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로태와 아들이 위랍특의 습격으로 죽으니 가족들이 조정에 귀부를 청한 글
선덕(宣德)주 001 9년(1434)에, 아로태는 다시 태태불화(脫脫不花)
주 002에게 습격당하여 처자(妻子)는 죽고 가축은 거의 잃었으며, 홀로 아들 실날간(失捏干) 등과 함께 모납산(母納山)
주 003·찰한뇌랄(察罕腦剌)
주 004 등지로 옮겨가 지냈다. 얼마 후 와랄의 태환(脫懽)
주 005
각주 005)

이 아로태와 실날간을 습격하여 죽이니,주 006脫懽(?~1439): Toghon의 音譯으로, 일반적으로 脫歡이라 하며, 綽羅斯氏이다. 馬哈木의 아들로 永樂 14년(1416)에 부친이 죽자 太師의 職을 잇고, 영락 16년(1418)에 明으로부터 順寧王에 冊封되었다. 이어 곧 賢義王, 安樂王의 무리를 겸병하여 瓦剌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可汗位에 오르려 했으나 무리들의 반대를 받아 宣德 8년(1433)에 脫脫不花(Toqto Büqa)를 可汗으로 擁立하였으며, 딸을 脫脫不花에게 시집보내고 太師를 맡아 실권을 장악했다. 1438년에 脫脫不花가 阿台汗을 공격하여 죽임으로 몽골 전체가 실질적으로 脫歡의 控除하에 있게 되었다. 그의 사후 아들 也先이 뒤를 이어 太師가 된 후, 곧 可汗을 칭했다.
각주 006)

이에 아로태의 아들 아복지엄(阿卜只俺)과 손자의 처 속목답사(速木答思) 등이 패하여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중국에] 와서 조정에 귀부하기를 청하였다. 황제는 불쌍히 여겨 그들을 무휼(撫恤)하였다.脫歡이 阿魯台를 죽인 것은 宣德 9년(1434) 4월이다. 『明史紀事本末』 卷20 「設立三衛」 正統 9년 4월條 참조. 阿魯台의 죽음으로 쿠빌라이家의 皇權 복구를 위한 1차 시도는 완전히 실패하였다고 평하고 있다(룩 콴텐, 1984: 418~419). 『殊域周咨錄』에는 瓦剌의 脫歡이 阿魯台를 공격하여 죽인 후에 그 부락을 통솔하고자 하였으나, 민심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바로 元의 후예인 脫脫不花(Toqto Büqa)를 군주로 삼아 漠北에 거주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殊域周咨錄』 卷17 「韃靼」 宣德 9년條 참조).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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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5)
脫懽(?~1439): Toghon의 音譯으로, 일반적으로 脫歡이라 하며, 綽羅斯氏이다. 馬哈木의 아들로 永樂 14년(1416)에 부친이 죽자 太師의 職을 잇고, 영락 16년(1418)에 明으로부터 順寧王에 冊封되었다. 이어 곧 賢義王, 安樂王의 무리를 겸병하여 瓦剌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可汗位에 오르려 했으나 무리들의 반대를 받아 宣德 8년(1433)에 脫脫不花(Toqto Büqa)를 可汗으로 擁立하였으며, 딸을 脫脫不花에게 시집보내고 太師를 맡아 실권을 장악했다. 1438년에 脫脫不花가 阿台汗을 공격하여 죽임으로 몽골 전체가 실질적으로 脫歡의 控除하에 있게 되었다. 그의 사후 아들 也先이 뒤를 이어 太師가 된 후, 곧 可汗을 칭했다.
- 각주 006)
색인어
- 이름
- 아로태, 태태불화(脫脫不花), 실날간(失捏干), 태환(脫懽), 아로태, 실날간, 아로태, 아복지엄(阿卜只俺), 속목답사(速木答思)
- 지명
- 모납산(母納山), 찰한뇌랄(察罕腦剌), 와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