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족에 대한 안정책
일찍이 여족의 근심을 제거한 일을 살펴본 적이 있는데, 그 가운데 대규모 용병은 두 차례였습니다. 원나라 지원(至元)주 001 신묘(辛卯)주 002년(1291)에 일찍이 그 소굴을 깨끗이 소탕한 뒤 오지산(五指山)주 003에서 돌에 [공훈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 때 비록 둔전부(屯田府)를 건립하고 정안(定安)·회동(會同)의 두 현을 세웠지만 안타깝게도 그 경략이 미진하였고, 그런 까닭에 얻은 바의 것을 곧바로 잃어버렸습니다. 가정(嘉靖) 경자(庚子)년주 004(1540)에 다시 일찍이 크게 군대를 바다 건너 파견하여 [구적의] 산속의 소굴을 공격하여 파괴하였는데,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이에 논의하는 자들은 덕하(德霞)의 지세가 평탄하고 넓다면서 성읍을 건설하고 새로 온 백성을 불러 모아 경작하고 수비하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미 [그대로] 거행했지만 중도에 폐기되어 얼마 후에는 구적의 자산이 되어버려 다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삼가 세 가지 사항으로 나누어 진술합니다.
- 각주 001)
- 각주 002)
- 각주 003)
- 각주 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