cutch)”이라고 적혀 있었다.
파키스탄은 말한다: 맥도날드는 그의 보고서 혹은 그 자신의 행위 속에서 그가 바딘 탈루카를 측량하는 동안에 쿠취 영역을 어떤 지점이 되었든지 지나갈 수 있었다는 인식을 저버리지 않는다. (파키스탄 자료 B.358/인디아 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이러한 진입 사실이 발견되는 부하의 답사기록지에 관해서, 그는 실제 답사관으로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어떤 자료, 지도 혹은 기타 기록물에서도 쿠취 탈루카 락파트(Kutch Taluka Lakhpat)를 세지역교차점을 향하여 북쪽으로 팽창하는 실체로 묘사한 적이 없었다. 맥도날드가 제작한 어떤 지도 속에서도 문제가 된 그 지역을 라크파트 또는 쿠취라고 표시한다. 그것은 변함없이 또는 란(Rann) 또는 란서브써큐트(Rann Sur-Circuit 란하부행정지역)이라고 표시된다. 1883-84 동안에, 탄다 지역 부징수관이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지역과 쿠취 공국 간 경계선이 어디인가를 파악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그것은 룬(Runn) 내에 어떤 곳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 넘어 어떠한 정보도 얻지 못했다.
인도는 답한다: 1867-68 맥도날드 보고서는 란서브써큐트를 바딘 지역의 남쪽에 그렸는데 이것은 란서브써큐트에 해당되는 영역은 바딘의 일부분으로 측량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계선이 인접하고 있는 까닭에, 맥도날드 지도는 신드와 쿠취 간 경계선을 보여준다. 심지어 답사일지 속에서 당해 지역에 진입한 것으로 기록된 로프티 씨가 일정한 오류를 범했다고 해도, 궁극적으로 측량팀을 책임지고 있는 관리는 그 정확성에 대한 책임이 있고 추정하건대 맥도날드가 모든 것을 검토하였고 정확한 것이라고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당해 징수관은 히데라바드 구역의 탄디 하부행정지역이 쿠취의 란과 경계를 했었고 그것은 바딘 탈루카였지 란에 접하고 있는 탄다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인도 B-2 지도세트(일련 혹은 시리즈 지도)를 알고 있었다.
아래 6.과 7.에서 보겠지만, 인도 B-2 시리즈지도 속에 있는 맥도날드 선(라인)은, 누구의 입장을 대변했는지는 몰라도, 1904-05년에 걸쳐 에어스킨이 다시 측량하였고 (아라비아 해부터 디플로(Diplo) 탈루카 서쪽 경계선에 있는 도로 프란(Dhoro Pran)까지) 1938-39년에 걸쳐 오스마스톤이 또 다시 하였다 (인도 B-2 일련지도의 94쪽 속에 있는 나히르 베로(Nahir Vero)의 남쪽에 한 지점으로부터 조드푸르 경계선까지). 맥도날드 라인의 나머지 부분에 관해서는, 그의 조정(정렬)이, 덜 구불구불하게, 인도지도 TB-26, 1872년 인도지도책(Atlas Map), 그리고 뒤에 가서 인도지도 B-44(파키스탄 결의안 지도와 유사함)에 포함된 인디아(인도)와 그에 인접하는 지역들에 대한 지도, 1928 (인도지도 B-16) 등등 속에서 되풀이 되었다. 라힘 키 바자르와 그 남쪽 지역은 그 선의 북쪽에 보였다. 이 경계선 조정은 1921년, 1936년 및 1943년의 각도지도(degree sheet) 속에 계속 보인다 (인도지도 B-18, B-30 및 B-37; 1945년의 모자이크 지도, 인도지도 B-40을 또한 참조하시오). 여전히 라힘 키 바자르의 남쪽에 상당한 영역이 단 하나의 지도, 인도지도 B-29, 1927년 신드의 측량및육지기록물 감독관이 준비한 디플로 탈루카의 지도, 그리고 1933년에 교정과 변경을 하고 다시 인쇄된 지도 속에서는 디플로 탈루카 내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34년 경계선 조정(정렬)의 가능하지만 불확실한 출처는 에어스킨의 인도지도 B-11 속에서 혹은 그의 총천연색판인 파키스탄 지도 115 안에서 찾을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것은, 1931년의 대축척지도 인도지도 B-26인데 (1947년에 다시 인쇄됨), 그 안에서 인도지도 B-11인 에어스킨의 지도가 맥도날드 개정지도 제 92쪽과 합쳐졌다. 이 새로운 지도 속에서 지방 또는 공국의 경계: “쿠취의 란(Rann of Kutch)”, “서인도 공국들”의 남쪽에 -‥- (dash-two dots-dash) 라고 표시된다.
이 섹션(5.)은 구술변론 동안 맥도날드 측량지도와 그의 산출물들이 반복되어 그리고 철처하게 토의되었다는 말과 함께 마치고자 한다.
색인어
-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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