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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여족 부남사의 반란

  • 국가
    광동경주부(廣東瓊州府)
[홍치] 15년(1502)에, 여족의 구적 부남사(符南蛇) 주 001
각주 001)
符南蛇(1465∼1502): 符蚺이라고도 한다. 儋州 七坊峒(지금의 海南省 儋縣 海頭鎭 七坊村) 출신이다. 明代 黎族 반란군의 領袖이다. 대대로 경작과 수렵생활을 영위했다. 符南蛇는 평소에 창과 곤봉에 능숙했고 특히 활쏘기를 잘 했는데, 峒人 符那攬 등과 結義兄弟하면서 현지에서 자못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弘治 연간(1488∼1505)에 瓊州에 水害와 旱災가 일어났지만, 張桓과 余浚 두 知府가 백성의 어려움을 고려하지 않고 여전히 가렴주구를 하여 크게 민심을 잃었다. 수많은 黎族 災民들이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여 弘治 14년(1501) 여름에 符南蛇의 지휘 하에 반란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海南島의 절반 가량이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明의 官軍 2만여 명이 동원되어 5路로 나누어 반란군의 거점을 향해 진격했다. 반란군은 지리적 利點을 최대한 이용하여 관군 3,000여 명을 섬멸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兩廣을 鎭守하던 ‘征瑤將軍’毛稅로 하여금 10만의 대군을 데리고 가서 征討하도록 명하였다. 반란군은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홍치 15년(1502) 符南蛇는 전투 과정에서 화살을 맞고 부상당했고, 끝내는 강물 속으로 떨어져 사망하였다. 官軍은 七坊峒을 점령했고, 그해 12월에 반란군은 결국 진압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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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수하던 군대가 그를 토벌했지만 공략하지는 못하였다. 호부주사(戶部主事) 풍옹(馮顒) 주 002
각주 002)
馮顒: 생졸년 미상. 瓊山 출신이다. 弘治 9년(1496)에 進士로 급제하여 監察御史로 제수되었다. 官軍이 符南蛇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가담하여 尙書 劉大夏의 칭찬을 받았다. 正德 초년에 宦官 高金과 함께 涇王이 占有한 莊園을 현지를 방문하여 철저히 조사하였다. 후에 劉瑾에게 미움을 받아 무고를 당해 결국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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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주하여 아뢰기를, “부(府)의 치소(治所)는 대해(大海)의 남쪽에 있습니다. 오지산동(五指山洞)이라는 곳에 여족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습니다. 그 외에 3개의 주(州)·10개의 현(縣)·1개의 위(衛)·11개의 소(所)가 있습니다. 영락 연간(1403∼1424)에 토관의 주현을 두어 그들을 통치하였는데, 여족 백성들이 예전 그대로 편안하게 생활하였습니다. 성화 연간(1465∼1487)에 여족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세 차례에 걸쳐 토벌하였습니다. 장령들이 공을 탐하여 무고한 자들을 살육하였습니다. 홍치 연간(1488∼1505)에 이르러 지부(知府) 장환(張桓)·여준(余浚)이 탐욕스럽고 잔인하게 가렴주구를 하여 크게 여족의 민심을 잃어 오늘날 부남사의 화를 양성(釀成)하였습니다. 신은 본디 현지인으로서 자못 사정의 형세를 알고 있으니, 청컨대 예전처럼 원래 설치하여 응당 계승할 토관의 아들들을 찾아 그들로 하여금 각각 토병(土兵)을 모으도록 한다면 수만 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진순관(鎭巡官)의 통제를 받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수악(首惡) 부남사를 능히 체포할 자가 있다면 그 조상의 관직을 회복시키시기 바랍니다. 만족(蠻族)으로써 만족을 치게 한다면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성공의] 실적을 아뢸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홍치제는] 조서를 내려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하였다.주 003
각주 003)
『孝宗實錄』卷193 弘治 15년 11월 壬申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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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符南蛇(1465∼1502): 符蚺이라고도 한다. 儋州 七坊峒(지금의 海南省 儋縣 海頭鎭 七坊村) 출신이다. 明代 黎族 반란군의 領袖이다. 대대로 경작과 수렵생활을 영위했다. 符南蛇는 평소에 창과 곤봉에 능숙했고 특히 활쏘기를 잘 했는데, 峒人 符那攬 등과 結義兄弟하면서 현지에서 자못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弘治 연간(1488∼1505)에 瓊州에 水害와 旱災가 일어났지만, 張桓과 余浚 두 知府가 백성의 어려움을 고려하지 않고 여전히 가렴주구를 하여 크게 민심을 잃었다. 수많은 黎族 災民들이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여 弘治 14년(1501) 여름에 符南蛇의 지휘 하에 반란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海南島의 절반 가량이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明의 官軍 2만여 명이 동원되어 5路로 나누어 반란군의 거점을 향해 진격했다. 반란군은 지리적 利點을 최대한 이용하여 관군 3,000여 명을 섬멸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兩廣을 鎭守하던 ‘征瑤將軍’毛稅로 하여금 10만의 대군을 데리고 가서 征討하도록 명하였다. 반란군은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홍치 15년(1502) 符南蛇는 전투 과정에서 화살을 맞고 부상당했고, 끝내는 강물 속으로 떨어져 사망하였다. 官軍은 七坊峒을 점령했고, 그해 12월에 반란군은 결국 진압되고 말았다. 바로가기
  • 각주 002)
    馮顒: 생졸년 미상. 瓊山 출신이다. 弘治 9년(1496)에 進士로 급제하여 監察御史로 제수되었다. 官軍이 符南蛇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가담하여 尙書 劉大夏의 칭찬을 받았다. 正德 초년에 宦官 高金과 함께 涇王이 占有한 莊園을 현지를 방문하여 철저히 조사하였다. 후에 劉瑾에게 미움을 받아 무고를 당해 결국 자살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3)
    『孝宗實錄』卷193 弘治 15년 11월 壬申條 참조.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부남사(符南蛇), 풍옹(馮顒), 장환(張桓), 여준(余浚), 부남사, 부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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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족 부남사의 반란 자료번호 : jo.k_0024_0319_0090_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