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가 기국공 구복(邱福) 등으로 하여금 공격을 명하였는데 적을 가벼이 여겨 참패를 당한 내용
이듬해(1409) 그 부하인주 001
완자첩목아(完者帖木兒)등 22명을 붙잡았는데, 황제가 이로 인해 다시 급사중(給事中)주 002
곽기(郭驥)에게 서신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그런데] 곽기가 피살되자주 003 황제가 분노하였다.주 004 가을에 기국공(淇國公) 구복(丘福)
주 005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무성후(武城侯) 왕총(王聰)
주 006
각주 006)

·동안후(同安侯) 화진(火眞)에게 그를 보좌케 하였으며, 정안후(靖安侯) 왕충(王忠)·안평후(安平侯) 이원(李遠)
주 007을 좌·우 참장으로 삼아, 정예 기병(騎兵) 10만을 이끌고 북방을 토벌하도록 명하고, “기회를 잃지 말고, 가볍게 적을 공격하지 말고, 한번 공격하여 승리하지 못하면 기다렸다가 다시 공격하도록 하라”고 유(諭)하였다.주 008 당시 본아실리는 이미 와랄에게 습격을 받아 패하여, 아로태와 함께 여구하(臚朐河)
주 009로 옮겨가 지내고 있었다.주 010
구복이 기병 1천을 이끌고 먼저 달려가 유병(遊兵)을 만나 격파(擊破)하였다. 군대가 아직 집결하지 않았는데도 구복이 승세를 타 강을 건너 적을 쫓으니, 적은 곧 패한 척하며 군대를 이끌고 갔다. 여러 장수들이 황제의 명으로 구복을 제지하였지만, 구복이 듣지 않았다. 적의 무리가 몰래 이르러 그들(구복의 군대)을 포위하여, 다섯 장군이 모두 죽었다. 황제가 더욱 노하였다.주 011
王聰(1362~1409): 巴河鎭 사람으로 明代 將軍이다. 왕총은 농민 출신으로 팔힘이 뛰어났으며, 燕王의 부하로 지략과 용기를 겸비하여 전술에 능했다. 洪武 29년(1396) 연왕을 따라 변경을 순시하여 軍功을 쌓아 都指揮使로 승진하였다. ‘靖難之役’ 당시 武城侯에 봉해졌다. 永樂 7년(1409) 征虜大將軍 丘福을 따라 出征하여 本雅失里와 交戰했을 때, 본아실리가 패배를 가장하고 도망쳐 구복이 추격하였는데 왕총이 타타르의 계책을 알고 만류하였으나 구복이 듣지 않아 도중에 매복을 만나 전사하였다. 유해를 수습하지 못하고 후에 비를 세우고 漳國公으로 追封되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王聰(1362~1409): 巴河鎭 사람으로 明代 將軍이다. 왕총은 농민 출신으로 팔힘이 뛰어났으며, 燕王의 부하로 지략과 용기를 겸비하여 전술에 능했다. 洪武 29년(1396) 연왕을 따라 변경을 순시하여 軍功을 쌓아 都指揮使로 승진하였다. ‘靖難之役’ 당시 武城侯에 봉해졌다. 永樂 7년(1409) 征虜大將軍 丘福을 따라 出征하여 本雅失里와 交戰했을 때, 본아실리가 패배를 가장하고 도망쳐 구복이 추격하였는데 왕총이 타타르의 계책을 알고 만류하였으나 구복이 듣지 않아 도중에 매복을 만나 전사하였다. 유해를 수습하지 못하고 후에 비를 세우고 漳國公으로 追封되었다.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010)
- 각주 011)
색인어
- 이름
- 완자첩목아(完者帖木兒), 곽기(郭驥), 곽기, 구복(丘福), 왕총(王聰), 화진(火眞), 왕충(王忠), 이원(李遠), 본아실리, 아로태, 구복, 구복, 구복, 구복
- 지명
- 와랄, 여구하(臚朐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