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광순무 섭성에게 경주를 위무할 것을 명함
천순(天順)주 001 5년(1461)에, 양광(兩廣) 순무(巡撫) 섭성(葉盛)
주 002
각주 002)

에게 칙서를 내려 해남 구적 500여 명이 성지(城池)를 점거하였다고 하니, 급히 속도를 내어 경주에 이르면 기회를 보아 위무하고 체포하여 소란이 널리 뻗어가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주 003
葉盛(1420∼1474): 字는 與中, 號는 蛻庵, 自號는 白泉, 別號는 涇東道人, 澱東老漁이다. 江蘇 崑山 출신이다. 正統 10년(1445)에 進士로 급제하여 兵科給事中이 되었다. 정통 14년(144) 오이라트의 에센군이 土木堡에서 英宗을 생포한 후 北京으로 육박해오자 葉盛은 于謙을 도와 重兵을 동원하여 城外에서 오이라트군을 격퇴하였다. 이후 都給事中으로 승진하였다. 뒤에는 山西右參政으로 발탁되어 宣府鎭(지금의 山西 大同)의 錢餉 조달을 감독하였다. 景泰 3년(1452) 巡邊御史 李秉의 추천으로 獨石 등 4城의 軍務를 보좌하였다. 任職 5년 동안 吏治를 정돈하고 武備에 힘썼으며 경지의 개간에 노력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天順 2년(1458) 4월에는 都察院右僉都御史로 발탁되어 兩廣을 巡撫하였다. 天順 7년(1463)에 京師로 소환되어 左僉都御史가 되어 宣府鎭을 巡撫하였다. 成化 3년(1467)에 禮部右侍郞으로 승진하였다. 成化 8년(1472)에 吏部左侍郞으로 옮겼다. 成化 10년(1474)에 病死하였다. 文壯이란 諡號를 받았다.
- 각주 001)
-
각주 002)
葉盛(1420∼1474): 字는 與中, 號는 蛻庵, 自號는 白泉, 別號는 涇東道人, 澱東老漁이다. 江蘇 崑山 출신이다. 正統 10년(1445)에 進士로 급제하여 兵科給事中이 되었다. 정통 14년(144) 오이라트의 에센군이 土木堡에서 英宗을 생포한 후 北京으로 육박해오자 葉盛은 于謙을 도와 重兵을 동원하여 城外에서 오이라트군을 격퇴하였다. 이후 都給事中으로 승진하였다. 뒤에는 山西右參政으로 발탁되어 宣府鎭(지금의 山西 大同)의 錢餉 조달을 감독하였다. 景泰 3년(1452) 巡邊御史 李秉의 추천으로 獨石 등 4城의 軍務를 보좌하였다. 任職 5년 동안 吏治를 정돈하고 武備에 힘썼으며 경지의 개간에 노력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天順 2년(1458) 4월에는 都察院右僉都御史로 발탁되어 兩廣을 巡撫하였다. 天順 7년(1463)에 京師로 소환되어 左僉都御史가 되어 宣府鎭을 巡撫하였다. 成化 3년(1467)에 禮部右侍郞으로 승진하였다. 成化 8년(1472)에 吏部左侍郞으로 옮겼다. 成化 10년(1474)에 病死하였다. 文壯이란 諡號를 받았다.
- 각주 003)
색인어
- 이름
- 섭성(葉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