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격이가 죽고 몽고륵극렬청길사(蒙古勒克哷靑吉斯)를 세운 뒤 보랄이 입공은 하면서도 침범 노략질을 하자 변경의 수비를 강화하게 된 내용
당시 마아가아가 다시 패래와 서로 원수가 되어 죽이려고 했다. 마아가아가 죽자,주 001 무리들이 모두 마아고아길사(馬可古兒吉思)
주 002
각주 002)

를 세우고 역시 소왕자라고 불렀다. 이로부터 달단 부락의 수령은 더욱 각자 제멋대로 하였다. 소왕자는 중국과 드물게 통교하였는데, 계승 세대의 순서는 대부분 고찰할 수 없다. 패래 등은 매년 입공하였지만 여러 차례 침범하여 노략질을 하였고, 북쪽 변경을 왕래하며 서쪽으로 와랄을 공격한다고 하면서 또 여러 차례 3위(三衛)주 003를 겁박하여 빼앗으려 했다. [천순] 7년(1463) 겨울에, 조공 사신이 관(關)에 이르자 황제가 그들을 거절하였는데, 대학사(大學士)주 004馬可古兒吉思(1446~1465): Margürgis의 음역이다. 脫脫不花(Toqto Büqa)의 幼子로 후에 蒙古의 大汗이 되었다. 1454년 也先이 피살되자 別勒古台(成吉思汗의 異母弟)의 後裔 毛里孩가 마아고아길사를 擁立하여 瓦剌人을 서쪽으로 몰아냈다. 모리해와 哈剌嗔의 首領 孛來가 太師로 봉해졌다. 마아고아길사는 겨우 7살이었기 때문에 권력은 모두 太師의 수중에 있었다. 그는 韃靼 部落 중에서 아주 탁월한 인재로, 우수한 군사지휘관이었다. 그의 지휘 하에 蒙古 軍隊가 끊임없이 明의 邊境을 침입하였다. 1465년 모리해가 패래를 공격하였는데, 마아고아길사가 軍中에서 피살되었다. 이후 마아고아길사의 형 脫古思猛可를 摩倫汗으로 옹립하였다. 마아고아길사를 『明史』에서는 ‘小王子’라고 칭하고 있다.
각주 004)

이현(李賢)
주 005大學士: 內閣 大學士를 일컫는다. 內閣은 明代 政務를 논하는 最高의 官署인데, 洪武 13년(1380)에 명 태조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재상제도를 폐지한 후, 洪武 15년(1382)에 宋代의 制度를 모방하여 華蓋殿·謹身殿·武英殿·文淵閣·東閣 등을 설치하고 이곳에 大學士를 두어 皇帝의 顧問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런가 하면 文華殿 大學士를 두어 太子를 보필토록 하였다. 이후 永樂 연간(1403~1424)에 들어와 文淵閣의 대학사를 機務에도 참여하게 하였으며, 이때부터 內閣이라 칭하게 되었다. 대학사는 초기에 정5품의 낮은 품계였지만 洪熙 연간(1425) 이후, 尙書의 職에 있던 楊士奇·楊榮을 華蓋殿·謹身殿의 大學士에 임용하면서 내각의 權力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점차 大學士의 朝位班次도 六部尙書의 앞에 서게 되었고, 地位도 높아져 內閣 大學士는 宰相의 이름은 없지만 실제로 宰相의 權限을 가지게 되었다.
각주 005)

의 진언으로 곧 그만두었다. [천순] 8년(1464) 봄에 어사(御史) 진선(陳選)
주 006李賢(1408~1467): 字는 原德으로, 鄧州(현재 河南 鄧州市) 사람이다. 宣德 7년(1432)에 鄕試에 第一로 급제하여 이듬해 進士가 되었다. 河津 등지에서 蝗災를 시찰한 후 吏部 驗封主事가 되었다. 正統 10년(1445)에 功部郞中이 되었다가 후에 文選郞中이 되었다. 正統 14년(1449) 土木의 變 이후 英宗이 포로로 잡히자 이현은 탈출하여 경사로 돌아왔다. 景泰 2년(1451) 正本 10策을 상소하자 황제가 좌우명으로 삼았다. 또한 戰車火器의 장점을 논술하여 兵部右侍郞으로 승진했다가 戶部侍郞, 吏部右侍郞 등을 역임했다. 그는 古代 君王의 정치 경험을 엮어 『鑒古錄』을 편찬하였는데, 代宗이 施政에 참고하였다. 天順 원년(1457) 7월부터 成化 2년(1466) 3월까지 首輔職을 맡았다. 30여 년을 정치에 힘썼는데 청렴하고 정직하였으며, 政績이 탁월하여 明朝 文官 중에서 治世良臣 중 하나로 꼽힌다.
각주 006)

이 아뢰기를, “달단 부락 중에서 패래가 가장 강한데 또 3위 제번(諸蕃)을 몰래 불러 모아 서로 결탁하여 주둔하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에 내조(來朝)하여 우리에게 상을 내리고 연회를 베풀기를 요구하면서 우리의 허실(虛實)을 엿보았는데, [이는] 그들이 변경을 침범하려는 정황을 이미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 변경 관문의 수신(守臣)주 007은 태만하여 성보(城堡)주 008는 수리되지 않고, 병장기는 예리하지 않으며, 군사는 훈련되지 않고, 심지어 [군사 중에] 부자는 월전(月錢)을 납부하고 편안히 지내고 있고, 가난한 자는 추위와 배고픔에 쫓겨 도망가 숨어버리고 있습니다. 변방의 수비가 이미 폐하여 없어져버렸는데, 완급(緩急)을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청하옵건대, 변경의 제신(諸臣)에게 칙서를 내리시어 예전의 폐단을 모두 없애도록 하십시오. 진수(鎭守)·비어(備禦) 등 관원 또한 마땅히 때에 따라 파면·승진시킨다면, 능력 있는 자는 분발해야 함을 알게 될 것이고 나태한 자는 두려움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변경을 방어하는 중요한 곳에는 관군(官軍)을 증가시키거나, 혹 영보(營堡)를 설치하거나, 혹은 돈대(墩台)주 009를 이용하거나 해서, 모두 반드시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매년 대신(大臣)을 파견하여 순시하게 하면, 변경의 방위는 갖추어져 침략의 기운이 그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황제가] 알았다고 비답(批答)을 내렸다.陳選(1429~1486): 字는 士賢이고, 號는 克庵으로, 臨海 城關 사람이다. 天順 4년(1460)에 會試에 합격하여 江西巡按御史가 되었다. 진선은 성품이 강직하여 貪官을 축출하고 大臣을 탄핵하는데 무서울 것이 없었다. 南畿를 督學할 때 學宮에 禮儀規矩를 반포하고 항상 學舍를 순시하였으며 직접 生員의 敎材를 만들었다. 成化 6년(1470) 河南 按察副使가 되었다가 提督學政, 按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大案을 여러 차례 해결하여 輕犯 수백 인을 석방하였으나 贓吏는 특히 엄격하게 처리하였다. 모친상으로 離任하자 士民들이 生祠를 건립해주었다. 후에 廣東 布政使 재직 중에 肇慶에 홍수가 나자 상부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누명을 쓰고 南昌에서 병사하였으나 弘治 초에 억울한 누명을 벗고 官禮로 改葬되었다. 諡號는 恭湣이었다.
-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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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馬可古兒吉思(1446~1465): Margürgis의 음역이다. 脫脫不花(Toqto Büqa)의 幼子로 후에 蒙古의 大汗이 되었다. 1454년 也先이 피살되자 別勒古台(成吉思汗의 異母弟)의 後裔 毛里孩가 마아고아길사를 擁立하여 瓦剌人을 서쪽으로 몰아냈다. 모리해와 哈剌嗔의 首領 孛來가 太師로 봉해졌다. 마아고아길사는 겨우 7살이었기 때문에 권력은 모두 太師의 수중에 있었다. 그는 韃靼 部落 중에서 아주 탁월한 인재로, 우수한 군사지휘관이었다. 그의 지휘 하에 蒙古 軍隊가 끊임없이 明의 邊境을 침입하였다. 1465년 모리해가 패래를 공격하였는데, 마아고아길사가 軍中에서 피살되었다. 이후 마아고아길사의 형 脫古思猛可를 摩倫汗으로 옹립하였다. 마아고아길사를 『明史』에서는 ‘小王子’라고 칭하고 있다.
-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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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4)
大學士: 內閣 大學士를 일컫는다. 內閣은 明代 政務를 논하는 最高의 官署인데, 洪武 13년(1380)에 명 태조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재상제도를 폐지한 후, 洪武 15년(1382)에 宋代의 制度를 모방하여 華蓋殿·謹身殿·武英殿·文淵閣·東閣 등을 설치하고 이곳에 大學士를 두어 皇帝의 顧問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런가 하면 文華殿 大學士를 두어 太子를 보필토록 하였다. 이후 永樂 연간(1403~1424)에 들어와 文淵閣의 대학사를 機務에도 참여하게 하였으며, 이때부터 內閣이라 칭하게 되었다. 대학사는 초기에 정5품의 낮은 품계였지만 洪熙 연간(1425) 이후, 尙書의 職에 있던 楊士奇·楊榮을 華蓋殿·謹身殿의 大學士에 임용하면서 내각의 權力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점차 大學士의 朝位班次도 六部尙書의 앞에 서게 되었고, 地位도 높아져 內閣 大學士는 宰相의 이름은 없지만 실제로 宰相의 權限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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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5)
李賢(1408~1467): 字는 原德으로, 鄧州(현재 河南 鄧州市) 사람이다. 宣德 7년(1432)에 鄕試에 第一로 급제하여 이듬해 進士가 되었다. 河津 등지에서 蝗災를 시찰한 후 吏部 驗封主事가 되었다. 正統 10년(1445)에 功部郞中이 되었다가 후에 文選郞中이 되었다. 正統 14년(1449) 土木의 變 이후 英宗이 포로로 잡히자 이현은 탈출하여 경사로 돌아왔다. 景泰 2년(1451) 正本 10策을 상소하자 황제가 좌우명으로 삼았다. 또한 戰車火器의 장점을 논술하여 兵部右侍郞으로 승진했다가 戶部侍郞, 吏部右侍郞 등을 역임했다. 그는 古代 君王의 정치 경험을 엮어 『鑒古錄』을 편찬하였는데, 代宗이 施政에 참고하였다. 天順 원년(1457) 7월부터 成化 2년(1466) 3월까지 首輔職을 맡았다. 30여 년을 정치에 힘썼는데 청렴하고 정직하였으며, 政績이 탁월하여 明朝 文官 중에서 治世良臣 중 하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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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6)
陳選(1429~1486): 字는 士賢이고, 號는 克庵으로, 臨海 城關 사람이다. 天順 4년(1460)에 會試에 합격하여 江西巡按御史가 되었다. 진선은 성품이 강직하여 貪官을 축출하고 大臣을 탄핵하는데 무서울 것이 없었다. 南畿를 督學할 때 學宮에 禮儀規矩를 반포하고 항상 學舍를 순시하였으며 직접 生員의 敎材를 만들었다. 成化 6년(1470) 河南 按察副使가 되었다가 提督學政, 按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大案을 여러 차례 해결하여 輕犯 수백 인을 석방하였으나 贓吏는 특히 엄격하게 처리하였다. 모친상으로 離任하자 士民들이 生祠를 건립해주었다. 후에 廣東 布政使 재직 중에 肇慶에 홍수가 나자 상부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누명을 쓰고 南昌에서 병사하였으나 弘治 초에 억울한 누명을 벗고 官禮로 改葬되었다. 諡號는 恭湣이었다.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색인어
- 이름
- 마아가아, 패래, 마아가아, 마아고아길사(馬可古兒吉思), 패래, 이현(李賢), 진선(陳選), 패래
- 지명
- 달단, 중국, 와랄, 달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