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외국전

영종(英宗)이 복벽(復辟)하여 보랄(保喇)의 노략질을 정원백 석표(石彪)에게 명하여 패퇴시킴

  • 국가
    달단(韃靼)
경태 6년(1455)에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영종(英宗) 주 001
각주 001)
英宗: 宣德帝의 장남이며, 景泰帝의 이복형인 朱祁鎭이다. 어머니는 孝恭章皇后 孫氏이다. 묘호는 英宗, 시호는 睿皇帝, 연호는 처음 등극하면서 正統(1435~1449)을, 재차 등극할 때에 天順(1457~1464)을 사용하였다. 9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므로 태황태후가 섭정하였고, 전대부터의 어진 신하 楊士奇·楊溥·楊榮 등 이른바 三楊의 보필을 받아 善政이 기대되었으나, 그들이 죽자 환관 王振이 專橫하였다. 雲南에서 일어난 思仁發·思機發의 난으로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고, 이후 浙江·福建 광부들의 난과 鄧茂七의 반란까지 겹쳐 재정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때마침 몽골을 통일한 오이라트의 也先(Esen)이 쳐들어왔으며, 王振의 권고에 따라 親征하였으나 土木堡에서 대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이를 ‘土木의 變’이라고 한다. 이듬해에 석방되었으나 이미 동생 景泰帝가 즉위하여 있었으므로, 태상황제라 칭해져 南宮에 유폐되었다. 그러나 1457년에 경태제가 중병에 걸린 틈에 石亨 등이 정변(奪門의 變)을 일으켜 다시 황제로 복위하였다. 그러나 瓦剌(Oirat)에 대신하여 韃靼(Tatar)의 침입을 받는 등 마지막까지 북방민족의 침입에 시달렸다.
닫기
이 복벽(復辟)주 002
각주 002)
일찍부터 기회를 엿보고 있던 將軍 石亨·廷臣 徐有貞·宦官 曹吉祥 등이 景泰 8년(1457)에 쿠데타(奪門의 變)를 일으켜 英宗을 다시 帝位에 앉힌 사건을 말한다. 재차 帝位에 오른 英宗은 연호를 天順으로 고쳤다.
닫기
해서, 도독(都督) 마정(馬政)을 보내 죽은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 주 003
각주 003)
伯顔帖木兒(?~1454): Bayan Temür의 音譯이다. 也先汗의 심복이며, 平章·知院 등의 官號를 가진 重臣이다. ‘土木의 變’으로 英宗이 포로로 잡혀 왔을 때, 영종을 살해하려는데 반대하고 황제를 잘 대함으로 明과의 우호관계를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처와 함께 포로로 잡힌 英宗을 禮로써 잘 모셨고, 영종이 귀환할 때에도 친히 明 변경에까지 모셨다. 1454년에 瓦剌의 內訌으로 阿剌知院에게 살해되었다.
닫기
의 처에게 채폐를 하사했다. 패래가 그를 억류하고는,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하례를 드리고 옥새(玉璽)를 바치고자 하였다. 황제가 그에게 칙서를 내려 이르기를, “옥새는 이미 진품이 아니다. 진품이라 해도 진(秦)의 상서롭지 못한 물건일 뿐이니, 바치든 말든 너 편한대로 하라. 다만 우리 사신을 억류하여 너의 화를 재촉하지 말라”고 하였다. 당시 적이 위원(威遠) 주 004
각주 004)
威遠衛: 明 洪武 9년(1376)부터 28년(1395)까지 河西 지역에 涼州衛, 甘州五衛, 肅州衛 등을 설치하였는데 그때 함께 설치되었다. 현재 甘肅省 金塔縣 境內의 黑河灌區 지역을 관할하였다. 正統 3년(1438)에 성을 다시 쌓았고, 嘉靖 39년(1560)에 威遠路를 分設하여 城堡 5곳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닫기
등 여러 위(衛)를 여러 차례 노략질하였는데, [그해] 여름에 정원백(定遠伯) 석표(石彪) 주 005
각주 005)
石彪(?~1460): 明代의 將領으로 正統 연간(1436~1449) 말에 指揮同知가 되었다. 京師 保衛戰 때 也先을 추격하여 斬獲한 것이 많아 指揮僉事에 올랐다. 景泰 원년(1450)에 遊擊將軍이 되어 威遠衛를 수비하였고, 그 후에도 매번 승리하여 都督僉事로 승진하였다. 당시 叔父 石亨의 권세를 믿고 백성들의 재산을 차지하고 함부로 개간하여 御史 張奎 등의 탄핵을 받았으나 황제가 용서하였다. 경태 3년(1452)에 右參將이 되어 大同을 鎭守하는 것을 도왔다. 英宗 複辟 후에 소환되어 무고하게 투옥되었기도 하였으나, 후에 다시 都督同知가 되어 遊擊將軍으로서 대동에서 적을 막아 伯에 봉해졌다. 天順 3년(1459)에 彰武伯 楊信과 함께 瓦剌의 침입을 막아 定遠侯에 봉해졌다(『明史』 卷173 「石彪傳」 참조).
닫기
마아산(磨兒山) 주 006
각주 006)
磨兒山: 四川盆地 서남쪽에 위치한 東山市에 있다.
닫기
에서 그들을 패퇴시켰다.

  • 각주 001)
    英宗: 宣德帝의 장남이며, 景泰帝의 이복형인 朱祁鎭이다. 어머니는 孝恭章皇后 孫氏이다. 묘호는 英宗, 시호는 睿皇帝, 연호는 처음 등극하면서 正統(1435~1449)을, 재차 등극할 때에 天順(1457~1464)을 사용하였다. 9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므로 태황태후가 섭정하였고, 전대부터의 어진 신하 楊士奇·楊溥·楊榮 등 이른바 三楊의 보필을 받아 善政이 기대되었으나, 그들이 죽자 환관 王振이 專橫하였다. 雲南에서 일어난 思仁發·思機發의 난으로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고, 이후 浙江·福建 광부들의 난과 鄧茂七의 반란까지 겹쳐 재정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때마침 몽골을 통일한 오이라트의 也先(Esen)이 쳐들어왔으며, 王振의 권고에 따라 親征하였으나 土木堡에서 대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이를 ‘土木의 變’이라고 한다. 이듬해에 석방되었으나 이미 동생 景泰帝가 즉위하여 있었으므로, 태상황제라 칭해져 南宮에 유폐되었다. 그러나 1457년에 경태제가 중병에 걸린 틈에 石亨 등이 정변(奪門의 變)을 일으켜 다시 황제로 복위하였다. 그러나 瓦剌(Oirat)에 대신하여 韃靼(Tatar)의 침입을 받는 등 마지막까지 북방민족의 침입에 시달렸다. 바로가기
  • 각주 002)
    일찍부터 기회를 엿보고 있던 將軍 石亨·廷臣 徐有貞·宦官 曹吉祥 등이 景泰 8년(1457)에 쿠데타(奪門의 變)를 일으켜 英宗을 다시 帝位에 앉힌 사건을 말한다. 재차 帝位에 오른 英宗은 연호를 天順으로 고쳤다. 바로가기
  • 각주 003)
    伯顔帖木兒(?~1454): Bayan Temür의 音譯이다. 也先汗의 심복이며, 平章·知院 등의 官號를 가진 重臣이다. ‘土木의 變’으로 英宗이 포로로 잡혀 왔을 때, 영종을 살해하려는데 반대하고 황제를 잘 대함으로 明과의 우호관계를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처와 함께 포로로 잡힌 英宗을 禮로써 잘 모셨고, 영종이 귀환할 때에도 친히 明 변경에까지 모셨다. 1454년에 瓦剌의 內訌으로 阿剌知院에게 살해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威遠衛: 明 洪武 9년(1376)부터 28년(1395)까지 河西 지역에 涼州衛, 甘州五衛, 肅州衛 등을 설치하였는데 그때 함께 설치되었다. 현재 甘肅省 金塔縣 境內의 黑河灌區 지역을 관할하였다. 正統 3년(1438)에 성을 다시 쌓았고, 嘉靖 39년(1560)에 威遠路를 分設하여 城堡 5곳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5)
    石彪(?~1460): 明代의 將領으로 正統 연간(1436~1449) 말에 指揮同知가 되었다. 京師 保衛戰 때 也先을 추격하여 斬獲한 것이 많아 指揮僉事에 올랐다. 景泰 원년(1450)에 遊擊將軍이 되어 威遠衛를 수비하였고, 그 후에도 매번 승리하여 都督僉事로 승진하였다. 당시 叔父 石亨의 권세를 믿고 백성들의 재산을 차지하고 함부로 개간하여 御史 張奎 등의 탄핵을 받았으나 황제가 용서하였다. 경태 3년(1452)에 右參將이 되어 大同을 鎭守하는 것을 도왔다. 英宗 複辟 후에 소환되어 무고하게 투옥되었기도 하였으나, 후에 다시 都督同知가 되어 遊擊將軍으로서 대동에서 적을 막아 伯에 봉해졌다. 天順 3년(1459)에 彰武伯 楊信과 함께 瓦剌의 침입을 막아 定遠侯에 봉해졌다(『明史』 卷173 「石彪傳」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6)
    磨兒山: 四川盆地 서남쪽에 위치한 東山市에 있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영종(英宗), 마정(馬政),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 패래, 석표(石彪)
지명
진(秦), 위원(威遠), 마아산(磨兒山)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영종(英宗)이 복벽(復辟)하여 보랄(保喇)의 노략질을 정원백 석표(石彪)에게 명하여 패퇴시킴 자료번호 : jo.k_0024_0327_0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