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욕혼(吐谷渾)은 요서 선비(遼西鮮卑)인 도하섭귀(徒河涉歸)의 아들 토욕혼을 성씨[國氏]로 삼은 나라이다
토욕혼(吐谷渾)
주 001
각주 001)

은 본디 요서선비(遼西鮮卑)인 도하섭귀(徒河涉歸)의 아들[을 시조로] 한다. 처음에 섭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서장자(庶長子)가 토욕혼이고 작은 아들이 야락외(若洛廆)였다. 섭귀가 죽자 야락외가 대신하여 부락을 통할하였는데 이것이 모용씨(慕容氏)이다. 토욕혼은 야락외와 서로 맞지가 않아서 마침내 서쪽으로 농(隴) 지방을 지나서, 감송(甘松)
주 002의 남쪽, 조수(洮水)
주 003의 서쪽, 남쪽 끝이 백란산(白蘭山)
주 004인 수천 리에 이르는 지방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 뒤 마침내 토욕혼이 나라의 성씨[國氏]가 되었다. 위(魏)·주(周)의 교체기에 처음으로 가한(可汗)을 칭하였고 도읍은 복사성(伏俟城)
주 005이었으니 청해(靑海)에서 45리 떨어진 곳이다. 성곽은 있으나 그곳에 거주하지 않고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하였다. 관직으로는 왕공(王公)·복야(僕射)·상서(尙書)·낭중(郞中)·장군(將軍) 등이 있다. 그 군주는 조(皂)주 006로 된 모자를 쓰고 부인은 금화(金花)를 머리에 꽂는다. 그들의 도구[器械]와 의복은 중원의 나라와 대략 동일하다. 그 왕공과 귀족 대다수는 얼굴가리개[羃䍦]를 쓰고, 부인들은 치마저고리[裙襦]를 입고 머리를 땋았으며[辮髮], 진주와 조개를 매달아 놓는다. 나라에는 고정된 세금이 없다. 살인하거나 말을 훔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그 나머지 범죄는 물건을 징수하여 죄값을 치른다. 풍속은 돌궐과 많이 비슷하다. 장례를 치를 때는 상복을 입으며 장례가 끝나면 벗는다. 성품은 모두 탐욕스럽고 잔인하다. 보리·조·콩이 있다. 청해(靑海)는 둘레가 천여 리인데, 가운데에 조그만 산이 하나 있다. 그들의 풍속에 의하면 겨울이 되면 그 꼭대기에 암말을 풀어놓는데, 용의 씨[龍種]를 얻기 위함이라고 한다. 토욕혼이 일찍이 페르시아의 어미 말[草馬]주 007을 구했을 때 그것을 [청]해 [가운데의 산]에 집어넣었고 그래서 총구(驄駒)주 008를 얻었다. 그것은 하루에 천 리를 갈 수 있었으므로, 그런 까닭에 당시 ‘청해총(靑海驄)’이라 불렀다. 이우(氂牛)주 009가 많고, 동·철·주사가 풍부하다. 그 지방은 선선·차말 등을 겸병하고 있다. 서북으로는 유사(流沙)가 수백 리 펼쳐져 있는데, [그곳에는] 여름에 열풍이 불어서 여행하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거나 죽게 한다. 바람이 불어오려고 하면 늙은 낙타들은 그것을 미리 알고 목을 당기고 울면서 모여 서서 입과 코를 모래 속에 파묻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을] 알고, 모포로 입과 코를 가리면서 그 환난을 피한다.주 100
吐谷渾: 靑海 일대에 거주하던 유목민. 중국측 기록에 의하면 遼西鮮卑의 일파로서, 西晉 太康 4년(284) 徒河涉歸의 庶長子 吐谷渾이 慕容廆와 不和하여 부락민 1,700호를 이끌고 西遷하여 陰山으로 갔다. 그러다가 4세기 전반 晉이 南遷하는 기회를 타서 靑海 지방으로 이주하여 서방의 일대 세력을 이루었다. 사천분지를 경유하여 南朝와 교류를 갖고, 북으로는 河西에 들어선 여러 나라들과 교섭하였다. 동방에서 北魏가 화북 통일을 이루고 그 세력이 서쪽으로 미치게 되자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북위의 세력이 쇠퇴하자 6세기 중반경부터 吐谷渾은 융성을 이루게 된다. 즉 서쪽으로는 차이담분지를 거쳐 타림분지의 남변으로 진출하여, 鄯善·且末 등지를 장악하고, 남방으로는 龍涸州(사천성 松潘縣)에 諸王들을 배치하여 사천분지와 양자강 하류로 나가는 교역루트를 확보하였다. 수령 夸呂(540∼591)가 처음으로 可汗을 칭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可汗의 居所는 澆河 하류에서 伏賀川을 거쳐 청해 서쪽의 伏俟城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7세기 전반 티베트 고원에서 발흥한 吐蕃이 靑海와 河西로 진출하면서 그 압박을 받기 시작했고, 670년 일대 전투에서 패배한 뒤 遺民들은 靈州로 피신했고, 唐朝는 安樂州를 설치하여 그들을 안무하였다(周偉洲,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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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吐谷渾: 靑海 일대에 거주하던 유목민. 중국측 기록에 의하면 遼西鮮卑의 일파로서, 西晉 太康 4년(284) 徒河涉歸의 庶長子 吐谷渾이 慕容廆와 不和하여 부락민 1,700호를 이끌고 西遷하여 陰山으로 갔다. 그러다가 4세기 전반 晉이 南遷하는 기회를 타서 靑海 지방으로 이주하여 서방의 일대 세력을 이루었다. 사천분지를 경유하여 南朝와 교류를 갖고, 북으로는 河西에 들어선 여러 나라들과 교섭하였다. 동방에서 北魏가 화북 통일을 이루고 그 세력이 서쪽으로 미치게 되자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북위의 세력이 쇠퇴하자 6세기 중반경부터 吐谷渾은 융성을 이루게 된다. 즉 서쪽으로는 차이담분지를 거쳐 타림분지의 남변으로 진출하여, 鄯善·且末 등지를 장악하고, 남방으로는 龍涸州(사천성 松潘縣)에 諸王들을 배치하여 사천분지와 양자강 하류로 나가는 교역루트를 확보하였다. 수령 夸呂(540∼591)가 처음으로 可汗을 칭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可汗의 居所는 澆河 하류에서 伏賀川을 거쳐 청해 서쪽의 伏俟城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7세기 전반 티베트 고원에서 발흥한 吐蕃이 靑海와 河西로 진출하면서 그 압박을 받기 시작했고, 670년 일대 전투에서 패배한 뒤 遺民들은 靈州로 피신했고, 唐朝는 安樂州를 설치하여 그들을 안무하였다(周偉洲,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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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03)
-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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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006)
- 각주 007)
- 각주 008)
- 각주 009)
- 각주 100)
색인어
- 이름
- 도하섭귀(徒河涉歸), 섭귀, 토욕혼, 야락외(若洛廆), 섭귀, 야락외, 토욕혼, 야락외, 토욕혼
- 지명
- 토욕혼(吐谷渾), 요서선비(遼西鮮卑), 모용씨(慕容氏), 농(隴), 감송(甘松), 조수(洮水), 백란산(白蘭山), 토욕혼, 위(魏), 주(周), 복사성(伏俟城), 청해(靑海), 중원, 청해(靑海), 페르시아, 선선, 차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