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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불도(佛道)의 융성과 금령(禁令)

  • 국가
    가비려국(迦毘黎國)
불도(佛道)는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부터 법(法)이 비로소 동쪽으로 유전되었는데, 이때로부터 그 가르침이 점차 넓어져 따로 일가(一家)의 학이 되었다. 원가(元嘉) 12년(435)에 단양윤(丹陽尹) 소모지(蕭摹之)가 상주하여 말하기를, “부처의 교화(佛化)가 중국에 이른 것은 이미 4대가 지났습니다. 그런데 근래로부터 사치를 다투는 것이 더욱 무거워졌습니다. 청컨대, 지금 이후로는 동(銅) 불상을 주조하고자 하는 자는 모두 조정에 이르러 스스로 신고하게 하고, [또] 사탑(塔寺)과 정사(精舍)를 짓고자 하는 자도 모두 미리 말하게 하여서, 모름지기 허락을 얻은 연후에야 일을 시작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조(詔)를 내려 가(可)하다 하였다. 또 사문(沙門)으로 불도를 파계한 자를 쓸어낸 것이 수백 인이었다. 효무제(孝武帝) 대명(大明) 2년에 담표(曇標)라는 불교 승려[道人]가 있어 강인(羗人) 고도(高闍)와 함께 모반하였다. 상(上)이 이로 인하여 조(詔)를 내려, 반란이 일어난 곳은 더욱 정밀하게 [승려로 부적합한 자를 골라내어] 떨어내게 하고, 나중에 거스르거나 범하는 자가 있으면 연좌된 자들을 주멸하는 것을 더욱 엄하게 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여러 조의 금령을 마련하여 스스로 법계를 행하여 정심으로 고행하지 못하는 자는 모두 환속하도록 하였으나, 여러 사찰의 비구니로 궁액(宮掖)에 출입하여 비후(妃后)와 교유하는 자들이 있어, 이 제도는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진대[晉世]에 유빙(庾冰) 주 001
각주 001)
庾冰(296~344): 東晉 成帝 末, 康帝시기의 輔政대신. 『晉書』의 기록들에 따르면, 王導의 죽음 이후 이어 보정하였으며, 中書監으로서 成帝의 고명을 받아 하충과 함께 강제 시기에 보정하였다. 字는 季堅이며, 성제시기 왕도와 함께 보정하였던 亮의 동생이다. 처음에 秘書郞에 징소되어, 都鄕侯에 봉해졌다가, 王導가 청하여 司徒右長史가 되었으며, 지방으로 나가 吳國 內史를 지내고, 振威將軍·會稽內史로 옮겼다. 다시 조정으로 들어가 中書監·揚州刺史·都督揚豫兗三州軍事·征虜將軍·假節이 되었으며, 왕도를 대신하여 輔政하면서, 左將軍으로 승진하였다. 康帝가 卽位한 뒤에 車騎將軍에 올랐으며, 다시 외직으로 나가서 都督荊江司雍益梁六州諸軍事·江州刺史로서 武昌에 진주하였다가 죽었다. 侍中·司空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를 忠成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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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처음 사문에게 왕과 같은 존경의 예를 받게 하자는 의논을 제기하였고, 나중에 환현(桓玄) 주 002
각주 002)
桓玄(369~404): 字는 敬道이고, 靈寶이라고도 불렀다. 譙國 龍亢(安徽 懷遠) 사람이다. 東晉 末期 桓楚國의 建立者이다. 桓玄은 東晉이 名將 大司馬 南郡宣武公 桓溫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환온의 사랑을 받았다. 東晉 孝武帝 寧康 元年(373)에 桓溫이 죽으면서 그 아우 桓沖에게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고, 아울러 당시 5세였던 환현은 南郡公의 작을 이어 받았다. 23歲가 되던 해(391)에 太子洗馬에 임명되었다. 몇 년 뒤 경사에서 나가 義興(江蘇 宜興)太守의 직을 맡았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여, 관을 버리고 그 封國인 南郡(湖北 江陵)으로 갔다. 東晉 安帝 隆安 元年(397)에 尙書僕射 王國寶와 建威將軍 王緒가 당시 권세를 잡고있던 會稽王 司馬道子에 의지하여 각 方鎭의 약화를 도모하자, 靑·兗二州刺史 王恭이 불만을 표시하여 기병하였다. 桓玄은 마침내 荊州刺史 殷仲堪을 종용하여 王恭에 향응하도록 하였다. 當時 東晉의 정치적 세력 판도는 다음과 같았다. 朝廷 안에는 司馬道子와 司馬元顯 父子가 대를 이어 권력을 오로지하고 있었고, 밖에는 桓玄 等의 세 사람이 劉牢之 및 司馬尙之와 割據하고 있었다. 그리고 京師인 建康 이남 一帶는 또 민란을 일으킨 孫恩의 세력이 盤踞하여 국내가 크게 어지러웠다. 隆安 3년(399)에는 桓玄이 荊州刺史(首府는 江陵으로 현재의 湖北 江陵) 殷仲堪과 雍州刺史(首府는 襄陽이며 현재의 湖北 襄陽) 楊佺期 두 사람의 세력을 소멸시키고, 長江 중류 일대를 점유하였다. 다음 해(400)에 조정은 어쩔 수 없이 桓玄을 都督荊·司·雍·秦·梁·益·寧·江八州及揚·豫八郡諸軍事와 後將軍 및 荊·江二州刺史에 임명하고 假節을 더하였다. 손은 세력에 대한 진압이 이루어진 후, 權臣 司馬元顯은 환현을 제거하기로 마음 먹고, 元興 元年(402) 토벌에 나섰으나, 劉牢之의 배반으로 오히려 환현의 군대에 살해당한다. 이어 유뢰지까지 제거한 환현은 矯詔를 내려 스스로를 太尉·都督中外諸軍事·揚州牧·領豫州刺史에 임명하고 국정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元興 2년(403)에 결국에는 東晉의 安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正式으로 稱帝하고 國號를 楚라하였으며, 永始로 개원하였다. 그러나 桓楚 永始 2년(404) 환현 토벌의 기치를 내걸고 기병한 劉裕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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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 의논을 다시 되풀이 하였지만, 모두 실행되지는 못 하였다. 대명(大明) 6년에 효무제(孝武帝)가 유사에게 사문이 접견할 시 극진한 존경의 예를 취하도록 하는 주문을 올리게 한 뒤, 조를 내려 가(可)하다 하였다. 전폐제(前廢帝) 초(初)에 예전으로 되돌렸다.

  • 각주 001)
    庾冰(296~344): 東晉 成帝 末, 康帝시기의 輔政대신. 『晉書』의 기록들에 따르면, 王導의 죽음 이후 이어 보정하였으며, 中書監으로서 成帝의 고명을 받아 하충과 함께 강제 시기에 보정하였다. 字는 季堅이며, 성제시기 왕도와 함께 보정하였던 亮의 동생이다. 처음에 秘書郞에 징소되어, 都鄕侯에 봉해졌다가, 王導가 청하여 司徒右長史가 되었으며, 지방으로 나가 吳國 內史를 지내고, 振威將軍·會稽內史로 옮겼다. 다시 조정으로 들어가 中書監·揚州刺史·都督揚豫兗三州軍事·征虜將軍·假節이 되었으며, 왕도를 대신하여 輔政하면서, 左將軍으로 승진하였다. 康帝가 卽位한 뒤에 車騎將軍에 올랐으며, 다시 외직으로 나가서 都督荊江司雍益梁六州諸軍事·江州刺史로서 武昌에 진주하였다가 죽었다. 侍中·司空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를 忠成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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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桓玄(369~404): 字는 敬道이고, 靈寶이라고도 불렀다. 譙國 龍亢(安徽 懷遠) 사람이다. 東晉 末期 桓楚國의 建立者이다. 桓玄은 東晉이 名將 大司馬 南郡宣武公 桓溫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환온의 사랑을 받았다. 東晉 孝武帝 寧康 元年(373)에 桓溫이 죽으면서 그 아우 桓沖에게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고, 아울러 당시 5세였던 환현은 南郡公의 작을 이어 받았다. 23歲가 되던 해(391)에 太子洗馬에 임명되었다. 몇 년 뒤 경사에서 나가 義興(江蘇 宜興)太守의 직을 맡았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여, 관을 버리고 그 封國인 南郡(湖北 江陵)으로 갔다. 東晉 安帝 隆安 元年(397)에 尙書僕射 王國寶와 建威將軍 王緒가 당시 권세를 잡고있던 會稽王 司馬道子에 의지하여 각 方鎭의 약화를 도모하자, 靑·兗二州刺史 王恭이 불만을 표시하여 기병하였다. 桓玄은 마침내 荊州刺史 殷仲堪을 종용하여 王恭에 향응하도록 하였다. 當時 東晉의 정치적 세력 판도는 다음과 같았다. 朝廷 안에는 司馬道子와 司馬元顯 父子가 대를 이어 권력을 오로지하고 있었고, 밖에는 桓玄 等의 세 사람이 劉牢之 및 司馬尙之와 割據하고 있었다. 그리고 京師인 建康 이남 一帶는 또 민란을 일으킨 孫恩의 세력이 盤踞하여 국내가 크게 어지러웠다. 隆安 3년(399)에는 桓玄이 荊州刺史(首府는 江陵으로 현재의 湖北 江陵) 殷仲堪과 雍州刺史(首府는 襄陽이며 현재의 湖北 襄陽) 楊佺期 두 사람의 세력을 소멸시키고, 長江 중류 일대를 점유하였다. 다음 해(400)에 조정은 어쩔 수 없이 桓玄을 都督荊·司·雍·秦·梁·益·寧·江八州及揚·豫八郡諸軍事와 後將軍 및 荊·江二州刺史에 임명하고 假節을 더하였다. 손은 세력에 대한 진압이 이루어진 후, 權臣 司馬元顯은 환현을 제거하기로 마음 먹고, 元興 元年(402) 토벌에 나섰으나, 劉牢之의 배반으로 오히려 환현의 군대에 살해당한다. 이어 유뢰지까지 제거한 환현은 矯詔를 내려 스스로를 太尉·都督中外諸軍事·揚州牧·領豫州刺史에 임명하고 국정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元興 2년(403)에 결국에는 東晉의 安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正式으로 稱帝하고 國號를 楚라하였으며, 永始로 개원하였다. 그러나 桓楚 永始 2년(404) 환현 토벌의 기치를 내걸고 기병한 劉裕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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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명제(明帝), 소모지(蕭摹之), 효무제(孝武帝), 담표(曇標), 강인(羗人), 고도(高闍), 유빙(庾冰), 환현(桓玄), 효무제(孝武帝)
지명
후한(後漢),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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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佛道)의 융성과 금령(禁令) 자료번호 : jo.k_0014_0078_020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