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왕자가 부강하였지만 병사가 전쟁에 싫증을 냈으며, 제농(濟農)·암달(諳達)이란 자가 변경을 유린하였다는 내용
당시 소왕자가 [달단 중에서] 가장 부강(富强)하였는데, 활을 당기는 병사가 10여 만[에 이르고] 재물을 많이 모아 차츰 전쟁에 싫증이 났으며, 이에 군막(軍幕)을 동쪽으로 옮겨 토만(土蠻)을 칭했고,주 001 서북 변방에서 여러 부락을 나눈 것이 매우 많았다. 길낭(吉囊)
주 002
각주 002)

이라고 하는 자·엄답(俺答)
주 003吉囊(1506~1542): Jinong의 音譯으로 明代 몽골 右翼 3萬戶(鄂爾多斯·土默特·永谢布)의 濟農[親王]이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庫蔑里였는데, 이후에는 衮必里克墨爾根이라는 존칭으로 불렀다. 명조의 사람들은 그 존칭을 바탕으로 麥力艮吉囊이라는 封號를 만들었다. 達延汗(Dayan khan)의 손자이며 巴爾斯博羅特의 장자이다. 正德 14년(1519)에 濟農이 되어 우익 3만호를 거느리고, 鄂爾多斯萬戶에 장막을 치고 머물면서 河套과 그 서쪽에서 유목하였다. 嘉靖 초기에 그 세력이 날로 강성해졌고, 그 동생인 俺答과 昆都力哈을 거느리고 사방을 정복하였고, 여러 部에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左翼 大汗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가정 3년(1524)에서 17년(1538) 사이에 4차례나 군대를 이끌고 兀良哈(Uriyangqai) 万戶를 공격하였고 결국 정복하였다. 가정 11년(1532)과 13년(1534)에 靑海를 공격하여 亦不剌과 卜兒孩를 대패시킨 후 그 무리를 장악하였다. 가정 12년(1533)에는 군대를 이끌고 大同의 반란군을 지원하였고, 그 반란군 대부분이 그를 따라서 몽골로 갔다. 여러 차례 명의 宣府(지금 河北의 宣化)·大同·涼州(지금 甘肅 武威 일대) 등을 약탈하였고, 이로써 명조의 서북 변경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일찍이 명조에 通貢互市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했다. 말년에는 방종한 생활을 하면서 軍政을 돌보지 않아 大權이 俺答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가 사망한 후 우익 3만호는 俺答의 통제를 받았고, 濟農의 세력은 점점 약화되었다.
각주 003)

이라고 하는 자는 소왕자에게 숙부가 되는 항렬(行列)로, 하투(河套)를 점거했는데, 매우 간교하고 싸우기를 좋아해서 여러 부락의 수령이 되어서 서로 솔선하여 여러 변경 지역을 유린(蹂躪)하였다.俺答(1507~1582): Altan의 音譯으로 俺答汗을 일컬음. 16세기 후반 몽골 土默特部의 주요 수령으로 칭기스칸 黄金家族의 후예이며, 達延汗의 손자이다. 그에 대한 호칭은 阿勒坦汗인데, ‘俺答汗’으로 번역되었다. 明朝의 嘉靖 연간(1522~1566)에 그 세력이 성장하였는데, 그 부락은 처음에는 지금의 내몽골의 呼和浩特 일대에서 유목하였으나, 점차 세력이 강성해져서 察哈爾部를 遼東으로 내몰았고, 우익몽골의 수령이 되었다. 그가 장악한 지역은 동쪽으로는 宣化와 大同이북에서 서쪽으로 河套까지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고비사막, 남쪽으로는 만리장성에 이르렀다. 후에 靑海를 정복하였고, 그 세력이 西藏에 까지 이르렀다. 그는 자주 명나라에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530년 무렵부터 10여 년 간에 걸쳐 해마다 명나라의 북쪽 국경에 침입하였다. 1550년 庚戌의 變에서는 한때 수도 北京까지 포위, 위협하였는데 이른바 ‘北虜’가 이 무리다. 1570년 그의 손자 把漢那吉이 明에 투항한 것을 기회로 명나라와의 화의가 성립되고, 통상허락을 받았다. 이듬해 명나라로부터 順義王에 봉해지고, 뒤에 그의 居城에 歸化城이라는 이름까지 받았다. 1552년 이후 오이라트를 쳐서 카라코룸과 청해를 다스렸고, 다시 군대를 티베트까지 진격시켰다. 라마교를 숭상하였으며, 라마교를 몽골에 보급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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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吉囊(1506~1542): Jinong의 音譯으로 明代 몽골 右翼 3萬戶(鄂爾多斯·土默特·永谢布)의 濟農[親王]이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庫蔑里였는데, 이후에는 衮必里克墨爾根이라는 존칭으로 불렀다. 명조의 사람들은 그 존칭을 바탕으로 麥力艮吉囊이라는 封號를 만들었다. 達延汗(Dayan khan)의 손자이며 巴爾斯博羅特의 장자이다. 正德 14년(1519)에 濟農이 되어 우익 3만호를 거느리고, 鄂爾多斯萬戶에 장막을 치고 머물면서 河套과 그 서쪽에서 유목하였다. 嘉靖 초기에 그 세력이 날로 강성해졌고, 그 동생인 俺答과 昆都力哈을 거느리고 사방을 정복하였고, 여러 部에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左翼 大汗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가정 3년(1524)에서 17년(1538) 사이에 4차례나 군대를 이끌고 兀良哈(Uriyangqai) 万戶를 공격하였고 결국 정복하였다. 가정 11년(1532)과 13년(1534)에 靑海를 공격하여 亦不剌과 卜兒孩를 대패시킨 후 그 무리를 장악하였다. 가정 12년(1533)에는 군대를 이끌고 大同의 반란군을 지원하였고, 그 반란군 대부분이 그를 따라서 몽골로 갔다. 여러 차례 명의 宣府(지금 河北의 宣化)·大同·涼州(지금 甘肅 武威 일대) 등을 약탈하였고, 이로써 명조의 서북 변경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일찍이 명조에 通貢互市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했다. 말년에는 방종한 생활을 하면서 軍政을 돌보지 않아 大權이 俺答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가 사망한 후 우익 3만호는 俺答의 통제를 받았고, 濟農의 세력은 점점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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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3)
俺答(1507~1582): Altan의 音譯으로 俺答汗을 일컬음. 16세기 후반 몽골 土默特部의 주요 수령으로 칭기스칸 黄金家族의 후예이며, 達延汗의 손자이다. 그에 대한 호칭은 阿勒坦汗인데, ‘俺答汗’으로 번역되었다. 明朝의 嘉靖 연간(1522~1566)에 그 세력이 성장하였는데, 그 부락은 처음에는 지금의 내몽골의 呼和浩特 일대에서 유목하였으나, 점차 세력이 강성해져서 察哈爾部를 遼東으로 내몰았고, 우익몽골의 수령이 되었다. 그가 장악한 지역은 동쪽으로는 宣化와 大同이북에서 서쪽으로 河套까지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고비사막, 남쪽으로는 만리장성에 이르렀다. 후에 靑海를 정복하였고, 그 세력이 西藏에 까지 이르렀다. 그는 자주 명나라에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530년 무렵부터 10여 년 간에 걸쳐 해마다 명나라의 북쪽 국경에 침입하였다. 1550년 庚戌의 變에서는 한때 수도 北京까지 포위, 위협하였는데 이른바 ‘北虜’가 이 무리다. 1570년 그의 손자 把漢那吉이 明에 투항한 것을 기회로 명나라와의 화의가 성립되고, 통상허락을 받았다. 이듬해 명나라로부터 順義王에 봉해지고, 뒤에 그의 居城에 歸化城이라는 이름까지 받았다. 1552년 이후 오이라트를 쳐서 카라코룸과 청해를 다스렸고, 다시 군대를 티베트까지 진격시켰다. 라마교를 숭상하였으며, 라마교를 몽골에 보급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색인어
- 이름
- 소왕자, 길낭(吉囊), 엄답(俺答), 소왕자
- 지명
- 달단, 하투(河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