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成化) 원년 보랄이 오량해(烏梁海)를 끌어들여 요하(遼河)를 침범하는 등 노략질을 계속하자 무안후 정굉(鄭宏) 등이 막아 물리친 내용
성화(成化)주 001 원년(1465) 봄에, 패래가 올량합(兀良哈)의 9만 기병을 끌어들여 요하(遼河)
주 002를 침범했는데, 무안후(武安侯) 정굉(鄭宏)이 이를 막아 물리쳤다.주 003 [그해] 가을에, [그들은] 분산하여 연안(延安)
주 004·수덕(綏德)
주 005을 노략질했다. [그해] 겨울에, 다시 대거 침입해왔다.주 006 창무백(彰武伯) 양신(楊信)에게 산서의 군대를 이끌고, 도어사(都御史) 항충(項忠)
주 007
각주 007)

에게 섬서의 군대를 이끌어 이들을 방어하도록 명하니, [적이] 조금씩 물러났다. 얼마 후 다시 하곡(河曲)
주 008을 넘어 황보천보(黃甫川堡)
주 009를 포위하였는데, 관군(官軍)이 힘껏 싸우자 이에 [적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項忠(1421~1502): 字는 藎臣, 號는 喬松으로, 浙江 嘉興 사람이다. 正統 7년(1442)에 進士가 되어 刑部主事職을 除授받았고 員外郞으로 진급하였다. 正統 14년(1449)에 英宗을 따라 蒙古 瓦剌을 정벌하러 갔다가 土木堡(현재 河北 懷來縣 서쪽)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왔다. 景泰 연간(1450~1456)에 廣東 副使가 되어 瑤民의 起義를 진압하여 一級 加俸되었다. 天順 초년에 陝西 按察使가 되었는데, 당시 섬서에 기근이 들어 항충이 창고를 열어 饑民을 구휼하였다. 천순 7년(1463)에 大理寺卿에 임명되었는데 當地 사람들이 유임하기를 원하여 右副都御史가 되어 섬서를 巡撫하였다. 당시 洮河流域에서 일어난 羌族의 起義를 招撫하였다. 成化 4년(1468) 陝西 開城 土官 滿俊(滿四라고도 함)이 石城(唐代 吐蕃의 石堡城)을 점거하고 “招賢王”이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항충이 이를 평정하고 만준을 사로잡았다. 그 후 右都御史로 진급하여 林聰과 함께 都察院의 일을 맡아보았다. 성화 6년(1470)에 李原이 流民을 이끌고 湖北 荊襄地區에서 기의하여 南漳房, 內鄕, 渭南縣 등을 점거했을 때, 항충이 總督 軍務를 맡아 湖廣 總兵 李震과 함께 기의군을 진압하였다. 成化 10년(1474)에 刑部尙書로 승차하였고, 곧 白圭를 대신하여 兵部尙書가 되었다. 成化 13년(1477)에 宦官 汪直이 전횡을 일삼자 항충이 九卿과 함께 왕직을 탄핵하는 글을 올렸으나 왕직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梅江, 戴佑, 薑諒 등과 檇李耆英會를 창립하고 『唱和詩』를 엮어냈다. 사후 太子太保의 職銜이 주어졌고, 諡號는 襄毅이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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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7)
項忠(1421~1502): 字는 藎臣, 號는 喬松으로, 浙江 嘉興 사람이다. 正統 7년(1442)에 進士가 되어 刑部主事職을 除授받았고 員外郞으로 진급하였다. 正統 14년(1449)에 英宗을 따라 蒙古 瓦剌을 정벌하러 갔다가 土木堡(현재 河北 懷來縣 서쪽)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왔다. 景泰 연간(1450~1456)에 廣東 副使가 되어 瑤民의 起義를 진압하여 一級 加俸되었다. 天順 초년에 陝西 按察使가 되었는데, 당시 섬서에 기근이 들어 항충이 창고를 열어 饑民을 구휼하였다. 천순 7년(1463)에 大理寺卿에 임명되었는데 當地 사람들이 유임하기를 원하여 右副都御史가 되어 섬서를 巡撫하였다. 당시 洮河流域에서 일어난 羌族의 起義를 招撫하였다. 成化 4년(1468) 陝西 開城 土官 滿俊(滿四라고도 함)이 石城(唐代 吐蕃의 石堡城)을 점거하고 “招賢王”이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항충이 이를 평정하고 만준을 사로잡았다. 그 후 右都御史로 진급하여 林聰과 함께 都察院의 일을 맡아보았다. 성화 6년(1470)에 李原이 流民을 이끌고 湖北 荊襄地區에서 기의하여 南漳房, 內鄕, 渭南縣 등을 점거했을 때, 항충이 總督 軍務를 맡아 湖廣 總兵 李震과 함께 기의군을 진압하였다. 成化 10년(1474)에 刑部尙書로 승차하였고, 곧 白圭를 대신하여 兵部尙書가 되었다. 成化 13년(1477)에 宦官 汪直이 전횡을 일삼자 항충이 九卿과 함께 왕직을 탄핵하는 글을 올렸으나 왕직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梅江, 戴佑, 薑諒 등과 檇李耆英會를 창립하고 『唱和詩』를 엮어냈다. 사후 太子太保의 職銜이 주어졌고, 諡號는 襄毅이다.
- 각주 008)
- 각주 009)
색인어
- 이름
- 패래, 정굉(鄭宏), 양신(楊信), 항충(項忠)
- 지명
- 올량합(兀良哈), 요하(遼河), 연안(延安), 수덕(綏德), 산서, 섬서, 하곡(河曲), 황보천보(黃甫川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