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역(西域)의 호승(胡僧)들이 불상을 찾아 고회(高悝)에게 옴
처음에 고회(高悝)가 불상을 얻은 뒤에 서역(西域)의 호승(胡僧)주 001다섯 사람이 고회에게 와서 이르기를, “옛날에 천축에서 아육왕상을 얻어왔는데, 오다가 업하(鄴下)
주 002에서 호란(胡亂)을 만나, 상을 황하 가에 묻었습니다. 지금 찾아보았으나 유실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섯 사람이 일찍이 한 밤에 함께 꿈에서 그 상을 만났는데, 말하기를, “이미 강동(江東)으로 나와 고회라는 이에게 발견되었다.”라고 하였다고 했다. 이에 고회가 이 다섯 승려를 사원에 데려다 주었다. [승려들이] 상을 보자마자 흐느껴 울며 눈물을 흘리니, 상이 바로 빛을 발하여 전당을 밝혔다. 또 와관사(瓦官寺)주 003
각주 003)

의 혜수(慧邃)가 금상의 형상을 [밀랍으로 떠서] 모사(模寫) 하고자 하였는데, 사원의 주지 승상(僧尙)은 금상의 금칠이 훼손될까 염려하여 혜수에게 말하기를, “만약 금상이 빛을 내고 몸을 돌려 서쪽을 향하게 할 수 있다면 허락하겠다.”고 하였다. 혜수가 금상에 대하여 간절히 절하며 청하였다. 그날 밤에 금상이 바로 돌려 앉으며 빛을 발하였고, 몸을 돌려 서쪽을 향하였다. 다음날 아침 바로 본뜨는 것을 허락하였다. 금상의 부좌 부분에 외국어로 된 글이 있었는데, 일찍이 읽을 줄 아는 자가 없었다. 나중에 삼장(三藏)주 004
나발마(那跋摩)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기를, 이는 아육왕(阿育王)이 넷째 딸을 위하여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瓦官寺: 江蘇省 南京의 鳳凰台에 있다. 東晉 興寧 2년(364)에 慧力이라는 승려의 奏請에 따라 詔令에 의해 창건되었다. 땅을 파다가 옛 와관(瓦棺)을 얻은 까닭에 瓦官寺라 칭하였다. 劉宋대 이후에는 慧果·慧璩·慧重·僧導·求那跋摩·寶意 等이 모두 서로 이어 여기에 거주하면서 혹은 불경을 강론하고 혹은 범어로 된 불경을 번역하여 가르쳤다. 梁代에는 瓦官閣을 증건하였다. 明初에 사원이 철폐되어 그 사원의 반은 徐魏公의 정원이 되었고, 나머지 반은 驍騎의 衛倉으로 편입되었다. 嘉靖 연간에 徐公園 옆에 積慶庵을 세우고 이름을 붙이기를 古瓦官寺하였으나, 옛 터는 아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와관사도 후대인들이 이름만 가져다 붙인 것이다.
- 각주 001)
-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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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3)
瓦官寺: 江蘇省 南京의 鳳凰台에 있다. 東晉 興寧 2년(364)에 慧力이라는 승려의 奏請에 따라 詔令에 의해 창건되었다. 땅을 파다가 옛 와관(瓦棺)을 얻은 까닭에 瓦官寺라 칭하였다. 劉宋대 이후에는 慧果·慧璩·慧重·僧導·求那跋摩·寶意 等이 모두 서로 이어 여기에 거주하면서 혹은 불경을 강론하고 혹은 범어로 된 불경을 번역하여 가르쳤다. 梁代에는 瓦官閣을 증건하였다. 明初에 사원이 철폐되어 그 사원의 반은 徐魏公의 정원이 되었고, 나머지 반은 驍騎의 衛倉으로 편입되었다. 嘉靖 연간에 徐公園 옆에 積慶庵을 세우고 이름을 붙이기를 古瓦官寺하였으나, 옛 터는 아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와관사도 후대인들이 이름만 가져다 붙인 것이다.
- 각주 004)
색인어
- 이름
- 고회(高悝), 고회, 고회, 고회, 혜수(慧邃), 승상(僧尙), 혜수, 혜수, 나발마(那跋摩)
- 지명
- 천축, 업하(鄴下), 황하, 강동(江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