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외국전

무종(武宗)이 계위하고, 적은 다시 화마지(花馬池)로부터 관중(關中)을 크게 침입하여 소란을 일으킨 설명

  • 국가
    달단(韃靼)
무종(武宗, 1491~1521; 재위 1506~1521)주 001
각주 001)
武宗: 弘治帝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朱厚照이고, 명 왕조 11대 황제이다. 효종 홍치제가 1505년에 세상을 떠나 15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하였으며, 연호를 正德으로 정하고 통치에 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환관들과 가까이하면서 길들여진 방종과 안일한 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역대 황제 가운데서 유례없는 기인으로 성장하였으며, 특히 劉謹을 비롯한 八狐라 일컫는 惡宦官들에 둘러싸여 온갖 亂行을 일삼았다. 따라서 정치의 실권은 유근에게 장악되어 문란하였고, 백성들의 생활은 어려워져 수많은 民亂이 일어났으며, 황실 내부에서도 政變이 잇따랐다. 결국 그는 재위한 지 16년 만인 1521년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도 없이 豹房新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諡號는 毅皇帝이며, 陵은 康陵이다.
닫기
이 계위해서 다시 주휘·사림에게 출병(出兵)하여 방어하도록 명하였다. [그해] 겨울에, 적이 진이소(鎭夷所)를 침입하여 지휘 유경(劉經)이 죽었다. 다시 화마지로부터 성을 허물고 침입하여 융덕(隆德) 주 002
각주 002)
隆德: 寧夏回族自治區 소속의 隆德縣이며, 六盤山 西麓에 위치해 있다.
닫기
·정녕(靜寧) 주 003
각주 003)
靜寧: 甘肅省 東部에 위치해 있는 靜寧縣이며, 六盤山 以西에 위치해 있다.
닫기
·회령(會寧) 주 004
각주 004)
會寧: 甘肅省 會寧縣은 甘肅 中部에 위치한다.
닫기
등지를 약탈하여 관중(關中) 주 005
각주 005)
關中: 陝西省의 渭河 중류의 평원 일대를 가리키며, 渭河평원이나 關中평원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그 북부는 陝西의 黃土高原이고 남쪽으로는 陝南 분지와 秦巴山脈이 있다.
닫기
이 크게 소란하므로, 양일청(楊一淸) 주 006
각주 006)
楊一淸(1454~1530): 字는 應寧, 號는 邃庵으로, 鎭江 丹徒人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神童으로 불렸으며, 14세에 鄕試에 참가하여 翰林秀才에 추천되기도 했다. 成化 8년(1472)에 進士에 급제하여 中書舍人에 제수되었다. 弘治 末에 陝西巡撫의 직을 맡았으며, 武宗이 卽位해서는 三邊(延綏·寧夏·甘肅) 總制軍務를 수행하고, 右都御史로 승임하였다. 이후 劉瑾을 따르지 않아 파직되었으나 유근이 피살된 후 吏部尙書에 임명되고 武英殿大學士를 겸임하여 내각의 機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江彬이 전횡하면서 다시 사직하였으나 세종이 즉위해서 다시 仕宦하였다. ‘大禮의 議’ 사건 때에 張璁 등이 楊廷和를 공격하는데 幫助하였고, 이후 兵部尙書의 직에 있으면서 陝西三邊의 軍務를 總制하였으며, 곧 華蓋殿 大學士에 임명되어 內閣의 首輔가 되었다. 그러나 만년에 張璁·桂萼과 불화하여 이들의 공격을 받아 사직하였으며, 친구들과 焦山에서 지내다 세상을 떠났다. 諡號는 文襄이며, 『楊文襄公集』·『關中奏議』·『石淙詩鈔』 등의 저서를 남겼다.
닫기
을 총제로 삼았다.주 007
각주 007)
『殊域周咨錄』 卷18 「韃靼」 正德 원년條에 관련 내용이 있다.
닫기
당시는 정덕(正德)주 008
각주 008)
正德: 명 왕조 11대 황제인 武宗 朱厚照의 年號이다.
닫기
원년(1506) 봄이었다.주 009
각주 009)
당시 적의 침략에 대해 總制三邊 楊一淸이 이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 여섯 가지를 上言하고 있는데, 이에 관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58 「議復河套」 正德 원년 춘정월條 참조.
닫기


  • 각주 001)
    武宗: 弘治帝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朱厚照이고, 명 왕조 11대 황제이다. 효종 홍치제가 1505년에 세상을 떠나 15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하였으며, 연호를 正德으로 정하고 통치에 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환관들과 가까이하면서 길들여진 방종과 안일한 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역대 황제 가운데서 유례없는 기인으로 성장하였으며, 특히 劉謹을 비롯한 八狐라 일컫는 惡宦官들에 둘러싸여 온갖 亂行을 일삼았다. 따라서 정치의 실권은 유근에게 장악되어 문란하였고, 백성들의 생활은 어려워져 수많은 民亂이 일어났으며, 황실 내부에서도 政變이 잇따랐다. 결국 그는 재위한 지 16년 만인 1521년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도 없이 豹房新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諡號는 毅皇帝이며, 陵은 康陵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2)
    隆德: 寧夏回族自治區 소속의 隆德縣이며, 六盤山 西麓에 위치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靜寧: 甘肅省 東部에 위치해 있는 靜寧縣이며, 六盤山 以西에 위치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會寧: 甘肅省 會寧縣은 甘肅 中部에 위치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5)
    關中: 陝西省의 渭河 중류의 평원 일대를 가리키며, 渭河평원이나 關中평원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그 북부는 陝西의 黃土高原이고 남쪽으로는 陝南 분지와 秦巴山脈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楊一淸(1454~1530): 字는 應寧, 號는 邃庵으로, 鎭江 丹徒人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神童으로 불렸으며, 14세에 鄕試에 참가하여 翰林秀才에 추천되기도 했다. 成化 8년(1472)에 進士에 급제하여 中書舍人에 제수되었다. 弘治 末에 陝西巡撫의 직을 맡았으며, 武宗이 卽位해서는 三邊(延綏·寧夏·甘肅) 總制軍務를 수행하고, 右都御史로 승임하였다. 이후 劉瑾을 따르지 않아 파직되었으나 유근이 피살된 후 吏部尙書에 임명되고 武英殿大學士를 겸임하여 내각의 機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江彬이 전횡하면서 다시 사직하였으나 세종이 즉위해서 다시 仕宦하였다. ‘大禮의 議’ 사건 때에 張璁 등이 楊廷和를 공격하는데 幫助하였고, 이후 兵部尙書의 직에 있으면서 陝西三邊의 軍務를 總制하였으며, 곧 華蓋殿 大學士에 임명되어 內閣의 首輔가 되었다. 그러나 만년에 張璁·桂萼과 불화하여 이들의 공격을 받아 사직하였으며, 친구들과 焦山에서 지내다 세상을 떠났다. 諡號는 文襄이며, 『楊文襄公集』·『關中奏議』·『石淙詩鈔』 등의 저서를 남겼다. 바로가기
  • 각주 007)
    『殊域周咨錄』 卷18 「韃靼」 正德 원년條에 관련 내용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8)
    正德: 명 왕조 11대 황제인 武宗 朱厚照의 年號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9)
    당시 적의 침략에 대해 總制三邊 楊一淸이 이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 여섯 가지를 上言하고 있는데, 이에 관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58 「議復河套」 正德 원년 춘정월條 참조.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무종, 武宗, 주휘, 사림, 유경(劉經), 양일청(楊一淸)
지명
진이소(鎭夷所), 화마지, 융덕(隆德), 정녕(靜寧), 회령(會寧), 관중(關中)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무종(武宗)이 계위하고, 적은 다시 화마지(花馬池)로부터 관중(關中)을 크게 침입하여 소란을 일으킨 설명 자료번호 : jo.k_0024_0327_0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