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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조종수와 상무, 이원태와의 갈등

  • 국가
    용주(龍州)
[홍무] 21년(1388)에 조첩견이 병이 들었는데, 자식이 없어 그 조카 조종수(趙宗壽)로 하여금 대신 주(州)의 사무를 처리하도록 하였다.주 001
각주 001)
『太祖實錄』卷190 洪武 21년 4월 癸酉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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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첩견이 죽자 조종수가 계승하였다. 정국공(鄭國公) 상무(常茂) 주 002
각주 002)
常茂: 自稱 茂太爺라 하는데, 常遇春의 長子이다. 明나라가 開國하는 과정에서 제1선에서 맹활약한 猛將인데, 전투와 智謀가 뛰어났으며, 사람들은 常茂를 ‘無敵大將’이라 불렀다. 건국 후 朱元璋은 常茂를 孝義永安王으로 봉하였다. 常茂는 長城 지대에서 주둔하며 방비했는데, 洪武帝는 충분한 糧草를 지급하지 않아 한때 常茂가 도주한 적도 있었다. 후에 燕王 朱棣를 따라 靖難의 役을 일으켜 군공을 세웠다. 한편 常茂는 부친 常遇春의 작위를 이어받아 鄭國公으로 봉해져 2,000石의 食祿을 받았다. 洪武 20년(1387)에 洪武帝는 常茂에게 명하여 大將軍 馮勝을 따라 金山에서 納哈出을 征討하도록 하였다. 馮勝은 常茂의 장인이었다. 하지만 常茂는 馮勝의 지휘를 따르지 않아 자주 질책을 받았다. 얼마 후 納哈出이 항복을 청하기 위해 右副將軍 藍玉의 병영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벌어진 술자리에서 納哈出과 藍玉이 서로 무례한 행동을 하였다. 納哈出이 술을 땅에 부으며 부하에게 몇 마디 일렀다. 당시 常茂가 옆에 배석하고 있었다. 그 휘하의 趙指揮가 몽골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常茂에게 納哈出이 달아나려 한다고 가만히 알려주었다. 이에 常茂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제지했고, 크게 놀란 納哈出이 급히 말에 올라타려 했지만, 常茂가 칼을 휘둘러 어깨를 베었다. 納哈出의 부대가 이 소식을 듣고는 크게 동요하였다. 후에 馮勝이 이 소식을 접하고 常茂에게 더욱 노하여 罪狀을 부풀려서 常茂가 激變했다고 上奏하고 는 칼을 씌워 京師로 보냈다. 常茂 역시 馮勝의 여러 不法의 일을 아뢰었다. 이에 洪武帝는 馮勝으로부터 總兵의 印을 회수하고, 常茂는 龍州에 安置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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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죄를 지어 좌천되어 용주에서 살았다.주 003
각주 003)
納哈出에게 칼을 휘둘러 어깨에 부상을 입혀 그 부대를 동요시킨 일로 인하여 장인 馮勝과 서로 고발한 일이 있는데 常茂는 결국 멀리 龍州로 배치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常茂에 관한 주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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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첩견의 처 황씨(黃氏)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한 명은 태평주(太平州) 토관 이원태(李圓泰)의 처였고, 상무는 다른 한 명을 첩으로 맞아들였다. 당시 조종수가 비록 관직을 계승했지만, 조첩견의 처가 여전히 토관의 관인을 가지고 있으면서 상무·이원태와 함께 주(州)의 사무를 오로지 장악하였으며, 자주 조종수를 능멸하며 핍박하였다. 마침 상무가 병으로 죽었는데, 그의 문지기 조관해(趙觀海) 등이 또한 조종수를 멋대로 모욕을 주었다. 조종수는 이에 집사 등과 함께 계책을 써서 토관의 인장을 취득하고, 상주하여 상무가 이미 죽었음을 아뢰었으며, 아울러 조관해 등에게 칼을 씌워 경사에 이르게 하였다. 이에 조첩견의 처가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사람을 시켜 조종수의 노략질을 고하고, 다시 이원태와 함께 모의해서 상무의 첩과 그 노비를 협박하여 태평주에 가도록 했으며, 또 조씨(趙氏) 조부와 부친의 관고(官誥) 등 여러 물품을 모두 약탈하고, 다시 용주의 땅을 모두 취하고자 하였다. 이에 직접 경사에 이르러 조종수는 실제로는 조카라서 승계가 마땅치 않음을 고하였고, 조종수 또한 상주하여 상황을 설명하였다. 홍무제는 이에 조서를 내려 조종수를 문죄(問罪)하지 말도록 하고, 옥리(獄吏)에게 내려 조첩견의 처와 이원태의 죄를 논의토록 했는데, 얼마 후에 원방(遠方)의 만인(蠻人)이라는 이유로 모두 석방시켰다.주 004
각주 004)
『太祖實錄』卷236 洪武 28년 2월 庚辰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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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太祖實錄』卷190 洪武 21년 4월 癸酉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2)
    常茂: 自稱 茂太爺라 하는데, 常遇春의 長子이다. 明나라가 開國하는 과정에서 제1선에서 맹활약한 猛將인데, 전투와 智謀가 뛰어났으며, 사람들은 常茂를 ‘無敵大將’이라 불렀다. 건국 후 朱元璋은 常茂를 孝義永安王으로 봉하였다. 常茂는 長城 지대에서 주둔하며 방비했는데, 洪武帝는 충분한 糧草를 지급하지 않아 한때 常茂가 도주한 적도 있었다. 후에 燕王 朱棣를 따라 靖難의 役을 일으켜 군공을 세웠다. 한편 常茂는 부친 常遇春의 작위를 이어받아 鄭國公으로 봉해져 2,000石의 食祿을 받았다. 洪武 20년(1387)에 洪武帝는 常茂에게 명하여 大將軍 馮勝을 따라 金山에서 納哈出을 征討하도록 하였다. 馮勝은 常茂의 장인이었다. 하지만 常茂는 馮勝의 지휘를 따르지 않아 자주 질책을 받았다. 얼마 후 納哈出이 항복을 청하기 위해 右副將軍 藍玉의 병영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벌어진 술자리에서 納哈出과 藍玉이 서로 무례한 행동을 하였다. 納哈出이 술을 땅에 부으며 부하에게 몇 마디 일렀다. 당시 常茂가 옆에 배석하고 있었다. 그 휘하의 趙指揮가 몽골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常茂에게 納哈出이 달아나려 한다고 가만히 알려주었다. 이에 常茂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제지했고, 크게 놀란 納哈出이 급히 말에 올라타려 했지만, 常茂가 칼을 휘둘러 어깨를 베었다. 納哈出의 부대가 이 소식을 듣고는 크게 동요하였다. 후에 馮勝이 이 소식을 접하고 常茂에게 더욱 노하여 罪狀을 부풀려서 常茂가 激變했다고 上奏하고 는 칼을 씌워 京師로 보냈다. 常茂 역시 馮勝의 여러 不法의 일을 아뢰었다. 이에 洪武帝는 馮勝으로부터 總兵의 印을 회수하고, 常茂는 龍州에 安置시켰다. 바로가기
  • 각주 003)
    納哈出에게 칼을 휘둘러 어깨에 부상을 입혀 그 부대를 동요시킨 일로 인하여 장인 馮勝과 서로 고발한 일이 있는데 常茂는 결국 멀리 龍州로 배치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常茂에 관한 주석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4)
    『太祖實錄』卷236 洪武 28년 2월 庚辰條 참조.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조첩견, 조종수(趙宗壽), 조첩견, 조종수, 상무(常茂), 조첩견, 이원태(李圓泰), 상무, 조종수, 조첩견, 상무, 이원태, 조종수, 상무, 조관해(趙觀海), 조종수, 조종수, 상무, 조관해, 조첩견, 조종수, 이원태, 상무, 조종수, 조종수, 조종수, 조첩견, 이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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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수와 상무, 이원태와의 갈등 자료번호 : jo.k_0024_0319_003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