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성립과 대조영(大祚榮)의 발해왕 배수(拜受)
발해주 001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부속되어 있었으며,주 002
번역주 002)

성은 대씨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주 003의 동모산주 004을 지켰다. [그] 땅은 곧바로 영주주 005 대조영의 출자에 대해서 『舊唐書』 발해말갈전의 ‘本高麗別種(본래 고려의 별종)’이라고 한 기록과 표현에 차이가 있어 해석에 논란이 있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대조영의 출신을 고구려 계통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는데, 李承休의 『帝王韻記』와 柳得恭의 『渤海考』가 대표적이다. 일본에서는 대체로 속말말갈이나 여진 계통으로 보았다. 발해국의 주체는 靺鞨族이지만, 大祚榮은 高句麗 別部 출신으로 보는 경우(鳥山喜一, 1915), 새로운 종족으로 발해말갈을 이해한 경우(池內宏, 1916),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으로 본 경우(白鳥庫吉, 1933)도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 발해사 연구를 촉발시킨 대표적인 연구자는 북한의 박시형이다. 그는 발해국의 성립에 중심 역할을 한 것은 고구려 멸망 후 요서지방으로 이주된 고구려인 집단이었고, 이들을 조직하여 지휘한 것이 고구려 장수인 대조영이라고 하였다. 발해국은 고구려 왕실의 일족 또는 고구려 계통의 귀족출신들이 거의 권력을 독점하였고, 문화 방면에서도 고구려의 문화가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고 보았다(박시형, 1979 ; 송기호 해제, 1989). 한국의 李龍範도 발해의 주체는 고구려 유민이었음을 주장하였다(李龍範, 1972·1973). 이후 한국 학계에서는 기본적으로 대조영을 고구려 계통으로 보았으나, 종족은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옮겨와 정착하여 동화된 인물, 즉 말갈계 고구려인으로 보기도 한다(송기호, 1995). 말갈의 명칭 자체를 고구려 변방 주민이나 중국 동북 지역민에 대한 비칭·범칭으로 보고, 발해의 구성원이 된 말갈은 흑수말갈과 구분되는 예맥계인 고구려말갈이며, 대조영은 고구려인으로 속말강(송화강) 지역민으로 본 견해도 있다(한규철, 1988 ; 2007). 중국 학계에서는 근대 초기에는 양면적 인식이 보였다. 대표적인 학자는 金毓黻이다(『渤海國志長編』, 1934).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는 발해사를 중국의 소수민족사로 보고 고구려계승성을 부정하며 말갈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한편 19세기 중반 연해주 지역을 차지하였던 러시아에서는 자국의 極東 지역 소수민족사의 일부로서 관심을 갖고 발해를 말갈족의 역사로 규정하며 대조영 역시 말갈인으로 보고 있다. 이외 소수 설로 말갈 중 대조영을 백산말갈 출신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津田左右吉, 1915 ; 李健才, 2000).
번역주 005)

에서 동쪽 2,000리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와 잇닿아 니하주 006 營州 : 현재 중국 遼寧省 朝陽市. 營州의 지명은 『爾雅』 「釋地」 등 고전에 9州나 2州의 하나로 나오지만 대체로 산동반도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後趙 시기에는 石虎가 지금의 中國 灤河·永平 부근에 영주를 설치하였고, 遼西·北平의 2郡을 거느렸다. 北魏 시기에는 治所를 朝陽 지역의 和龍城에 두어 昌黎·建德·遼東·樂良·冀湯·冀陽·營丘의 7郡을 거느렸다. 隋대와 唐대에도 營州라 불렀다. 당나라 초기부터 이 땅에는 투항한 거란족과 해족 등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였고,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그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고구려 멸망 이후에는 많은 고구려 유민과 고구려 예하에 있었던 말갈인들이 당 內地로 끌려가면서 일부 이곳에 남았고, 이들 중 상당수는 696년 거란 李盡忠의 반란을 계기로 東走하여 발해건국에 참여하였다. 이곳은 이후에도 唐나라가 동북방민족들을 공제하고 방어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번역주 006)

를 경계로 한다. 동쪽에는 큰 바다가 서쪽에는 거란이 있다. 성곽을 쌓고 사니, 고구려의 도망하여 남은 이들이 그에게 점점 귀부하였다. 泥河 : 니하와 관련해서는 『三國史記』에 몇 차례 관련 기사가 보인다. 「新羅本紀」 祇摩尼師今 14年條 ‘秋七月〔靺鞨〕又襲大嶺柵 過於泥河’, 慈悲麻立干 11年條 ‘春 高句麗與靺鞨襲北邊悉直城 秋九月 徵何瑟羅人年十五已上 築城於泥河’, 照知麻立干 3年 條 ‘三月 高句麗與靺鞨入北邊 取狐鳴等七城 又進軍於爾秩夫 我軍與百濟加那援兵 分道禦之 賊敗退 追擊破之泥河西斬首千餘級’, 照知麻立干 18年條 ‘秋七月 高句麗來攻牛山城 將軍實竹出擊泥河上 破之’ 등이다. 이들 기록을 통해 니하는 동해에 인접한 悉直(三陟), 何瑟羅(江陵)과 비교적 가까이에 있는 강으로 추정된다. 丁若鏞은 『我邦疆域考』 「渤海考」에서 ‘我江陵之北 泥川水也’라 하였고, 松井等은 『三國史記』 「地理志」에 引用되어 있는 賈耽의 『古今郡國志』의 ‘自新羅泉井郡 至柵城府 凡三十九驛’이라는 記事에 의거하여 泉井郡인 현재의 德源으로 단정하고, 泥河는 德源 附近의 河川으로 보아, 德源과 그 북쪽인 永興傍의 龍興江으로 推定한 바 있다(松井等, 1913). 津田左右吉은 聖德王 20年의 長城 축조 기사를 통해 東海岸에서 安邊 附近의 南大川으로 보았다(津田左右吉, 1913).
만세통천(696) 중에 거란주 007
번역주 007)

의 [이]진충주 008이 영주도독 조홰주 009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주 010 契丹 : 고대에 현재 중국의 시라무렌 강(Siramuren, 西刺木倫) 지역에서 일어난 부족이다. 거란의 열전은 『魏書』에 처음 입전되었다. 거란이라는 이름이 보이는 가장 오래된 자료는 朝陽 동쪽 義縣 부근의 萬佛洞에, 北魏의 使者 韓貞이 景明 3년(502)에 契丹으로 가면서 새긴 명문이다. 5세기 후반 동쪽에서는 고구려가 遼西로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서쪽에서는 柔然의 압박이 가해지자, 거란은 北魏에 內附하여 白狼水(大凌河)의 동쪽으로 남하하였다. 거란의 別部인 出伏部 등 그 일부는 高句麗에 臣屬하였다. 중국 隋·唐代에는 고구려나 돌궐에 복속하거나 연대하여 수·당에 대항하기도 하고, 반대로 수·당에 복속하여 고구려나 돌궐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唐 太宗은 거란 서쪽에 인접해 있는 庫莫奚를 支配하기 위해서 시라무렌 上流에 饒樂都督府를 설치하였고, 거란을 지배하기 위해서 營州 附近에 松漠都督府를 設置하였다. 당 초기에는 大賀氏가 지배씨족인 八部 연맹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 태종은 그 수장인 窟哥를 都督으로 任命하여 李氏 성을 하사하여 부족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들은 營州 부근에 살면서 평소에는 자치를 하며 유목생활을 하다가 당의 고구려 공격과 같은 대외전쟁 시기에는 藩兵으로 동원되었다.
번역주 010)

걸걸중상이라는 자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남은 종족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서 태백산의 동북쪽을 지키고 오루하를 막아 성벽을 세우고 스스로 수비하였다.주 011 舍利 : 걸걸중상이 사리를 칭하고 있어, 영주 지역에서 거란의 예속 하에 사리직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7세기 후반에 거란에서 사리를 관명이나 부족장의 칭호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遼史』 「國語解」의 舍利條에는 ‘契丹豪民要裏頭巾者 納牛駝十頭 馬百疋 乃給官命曰舍利 後遂爲諸帳官 以郞君繫之’라고 하였다. 사리는 遼代에 豪民들이 官에 牛駝 및 馬를 納하고 얻는 官名이었다. 그런데 사리 명칭은 돌궐계와 관련하여 처음 보이며, 고구려 멸망 후 설치된 주명에도 舍利州都督府가 보이고 있어 거란의 영향으로만 볼 수 없다(권은주, 2011).
번역주 011)

[측천]무후주 012는 걸사비우를 허국공으로, 걸걸중상을 진국공으로 책봉하여 그 죄를 용서하였다. [걸사]비우가 명령을 받지 않자, [측천무]후가 옥검위대장군주 013 이해고주 014 『舊唐書』 渤海靺鞨傳에서는 대조영의 아버지인 乞乞仲象의 이야기가 보이지 않고, 大祚榮이 唐에 반기를 들고 東走하여 건국한 것으로 나온다. 이밖에 최치원의 글에는 구당서와 같이 대조영과 걸사비우가 영주를 벗어난 것처럼 기술되어 있는 반면, 오대회요는 신당서처럼 처음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집단을 이끌다가 대조영이 계승한 것으로 나온다. 서로 다른 두 계통의 기록 차이로 인해 발해의 실제 건국자가 누구인지, 대조영과 걸걸중상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가 논란이 되었다. 대체로 부자 관계로 보는 것이 정설이나, 대조영과 걸걸중상을 동일인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예로 일본 학자인 池內宏과 津田左右吉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걸걸중상이 본명이며, 대조영은 건국 후 漢式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았다(池內宏, 1914 ; 津田左右吉, 1915).
번역주 014)

와 중랑장 색구에게 조서를 내려 그를 공격해서 베어 죽였다. 이때에 [걸걸]중상은 이미 죽었고 그의 아들 [대]조영이 상처 난 이들을 이끌고 도망쳐 달아났는데, [이]해고가 끝까지 추격하여 천문령주 015을 넘었다.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 병사로써 [이]해고를 막으니, [이]해고가 패하여 돌아왔다. 이때 거란이 돌궐에게 붙음으로 천자의 군대는 길이 끊어져 토벌하지 못하였다. [대]조영이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아우르고 지역이 [중국과] 먼 것을 믿고, 곧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주 016 李楷固 : 唐의 장수(656~720). 거란 출신으로 696년 李盡忠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의 수하로 반란에 가담하였다. 李盡忠이 죽고 거란군을 이끌던 孫萬榮이 피살되자, 駱務整과 함께 唐에 투항하였다. 재상인 狄仁傑의 추천으로 당의 장수가 되어, 대조영이 이끌던 고구려 유민과 걸사비우가 이끌던 말갈인을 쫓았다. 먼저 걸사비우를 죽이고, 뒤이어 천문령전투에서 대조영에게 패배하여 돌아가게 되었다. 이후 측천무후에게 총애를 얻어 燕國公이 되었고, 700년에 武씨 성을 하사받아 武楷固라 불렀다. 中宗이 복위한 뒤 李씨 성을 회복하였다. 이해고의 사위는 같은 거란 장수인 李楷洛이며 외손자는 名將인 李光弼(708~764)이다.
번역주 016)

왕이라 부르며, 사신을 보내 돌궐과 교류하였다. [그] 땅은 사방 5,000리이며, 호수는 십여만이고, 뛰어난 병사가 수만이다.주 017 문자를 제법 알며, 부여·옥저·변한·조선의 바다 북쪽 여러 나라를 모두 얻었다.주 018
震國 : 『舊唐書』 渤海靺鞨傳에는 ‘振國’으로 되어 있다. 震을 초기 국명으로 보는 견해로는 稻葉岩吉 등이 있는데, 그는 신당서가 발해의 문물제도에 대한 풍부한 기록을 싣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인정하여 震을 초기 국명으로 보았다. 이때 震은 불교의 東方大震那나 周易의 帝出乎震에서 나온 東方을 의미한다고 보았다(稻葉岩吉, 1915 ; 金毓黻, 1934). 그런데 중국 학계에서는 ‘말갈설’에 입각하여 진을 숙신의 음차로 보기도 하며, 진국을 국명이 아닌 별칭으로 보기도 한다. 예로 劉振華의 경우 震은 肅愼을 생략하여 愼만 취한 것이라고 보았는데, 즉 愼의 眞은 振(震)과 同紐同韻으로서 異調同音字라고 하였다(劉振華, 1981). 魏國忠은 초기 국명 ‘말갈설’을 견지한 입장에서, 振國과 震國은 상호 배척되는 단어로 보고 이 중 震國이 속칭 혹은 별칭이었고, 振國은 전승되는 과정에서 잘못 기록해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魏國忠, 2006),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振國이 초기 국명이라고 보고 있다.
[당] 중종(재위: 684, 705~710)주 019
번역주 019)

때에 시어사 장행급을 보내어 불러 위로하니, [대]조영이 아들을 보내어 입시하게 하였다.주 020 [당] 예종(재위: 684~690, 710~712) 선천 연간(712~713)주 021에 사신을 보내어 [대]조영을 좌효위대장군주 022·발해군왕에 배수하고, 총괄하고 있는 지역을 홀한주주 023로 삼아서 홀한주도독을 겸임시켰다. 이로부터 처음 말갈이라는 호칭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로만 불렀다.주 024
당 중종 : 唐代 제4대 皇帝로 이름은 李顯이었다. 高宗의 일곱 번째 아들로 武則天의 소생이었다. 다른 이름은 哲이었다. 永隆 元年(680)에 태자로 봉해져 弘道 元年(683)에 高宗이 병사하자 즉위하나 이듬해 2월 폐위되어 廢陵王이 된 다음에 房州(지금 湖北省 房縣)에 옮겨가 있었다. 聖曆 元年(698) 다시 太子가 되어 神龍 元年(705) 丁月에 군사 정변을 통해 복위되었다가 二月에 국호를 다시 唐으로 환원시켰다. 재위 기간 동안 정사에 관심이 없었고, 景龍 4년(710) 六月에 韋后와 安樂公主에게 독살되었다. 定陵(지금의 陝西省 富平 북쪽)에 피장이 되었다. 諡號는 孝和皇帝였다.
- 번역주 001)
-
번역주 002)
대조영의 출자에 대해서 『舊唐書』 발해말갈전의 ‘本高麗別種(본래 고려의 별종)’이라고 한 기록과 표현에 차이가 있어 해석에 논란이 있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대조영의 출신을 고구려 계통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는데, 李承休의 『帝王韻記』와 柳得恭의 『渤海考』가 대표적이다. 일본에서는 대체로 속말말갈이나 여진 계통으로 보았다. 발해국의 주체는 靺鞨族이지만, 大祚榮은 高句麗 別部 출신으로 보는 경우(鳥山喜一, 1915), 새로운 종족으로 발해말갈을 이해한 경우(池內宏, 1916),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으로 본 경우(白鳥庫吉, 1933)도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 발해사 연구를 촉발시킨 대표적인 연구자는 북한의 박시형이다. 그는 발해국의 성립에 중심 역할을 한 것은 고구려 멸망 후 요서지방으로 이주된 고구려인 집단이었고, 이들을 조직하여 지휘한 것이 고구려 장수인 대조영이라고 하였다. 발해국은 고구려 왕실의 일족 또는 고구려 계통의 귀족출신들이 거의 권력을 독점하였고, 문화 방면에서도 고구려의 문화가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고 보았다(박시형, 1979 ; 송기호 해제, 1989). 한국의 李龍範도 발해의 주체는 고구려 유민이었음을 주장하였다(李龍範, 1972·1973). 이후 한국 학계에서는 기본적으로 대조영을 고구려 계통으로 보았으나, 종족은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옮겨와 정착하여 동화된 인물, 즉 말갈계 고구려인으로 보기도 한다(송기호, 1995). 말갈의 명칭 자체를 고구려 변방 주민이나 중국 동북 지역민에 대한 비칭·범칭으로 보고, 발해의 구성원이 된 말갈은 흑수말갈과 구분되는 예맥계인 고구려말갈이며, 대조영은 고구려인으로 속말강(송화강) 지역민으로 본 견해도 있다(한규철, 1988 ; 2007). 중국 학계에서는 근대 초기에는 양면적 인식이 보였다. 대표적인 학자는 金毓黻이다(『渤海國志長編』, 1934).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는 발해사를 중국의 소수민족사로 보고 고구려계승성을 부정하며 말갈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한편 19세기 중반 연해주 지역을 차지하였던 러시아에서는 자국의 極東 지역 소수민족사의 일부로서 관심을 갖고 발해를 말갈족의 역사로 규정하며 대조영 역시 말갈인으로 보고 있다. 이외 소수 설로 말갈 중 대조영을 백산말갈 출신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津田左右吉, 1915 ; 李健才, 2000).
- 번역주 003)
- 번역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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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5)
營州 : 현재 중국 遼寧省 朝陽市. 營州의 지명은 『爾雅』 「釋地」 등 고전에 9州나 2州의 하나로 나오지만 대체로 산동반도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後趙 시기에는 石虎가 지금의 中國 灤河·永平 부근에 영주를 설치하였고, 遼西·北平의 2郡을 거느렸다. 北魏 시기에는 治所를 朝陽 지역의 和龍城에 두어 昌黎·建德·遼東·樂良·冀湯·冀陽·營丘의 7郡을 거느렸다. 隋대와 唐대에도 營州라 불렀다. 당나라 초기부터 이 땅에는 투항한 거란족과 해족 등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였고,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그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고구려 멸망 이후에는 많은 고구려 유민과 고구려 예하에 있었던 말갈인들이 당 內地로 끌려가면서 일부 이곳에 남았고, 이들 중 상당수는 696년 거란 李盡忠의 반란을 계기로 東走하여 발해건국에 참여하였다. 이곳은 이후에도 唐나라가 동북방민족들을 공제하고 방어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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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6)
泥河 : 니하와 관련해서는 『三國史記』에 몇 차례 관련 기사가 보인다. 「新羅本紀」 祇摩尼師今 14年條 ‘秋七月〔靺鞨〕又襲大嶺柵 過於泥河’, 慈悲麻立干 11年條 ‘春 高句麗與靺鞨襲北邊悉直城 秋九月 徵何瑟羅人年十五已上 築城於泥河’, 照知麻立干 3年 條 ‘三月 高句麗與靺鞨入北邊 取狐鳴等七城 又進軍於爾秩夫 我軍與百濟加那援兵 分道禦之 賊敗退 追擊破之泥河西斬首千餘級’, 照知麻立干 18年條 ‘秋七月 高句麗來攻牛山城 將軍實竹出擊泥河上 破之’ 등이다. 이들 기록을 통해 니하는 동해에 인접한 悉直(三陟), 何瑟羅(江陵)과 비교적 가까이에 있는 강으로 추정된다. 丁若鏞은 『我邦疆域考』 「渤海考」에서 ‘我江陵之北 泥川水也’라 하였고, 松井等은 『三國史記』 「地理志」에 引用되어 있는 賈耽의 『古今郡國志』의 ‘自新羅泉井郡 至柵城府 凡三十九驛’이라는 記事에 의거하여 泉井郡인 현재의 德源으로 단정하고, 泥河는 德源 附近의 河川으로 보아, 德源과 그 북쪽인 永興傍의 龍興江으로 推定한 바 있다(松井等, 1913). 津田左右吉은 聖德王 20年의 長城 축조 기사를 통해 東海岸에서 安邊 附近의 南大川으로 보았다(津田左右吉,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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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7)
契丹 : 고대에 현재 중국의 시라무렌 강(Siramuren, 西刺木倫) 지역에서 일어난 부족이다. 거란의 열전은 『魏書』에 처음 입전되었다. 거란이라는 이름이 보이는 가장 오래된 자료는 朝陽 동쪽 義縣 부근의 萬佛洞에, 北魏의 使者 韓貞이 景明 3년(502)에 契丹으로 가면서 새긴 명문이다. 5세기 후반 동쪽에서는 고구려가 遼西로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서쪽에서는 柔然의 압박이 가해지자, 거란은 北魏에 內附하여 白狼水(大凌河)의 동쪽으로 남하하였다. 거란의 別部인 出伏部 등 그 일부는 高句麗에 臣屬하였다. 중국 隋·唐代에는 고구려나 돌궐에 복속하거나 연대하여 수·당에 대항하기도 하고, 반대로 수·당에 복속하여 고구려나 돌궐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唐 太宗은 거란 서쪽에 인접해 있는 庫莫奚를 支配하기 위해서 시라무렌 上流에 饒樂都督府를 설치하였고, 거란을 지배하기 위해서 營州 附近에 松漠都督府를 設置하였다. 당 초기에는 大賀氏가 지배씨족인 八部 연맹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 태종은 그 수장인 窟哥를 都督으로 任命하여 李氏 성을 하사하여 부족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들은 營州 부근에 살면서 평소에는 자치를 하며 유목생활을 하다가 당의 고구려 공격과 같은 대외전쟁 시기에는 藩兵으로 동원되었다.
- 번역주 008)
- 번역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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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10)
舍利 : 걸걸중상이 사리를 칭하고 있어, 영주 지역에서 거란의 예속 하에 사리직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7세기 후반에 거란에서 사리를 관명이나 부족장의 칭호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遼史』 「國語解」의 舍利條에는 ‘契丹豪民要裏頭巾者 納牛駝十頭 馬百疋 乃給官命曰舍利 後遂爲諸帳官 以郞君繫之’라고 하였다. 사리는 遼代에 豪民들이 官에 牛駝 및 馬를 納하고 얻는 官名이었다. 그런데 사리 명칭은 돌궐계와 관련하여 처음 보이며, 고구려 멸망 후 설치된 주명에도 舍利州都督府가 보이고 있어 거란의 영향으로만 볼 수 없다(권은주,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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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11)
『舊唐書』 渤海靺鞨傳에서는 대조영의 아버지인 乞乞仲象의 이야기가 보이지 않고, 大祚榮이 唐에 반기를 들고 東走하여 건국한 것으로 나온다. 이밖에 최치원의 글에는 구당서와 같이 대조영과 걸사비우가 영주를 벗어난 것처럼 기술되어 있는 반면, 오대회요는 신당서처럼 처음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집단을 이끌다가 대조영이 계승한 것으로 나온다. 서로 다른 두 계통의 기록 차이로 인해 발해의 실제 건국자가 누구인지, 대조영과 걸걸중상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가 논란이 되었다. 대체로 부자 관계로 보는 것이 정설이나, 대조영과 걸걸중상을 동일인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예로 일본 학자인 池內宏과 津田左右吉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걸걸중상이 본명이며, 대조영은 건국 후 漢式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았다(池內宏, 1914 ; 津田左右吉, 1915).
- 번역주 012)
- 번역주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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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14)
李楷固 : 唐의 장수(656~720). 거란 출신으로 696년 李盡忠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의 수하로 반란에 가담하였다. 李盡忠이 죽고 거란군을 이끌던 孫萬榮이 피살되자, 駱務整과 함께 唐에 투항하였다. 재상인 狄仁傑의 추천으로 당의 장수가 되어, 대조영이 이끌던 고구려 유민과 걸사비우가 이끌던 말갈인을 쫓았다. 먼저 걸사비우를 죽이고, 뒤이어 천문령전투에서 대조영에게 패배하여 돌아가게 되었다. 이후 측천무후에게 총애를 얻어 燕國公이 되었고, 700년에 武씨 성을 하사받아 武楷固라 불렀다. 中宗이 복위한 뒤 李씨 성을 회복하였다. 이해고의 사위는 같은 거란 장수인 李楷洛이며 외손자는 名將인 李光弼(708~764)이다.
- 번역주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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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16)
震國 : 『舊唐書』 渤海靺鞨傳에는 ‘振國’으로 되어 있다. 震을 초기 국명으로 보는 견해로는 稻葉岩吉 등이 있는데, 그는 신당서가 발해의 문물제도에 대한 풍부한 기록을 싣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인정하여 震을 초기 국명으로 보았다. 이때 震은 불교의 東方大震那나 周易의 帝出乎震에서 나온 東方을 의미한다고 보았다(稻葉岩吉, 1915 ; 金毓黻, 1934). 그런데 중국 학계에서는 ‘말갈설’에 입각하여 진을 숙신의 음차로 보기도 하며, 진국을 국명이 아닌 별칭으로 보기도 한다. 예로 劉振華의 경우 震은 肅愼을 생략하여 愼만 취한 것이라고 보았는데, 즉 愼의 眞은 振(震)과 同紐同韻으로서 異調同音字라고 하였다(劉振華, 1981). 魏國忠은 초기 국명 ‘말갈설’을 견지한 입장에서, 振國과 震國은 상호 배척되는 단어로 보고 이 중 震國이 속칭 혹은 별칭이었고, 振國은 전승되는 과정에서 잘못 기록해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魏國忠, 2006),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振國이 초기 국명이라고 보고 있다.
- 번역주 017)
- 번역주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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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19)
당 중종 : 唐代 제4대 皇帝로 이름은 李顯이었다. 高宗의 일곱 번째 아들로 武則天의 소생이었다. 다른 이름은 哲이었다. 永隆 元年(680)에 태자로 봉해져 弘道 元年(683)에 高宗이 병사하자 즉위하나 이듬해 2월 폐위되어 廢陵王이 된 다음에 房州(지금 湖北省 房縣)에 옮겨가 있었다. 聖曆 元年(698) 다시 太子가 되어 神龍 元年(705) 丁月에 군사 정변을 통해 복위되었다가 二月에 국호를 다시 唐으로 환원시켰다. 재위 기간 동안 정사에 관심이 없었고, 景龍 4년(710) 六月에 韋后와 安樂公主에게 독살되었다. 定陵(지금의 陝西省 富平 북쪽)에 피장이 되었다. 諡號는 孝和皇帝였다.
- 번역주 020)
- 번역주 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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