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공 부우덕(傅友德) 등에게 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정벌하였는데, 적은 쇠퇴하여 부족의 우두머리들이 서로 싸우고 귀력적(鬼力赤)에 이르러 달단이라 칭한 설명
[홍무] 23년(1390) 봄에, 영국공(潁國公) 부우덕(傅友德) 등에게 명하여 북평(北平)의 군대를 이끌고 연왕(燕王)주 001을 따르게 하고, 정원후 왕필 등은 산서(山西)의 군대를 이끌고 진왕(晉王)주 002
각주 002)

을 따르게 하여, 교주 및 내아불화·아노첩목아(阿魯帖木兒) 등을 정벌하게 하였다.주 003 연왕이 고북구(古北口)
주 004를 나와 내아불화가 이도(迤都)
주 005에 군영을 만들었다는 것을 정탐하여 알아차리고, 큰 눈이 내림에도 [이를] 무릅쓰고 빠르게 달려 적과의 거리가 하나의 여울을 사이에 두고 있었으나 적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먼저 지휘(指揮)주 006
관동(觀童)을 파견했는데, 관동은 예전에 내아불화와 사이가 좋아 보자마자 서로 붙잡고 울었다. 잠시 뒤 대군(大軍)이 그 군영을 압박하자 내아불화가 놀라 도망가려고 하였으나 관동이 이를 제지하고 [그를] 데리고 [연]왕을 알현하니, [연왕이] 음식을 하사하여 위로하고 효유(曉諭)한 뒤 돌려보냈다. 내아불화는 과분한 대접에 기뻐하였고 마침내 교주 등과 함께 와서 투항하였다.주 007 이후에 내아불화 등이 모반(謀叛)으로 주살(誅殺)되자, 적은 더욱 쇠퇴하였다. 태조는 또한 연(燕)·진(晉) 등 여러 왕을 봉하여 변경의 번진(藩鎭)으로 삼았고,주 008晉王: 明 太祖 朱元璋의 3子인 朱棡(1358~1398)을 말한다. 洪武 3년(1370) 4월에 晉王에 봉해지고, 13년(1378)에 山西 太原에 就藩하였다. 朱棡은 書學에 뛰어나고 騎射를 즐겼으며 謀略이 있었다. 명초에 태조가 邊防에 고심하여 여러 아들에게 兵事에 능숙하게 하고자 하였고 諸王에 봉하여 軍務를 담당케 했는데, 晉王과 燕王이 특히 뛰어났다. 여러 차례 將兵을 이끌고 出塞하고 屯田을 개간하도록 하여 明初 북쪽 邊防을 확고하게 하는데 공헌이 많았다. 宋國公 馮勝, 潁國公 傅友德 등이 모두 진왕의 節制를 받았다.
각주 008)

매년 대장(大將)을 파견하여 북쪽 변강 지역을 순행(巡行)하도록 하였으며, 제위(諸衛) 병졸의 둔전(屯田)주 009을 감독하게 하고, 근면하고 신중하게 경계하여 적구(敵寇)가 오면 바로 그들을 패퇴시키도록 했다. 적은 탈고사첩목아 이후부터 부족의 우두머리들이 어지럽게 서로 싸워 오대(五代)가 전해져 곤첩목아(坤帖木兒, 1377~1402; 재위 1400~1402)주 010에 이르렀는데, 모두 피살되어 다시는 황제의 연호를 알지 못한다.주 011明 太祖의 諸王分封策을 말한다. 洪武帝는 수도가 남쪽에 치우쳐 있고, 몽골고원에 여전히 원의 잔존세력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북방 변경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북변 군대의 통수권을 在地의 장군들에게 위임한다면, 唐 시기의 藩鎭처럼 그들이 중앙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게 될 위험성이 있었다. 그래서 洪武帝는 북방 군사상의 취약성을 보완하고 해결하기 위해 북방 및 지방 요지에 子弟들을 분봉하는 제왕분봉책을 실시하였다. 제왕분봉책은 皇子들의 제위 계승 싸움을 막는 간접적인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洪武帝 사후 황실의 내란을 유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分封과 관련된 내용이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30년條에도 있다.
각주 011)

귀력적(鬼力赤, ?~1408; 재위 1402~1408)주 012『明史』에는 帝號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였으나, 和田淸은 『東亞史硏究』(蒙古篇)에서 『蒙古原流』를 근거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즉, 제1대 Togo’an Temür(妥權帖木兒, 順帝), 제2대 Ayursiridara(愛猷識理達臘, 昭宗), 제3대 Usqal(脫古思帖木兒), 제4대 Engke Joriktu(恩克卓里克圖), 제5대 Elbek(額勒伯克), 제6대 Gün Temür(坤帖木兒). 그런데 이는 『明史』의 “敵自脫古思帖木兒後, 部帥紛拏, 五傳至坤帖木兒”와 인원수가 맞지 않는다. 이에 대해 岡田英弘은 Engke Joriktu를 두 사람으로 보아 Joriktu可汗 뒤에 Engke可汗이 계승했다고 한다(岡田英弘, 1965).
각주 012)

이라는 자가 제위(帝位)를 찬탈(簒奪)하여 가한(可汗)이라고 칭하고 국호(國號)를 버리고 마침내 달단(韃靼)이라 칭했다고 한다.鬼力赤(?~1408): 建文 4년(1402)에 北元 湣宗 順天皇帝 坤帖木兒(Gün Temür)를 죽이고, 阿魯台 등에게 옹립되어 大汗이 되었다. 그는 北元의 國號를 폐지하고 韃靼(Tatar)可汗이라 칭했으나 正統 汗의 後裔가 아니었기 때문에 明朝의 支持를 받을 필요가 있어 명조와 通交했다. 이로 인해 그는 蒙古 各部의 불만을 샀으며, 결국 1408년에 知院인 阿魯台에게 피살되었다. 그의 尊號는 兀雷帖木兒汗(Örüg Temür)이며, 그가 피살된 후 坤帖木兒(Gün Temür)의 동생 本雅失里(尊號는 完者帖木兒汗, Öljei Temür Khan)가 영입되어 大汗이 되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 각주 005)
-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明 太祖의 諸王分封策을 말한다. 洪武帝는 수도가 남쪽에 치우쳐 있고, 몽골고원에 여전히 원의 잔존세력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북방 변경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북변 군대의 통수권을 在地의 장군들에게 위임한다면, 唐 시기의 藩鎭처럼 그들이 중앙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게 될 위험성이 있었다. 그래서 洪武帝는 북방 군사상의 취약성을 보완하고 해결하기 위해 북방 및 지방 요지에 子弟들을 분봉하는 제왕분봉책을 실시하였다. 제왕분봉책은 皇子들의 제위 계승 싸움을 막는 간접적인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洪武帝 사후 황실의 내란을 유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分封과 관련된 내용이 『殊域周咨錄』 卷16 「韃靼」 洪武 30년條에도 있다.
- 각주 009)
- 각주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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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1)
『明史』에는 帝號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였으나, 和田淸은 『東亞史硏究』(蒙古篇)에서 『蒙古原流』를 근거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즉, 제1대 Togo’an Temür(妥權帖木兒, 順帝), 제2대 Ayursiridara(愛猷識理達臘, 昭宗), 제3대 Usqal(脫古思帖木兒), 제4대 Engke Joriktu(恩克卓里克圖), 제5대 Elbek(額勒伯克), 제6대 Gün Temür(坤帖木兒). 그런데 이는 『明史』의 “敵自脫古思帖木兒後, 部帥紛拏, 五傳至坤帖木兒”와 인원수가 맞지 않는다. 이에 대해 岡田英弘은 Engke Joriktu를 두 사람으로 보아 Joriktu可汗 뒤에 Engke可汗이 계승했다고 한다(岡田英弘,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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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2)
鬼力赤(?~1408): 建文 4년(1402)에 北元 湣宗 順天皇帝 坤帖木兒(Gün Temür)를 죽이고, 阿魯台 등에게 옹립되어 大汗이 되었다. 그는 北元의 國號를 폐지하고 韃靼(Tatar)可汗이라 칭했으나 正統 汗의 後裔가 아니었기 때문에 明朝의 支持를 받을 필요가 있어 명조와 通交했다. 이로 인해 그는 蒙古 各部의 불만을 샀으며, 결국 1408년에 知院인 阿魯台에게 피살되었다. 그의 尊號는 兀雷帖木兒汗(Örüg Temür)이며, 그가 피살된 후 坤帖木兒(Gün Temür)의 동생 本雅失里(尊號는 完者帖木兒汗, Öljei Temür Khan)가 영입되어 大汗이 되었다.
색인어
- 이름
- 부우덕(傅友德), 왕필, 교주, 내아불화, 아노첩목아(阿魯帖木兒), 내아불화, 관동(觀童), 관동, 내아불화, 내아불화, 관동, 내아불화, 교주, 내아불화, 태조, 탈고사첩목아, 곤첩목아, 坤帖木兒, 귀력적, 鬼力赤
- 지명
- 북평(北平), 산서(山西), 고북구(古北口), 이도(迤都), 연(燕), 진(晉), 달단(韃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