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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황제가 기국공 구복(邱福) 등으로 하여금 공격을 명하였는데 적을 가벼이 여겨 참패를 당한 내용

  • 국가
    달단(韃靼)
이듬해(1409) 그 부하인주 001
각주 001)
『太宗實錄』 卷121 永樂 9년 11월 庚辰條에는 “韃靼哈兒哈孫完者帖木兒”라고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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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자첩목아(完者帖木兒)등 22명을 붙잡았는데, 황제가 이로 인해 다시 급사중(給事中)주 002
각주 002)
給事中: 六科에 속한 從七品 관직으로 시종과 6부 백관들의 감찰을 담당하였다. 左·右給事中이 1명씩 있고, 위로는 都給事中(正七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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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기(郭驥)에게 서신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그런데] 곽기가 피살되자주 003
각주 003)
이듬해 명 조정에서는 給事中 郭驥에게 璽書를 가지고 가서 本雅失里를 효유하여 通好하고자 하였으나, 살해되었다(『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7년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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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분노하였다.주 004
각주 004)
永樂 7년(1409) 4월에 都指揮 金塔卜歹과 給事中 郭驥를 本雅失里에게 보냈는데, 郭驥가 살해당했다.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7년 하4월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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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기국공(淇國公) 구복(丘福) 주 005
각주 005)
丘福(1343~1409): 濠州(지금의 安徽 鳳陽)사람이다. 明 永樂 시기의 將領으로, 일개 병사에서 시작하여 ‘靖難之役’ 이후 淇國公에 봉해졌다. 후에 戰鬪에서 패하여 奪爵되고, 가족과 함께 海南島로 이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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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무성후(武城侯) 왕총(王聰) 주 006
각주 006)
王聰(1362~1409): 巴河鎭 사람으로 明代 將軍이다. 왕총은 농민 출신으로 팔힘이 뛰어났으며, 燕王의 부하로 지략과 용기를 겸비하여 전술에 능했다. 洪武 29년(1396) 연왕을 따라 변경을 순시하여 軍功을 쌓아 都指揮使로 승진하였다. ‘靖難之役’ 당시 武城侯에 봉해졌다. 永樂 7년(1409) 征虜大將軍 丘福을 따라 出征하여 本雅失里와 交戰했을 때, 본아실리가 패배를 가장하고 도망쳐 구복이 추격하였는데 왕총이 타타르의 계책을 알고 만류하였으나 구복이 듣지 않아 도중에 매복을 만나 전사하였다. 유해를 수습하지 못하고 후에 비를 세우고 漳國公으로 追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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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후(同安侯) 화진(火眞)에게 그를 보좌케 하였으며, 정안후(靖安侯) 왕충(王忠)·안평후(安平侯) 이원(李遠) 주 007
각주 007)
李遠(1364~1409): 安徽 懷遠 사람으로, 아버지의 직함을 세습하여 蔚州衛 指揮僉事가 되었다. 燕兵이 蔚州를 공격하여 투항하고, 이후 成祖 시기에 공을 쌓아 都督僉事가 되고 安平侯에 봉해졌다. 永樂 7년(1409) 丘福을 따라 변방을 나가 臚朐河에 도착하여 구복에게 적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諫하였으나 듣지 않아 패하였다. 戰死 후 莒國公에 追封되었고 諡號는 忠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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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좌·우 참장으로 삼아, 정예 기병(騎兵) 10만을 이끌고 북방을 토벌하도록 명하고, “기회를 잃지 말고, 가볍게 적을 공격하지 말고, 한번 공격하여 승리하지 못하면 기다렸다가 다시 공격하도록 하라”고 유(諭)하였다.주 008
각주 008)
이에 관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7년 추7월條 참조. 『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7년條에도 본문의 공격을 지시하는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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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본아실리는 이미 와랄에게 습격을 받아 패하여, 아로태와 함께 여구하(臚朐河) 주 009
각주 009)
臚朐河: 몽골 肯特山 東麓에서 발원하여 중원으로 흐르는 克魯倫河의 古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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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옮겨가 지내고 있었다.주 010
각주 010)
이때 丘福은 臚朐河에 이르러 사로잡은 포로를 심문하여 本雅失里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군사작전을 실행하였다(『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7년 8월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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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복이 기병 1천을 이끌고 먼저 달려가 유병(遊兵)을 만나 격파(擊破)하였다. 군대가 아직 집결하지 않았는데도 구복이 승세를 타 강을 건너 적을 쫓으니, 적은 곧 패한 척하며 군대를 이끌고 갔다. 여러 장수들이 황제의 명으로 구복을 제지하였지만, 구복이 듣지 않았다. 적의 무리가 몰래 이르러 그들(구복의 군대)을 포위하여, 다섯 장군이 모두 죽었다. 황제가 더욱 노하였다.주 011
각주 011)
丘福이 本雅失里를 공격하다 全滅을 당한 구체적인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7년 8월條 참조. 당시 安平侯 李遠, 武城侯 王聰 등이 극력 말렸지만 붙잡은 諜者의 말을 가볍게 믿고 공격하다 전멸을 당하였다. 이 패배에 대해서 永樂帝는 皇太子에게, “比遣丘福等率兵北征, 皆沒於虜. 辱國如此, 若不再舉殄滅之, 邊禍未已. 來春決意親征, 凡國家之事爾當愼重, 不可忽也”라고 언급하였다(『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7년 9월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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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太宗實錄』 卷121 永樂 9년 11월 庚辰條에는 “韃靼哈兒哈孫完者帖木兒”라고 나와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給事中: 六科에 속한 從七品 관직으로 시종과 6부 백관들의 감찰을 담당하였다. 左·右給事中이 1명씩 있고, 위로는 都給事中(正七品)이 있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이듬해 명 조정에서는 給事中 郭驥에게 璽書를 가지고 가서 本雅失里를 효유하여 通好하고자 하였으나, 살해되었다(『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7년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4)
    永樂 7년(1409) 4월에 都指揮 金塔卜歹과 給事中 郭驥를 本雅失里에게 보냈는데, 郭驥가 살해당했다.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7년 하4월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5)
    丘福(1343~1409): 濠州(지금의 安徽 鳳陽)사람이다. 明 永樂 시기의 將領으로, 일개 병사에서 시작하여 ‘靖難之役’ 이후 淇國公에 봉해졌다. 후에 戰鬪에서 패하여 奪爵되고, 가족과 함께 海南島로 이주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6)
    王聰(1362~1409): 巴河鎭 사람으로 明代 將軍이다. 왕총은 농민 출신으로 팔힘이 뛰어났으며, 燕王의 부하로 지략과 용기를 겸비하여 전술에 능했다. 洪武 29년(1396) 연왕을 따라 변경을 순시하여 軍功을 쌓아 都指揮使로 승진하였다. ‘靖難之役’ 당시 武城侯에 봉해졌다. 永樂 7년(1409) 征虜大將軍 丘福을 따라 出征하여 本雅失里와 交戰했을 때, 본아실리가 패배를 가장하고 도망쳐 구복이 추격하였는데 왕총이 타타르의 계책을 알고 만류하였으나 구복이 듣지 않아 도중에 매복을 만나 전사하였다. 유해를 수습하지 못하고 후에 비를 세우고 漳國公으로 追封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7)
    李遠(1364~1409): 安徽 懷遠 사람으로, 아버지의 직함을 세습하여 蔚州衛 指揮僉事가 되었다. 燕兵이 蔚州를 공격하여 투항하고, 이후 成祖 시기에 공을 쌓아 都督僉事가 되고 安平侯에 봉해졌다. 永樂 7년(1409) 丘福을 따라 변방을 나가 臚朐河에 도착하여 구복에게 적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諫하였으나 듣지 않아 패하였다. 戰死 후 莒國公에 追封되었고 諡號는 忠壯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8)
    이에 관한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7년 추7월條 참조. 『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7년條에도 본문의 공격을 지시하는 내용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9)
    臚朐河: 몽골 肯特山 東麓에서 발원하여 중원으로 흐르는 克魯倫河의 古稱이다. 바로가기
  • 각주 010)
    이때 丘福은 臚朐河에 이르러 사로잡은 포로를 심문하여 本雅失里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군사작전을 실행하였다(『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7년 8월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11)
    丘福이 本雅失里를 공격하다 全滅을 당한 구체적인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21 「親征漠北」 永樂 7년 8월條 참조. 당시 安平侯 李遠, 武城侯 王聰 등이 극력 말렸지만 붙잡은 諜者의 말을 가볍게 믿고 공격하다 전멸을 당하였다. 이 패배에 대해서 永樂帝는 皇太子에게, “比遣丘福等率兵北征, 皆沒於虜. 辱國如此, 若不再舉殄滅之, 邊禍未已. 來春決意親征, 凡國家之事爾當愼重, 不可忽也”라고 언급하였다(『殊域周咨錄』 卷17 「韃靼」 永樂 7년 9월條 참조).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완자첩목아(完者帖木兒), 곽기(郭驥), 곽기, 구복(丘福), 왕총(王聰), 화진(火眞), 왕충(王忠), 이원(李遠), 본아실리, 아로태, 구복, 구복, 구복, 구복
지명
와랄, 여구하(臚朐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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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기국공 구복(邱福) 등으로 하여금 공격을 명하였는데 적을 가벼이 여겨 참패를 당한 내용 자료번호 : jo.k_0024_0327_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