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로태가 죽고 아륵태(阿勒台)왕자 및 다이제파륵(多爾濟巴勒)이 노략질을 하다 공격을 받아 마침내 귀순한 내용
아로태가 죽은 후, 그가 예전에 세운 아태(阿台)
주 001
각주 001)

왕자 및 부하 타아지백(朶兒只伯) 등이 다시 태태불화에게 핍박을 받아 역집내로(亦集乃路)로 달아나 거주했다. 겉으로는 귀순하였으나 여러 차례 감주(甘州)
주 002·양주(涼州)
주 003에 들어와 노략질하였다. 정통(正統)주 004 원년(1436)에 장군 진무(陳懋)가 평천(平川)
주 005에서 타아지백을 패퇴시키고 소무산(蘇武山)
주 006까지 추격했는데 죽이거나 포로로 잡은 자가 아주 많았다.주 007 [정통] 2년(1437) 겨울에, 도독(都督)주 008
임예(任禮)
주 009阿台(1390~1438): Atai의 音譯으로, 阿岱汗이라고도 하며 孛兒只斤氏이다. 元 太宗 오고타이(窩闊台)의 후예 鬼力赤의 아들이다(혹은 칭기스칸의 동생 哈撤爾, 斡赤斤의 후예로 好兒趁部인이라고도 한다). 약 1425년(1413년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에 阿魯台 太師에 의해 汗으로 옹립되었다. 1433년 脫脫不花(Toqto Büqa)가 瓦剌의 大汗으로 옹립되면서 ‘一時而二汗’의 국면이 조성되어, 오이라트와 대항하였다. 1434년 아로태가 脫脫不花에게 패하여 母納山(지금의 內蒙古 陰山)으로 옮겨 갔으나 오이라트의 脫歡에게 습격을 당해 甘肅 변경 밖으로 나갔다. 여러 차례 明軍과 오이라트군의 공격을 받아, 명과 교섭하여 近邊에서 駐牧하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1438년 脫脫不花에게 피살당했다.
각주 009)

를 총병관(總兵官)주 010으로 임명하였으며, 장귀(蔣貴)
주 011任禮(?~1465): 字는 尙義, 河南의 臨漳縣 사람으로, 明朝의 將軍이다. ‘靖難의 役’ 당시 燕山衛의 병사로 朱棣(후의 영락제)의 휘하에서 활동하여 공을 세웠으며, 이로 인해 山東都指揮使가 되었다. 永樂 20년(1422)에 都督僉事로 발탁되었고, 이후 영락제의 北伐에 참여하였다. 仁宗이 즉위해서 廣西都司事가 되었다가 다시 遼東으로 발령이 났다. 선덕제가 즉위해서는 指揮同知가 되었고, 兀良哈(Uriyangqai) 정벌에 참여하였다. 正統帝 즉위 후에는 左都督이 되었다. 正統 원년(1436)에는 平羌將軍印을 받았고, 左副總兵이 되어 甘肅에 진수하여, 阿台 등의 공격을 막았다. 나이가 들어서는 南京으로 보내졌는데, 中軍 都督府에 있었다. 사후 侯가 追贈되었고, 諡號는 僖武이다(『明史』 卷155 「任禮傳」 참조).
각주 011)

·조안(趙安)을 부총병으로, 상서(尙書) 왕기(王驥)
주 012를 독사(督師)주 013로 삼아,주 014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듬해(1438년) 여름에, 다시 타아지백 등을 석성(石城)에서 패배시켰다. 아태와 타아[지백]이 합치자 다시 올로내(兀魯乃)
주 015 지역에서 그들을 패퇴시키고 흑천(黑泉)
주 016까지 추격하였으며, 또한 조력구(刁力溝)까지 이르러 사막으로 천리를 나가 동서에서 협공하니 적이 거의 전멸하였는데, 전후로 그의 부락의 수령 150명을 사로잡았다. 이에 아태·타아지백 등이 와서 귀순하였다.蔣貴(1415~1484): 字는 文富이고 安徽 歙縣 蔣家塢 사람이다. 元末에 부친이 朱元璋을 따라 起兵하여 공이 많았다. 부친 사후 장귀가 弱冠의 나이로 부친을 대신하여 朱棣를 따라 征戰하여 都指揮僉事 자리에 올라 彭城衛의 軍事를 맡아보았다. 宣德 2년(1427)에 右參將이 되어 總兵 陳懷를 따라 四川 松潘 叛亂 토벌에 나섰다가 공을 쌓아 都指揮同知로 승진하여 密雲을 鎭守하였다. 正統 초에 平虜將軍이 되어 甘肅, 賀蘭山 등지의 반란을 평정하여 定西伯에 봉해졌다. 正統 6년(1441)에 平蠻將軍이 되어 雲南 麓川의 반란을 평정하여 이듬해 경사로 돌아와 定西侯에 봉해졌다. 正統 8년(1443) 여름에 다시 평만장군이 되어 長子와 兵部尙書 王驥를 이끌고 思機發을 정벌하였다. 사후에 涇國公이 追贈되었고, 諡號는 武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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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阿台(1390~1438): Atai의 音譯으로, 阿岱汗이라고도 하며 孛兒只斤氏이다. 元 太宗 오고타이(窩闊台)의 후예 鬼力赤의 아들이다(혹은 칭기스칸의 동생 哈撤爾, 斡赤斤의 후예로 好兒趁部인이라고도 한다). 약 1425년(1413년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에 阿魯台 太師에 의해 汗으로 옹립되었다. 1433년 脫脫不花(Toqto Büqa)가 瓦剌의 大汗으로 옹립되면서 ‘一時而二汗’의 국면이 조성되어, 오이라트와 대항하였다. 1434년 아로태가 脫脫不花에게 패하여 母納山(지금의 內蒙古 陰山)으로 옮겨 갔으나 오이라트의 脫歡에게 습격을 당해 甘肅 변경 밖으로 나갔다. 여러 차례 明軍과 오이라트군의 공격을 받아, 명과 교섭하여 近邊에서 駐牧하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1438년 脫脫不花에게 피살당했다.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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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9)
任禮(?~1465): 字는 尙義, 河南의 臨漳縣 사람으로, 明朝의 將軍이다. ‘靖難의 役’ 당시 燕山衛의 병사로 朱棣(후의 영락제)의 휘하에서 활동하여 공을 세웠으며, 이로 인해 山東都指揮使가 되었다. 永樂 20년(1422)에 都督僉事로 발탁되었고, 이후 영락제의 北伐에 참여하였다. 仁宗이 즉위해서 廣西都司事가 되었다가 다시 遼東으로 발령이 났다. 선덕제가 즉위해서는 指揮同知가 되었고, 兀良哈(Uriyangqai) 정벌에 참여하였다. 正統帝 즉위 후에는 左都督이 되었다. 正統 원년(1436)에는 平羌將軍印을 받았고, 左副總兵이 되어 甘肅에 진수하여, 阿台 등의 공격을 막았다. 나이가 들어서는 南京으로 보내졌는데, 中軍 都督府에 있었다. 사후 侯가 追贈되었고, 諡號는 僖武이다(『明史』 卷155 「任禮傳」 참조).
- 각주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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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1)
蔣貴(1415~1484): 字는 文富이고 安徽 歙縣 蔣家塢 사람이다. 元末에 부친이 朱元璋을 따라 起兵하여 공이 많았다. 부친 사후 장귀가 弱冠의 나이로 부친을 대신하여 朱棣를 따라 征戰하여 都指揮僉事 자리에 올라 彭城衛의 軍事를 맡아보았다. 宣德 2년(1427)에 右參將이 되어 總兵 陳懷를 따라 四川 松潘 叛亂 토벌에 나섰다가 공을 쌓아 都指揮同知로 승진하여 密雲을 鎭守하였다. 正統 초에 平虜將軍이 되어 甘肅, 賀蘭山 등지의 반란을 평정하여 定西伯에 봉해졌다. 正統 6년(1441)에 平蠻將軍이 되어 雲南 麓川의 반란을 평정하여 이듬해 경사로 돌아와 定西侯에 봉해졌다. 正統 8년(1443) 여름에 다시 평만장군이 되어 長子와 兵部尙書 王驥를 이끌고 思機發을 정벌하였다. 사후에 涇國公이 追贈되었고, 諡號는 武勇이었다.
- 각주 012)
- 각주 013)
- 각주 014)
- 각주 015)
- 각주 016)
색인어
- 이름
- 아로태, 아태(阿台), 타아지백(朶兒只伯), 태태불화, 진무(陳懋), 타아지백, 임예(任禮), 장귀(蔣貴), 조안(趙安), 왕기(王驥), 타아지백, 아태, 타아[지백], 아태, 타아지백
- 지명
- 역집내로(亦集乃路), 감주(甘州), 양주(涼州), 평천(平川), 소무산(蘇武山), 석성(石城), 올로내(兀魯乃), 흑천(黑泉), 조력구(刁力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