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대군이 경사(京師)를 침범하였으나 대동 총병 함녕후 구란(仇鸞) 등이 모두 유약하여 감히 싸우지 못하였다는 설명
적의 대군이 경사를 침범하니, 대동 총병 함녕후(咸寧侯) 구란(仇鸞)
주 001
각주 001)

·순무 보정(保定)주 002 도어사(保定都御史) 양수겸(楊守謙)
주 003仇鸞(?~1552): 陝西 鎭原 사람으로, 字는 伯翔이다. 甘肅 總兵이 되었다가 軍務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總督 曾銑에게 탄핵되어 파직되었다. 후에 嚴嵩에게 의지하여, 太子太保로 重用되어 總兵官으로 大同을 鎭守하였다. 嘉靖 29년(1550)에 俺答이 南下하자 구란은 뇌물을 써서 동쪽 薊鎭으로 향하게 하고 미리 京師로 와서 勤王하여 世宗의 신임을 얻어 平虜大將軍이 되었다. 古北口에서 俺答軍과 싸우다 궤멸되고 몸만 빠져나왔는데 敵軍이 이미 퇴각하여 그에 대한 세종의 寵信이 깊어졌다. 三大營을 통솔하고 戎政府를 설립하여 京軍과 邊兵을 총독하였다. 馬市를 열 것을 적극 주장하여 후에 엄숭과 논쟁을 벌였는데, 가정 31년(1552) 파직되었다가 죽었다. 사후에 叛逆罪로 開棺戮屍되었다.
각주 003)

등이 각각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이르렀다.주 004 황제가 구란을 대장군에 임명하여 제군(諸軍)을 통솔하도록 했다. [그런데] 구란과 양수겸이 모두 유약하여 감히 싸우지 않고, 병부상서 정여기(丁汝夔)
주 005楊守謙(?~1550): 字는 允亨, 號는 次村으로, 徐州 사람이다. 嘉靖 8년(1529)에 進士가 되어 屯田主事가 되었다. 후에 右僉都御史로 발탁되어 山西巡撫를 지냈다. 偏頭, 老營堡 두 곳에 營田을 크게 개간하여 邊關의 穀價를 반으로 줄였다. 가정 29년(1550)에 副都御史가 되어 保定을 巡撫하고 紫刑關 등을 감독하였다. 俺答이 京師를 침입했을 때, 양수겸은 군대를 이끌고 崇文門 밖에서 군영을 두고 방어하였다. 世宗이 仇鸞을 大將軍, 양수겸을 兵部 右侍郞으로 삼아 함께 內外의 軍事를 처리하도록 하였다. 구란은 東直門에서 관망만 하고, 양수겸 혼자 엄답의 진영으로 갔으나 뒤따르는 자가 없어 감히 싸우지 못했다. 당시 諸軍이 兵部尙書 丁汝夔와 양수겸을 핑계로 화살 한발도 쏘지 않았다. 俺答이 물러간 뒤 양수겸은 軍機를 잃은 罪로 8월 26일 西市에서 斬首되었다. 隆慶 初에 兵部尙書에 追贈되었고, 諡號는 恪湣이다.
각주 005)

도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해 성문을 닫고 지키기만 하였다. 적이 3일 낮과 밤을 불태우고 약탈하고는 물러갔다. 황제가 정여기와 양수겸을 주살(誅殺)하였다.주 006 적이 백양구(白羊口)에서 나가려고 하자 구란이 뒤쫓았다. 적이 갑자기 동쪽으로 되돌아왔는데, 구란이 생각하지도 못하고 나가 군대는 궤멸되어 천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주 007 적은 이에 천천히 고북구를 통해 북방 변경으로 나갔다. 여러 장수들이 참살되어 버려진 시신을 거두었는데, [적의 머리] 80여 급(級)을 얻고서 승전을 보고하였다.주 008
丁汝夔(1497~1550): 字는 大章, 號는 淪源으로 古城鎭 管家莊 사람이다. 正德 16년(1521)에 進士가 되어 庶吉士에 선발되었다. 禮部主事, 山西 左布政使, 甘肅·保定·應天 巡撫, 湖廣 參政, 河南 巡撫 등을 역임하고 兵部尙書가 되어 團營을 감독하였다. 嘉靖 29년(1550)에 타타르가 京城을 침범했을 때, 정여기가 군대를 조련하여 맞서 싸우는 것에 회의하자 嚴嵩이 그의 ‘退虜長策’을 제지하였다. 적이 8일만에 철수하자, 嘉靖帝는 적을 방어하는데 대책이 없고 수비가 엄하지 못했다는 죄로 정여기를 斬首하였다. 隆慶帝가 繼位한 뒤 누명을 벗고 資政大夫를 하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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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仇鸞(?~1552): 陝西 鎭原 사람으로, 字는 伯翔이다. 甘肅 總兵이 되었다가 軍務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總督 曾銑에게 탄핵되어 파직되었다. 후에 嚴嵩에게 의지하여, 太子太保로 重用되어 總兵官으로 大同을 鎭守하였다. 嘉靖 29년(1550)에 俺答이 南下하자 구란은 뇌물을 써서 동쪽 薊鎭으로 향하게 하고 미리 京師로 와서 勤王하여 世宗의 신임을 얻어 平虜大將軍이 되었다. 古北口에서 俺答軍과 싸우다 궤멸되고 몸만 빠져나왔는데 敵軍이 이미 퇴각하여 그에 대한 세종의 寵信이 깊어졌다. 三大營을 통솔하고 戎政府를 설립하여 京軍과 邊兵을 총독하였다. 馬市를 열 것을 적극 주장하여 후에 엄숭과 논쟁을 벌였는데, 가정 31년(1552) 파직되었다가 죽었다. 사후에 叛逆罪로 開棺戮屍되었다.
-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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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3)
楊守謙(?~1550): 字는 允亨, 號는 次村으로, 徐州 사람이다. 嘉靖 8년(1529)에 進士가 되어 屯田主事가 되었다. 후에 右僉都御史로 발탁되어 山西巡撫를 지냈다. 偏頭, 老營堡 두 곳에 營田을 크게 개간하여 邊關의 穀價를 반으로 줄였다. 가정 29년(1550)에 副都御史가 되어 保定을 巡撫하고 紫刑關 등을 감독하였다. 俺答이 京師를 침입했을 때, 양수겸은 군대를 이끌고 崇文門 밖에서 군영을 두고 방어하였다. 世宗이 仇鸞을 大將軍, 양수겸을 兵部 右侍郞으로 삼아 함께 內外의 軍事를 처리하도록 하였다. 구란은 東直門에서 관망만 하고, 양수겸 혼자 엄답의 진영으로 갔으나 뒤따르는 자가 없어 감히 싸우지 못했다. 당시 諸軍이 兵部尙書 丁汝夔와 양수겸을 핑계로 화살 한발도 쏘지 않았다. 俺答이 물러간 뒤 양수겸은 軍機를 잃은 罪로 8월 26일 西市에서 斬首되었다. 隆慶 初에 兵部尙書에 追贈되었고, 諡號는 恪湣이다.
-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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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5)
丁汝夔(1497~1550): 字는 大章, 號는 淪源으로 古城鎭 管家莊 사람이다. 正德 16년(1521)에 進士가 되어 庶吉士에 선발되었다. 禮部主事, 山西 左布政使, 甘肅·保定·應天 巡撫, 湖廣 參政, 河南 巡撫 등을 역임하고 兵部尙書가 되어 團營을 감독하였다. 嘉靖 29년(1550)에 타타르가 京城을 침범했을 때, 정여기가 군대를 조련하여 맞서 싸우는 것에 회의하자 嚴嵩이 그의 ‘退虜長策’을 제지하였다. 적이 8일만에 철수하자, 嘉靖帝는 적을 방어하는데 대책이 없고 수비가 엄하지 못했다는 죄로 정여기를 斬首하였다. 隆慶帝가 繼位한 뒤 누명을 벗고 資政大夫를 하사받았다.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색인어
- 이름
- 구란(仇鸞), 양수겸(楊守謙), 구란, 구란, 양수겸, 정여기(丁汝夔), 정여기, 양수겸, 구란, 구란
- 지명
- 백양구(白羊口), 고북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