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수부(黑水府) 설치와 중국과의 통교(通交)
개원 10년(722)에 그 추장 예속리계가 내조하니, [당] 현종(재위: 712~756)주 001
번역주 001)

은 곧 발리주주 002자사에 제수하였다. 이에 안동도호 설태가 흑수부를 설치할 것을 청하여,주 003 부장을 도독·자사로 삼고, 조정에서 장사를 두어 이를 감독하게 하였다.주 004 [흑수]부 도독에게 이씨 성을 하사하고 이름은 헌성이라 하였으며, 운휘장군·영흑수경략사로 삼아 유주도독에 예속시켰다.주 005 황제의 말년까지 조헌한 것이 15번이다. 대력 연간(766~779)에는 모두 7번, 정원 연간(785~804)에는 한 번 왔으며, 원화 연간(806~820)에는 두 번 왔다. 당 현종 : 唐朝 제6대 황제로 이름은 李隆基였다. 睿宗의 셋째 아들로 楚王에 봉해졌다가 臨淄王으로 改封되었다. 景雲 初 太平公主와 함께 韋后와 그 일당을 소탕하고 睿宗을 복위시켰으며, 太子로서 朝政에 참여하였다. 先天 元年(712) 즉위했고 이듬해 太平公主와 그 일당을 숙청하였다. 開元년간 사회 안정과 경제 발전, 문화 번영, 國勢의 강성을 開元之治라 한다. 그러나 天寶년간 이후 楊貴妃를 총애하고 李林甫와 楊國忠을 宰相으로 등용하게 되면서 정치가 부패하였다. 安史의 난이 일어나자 天寶 15년(756) 六月 蜀으로 도망갔으며, 七月 太子 李亨이 靈武에서 즉위한 후 太上皇을 칭하였다. 至德 2년(757)末 蜀에서 長安으로 돌아와 興慶宮에 유폐되었다가 죽었다. 泰陵에 장사 지냈으며 시호는 至道大聖大明孝皇帝였다.
처음, 흑수[말갈]의 서북쪽에 또 사모부가 있고, 좀 더 북쪽으로 10일을 가면 군리부에 도달하며, 동북으로 10일을 가면 굴설(窟說)부에 도달하는데, 굴설(屈說)이라고도 부른다. 약간 동남쪽으로 10일을 가면 막예개부에 도달하고, 또 불열·우루·월희·철리 등의 부가 있다. 그 땅은 남쪽으로 발해에 이르고, 북동쪽은 바다에 닿아 있으며, 서쪽으로는 실위에 이른다. 남북의 길이는 2,000리이고, 동서는 1,000리이다. 불열·철리·우루·월희는 때때로 중국과 통교하였으나, 군리·굴설·막예개는 스스로 통교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경사에 조현한 것을 왼편에 부기해 둔다.
불열은 혹은 대불열로도 불리며, 개원(713~741)·천보(742~755) 사이에 여덟 번 와서 고래눈알·담비·흰 토끼 가죽을 바쳤다.주 006 철리는 개원 연간에 여섯 번 왔고, 월희는 [개원 연간에] 일곱 번 왔고, 정원 연간(785~804)에 한 번 왔다. 우루는 정관 연간(627~649)에 두 번 왔고, 정원 [연간(785~804)]에 한 번 왔다. 뒤에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은 모두 그에게 복속되어 다시는 천자와 만나지 못하였다.주 007
번역주 007)

黑水靺鞨이 渤海의 지배를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되고 있다. 『唐會要』 黑水靺鞨傳에는 ‘渤海浸强 黑水亦爲其所屬’으로 되어 있고, 『金史』 「本紀」에서도 渤海에 복속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어느 시점엔가 흑수의 일부가 발해의 직접 지배를 받았거나 간접 지배를 받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권은주, 2009). 그러나 小川裕人(1937) 등은 黑水靺鞨이 渤海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舊唐書』·『新唐書』 등에 黑水靺鞨의 朝貢記事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은 渤海가 三姓(依蘭) 지방에까지 그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唐과 통교할 수 있는 朝貢路가 차단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渤海가 鐵利部, 越喜部, 拂涅部 등을 복속하고 그 故地에 행정구역을 설치한 것과는 달리 흑수말갈에 둔 행정구역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도 발해의 흑수말갈 지배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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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주 001)
당 현종 : 唐朝 제6대 황제로 이름은 李隆基였다. 睿宗의 셋째 아들로 楚王에 봉해졌다가 臨淄王으로 改封되었다. 景雲 初 太平公主와 함께 韋后와 그 일당을 소탕하고 睿宗을 복위시켰으며, 太子로서 朝政에 참여하였다. 先天 元年(712) 즉위했고 이듬해 太平公主와 그 일당을 숙청하였다. 開元년간 사회 안정과 경제 발전, 문화 번영, 國勢의 강성을 開元之治라 한다. 그러나 天寶년간 이후 楊貴妃를 총애하고 李林甫와 楊國忠을 宰相으로 등용하게 되면서 정치가 부패하였다. 安史의 난이 일어나자 天寶 15년(756) 六月 蜀으로 도망갔으며, 七月 太子 李亨이 靈武에서 즉위한 후 太上皇을 칭하였다. 至德 2년(757)末 蜀에서 長安으로 돌아와 興慶宮에 유폐되었다가 죽었다. 泰陵에 장사 지냈으며 시호는 至道大聖大明孝皇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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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水靺鞨이 渤海의 지배를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되고 있다. 『唐會要』 黑水靺鞨傳에는 ‘渤海浸强 黑水亦爲其所屬’으로 되어 있고, 『金史』 「本紀」에서도 渤海에 복속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어느 시점엔가 흑수의 일부가 발해의 직접 지배를 받았거나 간접 지배를 받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권은주, 2009). 그러나 小川裕人(1937) 등은 黑水靺鞨이 渤海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舊唐書』·『新唐書』 등에 黑水靺鞨의 朝貢記事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은 渤海가 三姓(依蘭) 지방에까지 그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唐과 통교할 수 있는 朝貢路가 차단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渤海가 鐵利部, 越喜部, 拂涅部 등을 복속하고 그 故地에 행정구역을 설치한 것과는 달리 흑수말갈에 둔 행정구역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도 발해의 흑수말갈 지배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