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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옹만달의 조해 처단

  • 국가
    용주(龍州)
도어사 채경(蔡經) 주 001
각주 001)
蔡經: 生卒年 未詳. 『世宗實錄』卷211, 嘉靖 17년 4월 丁巳條에 보면, 당시 그의 관직은 ‘提督兩廣軍務兵部侍郞’이고, 이름이 蔡經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明史』卷205, 「張經傳」에는 ‘初冒蔡姓, 久之乃復’이라 되어 있다. 따라서 채경과 장경은 동일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의 字는 廷彝로, 福建 福州府 侯官縣 사람이다. 正德 12년(1517)의 進士로 嘉興知縣에 제수되었고, 嘉靖 연간(1522∼1566)에 兵部左侍郞을 역임하였다. 毛伯溫과 함께 계획을 입안하여 安南을 위무하고 평정하여 右都御史에 오르고, 思恩九土司 및 瓊州黎를 토벌하여 兵部尙書로 승진하였다. 嘉靖 말에는 南京戶部尙書로 동남 지방에 발생한 倭寇의 禍를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으나 嚴嵩의 무고로 巡撫 李天寵과 함께 斬刑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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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사(副使) 옹만달(翁萬達) 주 002
각주 002)
翁萬達(1498∼1552): 字는 仁夫, 號는 東涯로 揭陽 사람이다. 嘉靖 5년(1526)에 進士가 되어 戶部 廣西 淸吏司 主事로 관직을 시작하여, 兵部尙書, 宣大總督 등을 역임했다. 嘉靖 12년(1533)에 廣西 梧州府知府 재직시절에 “治行第一”이라는 명성이 높았다. 嘉靖 18년(1539)에 安南王 莫登庸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廣西 按察副使로 안남을 평정하여 參政으로 진급하고, 다시 四川 按察使로 발탁되었다. 嘉靖 23년(1544)에 陝西 布政使, 이듬해(1545)에는 陝西 巡撫가 되었다가, 兵部 右侍郞이 되어 宣府, 大同, 山西, 保定 등의 軍務를 總督하였다. 嘉靖 28년(1548)에 부친상을 당했으나 北邊의 상황이 위급하여 조정에서는 그를 다시 임용하고자 했으나 嚴嵩의 반대로 重用되지 못하고 결국 관직에서 쫓겨나 民이 되었다. 嘉靖 31년(1552)에 嘉靖帝가 그를 兵部尙書에 복직시키고자 하였으나 귀향 도중 사망하였다. 사후 15년인 隆慶 원년(1567)에 太子少保에 追贈되었고, 諡號는 襄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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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위임하여 일을 획책하도록 하였다. 옹만달이 아뢰기를, 조해는 교활하여 아직 급히 도모할 수 없고, 위응은 나약하고 사려가 부족하여 아침 저녁으로 사로잡을 수 있으니, 그의 중견(中堅)주 003
각주 003)
中堅: 원래는 군대에서 가장 강하고 精銳에 해당하는 병사들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배후의 후견인 정도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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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끊은 연후에 순서에 따라 포획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니, 독무(督撫)가 옳다고 하였다. 옹만달이 관할 구역을 순행(巡行)하여 태평(太平)에 이르러서 사람을 시켜 다른 일로 황조를 불러 그에게 계책을 말하기를, 위응은 사형을 당할 것이고, 조해는 재간이 있고 용맹하여 바로 모름지기 그에게 의지하여 용주에서 일방의 중임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각각 조해의 일을 말하는 자들을 [옹만달이] 고의로 주목하지 않자, 주(州)의 사람들이 큰 소리로 떠들며 의논이 분분하였다. 옹만달이 더욱 조해를 두터이 대하자 조해가 그를 믿어 드디어 정예병 1,000명을 통솔하여 옹만달의 거처에 이르러서 상황을 설명하고, 아울러 31개 촌의 땅을 바쳤다. 옹만달조해 및 주의 두목 등우(鄧瑀) 등을 불러 안으로 들여 접견하였는데, 매복한 장사(壯士)가 그를 위협하여 말하기를, “너의 죄가 크니 마땅히 스스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만약 죽는다면 그래도 너의 아들에게 하나의 관직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조해는 스스로 헤아려보니 생환할 가능성이 없어 이에 친필로 자기의 패거리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미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반란을 일으켜도 이익이 없다. 내 아들을 잘 보좌하여 조씨(趙氏)를 보존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옹만달이 곧 조해에게 장형을 가하여 그를 때려 죽이고, 조해의 서신으로 그 주(州)의 사람들에게 효유하였다. 당시 조해의 아들 조광시(趙匡時)는 4살이었는데, 그를 후사로 세우니 온 주(州)가 모두 안정되었다. 곧 13개 촌을 용주에 돌려주고, 18개 촌은 숭선현(崇善縣)에 예속시키니, 이에 용주의 조씨는 예전대로 계승할 수 있었다.

  • 각주 001)
    蔡經: 生卒年 未詳. 『世宗實錄』卷211, 嘉靖 17년 4월 丁巳條에 보면, 당시 그의 관직은 ‘提督兩廣軍務兵部侍郞’이고, 이름이 蔡經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明史』卷205, 「張經傳」에는 ‘初冒蔡姓, 久之乃復’이라 되어 있다. 따라서 채경과 장경은 동일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의 字는 廷彝로, 福建 福州府 侯官縣 사람이다. 正德 12년(1517)의 進士로 嘉興知縣에 제수되었고, 嘉靖 연간(1522∼1566)에 兵部左侍郞을 역임하였다. 毛伯溫과 함께 계획을 입안하여 安南을 위무하고 평정하여 右都御史에 오르고, 思恩九土司 및 瓊州黎를 토벌하여 兵部尙書로 승진하였다. 嘉靖 말에는 南京戶部尙書로 동남 지방에 발생한 倭寇의 禍를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으나 嚴嵩의 무고로 巡撫 李天寵과 함께 斬刑을 당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2)
    翁萬達(1498∼1552): 字는 仁夫, 號는 東涯로 揭陽 사람이다. 嘉靖 5년(1526)에 進士가 되어 戶部 廣西 淸吏司 主事로 관직을 시작하여, 兵部尙書, 宣大總督 등을 역임했다. 嘉靖 12년(1533)에 廣西 梧州府知府 재직시절에 “治行第一”이라는 명성이 높았다. 嘉靖 18년(1539)에 安南王 莫登庸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廣西 按察副使로 안남을 평정하여 參政으로 진급하고, 다시 四川 按察使로 발탁되었다. 嘉靖 23년(1544)에 陝西 布政使, 이듬해(1545)에는 陝西 巡撫가 되었다가, 兵部 右侍郞이 되어 宣府, 大同, 山西, 保定 등의 軍務를 總督하였다. 嘉靖 28년(1548)에 부친상을 당했으나 北邊의 상황이 위급하여 조정에서는 그를 다시 임용하고자 했으나 嚴嵩의 반대로 重用되지 못하고 결국 관직에서 쫓겨나 民이 되었다. 嘉靖 31년(1552)에 嘉靖帝가 그를 兵部尙書에 복직시키고자 하였으나 귀향 도중 사망하였다. 사후 15년인 隆慶 원년(1567)에 太子少保에 追贈되었고, 諡號는 襄毅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3)
    中堅: 원래는 군대에서 가장 강하고 精銳에 해당하는 병사들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배후의 후견인 정도의 의미이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채경(蔡經), 옹만달(翁萬達), 옹만달, 조해, 위응, 옹만달, 황조, 위응, 조해, 조해, 옹만달, 옹만달, 조해, 조해, 옹만달, 옹만달, 조해, 등우(鄧瑀), 조해, 옹만달, 조해, 조해, 조해, 조광시(趙匡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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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만달의 조해 처단 자료번호 : jo.k_0024_0319_0030_0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