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화지(檀和之)의 면직(免職)
[단]화지(和之)는 고평군(高平郡)
금향(金鄕) 사람이며, 단빙지(檀憑之)
주 001
각주 001)

의 아들이다. 공(功)으로 운두현자(雲杜縣子)에 책봉되었다. 효건(孝建) 3년(456)에 남연주(南兖州) 자사(刺史)가 되었으나, 수뢰사건에 연좌되고 옥중의 여자를 안으로 맞아들인 일로 면직되고, 금고(禁錮)에 처해졌다. 나중에 병사하였는데, 호신(胡神)으로 숭상되었다. 좌장군(左將軍)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를 양자(襄子)라 하였다.檀憑之: 『晉書』의 「檀憑之傳」에 따르면, 字는 慶子이며, 高平縣 사람이다. 劉宋의 개창자인 劉裕와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곳에서 자란 사이[州閭之舊]이고, 매우 친밀했다고 한다. 환현에 대항하여 거병한 뒤에 간난을 함께 하였으며, 거병을 모의할 때도 何無忌 魏詠之와 함께 단빙지의 거소에서 모였다고 한다. 그의 관력은 처음에 會稽王의 驃騎將軍府 行參軍이었다가, 옮겨서 桓脩의 長流參軍으로 東莞太守를 겸령하였으며, 寧遠將軍의 장군호를 더하였다.비록 才望은 유유보다 조금 못하였으나, 官次 및 威聲은 유유를 앞섰다고 한다. 따라서 유유가 거병한 뒤 그를 建武將軍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후 桓玄이 皇甫敷를 거느리고 羅落橋에 이르렀을 때, 유유와 군대를 나누어 나가 싸우다가 패하여 황보부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冀州刺史에 추증되었으며, 義熙 初에 본관은 유지한 채 散騎常侍를 더하여 추증하고, 曲阿縣公에 책봉하고 三千戶의 식읍을 내렸다(『晉書』 卷85 「檀憑之」: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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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檀憑之: 『晉書』의 「檀憑之傳」에 따르면, 字는 慶子이며, 高平縣 사람이다. 劉宋의 개창자인 劉裕와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곳에서 자란 사이[州閭之舊]이고, 매우 친밀했다고 한다. 환현에 대항하여 거병한 뒤에 간난을 함께 하였으며, 거병을 모의할 때도 何無忌 魏詠之와 함께 단빙지의 거소에서 모였다고 한다. 그의 관력은 처음에 會稽王의 驃騎將軍府 行參軍이었다가, 옮겨서 桓脩의 長流參軍으로 東莞太守를 겸령하였으며, 寧遠將軍의 장군호를 더하였다.비록 才望은 유유보다 조금 못하였으나, 官次 및 威聲은 유유를 앞섰다고 한다. 따라서 유유가 거병한 뒤 그를 建武將軍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후 桓玄이 皇甫敷를 거느리고 羅落橋에 이르렀을 때, 유유와 군대를 나누어 나가 싸우다가 패하여 황보부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冀州刺史에 추증되었으며, 義熙 初에 본관은 유지한 채 散騎常侍를 더하여 추증하고, 曲阿縣公에 책봉하고 三千戶의 식읍을 내렸다(『晉書』 卷85 「檀憑之」: 2217).
색인어
- 이름
- [단]화지(和之), 단빙지(檀憑之), 양자(襄子)
- 지명
- 고평군(高平郡), 금향(金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