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헌의 계승과 반란에 대한 출정
잠장이 죽은 뒤 차자(次子) 잠헌(岑瓛)이 계승하였다. 가정 4년(1525)에, 제독 성응기(盛應期)
주 001
각주 001)

가 잠헌이 이전에 반역을 꾀한 잠맹을 도와 사성(泗城)을 공격했기 때문에 [잠헌] 스스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 군대를 내어서 구적(寇賊)을 토벌해 스스로 속죄하도록 허락하자고 하니, [가정제가] 이를 인준하였다. [가정] 14년(1535)에 전주(田州)의 노소(盧蘇)가 반란을 일으키자, 잠헌과 힘을 합쳐 진안부를 공격하였다. 잠헌이 진안부를 격파하고, 아울러 잠진보(岑眞寶) 부모의 분묘를 파헤쳤다. 이 일이 보고되자, 관대(冠帶)주 002를 벗기되 공을 세워 속죄할 것을 허락하였다. 잠헌은 후에 관군을 따라 교지(交阯)로 출정했는데,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아들 잠대(岑代)가 계승하였는데, 만력 연간(1573∼1619)에 마필을 진헌하는 데 기한을 어겼다는 이유로 하사품을 반으로 줄여 지급하였다.盛應期(1474∼1535): 字는 思征이고, 號는 值庵이며, 南直隷 蘇州府 吳江縣(지금은 江蘇省 소속) 사람으로, 盛寅의 四代孫이다. 弘治 6년(1493)에 進士에 급제하여 都水主事에 제수되어 山東省 濟寧의 운하갑문을 관리하는 직책을 담당하였다. 이때 太監 李廣의 家人이 私鹽을 밀거래하러 濟寧에 이르렀다가 盛應期를 두려워하여 소금을 물에 빠뜨리고 갔다. 이 일로 환관들과의 사이가 틀어져 工部侍郞으로 승진하였으나 宦官들의 모함으로 투옥되었다가 雲南의 驛丞으로 유배당했다. 이후 곧 祿豊知縣으로 옮겼다가 正德 초년에 雲南僉事가 되었다. 雲南 武定의 土知府 鳳應이 사망하자 그의 처가 知府의 일을 장악하였는데, 아들 朝鳴이 주위를 노략질하였다. 이에 盛應期가 홀로 그 地境에 들어갔는데, 母子가 그를 두려워하여 노략질을 멈추고 돌아갔다. 그는 鳳氏의 변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이들의 品秩을 낮추고 流官을 설치해야 한다고 조정에 상주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御史張璞, 副使 晁必登과 함께 鎭守太監 梁裕가 발호하는 것을 제지했는데, 이에 앙심을 품은 梁裕가 세 사람을 탄핵하여 이들은 모두 투옥되고 張璞은 고문당해 죽었다. 이때 마침 乾淸宮에 불이 나서 황제가 죄인들을 사면하는 조치를 취해져, 盛應期는 복직되었고 陝西右布政使로 승진하였다. 그 후 右副都御史兼四川巡撫로 발탁되어 天全六番招討使 高文林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이 무렵 또 泉江 僰蠻 普法惡이 반란을 일으켰고 富順의 奸民 謝文禮, 文義가 합세했는데, 普法惡이 죽자 그는 指揮 何卿 등으로 하여금 謝文禮, 文義를 토벌하도록 하여 소란을 진압했다. 이후 그는 嘉靖 2년(1523)에는 江西 巡撫가 되었는데, 당시 江西에서는 宸濠의 반란이 진압되었지만 아직 그 후유증에서 미처 회복되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수십만 緡錢의 雜調 징수를 면제해주고, 南京으로 보내는 쌀 47만 석과 은 20만 냥을 강서에 存留시켜 굶주린 백성들에게 먹여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그리고 휘하의 府에 명령하여 흉년에 대비해 곡식 100여 만 석을 비축하게 하였다. 이후 곧 그는 兵部右侍郞兼總督兩廣軍務의 벼슬을 제수받아 廣東에 이르러 撫寧侯 朱麒와 함께 參將 李璋 등을 督率하여 思恩 土目 劉召를 토벌하였다. 조정에서 岑猛을 크게 토벌하자는 의론이 일어났는데, 그는 ‘方略七事’를 조목조목 언급하면서 兩廣의 병사들은 쇠약하여 전투에 동원할 수 없다고 상주하였다. 이에 撫寧侯 朱麒가 분개했으며, 御史 許中이 盛應期가 포학하다며 탄핵하였고, 朱麒도 이에 응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또 御史 鄭洛書가 다시 盛應期가 權貴들과 결탁하고 뇌물을 받았다고 탄핵하였다. 당시 그는 工部侍郞으로 자리를 옮긴 뒤였는데, 질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嘉靖 6년(1527)에 黄河의 물이 크게 넘쳐 漕運하는 水路로 흘러들어와 沛北 廟道口일대 수십 리가 진흙으로 막혀 조운선의 왕래가 단절되었으나 侍郞 章拯은 이를 복구하지 못하였다. 尙書 胡世寧, 詹事 霍韜, 僉事 江良材가 昭陽湖 동쪽에 별도의 漕運水路를 개통하는 것이 장구한 계책이라고 상주하였다. 盛應期는 右都御史가 되어 인부 6만 5천, 공사비 은 20만 냥에 6월이면 능히 운하를 소통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침 가뭄이 겹치자 많은 사람들이 운하를 새로 개통하는 것이 좋은 방책이 아니라고 말했다. 황제는 이에 공사를 중단시키고 제때에 공사를 완료하지 못했다는 혐의로 盛應期를 삭탈관직했다. 『明史』卷223 「盛應期傳」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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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盛應期(1474∼1535): 字는 思征이고, 號는 值庵이며, 南直隷 蘇州府 吳江縣(지금은 江蘇省 소속) 사람으로, 盛寅의 四代孫이다. 弘治 6년(1493)에 進士에 급제하여 都水主事에 제수되어 山東省 濟寧의 운하갑문을 관리하는 직책을 담당하였다. 이때 太監 李廣의 家人이 私鹽을 밀거래하러 濟寧에 이르렀다가 盛應期를 두려워하여 소금을 물에 빠뜨리고 갔다. 이 일로 환관들과의 사이가 틀어져 工部侍郞으로 승진하였으나 宦官들의 모함으로 투옥되었다가 雲南의 驛丞으로 유배당했다. 이후 곧 祿豊知縣으로 옮겼다가 正德 초년에 雲南僉事가 되었다. 雲南 武定의 土知府 鳳應이 사망하자 그의 처가 知府의 일을 장악하였는데, 아들 朝鳴이 주위를 노략질하였다. 이에 盛應期가 홀로 그 地境에 들어갔는데, 母子가 그를 두려워하여 노략질을 멈추고 돌아갔다. 그는 鳳氏의 변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이들의 品秩을 낮추고 流官을 설치해야 한다고 조정에 상주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御史張璞, 副使 晁必登과 함께 鎭守太監 梁裕가 발호하는 것을 제지했는데, 이에 앙심을 품은 梁裕가 세 사람을 탄핵하여 이들은 모두 투옥되고 張璞은 고문당해 죽었다. 이때 마침 乾淸宮에 불이 나서 황제가 죄인들을 사면하는 조치를 취해져, 盛應期는 복직되었고 陝西右布政使로 승진하였다. 그 후 右副都御史兼四川巡撫로 발탁되어 天全六番招討使 高文林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이 무렵 또 泉江 僰蠻 普法惡이 반란을 일으켰고 富順의 奸民 謝文禮, 文義가 합세했는데, 普法惡이 죽자 그는 指揮 何卿 등으로 하여금 謝文禮, 文義를 토벌하도록 하여 소란을 진압했다. 이후 그는 嘉靖 2년(1523)에는 江西 巡撫가 되었는데, 당시 江西에서는 宸濠의 반란이 진압되었지만 아직 그 후유증에서 미처 회복되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수십만 緡錢의 雜調 징수를 면제해주고, 南京으로 보내는 쌀 47만 석과 은 20만 냥을 강서에 存留시켜 굶주린 백성들에게 먹여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그리고 휘하의 府에 명령하여 흉년에 대비해 곡식 100여 만 석을 비축하게 하였다. 이후 곧 그는 兵部右侍郞兼總督兩廣軍務의 벼슬을 제수받아 廣東에 이르러 撫寧侯 朱麒와 함께 參將 李璋 등을 督率하여 思恩 土目 劉召를 토벌하였다. 조정에서 岑猛을 크게 토벌하자는 의론이 일어났는데, 그는 ‘方略七事’를 조목조목 언급하면서 兩廣의 병사들은 쇠약하여 전투에 동원할 수 없다고 상주하였다. 이에 撫寧侯 朱麒가 분개했으며, 御史 許中이 盛應期가 포학하다며 탄핵하였고, 朱麒도 이에 응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또 御史 鄭洛書가 다시 盛應期가 權貴들과 결탁하고 뇌물을 받았다고 탄핵하였다. 당시 그는 工部侍郞으로 자리를 옮긴 뒤였는데, 질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嘉靖 6년(1527)에 黄河의 물이 크게 넘쳐 漕運하는 水路로 흘러들어와 沛北 廟道口일대 수십 리가 진흙으로 막혀 조운선의 왕래가 단절되었으나 侍郞 章拯은 이를 복구하지 못하였다. 尙書 胡世寧, 詹事 霍韜, 僉事 江良材가 昭陽湖 동쪽에 별도의 漕運水路를 개통하는 것이 장구한 계책이라고 상주하였다. 盛應期는 右都御史가 되어 인부 6만 5천, 공사비 은 20만 냥에 6월이면 능히 운하를 소통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침 가뭄이 겹치자 많은 사람들이 운하를 새로 개통하는 것이 좋은 방책이 아니라고 말했다. 황제는 이에 공사를 중단시키고 제때에 공사를 완료하지 못했다는 혐의로 盛應期를 삭탈관직했다. 『明史』卷223 「盛應期傳」참조.
- 각주 002)
색인어
- 이름
- 잠장, 잠헌(岑瓛), 성응기(盛應期), 잠헌, 잠맹, 잠헌, 노소(盧蘇), 잠헌, 잠헌, 잠진보(岑眞寶), 잠헌, 잠대(岑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