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림(慧琳)의 균선론(均善論)
혜림(慧琳)은 진군(秦郡)
진현(秦縣) 사람으로 성(姓)은 유씨(劉氏)였다. 어려서 출가(出家)하여 야성사(冶城寺)에서 살았다. 문장에 재주가 있어 내외의 학을 모두 아우르니, 광릉왕(廬陵王) 의진(義眞)의 지기가 되었다. 일찍이 균선론(均善論)을 지었다. 자못 불법(佛法)을 폄하하여 질책하는 바가 자못 많았는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백학선생(白學先生)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중국(中國)의 성인(聖人)은 백대(百代)의 일을 계획하니 그 덕이 넓고, 지혜가 천변만화에 두루 미치니,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모두 다 깨쳤다고 생각하였다. 도(道)에는 숨겨진 뜻이 없고 교화에는 미치지 못하는 도구가 없으니, 총명한 이들이 성명(聖明)의 도를 행하면 어찌 수속(殊俗)의 논의에 뒤지겠는가라고 하였다. 흑학도사(黑學道士)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 말을 비루하게 여겼다. 말하기를, [그것은] 유명(幽冥)의 땅을 비추지 못하고, 내생의 조화에 미치지 못한다. 비록 허심(虛心)을 숭상할 수 있을지라도, 허사(虛事)를 행할 수는 없으니, 서역(西域)[의 도]의 심오함에는 미치지 못 한다고 하였다.” 손님과 주인이 대화를 주고받듯이 적었는데, 그 귀결은 “[불도에서 말하는] 육도(六度)와 [유가에서 말하는] 오교(五敎)가 함께 행해질 수 있고, [유자가 말하는] 신순(信順)과 [불자가 말하는] 자비가 병립할 수 있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 논의가 세상에 [널리] 유행하였다. 기존의 승려들은 그 논의가 석가모니를 폄하하고, 더하여 배척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문제(文帝)가 그 논의를 보고 칭찬하여, 원가(元嘉) 연간에는 마침내 혜림을 권부의 추요에 참여시키고, 조정의 대사를 모두 그와 의논하였다. [이에] 빈객(賔客)이 사방에서 몰려들고, 그 집 문 앞에는 수레가 늘 수십 대씩 늘어서 있었다. 사방에서 보내오는 선물이 서로 이어지니, 그 세도가 한 시기를 풍미하였다. 방석[方筵]이 일고여덟이나 있었지만, 자리는 항상 차있었다. 혜림은 높은 나막신[高屐]을 신고 담비 갖옷[貂裘]을 둘렀으며, 따로 빈객을 맞는 일을 담당하는 통정(通呈)과 서좌(書佐)같은 사람을 두었으니, 권세가 재상이나 보정대신이나 같았다. 회계(會稽)의 공기(孔覬)
주 001가 일찍이 혜림을 만나러 간 적이 있었는데, 마침 빈객이 가득 차서 안부를 물을 수 있을 뿐이었다. 공기가 강개하여 말하기를, “끝내 흑의 재상(승복을 입은 재상)이 났으니, 관과 갖신을 신은 이들(사대부들)은 있을 곳을 잃었구나!”라고 하였다. 『효경(孝經』 및 『장자(莊子)』 「소요편(逍遙篇)」에 주를 단 글과 논설이 대대로 전해진다.
색인어
- 이름
- 혜림(慧琳), 의진(義眞), 백학선생(白學先生), 흑학도사(黑學道士), 문제(文帝), 혜림, 공기(孔覬), 혜림, 공기
- 지명
- 진군(秦郡), 진현(秦縣), 중국(中國), 서역(西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