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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아로태가 귀부한 뒤 북방 변경을 엿보고 흥화(興和)를 침입하자 황제가 정벌을 명하니 처자를 데리고 북으로 옮겨 간 설명

  • 국가
    달단(韃靼)
아로태가 조정에 귀부한 것은 와랄에게 괴롭힘을 당해 생활이 곤란하게 되어 남으로 내려가 변경에서 잠시 휴식을 얻으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제가 이를 받아들여 그를 [왕에] 봉하고 어머니와 처(妻)를 모두 왕태부인(王太夫人)·왕부인(王夫人)으로 삼았다.주 001
각주 001)
이때 영락제는 阿魯台를 和寧王으로 책봉하였고, 金帛을 하사하였다. 영락제는 그를 받아들이면서 “虜性黠詐, 勢窮來歸, 非其本心. 然天地之仁, 發育而已, 豈有所擇哉!”라는 언급을 하였다(『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20년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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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간 인구가 늘고 재산을 모았으며, 기르는 가축이 날로 번성하니, 마침내 우리 사신을 업신여겨 그들을 구류하였다. 그들의 조공사신이 돌아갈 때 여러 차례 겁략(劫掠)을 행하였고, 부락(部落) 또한 때때로 와서 북방 변경을 엿보았다.주 002
각주 002)
이에 관련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19년 동10월條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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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 20년(1422) 봄에 [아로태가] 대거 흥화(興和) 주 003
각주 003)
興和: 元 皇慶 원년(1312)에 隆興路를 興和路로 개칭하고 治所를 高原(현재 張北)에 두었다. 지금의 河北 張北, 懷安, 山西 天鎭, 內蒙古 集寧市, 太仆寺旗 지역을 관할하였다. 明初에 興和府로 삼았다가 후에 폐지하였다. 洪武 말에 興和守禦 千戶所를 설치하였고, 永樂 12년(1422)에 阿魯台에게 습격을 받아 함락되어 치소가 宣府(현재 河北 張家口市 宣化)로 옮겨졌다가 淸代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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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침입했다. 이에 [황제는] 조서를 내려 친히 이들을 정벌하였다.주 004
각주 004)
당시 명 조정에서는 阿魯台가 공격하자 北伐을 논의하였는데, 이를 추진하려는 永樂帝에게 方賓 등은 우선 養民에 힘써야 한다는 것과 비축한 군량이 원정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또한 戶部尙書 夏原吉도 大軍을 움직이기에는 軍餉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북방원정을 반대하였다(『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22년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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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로태가 대군이 출정(出征)한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자 그의 어머니와 처가 모두 그를 꾸짖으며 말하기를, “대명(大明) 황제가 어찌 너에게 지겠는가, 필시 반역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아로태가] 군수품과 말·가축을 활란해(闊灤海) 주 005
각주 005)
闊灤海: 현재 內蒙古 呼倫湖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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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전부 버리고, 그의 처자(妻子)를 데리고 곧장 북으로 옮겨갔다. 황제가 그들의 군수품을 불태우고 말과 가축은 거두도록 명하고, 마침내 군대를 되돌렸다.주 006
각주 006)
이 당시 明朝의 阿魯台 정벌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20년條에 보인다. 『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22년條 참조에도 관련된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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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이때 영락제는 阿魯台를 和寧王으로 책봉하였고, 金帛을 하사하였다. 영락제는 그를 받아들이면서 “虜性黠詐, 勢窮來歸, 非其本心. 然天地之仁, 發育而已, 豈有所擇哉!”라는 언급을 하였다(『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20년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2)
    이에 관련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19년 동10월條에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03)
    興和: 元 皇慶 원년(1312)에 隆興路를 興和路로 개칭하고 治所를 高原(현재 張北)에 두었다. 지금의 河北 張北, 懷安, 山西 天鎭, 內蒙古 集寧市, 太仆寺旗 지역을 관할하였다. 明初에 興和府로 삼았다가 후에 폐지하였다. 洪武 말에 興和守禦 千戶所를 설치하였고, 永樂 12년(1422)에 阿魯台에게 습격을 받아 함락되어 치소가 宣府(현재 河北 張家口市 宣化)로 옮겨졌다가 淸代에 폐지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당시 명 조정에서는 阿魯台가 공격하자 北伐을 논의하였는데, 이를 추진하려는 永樂帝에게 方賓 등은 우선 養民에 힘써야 한다는 것과 비축한 군량이 원정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또한 戶部尙書 夏原吉도 大軍을 움직이기에는 軍餉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북방원정을 반대하였다(『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22년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5)
    闊灤海: 현재 內蒙古 呼倫湖를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006)
    이 당시 明朝의 阿魯台 정벌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20년條에 보인다. 『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22년條 참조에도 관련된 내용이 있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아로태, 아로태, 아로태, 아로태
지명
와랄, 흥화(興和), 활란해(闊灤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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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로태가 귀부한 뒤 북방 변경을 엿보고 흥화(興和)를 침입하자 황제가 정벌을 명하니 처자를 데리고 북으로 옮겨 간 설명 자료번호 : jo.k_0024_0327_0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