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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大祚榮)의 뒤를 이은 대무예(大武藝)가 흑수(黑水) 공격

[당] 현종(재위: 712~756)주 001
번역주 001)
당 현종 : 唐朝 제6대 황제로 이름은 李隆基였다. 睿宗의 셋째 아들로 楚王에 봉해졌다가 臨淄王으로 改封되었다. 景雲 初 太平公主와 함께 韋后와 그 일당을 소탕하고 睿宗을 복위시켰으며, 太子로서 朝政에 참여하였다. 先天 元年(712) 즉위했고 이듬해 太平公主와 그 일당을 숙청하였다. 開元년간 사회 안정과 경제 발전, 문화 번영, 國勢의 강성을 開元之治라 한다. 그러나 天寶년간 이후 楊貴妃를 총애하고 李林甫와 楊國忠을 宰相으로 등용하게 되면서 정치가 부패하였다. 安史의 난이 일어나자 天寶 15년(756) 六月 蜀으로 도망갔으며, 七月 太子 李亨이 靈武에서 즉위한 후 太上皇을 칭하였다. 至德 2년(757)末 蜀에서 長安으로 돌아와 興慶宮에 유폐되었다가 죽었다. 泰陵에 장사 지냈으며 시호는 至道大聖大明孝皇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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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 7년(719)에 [대]조영이 죽으니, 그 나라에서 사사로이 시호를 고왕이라 하였다. 아들 [대]무예(渤海 武王, 재위: 719~737)가 왕위에 올라 영토를 크게 개척하니, 동북의 모든 오랑캐가 그를 두려워하여 신속하였으며, 사사로이 연호를 고쳐 인안이라고 하였다. 황제가 전책을 하사하고 왕위와 영지를 세습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주 002
번역주 002)
『구당서』에 따르면, 개원 14년(72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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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수말갈의 사자가 입조하자, [당] 황제는 그 땅으로 흑수주를 세우고, 장사를 두어 총괄하게 하였다. [대]무예가 그 속하를 불러 모의하여 말하기를, “흑수[말갈]이 처음에 우리에게 길을 빌려서 당과 통하였고, 지난번 돌궐에게 토둔[직]주 003
번역주 003)
吐屯 : 『新唐書』 突厥列傳 ‘ … 其別部典兵者曰設 子弟曰特勒 大臣曰葉護 曰屈律啜·曰阿波·曰俟利發·曰吐屯 … 凡二十八等’ 기록에 토둔은 돌궐의 관명 중 일곱 번째로 나온다. 복속 지역에 주둔하여 征賦를 감독하는 직이었다. 吐屯設(Tudun Šad)·吐屯啜(Tudun Čur)·吐屯發(Tudun bär)으로 표시되기도 하는데, 設(Šad)·發(bär)·啜(Čur)의 官稱을 가진 者가 吐屯의 職에 있게 되었을 경우에 부르게 된 칭호인 것으로 보인다(小野川秀美,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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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청할 때에도 모두 우리에게 먼저 알렸다. [그런데] 지금 당에게 관을 청하면서 우리에게 알리지 않으니, 이는 반드시 당과 더불어 앞뒤로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동생 [대]문예와 장인 임아상을 보내 군사를 일으켜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다.
[대]문예는 일찍이 경사(장안)에 질자로 [있었으므로], 이로움과 해로움을 알아, [대]무예에게 말하길, “흑수[말갈]이 벼슬을 청하였다 하여 우리가 그를 공격하는 것은 당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당은 대국으로서 군사가 우리의 1만 배인데, 그들과 원한을 맺는다면 우리는 장차 망할 것입니다. 옛날 고구려는 전성기에 군사 30만으로, 당과 맞서 적이 되었으니, 용감하고 굳세다고 할 수 있지만, 당의 군사가 한 번 당도하자 땅이 쓸리듯이 없어졌습니다. 지금 우리의 군사는 고구려에 비해 삼분의 일이니, 왕이 그들을 어기려는 것은 불가합니다.”라고 하였다. [대]무예는 따르지 않았다. [대문예의] 군사가 국경에 이르자, [대문예가] 또 글을 올려 간곡히 간하였다. [대]무예가 진노하여, 종형 [대]일하를 보내어 대신 통솔하게 하고, [대]문예는 불러들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대]문예가 두려워 샛길로 귀순하니, [당 현종은] 조서를 내려 좌효위장군주 004
번역주 004)
左驍衛將軍 : 唐의 諸衛 가운데 左驍衛의 차관직인 將軍으로 종3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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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제수하였다. [대]무예가 사신을 시켜 [대]문예의 죄악을 폭로하게 하고, 그를 죽일 것을 청하였다. [당 현종은] 조서를 내려 대문예를 안서주 005
번역주 005)
安西 : 安西都護府 지역을 말한다. 640년 당나라는 吐魯蕃 지방의 高昌國을 멸망시키고, 서역 경영을 위해 도호부를 설치하였다. 658년에는 龜玆로 治所를 옮겼다. 그 관할하에 安西 四鎭을 두고 90여 屬州를 거느렸고, 파미르 동서방의 여러 오아시스국과의 무역 및 상업로를 관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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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머물게 하고, [대무예에게] 좋게 대답하여 말하길, “[대]문예가 곤궁하게 와서 나에게 귀순하였으니, 도리상 죽일 수가 없다. 이미 험한 땅주 006
번역주 006)
『구당서』에 따르면, ‘嶺南’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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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그를 보냈다.”라고 하였다. 아울러 사신은 머물게 하여 보내지 않고, 별도로 홍려소경주 007
번역주 007)
鴻臚少卿 : 鴻臚寺의 차관으로, 北齊 때 처음 설치되었다. 唐 무덕(617~626) 연간에 1인을 두었으며, 정관(627~649) 연간에 더하여 2인을 두었다. 종4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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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수와 원복에게 조서를 내려 뜻을 전하게 하였다. [대]무예가 그것을 알고 글을 올려 따져 말하길, ‘폐하가 거짓을 천하에 보이는 것은 부당합니다.’라고 하니, 본뜻은 반드시 [대]문예를 죽이라는 것이었다. [당의] 황제는 [이]도수와 [원]복이 나랏일을 누설한 것에 노하여, 모두 좌천시키고, 거짓으로 [대]문예를 물리쳐서 [이를 대무예에게] 알렸다.

  • 번역주 001)
    당 현종 : 唐朝 제6대 황제로 이름은 李隆基였다. 睿宗의 셋째 아들로 楚王에 봉해졌다가 臨淄王으로 改封되었다. 景雲 初 太平公主와 함께 韋后와 그 일당을 소탕하고 睿宗을 복위시켰으며, 太子로서 朝政에 참여하였다. 先天 元年(712) 즉위했고 이듬해 太平公主와 그 일당을 숙청하였다. 開元년간 사회 안정과 경제 발전, 문화 번영, 國勢의 강성을 開元之治라 한다. 그러나 天寶년간 이후 楊貴妃를 총애하고 李林甫와 楊國忠을 宰相으로 등용하게 되면서 정치가 부패하였다. 安史의 난이 일어나자 天寶 15년(756) 六月 蜀으로 도망갔으며, 七月 太子 李亨이 靈武에서 즉위한 후 太上皇을 칭하였다. 至德 2년(757)末 蜀에서 長安으로 돌아와 興慶宮에 유폐되었다가 죽었다. 泰陵에 장사 지냈으며 시호는 至道大聖大明孝皇帝였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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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당서』에 따르면, 개원 14년(726)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吐屯 : 『新唐書』 突厥列傳 ‘ … 其別部典兵者曰設 子弟曰特勒 大臣曰葉護 曰屈律啜·曰阿波·曰俟利發·曰吐屯 … 凡二十八等’ 기록에 토둔은 돌궐의 관명 중 일곱 번째로 나온다. 복속 지역에 주둔하여 征賦를 감독하는 직이었다. 吐屯設(Tudun Šad)·吐屯啜(Tudun Čur)·吐屯發(Tudun bär)으로 표시되기도 하는데, 設(Šad)·發(bär)·啜(Čur)의 官稱을 가진 者가 吐屯의 職에 있게 되었을 경우에 부르게 된 칭호인 것으로 보인다(小野川秀美, 1943).바로가기
  • 번역주 004)
    左驍衛將軍 : 唐의 諸衛 가운데 左驍衛의 차관직인 將軍으로 종3품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安西 : 安西都護府 지역을 말한다. 640년 당나라는 吐魯蕃 지방의 高昌國을 멸망시키고, 서역 경영을 위해 도호부를 설치하였다. 658년에는 龜玆로 治所를 옮겼다. 그 관할하에 安西 四鎭을 두고 90여 屬州를 거느렸고, 파미르 동서방의 여러 오아시스국과의 무역 및 상업로를 관장하였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구당서』에 따르면, ‘嶺南’ 지역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鴻臚少卿 : 鴻臚寺의 차관으로, 北齊 때 처음 설치되었다. 唐 무덕(617~626) 연간에 1인을 두었으며, 정관(627~649) 연간에 더하여 2인을 두었다. 종4품상이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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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大祚榮)의 뒤를 이은 대무예(大武藝)가 흑수(黑水) 공격 자료번호 : jd.k_0017_0219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