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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제(煬帝) 때에 시어사(侍御史) 위절(韋節) 등을 사신으로 보내 서방의 번국(蕃國)과 문물을 교류함

  • 국가
    서역(西域)
양제 때에 시어사(侍御史)주 001
각주 001)
侍御史: 御史 혹은 侍御라고도 簡稱된다. 前漢 시대에 御史大夫의 屬官으로 두어졌고 禁中에서 入侍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隋代에는 종7품관으로 吏部에서 選用했고 禁中에 入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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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절(韋節) 주 002
각주 002)
韋節: 본문에서 서술된 것과 같이 그는 司隸從事 杜行滿과 함께 罽賓을 위시하여 멀리 인도의 王舍城(Rajagriha)에까지 사신으로 다녀온 인물이다. 그러나 그 개인에 관한 전기적인 자료는 극히 드물어서, 『隋書』에도 그의 열전이 보이지 않으며, 『隋書』, 『通典』, 『資治通鑑』, 『冊府元龜』 등에 단편적인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사신을 다녀온 뒤 『西蕃記』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이 글은 현재 그 전문이 전해지지 않고 『通典』 「邊防典」에 殘文이 보일 뿐이다. 자세한 내용은 長澤和俊, 1964: 254∼25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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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사예종사(司隸從事)주 003
각주 003)
司隸從事: 漢代부터 있었던 관직이지만, 隋煬帝가 司隸臺를 설치하고 그 屬官으로 40인의 司隸從事를 두었다. 이들은 刺史를 도와 諸郡을 순찰하는 직무를 수행했다. 후에 司隸臺는 없어졌지만 司隸從事라는 직명은 그대로 남아, 京官들 가운데 淸明한 자들을 選用하여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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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행만(杜行滿)을 서방의 여러 번국(蕃國)에 사신으로 보냈는데,주 004
각주 004)
韋節과 杜行滿이 사절로 떠난 시기에 관해서 大業 원년(605)이라는 설과 大業 3년(607)이라는 설이 대립되었으나, 司隸從事가 소속된 司隸臺가 大業 3년 四月에 初置되었으므로, 그 뒤의 일로 보는 것이 해야 옳을 것이다. 또한 『隋書』 「經籍志」에는 韋節이 『西蕃記』를 써올린 것이 大業 5년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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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빈(罽賓) 주 005
각주 005)
罽賓: 시대마다 지칭하는 지역이 조금씩 다르고 이에 관해서는 학자들의 異見이 있으나, 대체로 카슈미르 지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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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러 마노(碼碯)로 만든 잔을, 왕사성(王舍城) 주 006
각주 006)
王舍城: Rajagriha. 마가다 왕국의 수도이자 불교의 제1차 집결지로, 현재 Rajgir시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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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불경을, 사국(史國)에서는 10명의 무녀(儛女)주 007
각주 007)
儛女: 唐代 胡旋舞로 유명한 西域의 舞女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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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사자의 가죽과 화서모(火鼠毛)주 008
각주 008)
火鼠毛: 일종의 石綿으로 보이며, 火浣布의 원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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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얻어서 돌아왔다. 황제께서 다시 문희공(聞喜公) 배구(裴矩) 주 009
각주 009)
裴矩: 547∼627. 字는 弘大이고 河東 聞喜人(현재 山西 聞喜 東北). 그는 北齊에서 관직을 시작하여 北齊 멸망 후에는 北周에 들어갔고, 楊堅이 隋朝를 건국한 뒤 重用되었다. 일찍이 南朝의 陳을 정벌하는 전투와 突厥의 啟民可汗을 安撫하는 일, 또한 隋禮를 制定하는 작업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隋煬帝가 즉위한 뒤 裴矩는 계속 重用되어 蘇威, 宇文述, 裴蘊, 虞世基 등과 함께 朝政을 장악하여, ‘五貴’라 불리우기도 했다. 물론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西域을 경영한 일이었다. 그는 大業 원년(605)에서 9년(613)까지 적어도 4차례에 걸쳐서 甘州, 涼州, 沙州 등지를 다녀왔다. 또한 그는 西域 各國의 山川地理와 人物風俗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各國의 貴族·庶人들의 服飾儀錶를 繪畫로 그려 『西域圖記』 三卷을 지었다, 아울러 地圖를 제작하여 各地의 險要를 그려서 煬帝에게 헌상하기도 하였다. 裴矩는 高昌王 麴伯雅, 伊吾의 吐屯設 등을 데리고 入朝하였다. 『隋書』 권67에 立傳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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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명을 내려 무위(武威)장액(張掖) 일대를 왕래하며 [외국의 사신들을] 인도하여 오도록 하였다. 그곳에서 군장(君長)을 갖고 있는 것이 44국이었으며, 배구가 그 사신들을 입조시켜 풍부한 재물을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서로 소문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대업(大業) 연간(605∼618)에 서로 이끌면서 내조한 것이 30여 국이었으니, 이로 인해 황제는 서역교위(西域校尉)주 010
각주 010)
西域校尉: 『通典』 「邊防」 7에는 ‘西戎校尉’라고도 표기. 西域校尉의 설치연대는 불분명하나 일찍부터 두어져 서역의 사신들을 대접하는 직무를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직책의 존속 기간은 매우 짧아서, 곧 四方館의 ‘西戎使者’가 그 직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물론 西域校尉가 수도 長安이 아니라 瓜州나 張掖과 같은 곳에 두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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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두어 그들을 접대하도록 하였다. 얼마 안 가서 중원의 나라가 큰 난리를 겪게 되자 조공은 마침내 끊어져버려, 관련 사정의 상당 부분은 사라졌고 현재 기록으로 보존된 것은 20국에 불과하다.

  • 각주 001)
    侍御史: 御史 혹은 侍御라고도 簡稱된다. 前漢 시대에 御史大夫의 屬官으로 두어졌고 禁中에서 入侍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隋代에는 종7품관으로 吏部에서 選用했고 禁中에 入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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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韋節: 본문에서 서술된 것과 같이 그는 司隸從事 杜行滿과 함께 罽賓을 위시하여 멀리 인도의 王舍城(Rajagriha)에까지 사신으로 다녀온 인물이다. 그러나 그 개인에 관한 전기적인 자료는 극히 드물어서, 『隋書』에도 그의 열전이 보이지 않으며, 『隋書』, 『通典』, 『資治通鑑』, 『冊府元龜』 등에 단편적인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사신을 다녀온 뒤 『西蕃記』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이 글은 현재 그 전문이 전해지지 않고 『通典』 「邊防典」에 殘文이 보일 뿐이다. 자세한 내용은 長澤和俊, 1964: 254∼25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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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司隸從事: 漢代부터 있었던 관직이지만, 隋煬帝가 司隸臺를 설치하고 그 屬官으로 40인의 司隸從事를 두었다. 이들은 刺史를 도와 諸郡을 순찰하는 직무를 수행했다. 후에 司隸臺는 없어졌지만 司隸從事라는 직명은 그대로 남아, 京官들 가운데 淸明한 자들을 選用하여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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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韋節과 杜行滿이 사절로 떠난 시기에 관해서 大業 원년(605)이라는 설과 大業 3년(607)이라는 설이 대립되었으나, 司隸從事가 소속된 司隸臺가 大業 3년 四月에 初置되었으므로, 그 뒤의 일로 보는 것이 해야 옳을 것이다. 또한 『隋書』 「經籍志」에는 韋節이 『西蕃記』를 써올린 것이 大業 5년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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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罽賓: 시대마다 지칭하는 지역이 조금씩 다르고 이에 관해서는 학자들의 異見이 있으나, 대체로 카슈미르 지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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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王舍城: Rajagriha. 마가다 왕국의 수도이자 불교의 제1차 집결지로, 현재 Rajgir시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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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儛女: 唐代 胡旋舞로 유명한 西域의 舞女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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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火鼠毛: 일종의 石綿으로 보이며, 火浣布의 원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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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裴矩: 547∼627. 字는 弘大이고 河東 聞喜人(현재 山西 聞喜 東北). 그는 北齊에서 관직을 시작하여 北齊 멸망 후에는 北周에 들어갔고, 楊堅이 隋朝를 건국한 뒤 重用되었다. 일찍이 南朝의 陳을 정벌하는 전투와 突厥의 啟民可汗을 安撫하는 일, 또한 隋禮를 制定하는 작업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隋煬帝가 즉위한 뒤 裴矩는 계속 重用되어 蘇威, 宇文述, 裴蘊, 虞世基 등과 함께 朝政을 장악하여, ‘五貴’라 불리우기도 했다. 물론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西域을 경영한 일이었다. 그는 大業 원년(605)에서 9년(613)까지 적어도 4차례에 걸쳐서 甘州, 涼州, 沙州 등지를 다녀왔다. 또한 그는 西域 各國의 山川地理와 人物風俗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各國의 貴族·庶人들의 服飾儀錶를 繪畫로 그려 『西域圖記』 三卷을 지었다, 아울러 地圖를 제작하여 各地의 險要를 그려서 煬帝에게 헌상하기도 하였다. 裴矩는 高昌王 麴伯雅, 伊吾의 吐屯設 등을 데리고 入朝하였다. 『隋書』 권67에 立傳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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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西域校尉: 『通典』 「邊防」 7에는 ‘西戎校尉’라고도 표기. 西域校尉의 설치연대는 불분명하나 일찍부터 두어져 서역의 사신들을 대접하는 직무를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직책의 존속 기간은 매우 짧아서, 곧 四方館의 ‘西戎使者’가 그 직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물론 西域校尉가 수도 長安이 아니라 瓜州나 張掖과 같은 곳에 두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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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양제, 위절(韋節), 두행만(杜行滿), 문희공(聞喜公) 배구(裴矩), 배구
지명
계빈(罽賓), 왕사성(王舍城), 사국(史國), 무위(武威), 장액(張掖), 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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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제(煬帝) 때에 시어사(侍御史) 위절(韋節) 등을 사신으로 보내 서방의 번국(蕃國)과 문물을 교류함 자료번호 : jo.k_0013_0083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