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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순(天順) 연간에 보랄이 섬서(陝西) 등지를 계속 침범하자 석표 등이 물리치니 보랄이 귀순을 청하고 내조하여 공물을 바친 설명

  • 국가
    달단(韃靼)
천순(天順)주 001
각주 001)
天順: 명 왕조 8대 황제인 英宗 朱祁鎭의 두 번째 연호이다. 영종은 명 왕조 6대 황제였지만 ‘土木堡의 變’으로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살아 돌아와, 天順 원년(1457)에 이른바 ‘奪門의 變’이라는 政變을 통해 景泰帝를 이어 8대 황제로 재차 즉위하였고, 이때 天順이라는 연호를 새롭게 제정하여 사용하였다. 洪武帝 이래 1世 1元制가 확립되어 명 왕조의 황제는 각기 하나만의 연호를 제정해 사용했지만, 이와 같이 英宗은 두 번 황제에 즉위했기 때문에 명청 시대 황제 가운데 유일하게 ‘正統’과 ‘天順’ 두 개의 연호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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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1458)에 패래섬서(陝西)를 대거 침범하자 안원후(安遠侯) 유부(柳溥) 주 002
각주 002)
柳溥: 생졸년 미상이다. 南直隸 安慶府 懷寧縣 사람이다. 부친 柳升의 爵位를 이어받아 처음에는 中軍 都督府의 일을 맡아보다가 正統 연간(1436~1449)에 總兵官이 되어 廣西를 鎭守하였다. 청렴하고 謹愼하였으나 謀略이 부족하여 大藤峽 叛亂을 차례로 진압하고, 柳州·思恩 등의 요새를 공략하였으나 寇亂이 예전과 같았다. 景泰 초년에 土木의 變 때문에 兵事가 긴급해져 右軍 都督府의 일을 관장하고, 神機營을 總督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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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이를 막았으나 곧 패하였는데, 작은 승리라고 꾸며서 보고하였다.주 003
각주 003)
관련 내용이 『殊域周咨錄』 卷18 「韃靼」 天順 2년條에 있는데, 이때 御史 劉濬이 柳溥를 탄핵하였는데, 뇌물로 석방되었다. 이 일로 劉濬은 강등되었고 유부는 소환되어 太傅 직함을 박탈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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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1459) 봄에, 적이 안변영(安邊營) 주 004
각주 004)
安邊營: 명대 楡林鎭의 중요한 軍營으로, 陝西 定邊縣 동쪽 100리에 舊 안변영이 있었는데 地名은 深井이었다. 明 成化 연간(1465~1487)에 余子俊이 지대가 평탄하여 戰守에 유리하다고 여겨 지명을 中山坡라 하고 새로운 안변영을 설치하였다. 예전 위치보다 북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이며, 城이 산 뒤에 있어 사방이 험준한 요새가 되었다. 嘉靖 연간(1522~1566)에 巡撫 王輪이 구 안변영을 大邊으로 옮겨 이때부터 신·구 안변영이 함께 설치되었다. 淸代에는 신 안변영을 통합하여 구 안변영에서 수비하고 都司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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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침입해 와 석표 등이 이를 물리쳤으나, 도독 주현(周賢)·지휘 이감(李鑑)이 전사하였다. [천순] 4년(1460)에 다시 유림(楡林) 주 005
각주 005)
楡林: 駝城이라고도 칭한다. 陝西省 最北部에 위치하며, 黃土高原과 毛烏素沙漠이 접하는 지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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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침범했는데, 창무백(彰武伯) 양신(楊信) 주 006
각주 006)
楊信(?~1477): 字는 文實로, 이른 나이에 叔父 楊洪을 따라 興州작전에 참가하였다. 正統 말년에 都指揮僉事가 되어 柴溝堡를 지켰다. 也先이 京師를 침입했을 때 保衛戰에 참가하여 都指揮同知로 승진하였다. 景泰 원년(1450)에 懷來를 鎭守하였으나, 瓦剌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해 彈劾을 받았다. 후에 다시 都督僉事로 진급하여 楊能을 대신하여 左副總兵이 되어 宣府를 함께 지켰다. 天順 원년(1457)에 延綏로 옮겨 방어하였고 都督同知로 승진하였다. 이듬해(1458)에 靑陽溝에서 瓦剌部隊를 크게 물리쳐 彰武伯에 봉해지고 總兵官이 되었다. 그 후 高家堡, 野馬澗, 楡林, 金雞峪 등에서 계속 승리하고 平章 阿孫帖木兒를 참살하였다. 후에 李文鎭을 대신하여 大同을 지켰다. 成化 원년(1465)에 뚜렷한 공적을 쌓지 못해 소환되어 三千營을 감독하였다. 毛里孩가 河套를 점령했을 때, 諸鎭의 군대를 총괄하여 방어하였고, 후에 大同을 鎭守하였다. 성화 6년(1470) 副將 徐恕, 參將 張瑛과 함께 변경을 나가 승리를 거두었다. 성화 13년(1477) 양신이 죽은 후 彰武侯가 追贈되었고 諡號는 武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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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를 막고 물리쳤다. 다시 침입해 오자 금계욕(金鷄峪)에서 이들을 패퇴시켰다. 얼마 후 다시 섬서 여러 변경을 대거 약탈하자 조정의 신하들이 각 수장(守將)들을 죄로 다스리자고 청하였으나, 황제는 이를 용서하였다.주 007
각주 007)
『殊域周咨錄』 卷18 「韃靼」 天順 3년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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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순] 5년(1461) 봄에, 적이 평로성(平虜城) 주 008
각주 008)
平虜城: 현재 河北 黃驊市 齊家務鄕 乾符村에 위치한다. 東漢 獻帝 建安 11년(206) 봄에 曹操가 烏桓을 北征할 때 董昭의 建議를 받아들여 平虜渠를 開鑿할 때 현재 乾符村 남쪽 200m 지점에 평로성을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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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침입하여 지휘 허옹(許顒) 등을 유인해 들어오게 하여 매복했다가 그들을 죽였다. 변경의 보고가 날로 급박해지자, 시랑(侍郞) 백규(白圭) 주 009
각주 009)
白圭(1419~1474): 字는 宗玉이고 河北 邢台市 南宮縣 南白塔村 사람이다. 正統 7년(1442) 3월 進士에 及第하였고, 그해에 江西道 監察御史에 除授되었다. 正統 9년(1444) 정월에 명을 받아 廣寧 등지(지금의 遼寧省鎭)를 침입한 兀良哈(Uriyangqai)을 정벌하여 英宗으로부터 상을 받았고, 후에 山西巡按이 되었다. 후에 湖廣巡撫, 工部尙書, 兵部尙書, 資政大夫, 資德大夫, 正治上卿 등을 역임했다. 재임기간 동안 貴州 동부의 苗夷 幹把豬와 河南 劉通의 叛亂을 정벌하였고, 裕陵(明 英宗의 陵墓) 조성을 감독하고, 承天門(지금의 天安門)을 수축하였다. 成化 10년(1474)에 백규가 官位에서 사망하자 皇帝는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주고 榮祿大夫를 하사하였으며, 諡號는 恭敏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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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사(都御史)주 010
각주 010)
都御史: 명대 감찰기구였던 都察院 長官을 말한다. 洪武 15년(1382)에 명 정부는 감찰기구를 정비하면서 도찰원을 설치했다. 도어사는 正2品이었으며, 부도어사는 正3品이었다. 그들은 감찰, 큰 사건의 심리와 관리의 근무 평가를 담당했다. 명초 도어사는 모두 도찰원에만 머물러 있었지만, 永樂 연간(1403~1424)과 宣德 연간(1426~1435)에 이르러 總督과 巡撫가 설치된 이후 督撫들이 都御史를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南京에도 도찰원을 두어 좌·우도어사를 설치했으며, 청대에 이르러서는 從1品인 左都御史가 도찰원 長官을, 正2品인 左副都御史가 副長官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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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횡(王竑) 주 011
각주 011)
王竑(1413~1488): 字는 公度이고, 號는 休庵(퇴임 후에 戅庵으로 바꾸었다)으로, 河州(현재 甘肅 臨夏) 사람이다. 正統 4년(1439)에 진사가 되었다. 戶部 給事中의 자리에 올랐는데, 기개가 있어 土木의 變 당시에 앞장서서 무리를 이끌고 王振의 무리를 물리치고 錦衣指揮 馬順을 도와 명성을 천하에 떨쳤다. 也先이 침입했을 때 황제의 명을 받고 京城을 지켜 右僉都御史로 발탁되었다. 漕運을 감독하고 다시 淮州·揚州를 慰撫하였다. 憲宗 초에 兵部尙書를 지냈으며, 諡號는 莊毅이다(『明史』 卷177 「王竑傳」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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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명하여 가서 군대를 시찰하도록 하였다. [그해] 가을에 패래가 귀순을 청하였는데, 황제가 사신 첨승(詹升)에게 칙서(勅書)를 가지고 가 [패래를] 효유하도록 하였다. 패래는 사신을 첨승에게 딸려 보내 내조하여 공물을 바치고, 대동의 옛 조공로를 고쳐 섬서 난현(蘭縣)으로 들어오도록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얼마 후 다시 그의 부하 모리해 등을 규합(糾合)하여 하서(河西) 주 012
각주 012)
河西: 황하의 서쪽 지역인 河西走廊을 일컬으며, 하서주랑은 동쪽의 烏鞘嶺으로부터 시작해 서쪽의 玉門關에 이른다. 하서주랑은 남쪽의 祁連山과 阿爾金山에서 북쪽의 馬鬃山, 合黎山 및 龍首山 사이의 길이 약 900km, 폭 수km에서 100km에 이르는 서북~동남 방향으로 늘어선 좁고 긴 평지이다. 甘肅省의 蘭州와 河西四郡(武威·張掖·酒泉·敦煌)을 포괄하며, 이 지역에는 한족을 비롯하여 몽골족·위구르족·티베트족 등 여러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은 漢의 武帝가 河西를 開闢해 河西四郡을 연 이래, 내륙의 新疆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통로이며, 고대 실크로드의 일부로서 고대 중국 내지와 西域의 정치·경제·문화적 교류를 촉진시킨 중요한 통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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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침입하였다. 이듬해(1462) 봄에, 백규 등이 서쪽 변경을 나누어 순찰하였는데, 백규고원천(固原川)에서 적을 만나고, 왕횡홍애자천(紅崖子川)에서 적을 만나 모두 이들을 물리쳤다. [이에] 황제는 새서(璽書)를 내려 표창하고 격려하였으며, 패래의 사신에게 칙서를 내려 예전처럼 대동으로 들어와 진공하도록 하였다.

  • 각주 001)
    天順: 명 왕조 8대 황제인 英宗 朱祁鎭의 두 번째 연호이다. 영종은 명 왕조 6대 황제였지만 ‘土木堡의 變’으로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살아 돌아와, 天順 원년(1457)에 이른바 ‘奪門의 變’이라는 政變을 통해 景泰帝를 이어 8대 황제로 재차 즉위하였고, 이때 天順이라는 연호를 새롭게 제정하여 사용하였다. 洪武帝 이래 1世 1元制가 확립되어 명 왕조의 황제는 각기 하나만의 연호를 제정해 사용했지만, 이와 같이 英宗은 두 번 황제에 즉위했기 때문에 명청 시대 황제 가운데 유일하게 ‘正統’과 ‘天順’ 두 개의 연호를 사용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柳溥: 생졸년 미상이다. 南直隸 安慶府 懷寧縣 사람이다. 부친 柳升의 爵位를 이어받아 처음에는 中軍 都督府의 일을 맡아보다가 正統 연간(1436~1449)에 總兵官이 되어 廣西를 鎭守하였다. 청렴하고 謹愼하였으나 謀略이 부족하여 大藤峽 叛亂을 차례로 진압하고, 柳州·思恩 등의 요새를 공략하였으나 寇亂이 예전과 같았다. 景泰 초년에 土木의 變 때문에 兵事가 긴급해져 右軍 都督府의 일을 관장하고, 神機營을 總督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3)
    관련 내용이 『殊域周咨錄』 卷18 「韃靼」 天順 2년條에 있는데, 이때 御史 劉濬이 柳溥를 탄핵하였는데, 뇌물로 석방되었다. 이 일로 劉濬은 강등되었고 유부는 소환되어 太傅 직함을 박탈당했다고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4)
    安邊營: 명대 楡林鎭의 중요한 軍營으로, 陝西 定邊縣 동쪽 100리에 舊 안변영이 있었는데 地名은 深井이었다. 明 成化 연간(1465~1487)에 余子俊이 지대가 평탄하여 戰守에 유리하다고 여겨 지명을 中山坡라 하고 새로운 안변영을 설치하였다. 예전 위치보다 북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이며, 城이 산 뒤에 있어 사방이 험준한 요새가 되었다. 嘉靖 연간(1522~1566)에 巡撫 王輪이 구 안변영을 大邊으로 옮겨 이때부터 신·구 안변영이 함께 설치되었다. 淸代에는 신 안변영을 통합하여 구 안변영에서 수비하고 都司를 설치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5)
    楡林: 駝城이라고도 칭한다. 陝西省 最北部에 위치하며, 黃土高原과 毛烏素沙漠이 접하는 지역에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楊信(?~1477): 字는 文實로, 이른 나이에 叔父 楊洪을 따라 興州작전에 참가하였다. 正統 말년에 都指揮僉事가 되어 柴溝堡를 지켰다. 也先이 京師를 침입했을 때 保衛戰에 참가하여 都指揮同知로 승진하였다. 景泰 원년(1450)에 懷來를 鎭守하였으나, 瓦剌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해 彈劾을 받았다. 후에 다시 都督僉事로 진급하여 楊能을 대신하여 左副總兵이 되어 宣府를 함께 지켰다. 天順 원년(1457)에 延綏로 옮겨 방어하였고 都督同知로 승진하였다. 이듬해(1458)에 靑陽溝에서 瓦剌部隊를 크게 물리쳐 彰武伯에 봉해지고 總兵官이 되었다. 그 후 高家堡, 野馬澗, 楡林, 金雞峪 등에서 계속 승리하고 平章 阿孫帖木兒를 참살하였다. 후에 李文鎭을 대신하여 大同을 지켰다. 成化 원년(1465)에 뚜렷한 공적을 쌓지 못해 소환되어 三千營을 감독하였다. 毛里孩가 河套를 점령했을 때, 諸鎭의 군대를 총괄하여 방어하였고, 후에 大同을 鎭守하였다. 성화 6년(1470) 副將 徐恕, 參將 張瑛과 함께 변경을 나가 승리를 거두었다. 성화 13년(1477) 양신이 죽은 후 彰武侯가 追贈되었고 諡號는 武毅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7)
    『殊域周咨錄』 卷18 「韃靼」 天順 3년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8)
    平虜城: 현재 河北 黃驊市 齊家務鄕 乾符村에 위치한다. 東漢 獻帝 建安 11년(206) 봄에 曹操가 烏桓을 北征할 때 董昭의 建議를 받아들여 平虜渠를 開鑿할 때 현재 乾符村 남쪽 200m 지점에 평로성을 구축했다. 바로가기
  • 각주 009)
    白圭(1419~1474): 字는 宗玉이고 河北 邢台市 南宮縣 南白塔村 사람이다. 正統 7년(1442) 3월 進士에 及第하였고, 그해에 江西道 監察御史에 除授되었다. 正統 9년(1444) 정월에 명을 받아 廣寧 등지(지금의 遼寧省鎭)를 침입한 兀良哈(Uriyangqai)을 정벌하여 英宗으로부터 상을 받았고, 후에 山西巡按이 되었다. 후에 湖廣巡撫, 工部尙書, 兵部尙書, 資政大夫, 資德大夫, 正治上卿 등을 역임했다. 재임기간 동안 貴州 동부의 苗夷 幹把豬와 河南 劉通의 叛亂을 정벌하였고, 裕陵(明 英宗의 陵墓) 조성을 감독하고, 承天門(지금의 天安門)을 수축하였다. 成化 10년(1474)에 백규가 官位에서 사망하자 皇帝는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주고 榮祿大夫를 하사하였으며, 諡號는 恭敏이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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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都御史: 명대 감찰기구였던 都察院 長官을 말한다. 洪武 15년(1382)에 명 정부는 감찰기구를 정비하면서 도찰원을 설치했다. 도어사는 正2品이었으며, 부도어사는 正3品이었다. 그들은 감찰, 큰 사건의 심리와 관리의 근무 평가를 담당했다. 명초 도어사는 모두 도찰원에만 머물러 있었지만, 永樂 연간(1403~1424)과 宣德 연간(1426~1435)에 이르러 總督과 巡撫가 설치된 이후 督撫들이 都御史를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南京에도 도찰원을 두어 좌·우도어사를 설치했으며, 청대에 이르러서는 從1品인 左都御史가 도찰원 長官을, 正2品인 左副都御史가 副長官을 맡았다. 바로가기
  • 각주 011)
    王竑(1413~1488): 字는 公度이고, 號는 休庵(퇴임 후에 戅庵으로 바꾸었다)으로, 河州(현재 甘肅 臨夏) 사람이다. 正統 4년(1439)에 진사가 되었다. 戶部 給事中의 자리에 올랐는데, 기개가 있어 土木의 變 당시에 앞장서서 무리를 이끌고 王振의 무리를 물리치고 錦衣指揮 馬順을 도와 명성을 천하에 떨쳤다. 也先이 침입했을 때 황제의 명을 받고 京城을 지켜 右僉都御史로 발탁되었다. 漕運을 감독하고 다시 淮州·揚州를 慰撫하였다. 憲宗 초에 兵部尙書를 지냈으며, 諡號는 莊毅이다(『明史』 卷177 「王竑傳」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12)
    河西: 황하의 서쪽 지역인 河西走廊을 일컬으며, 하서주랑은 동쪽의 烏鞘嶺으로부터 시작해 서쪽의 玉門關에 이른다. 하서주랑은 남쪽의 祁連山과 阿爾金山에서 북쪽의 馬鬃山, 合黎山 및 龍首山 사이의 길이 약 900km, 폭 수km에서 100km에 이르는 서북~동남 방향으로 늘어선 좁고 긴 평지이다. 甘肅省의 蘭州와 河西四郡(武威·張掖·酒泉·敦煌)을 포괄하며, 이 지역에는 한족을 비롯하여 몽골족·위구르족·티베트족 등 여러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은 漢의 武帝가 河西를 開闢해 河西四郡을 연 이래, 내륙의 新疆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통로이며, 고대 실크로드의 일부로서 고대 중국 내지와 西域의 정치·경제·문화적 교류를 촉진시킨 중요한 통로였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패래, 유부(柳溥), 석표, 주현(周賢), 이감(李鑑), 양신(楊信), 허옹(許顒), 백규(白圭), 왕횡(王竑), 패래, 첨승(詹升), 패래, 패래, 첨승, 모리해, 백규, 백규, 왕횡, 패래
지명
섬서(陝西), 안변영(安邊營), 유림(楡林), 금계욕(金鷄峪), 섬서, 평로성(平虜城), 대동, 섬서 난현(蘭縣), 하서(河西), 고원천(固原川), 홍애자천(紅崖子川), 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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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순(天順) 연간에 보랄이 섬서(陝西) 등지를 계속 침범하자 석표 등이 물리치니 보랄이 귀순을 청하고 내조하여 공물을 바친 설명 자료번호 : jo.k_0024_0327_0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