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근(劉瑾)을 비롯하여 감군(監軍)도 모두 환관이었고, 적은 영하 등지를 침입하다 수장들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음
유근(劉瑾)
주 001
각주 001)

이 일을 맡고 있고 감군(監軍)도 모두 환관이어서, 양일청은 직권을 행사할 수 없어 물러나고, 문귀(文貴)·재관(才寬)
주 002劉瑾(?~1510): 섬서성 興平縣 사람으로 魏忠賢, 王振과 더불어 명대 惡宦官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원래 姓은 談氏였으나 그를 천거한 태감의 姓을 따서 劉氏로 改姓하였다. 成化 연간(1465~1487)에 입궁하여 太監이 되었고, 正德 연간(1506~1521)에 武宗의 총애를 받아 司禮監을 관장하였다. 당시 武宗을 같이 모셨던 馬永成·高鳳·羅祥·魏彬·丘聚·谷大用·張永 등과 함께 이른바 ‘八虎’라 불렸는데, 이들 가운데 유근이 가장 교활하고 잔인하였다. 그는 각종 전횡을 일삼다가 모반죄로 태감 張永에 의해 고발당하여 1510년에 磔刑에 처해졌다(『明史』 卷304 「劉瑾傳」 참조).
각주 002)

이 서로 이어서 직무를 맡았다. [정덕] 2년(1507)에, 적이 영하·장랑 및 정요후위(定遼後衛) 등 여러 변경 [지역]을 침입하여, 수장(守將)들이 모두 체포되어 심문(審問)을 받았다.才寬(1458~?): 字는 汝勵, 河北 遷安 사람이다. 成化 14년(1478)에 進士가 되어 商河縣 知縣이 되었고, 후에 南京 刑部 郞中까지 진급하였다. 西安·淮安府를 다스릴 때 異政이 많았고 귀신같이 疑獄을 해결하였다. 副都御史로 甘肅 巡撫 재직 시절 軍民이 기뻐하였고 西夷가 感服하였다. 후에 工部 左侍郞을 거쳐 工部尙書(正二品)가 되었는데, 劉瑾을 따르지 않고 三邊總制를 그만두고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였다. 正德 4년(1509)에 虜가 변경을 침범했을 때 직접 나가 싸우다가 戰死했다. 사후에 太子少保(正二品)로 追贈하였고 諡號는 襄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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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劉瑾(?~1510): 섬서성 興平縣 사람으로 魏忠賢, 王振과 더불어 명대 惡宦官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원래 姓은 談氏였으나 그를 천거한 태감의 姓을 따서 劉氏로 改姓하였다. 成化 연간(1465~1487)에 입궁하여 太監이 되었고, 正德 연간(1506~1521)에 武宗의 총애를 받아 司禮監을 관장하였다. 당시 武宗을 같이 모셨던 馬永成·高鳳·羅祥·魏彬·丘聚·谷大用·張永 등과 함께 이른바 ‘八虎’라 불렸는데, 이들 가운데 유근이 가장 교활하고 잔인하였다. 그는 각종 전횡을 일삼다가 모반죄로 태감 張永에 의해 고발당하여 1510년에 磔刑에 처해졌다(『明史』 卷304 「劉瑾傳」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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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才寬(1458~?): 字는 汝勵, 河北 遷安 사람이다. 成化 14년(1478)에 進士가 되어 商河縣 知縣이 되었고, 후에 南京 刑部 郞中까지 진급하였다. 西安·淮安府를 다스릴 때 異政이 많았고 귀신같이 疑獄을 해결하였다. 副都御史로 甘肅 巡撫 재직 시절 軍民이 기뻐하였고 西夷가 感服하였다. 후에 工部 左侍郞을 거쳐 工部尙書(正二品)가 되었는데, 劉瑾을 따르지 않고 三邊總制를 그만두고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였다. 正德 4년(1509)에 虜가 변경을 침범했을 때 직접 나가 싸우다가 戰死했다. 사후에 太子少保(正二品)로 追贈하였고 諡號는 襄湣이다.
색인어
- 이름
- 유근(劉瑾), 양일청, 문귀(文貴), 재관(才寬)
- 지명
- 영하, 장랑, 정요후위(定遼後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