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역사
국가형성과 5부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에서 국가를 형성하였다. 기원전 3세기 이후 압록강 중류 유역에는 철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이 지역에는 여러 나(那) 집단이 등장하였다. 나는 냇가란 뜻이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말의 ‘나라’와 통한다. ‘나’집단은 작은 규모의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기원전 1세기 중반부터 압록강 중류 유역의 여러 ‘나’집단은 비류(沸流)집단을 중심으로 연맹체를 만들었다. 그런데 주몽관련 기사주 001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이후 연맹의 주도권은 계루(桂樓)집단으로 넘어갔다. 위의 『삼국지』 기록에서 보면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왕실이 바뀌었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은 연맹을 주도한 집단이 교체되었음을 말해준다.
고구려의 국가형성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요동지역 한(漢)나라의 군현(郡縣)이 고구려 ‘나’집단의 연맹에 개입하였고, ‘나’집단 간에도 갈등과 대립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국도(國都)도 졸본(卒本)주 002에서 국내성(國內城)주 003으로 이동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세기 중반 태조대왕(太祖大王, 재위 : 53∼146)주 004 이후 ‘나’집단의 연맹은 어느 정도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많은 수의 ‘나‘집단이 5개의 보다 큰 집단으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위의 『삼국지』 기록에 보이는 5부(部)가 바로 이렇게 통합된 5개의 보다 큰 집단이다. 고구려 5부의 지배층은 ‘여러 가(加)’ 즉 제가(諸加)였다.
고구려의 국가형성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요동지역 한(漢)나라의 군현(郡縣)이 고구려 ‘나’집단의 연맹에 개입하였고, ‘나’집단 간에도 갈등과 대립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국도(國都)도 졸본(卒本)주 002에서 국내성(國內城)주 003으로 이동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세기 중반 태조대왕(太祖大王, 재위 : 53∼146)주 004 이후 ‘나’집단의 연맹은 어느 정도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많은 수의 ‘나‘집단이 5개의 보다 큰 집단으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위의 『삼국지』 기록에 보이는 5부(部)가 바로 이렇게 통합된 5개의 보다 큰 집단이다. 고구려 5부의 지배층은 ‘여러 가(加)’ 즉 제가(諸加)였다.
‘가(加)’는 간(干)·한(汗)·간지(干支) 등과 통하는 말인데, 우리말로 옮기면 임금(王)이란 뜻이다. 몽골제국 징기스칸의 칸(汗, khan)도 그러한 의미이다. ‘가’는 본래 ‘나’집단, 즉 작은 국가의 왕(王)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집단이 5부의 연맹에 통합되면서 고구려 국왕의 신료(臣僚)가 되었고, 지배층의 명칭으로 변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세기 중반까지 ‘제가는 나름의 고유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그 세력 크기에 따라 대가(大加)와 소가(小加)로 구분되었는데, 위의 자료에 보이는 것처럼 대가는 스스로 사자·조의·선인과 같은 관원을 두었고, 이를 통해 부를 다스렸다. 다만 대가는 휘하의 관원 명단을 국왕에게 보고했다고 하듯이 국왕의 통제를 받았다. 즉, 대가는 일정지역을 통치하는데 나름대로의 하위 행정조직을 갖추었으나, 국왕의 통제를 받는 시스템인 셈이다. 전쟁이나 대외교섭도 국왕을 중심으로 하였다. 왕권 아래로 통합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세기 중반까지 ‘제가는 나름의 고유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그 세력 크기에 따라 대가(大加)와 소가(小加)로 구분되었는데, 위의 자료에 보이는 것처럼 대가는 스스로 사자·조의·선인과 같은 관원을 두었고, 이를 통해 부를 다스렸다. 다만 대가는 휘하의 관원 명단을 국왕에게 보고했다고 하듯이 국왕의 통제를 받았다. 즉, 대가는 일정지역을 통치하는데 나름대로의 하위 행정조직을 갖추었으나, 국왕의 통제를 받는 시스템인 셈이다. 전쟁이나 대외교섭도 국왕을 중심으로 하였다. 왕권 아래로 통합되고 있었던 것이다.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
고구려의 산업은 다양했지만 중시되는 것은 농업이었다. 그런데 압록강 중류 유역은 농업생산력이 높지 않았다. 힘써 농사지어도 먹을 것이 부족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농업만 아니라 수렵과 목축을 함께 하였다. 또한 전쟁을 통해 부족한 물자를 확보하였다. 그런데 전쟁 등 무력을 통한 물자확보는 성공할 수도 있지만, 실패할 수도 있었다. 약탈을 위한 전쟁에서 패할 수도 있었고, 전쟁에서 이겼다고 하여도 빼앗을 물자가 없을 수도 있었다. 무력을 통한 물자의 확보는 불안정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1세기 중반 태조대왕주 001대부터는 주변 지역을 무작정 약탈하기보다 복속시켜서 정기적으로 물자를 공급받았다. 이른바 조공의 형태인 것이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를 중심으로 복속집단을 넓혀갔다. 3세기까지 동해안의 옥저주 002와 동예주 003, 서방의 양맥(梁貊)주 004, 북방의 숙신(肅愼)주 005을 복속시켰다. 고구려는 이들에게 스스로 다스리도록 자치(自治)를 허용하고, 대신 정기적으로 물자를 바치도록 하였다. 농업생산물은 물론이고, 각종 특산물을 수취하였다. 옥저의 경우 물고기·소금·각종 해산물을 바쳤다. 이처럼 주변의 복속집단이 증대되면서 막대한 물자가 고구려의 국도 국내성주 006으로 모였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지배층, 즉 ‘제가’는 더욱 넓은 지역을 복속시켜 경제적 부를 증대시키고자 하였다. 정복전쟁의 욕구가 커진 것이다.
정복전쟁을 수행을 위해서는 국가의 체제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는 국왕을 중심으로 정치체제를 정비하였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를 중심으로 복속집단을 넓혀갔다. 3세기까지 동해안의 옥저주 002와 동예주 003, 서방의 양맥(梁貊)주 004, 북방의 숙신(肅愼)주 005을 복속시켰다. 고구려는 이들에게 스스로 다스리도록 자치(自治)를 허용하고, 대신 정기적으로 물자를 바치도록 하였다. 농업생산물은 물론이고, 각종 특산물을 수취하였다. 옥저의 경우 물고기·소금·각종 해산물을 바쳤다. 이처럼 주변의 복속집단이 증대되면서 막대한 물자가 고구려의 국도 국내성주 006으로 모였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지배층, 즉 ‘제가’는 더욱 넓은 지역을 복속시켜 경제적 부를 증대시키고자 하였다. 정복전쟁의 욕구가 커진 것이다.
정복전쟁을 수행을 위해서는 국가의 체제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는 국왕을 중심으로 정치체제를 정비하였다.
바로 위의 자료에서처럼 국왕 아래에는 여러 등급의 관등이 있었다. 또한 『삼국사기』에 보이는 것처럼 대보(大輔), 좌우보(左右輔), 국상(國相), 중외대부(中畏大夫)와 같은 관직을 두었다.주 007 관등은 신료의 등급이고, 관직은 신료의 직책을 말한다. 국왕은 제가를 비롯한 지배층에게 관등과 관직을 주고, 왕권 아래의 신료집단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세금을 거두고 보다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안정적 통치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하여 5부를 개편하였다.
고구려의 5부는 고유의 명칭을 갖고 있었는데, 2세기 후반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 179∼197)주 008대부터 동부·서부·남부·북부처럼 방위명칭이 붙은 부(部, 방위명부)가 새롭게 등장했다. 방위명부는 국내성(國內城)과 그 주변 지역에 설치된 것으로, 중앙의 행정구역이었다. 5부의 ‘제가’는 3세기를 지나면서 중앙의 방위명부로 이주해 왔다. 비로소 5부의 지배층은 중앙의 귀족으로 변모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의 국가권력은 중앙으로 집중되었다. 중앙집권화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중앙에 행정구역이 정비되었다면, 지방에서도 성(城)·곡(谷)·촌(村)과 같은 행정단위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각 행정단위마다 재(宰)·태수(太守)와 같은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이제 고구려의 지방은 국왕이 임명한 지방관이 직접 통치하였던 것이다. 일단은 국내성으로 통하는 주요 교통로를 중심으로 한 주요 거점에 지방관을 보냈다. 그러다 차츰 옥저와 동예와 같은 복속지역에도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4세기 이후 고구려는 지방관을 통해 지방을 다스렸다.
고구려의 5부는 고유의 명칭을 갖고 있었는데, 2세기 후반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 179∼197)주 008대부터 동부·서부·남부·북부처럼 방위명칭이 붙은 부(部, 방위명부)가 새롭게 등장했다. 방위명부는 국내성(國內城)과 그 주변 지역에 설치된 것으로, 중앙의 행정구역이었다. 5부의 ‘제가’는 3세기를 지나면서 중앙의 방위명부로 이주해 왔다. 비로소 5부의 지배층은 중앙의 귀족으로 변모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의 국가권력은 중앙으로 집중되었다. 중앙집권화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중앙에 행정구역이 정비되었다면, 지방에서도 성(城)·곡(谷)·촌(村)과 같은 행정단위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각 행정단위마다 재(宰)·태수(太守)와 같은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이제 고구려의 지방은 국왕이 임명한 지방관이 직접 통치하였던 것이다. 일단은 국내성으로 통하는 주요 교통로를 중심으로 한 주요 거점에 지방관을 보냈다. 그러다 차츰 옥저와 동예와 같은 복속지역에도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4세기 이후 고구려는 지방관을 통해 지방을 다스렸다.
영역확장과 전성
고구려의 영역확장은 4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4세기 전반부터 흉노(匈奴)주 001·갈(羯)주 002·선비(鮮卑)주 003·저(氐)주 004·강(羌)주 005 등 동아시아 북방 초원지대의 유목민이 남하하였는데, 이들은 중원지역의 북부를 장악하고 여러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른바 5호16국(五胡十六國)이었다. 5호16국은 서로 대립하며 경쟁하였다. 이에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시시각각 변화하였는데, 한편으로 고구려에게 이러한 국제정세는 자국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313년 고구려의 미천왕(美川王, 재위 : 300〜331)주 006은 남쪽으로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을 병합하였다. 지금의 한반도 서북부 지역을 차지한 것이다. 또한 서쪽으로 선비족 계통의 국가인 전연(前燕주 007 : 慕容燕주 008)과 각축하면서 요동지역 방면으로 세력범위를 확장해 갔다.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부여주 009를 압박하면서 송화강(松花江) 방면으로 진출했다. 미천왕의 영역확장 노력은 고국원왕대(故國原王, 재위 : 331∼371)주 010에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고국원왕대 고구려는 전연과 백제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342년(고국원왕 12)에 고구려는 전연의 공격을 받고 국도가 함락될 만큼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주 011 또한 371년 고국원왕은 평양성(平壤城)에서 백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주 012 영역확장이 어려움을 겪은 것은 물론이고 국가적인 위기상황에 봉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 371~384)주 013이 즉위하였다. 소수림왕은 당시 고구려가 당면한 국내외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먼저 국가체제 정비를 단행하였다.
313년 고구려의 미천왕(美川王, 재위 : 300〜331)주 006은 남쪽으로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을 병합하였다. 지금의 한반도 서북부 지역을 차지한 것이다. 또한 서쪽으로 선비족 계통의 국가인 전연(前燕주 007 : 慕容燕주 008)과 각축하면서 요동지역 방면으로 세력범위를 확장해 갔다.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부여주 009를 압박하면서 송화강(松花江) 방면으로 진출했다. 미천왕의 영역확장 노력은 고국원왕대(故國原王, 재위 : 331∼371)주 010에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고국원왕대 고구려는 전연과 백제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342년(고국원왕 12)에 고구려는 전연의 공격을 받고 국도가 함락될 만큼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주 011 또한 371년 고국원왕은 평양성(平壤城)에서 백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주 012 영역확장이 어려움을 겪은 것은 물론이고 국가적인 위기상황에 봉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 371~384)주 013이 즉위하였다. 소수림왕은 당시 고구려가 당면한 국내외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먼저 국가체제 정비를 단행하였다.
위의 『삼국사기』 기록에서 보는 것처럼 소수림왕은 372년 불교를 공인하였고, 태학(太學)주 014을 건립하였다. 또한 곧이어 373년(소수림왕 3)에는 율령(律令)주 015을 반포하였다.
고구려는 전진(前秦)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였는데, 당시 전진을 비롯한 북조(北朝)의 불교는 국가불교 내지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성격이 강하였다. 국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바탕으로, 국왕을 중심으로 불교를 신앙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무렵 불교의 수용은 고구려의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확립에 도움이 되었다.
태학은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양성하던 교육기관이었다. 유교의 중요 덕목은 충효(忠孝)였다. 부모에 대한 효와 국왕에 대한 충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는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관료를 의미한다. 고구려는 태학을 설립함으로써 국왕에 충성적인 관료를 양성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정비된 국가체제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행정관료도 양성하였다.
현재 고구려의 율령에 대해서는 그 내용이 전하지 않는다. 다만 율령은 중국 왕조에서 성립·발전한 성문법(成文法)으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운영원리를 담고 있었다. 그러므로 율령의 반포는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정비를 일단락 지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소수림왕대 고구려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5세기 이후 고구려는 이를 바탕으로 비약적인 영역확장을 이루었다. 특히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 391∼413)대주 016의 영역확장이 두드러졌다. 광개토왕은 서쪽의 후연(後燕)주 017과 전쟁하여 승리함으로써 요동지역을 온전히 차지하였다. 나아가 요하 너머 거란(契丹)주 018의 일부까지 세력범위에 두었다. 그리고 남쪽으로 백제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고, 예성강-임진강 유역에서부터 한강 유역까지 세력범위를 넓혔다.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부여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5세기 고구려 귀족의 묘지명 「모두루묘지명(牟頭婁墓誌銘)」주 019을 보면, 부여 지역에는 수사(守事)란 지방관이 파견되었다고 한다.
고구려는 전진(前秦)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였는데, 당시 전진을 비롯한 북조(北朝)의 불교는 국가불교 내지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성격이 강하였다. 국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바탕으로, 국왕을 중심으로 불교를 신앙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무렵 불교의 수용은 고구려의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확립에 도움이 되었다.
태학은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양성하던 교육기관이었다. 유교의 중요 덕목은 충효(忠孝)였다. 부모에 대한 효와 국왕에 대한 충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는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관료를 의미한다. 고구려는 태학을 설립함으로써 국왕에 충성적인 관료를 양성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정비된 국가체제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행정관료도 양성하였다.
현재 고구려의 율령에 대해서는 그 내용이 전하지 않는다. 다만 율령은 중국 왕조에서 성립·발전한 성문법(成文法)으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운영원리를 담고 있었다. 그러므로 율령의 반포는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정비를 일단락 지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소수림왕대 고구려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5세기 이후 고구려는 이를 바탕으로 비약적인 영역확장을 이루었다. 특히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 391∼413)대주 016의 영역확장이 두드러졌다. 광개토왕은 서쪽의 후연(後燕)주 017과 전쟁하여 승리함으로써 요동지역을 온전히 차지하였다. 나아가 요하 너머 거란(契丹)주 018의 일부까지 세력범위에 두었다. 그리고 남쪽으로 백제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고, 예성강-임진강 유역에서부터 한강 유역까지 세력범위를 넓혔다.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부여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5세기 고구려 귀족의 묘지명 「모두루묘지명(牟頭婁墓誌銘)」주 019을 보면, 부여 지역에는 수사(守事)란 지방관이 파견되었다고 한다.
위의 자료는 「광개토왕비」주 020의 일부로, 광개토왕의 업적을 요약한 대목이다. 위 자료의 내용을 살펴보면, 광개토왕은 사해(四海) 즉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세계에 위엄을 떨쳤고, 백성을 평안히 하였다고 찬양되고 있다. 이렇듯 광개토왕대에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을 설정하고 영토를 확장해 나아가는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광개토왕에 이어 장수왕(長壽王, 재위 : 413~491)대에도 고구려의 전성은 계속되었다. 장수왕은 427년에 국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한층 적극적으로 남진정책을 추진했다.
광개토왕에 이어 장수왕(長壽王, 재위 : 413~491)대에도 고구려의 전성은 계속되었다. 장수왕은 427년에 국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한층 적극적으로 남진정책을 추진했다.
위의 『삼국사기』 기록에서처럼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처형하였다. 그리고 한강 일대를 중심으로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북부, 남한강 유역까지 세력범위를 넓혔다. 장수왕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 고구려비」주 021는 고구려 남진정책의 산물이었다.
한편 이 무렵 중국의 북부에서는 5호16국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고(북조), 남부에는 한족(漢族)의 왕조 송(宋)·제(齊)·양(梁)·진(陳)이 차례로 세워졌다(남조). 이른바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였다. 남북조시대에는 북조와 남조만 아니라 북방의 유목국가 유연(柔然)주 022이 강성하였고, 서방의 토욕혼(吐谷渾)주 023 또한 강력하였다. 이에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어느 한 나라가 주도하지 못했고, 주요 강국의 세력균형이 유지되었다. 고구려도 이러한 강국의 하나였다. 고구려는 동아시아 주요 강국의 세력균형 속에서 동북아시아의 패자(覇者)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한편 이 무렵 중국의 북부에서는 5호16국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고(북조), 남부에는 한족(漢族)의 왕조 송(宋)·제(齊)·양(梁)·진(陳)이 차례로 세워졌다(남조). 이른바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였다. 남북조시대에는 북조와 남조만 아니라 북방의 유목국가 유연(柔然)주 022이 강성하였고, 서방의 토욕혼(吐谷渾)주 023 또한 강력하였다. 이에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어느 한 나라가 주도하지 못했고, 주요 강국의 세력균형이 유지되었다. 고구려도 이러한 강국의 하나였다. 고구려는 동아시아 주요 강국의 세력균형 속에서 동북아시아의 패자(覇者)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대내외적 정세의 변동
고구려의 전성시기는 6세기 전반 문자명왕(文咨明王, 재위 : 492∼519)주 001대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안장왕(安藏王, 재위 : 519∼531)주 002대부터 정치적 불안의 조짐이 보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안장왕은 피살되었다고 한다. 뒤를 이은 안원왕(安原王, 재위 : 531∼545)주 003 역시 피살된 것으로 나온다.
이 해에 고려(高麗)가 크게 어지러워 무릇 싸우다 죽은 자가 2,000여 명이었다. 『百濟本記』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고려(高麗)가 정월 병오에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는데 나이 8살이었다. 박왕(狛王)에게는 세 부인(夫人)이 있었는데 정부인(正夫人)은 아들이 없었다. 중부인(中夫人)이 세자(世子)를 낳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가 추군(麤群)이었다. 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는 세군(細群)이었다. 박왕의 질병이 심해지자 추군(麤群)과 세군(細群)이 각각 중부인(中夫人)과 소부인(小夫人)의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세군(細群)의 죽은 자가 2,000여 명이었다.”
위의 『일본서기』 기록 중에는 박왕(狛王) 즉 안원왕의 사망에 즈음한 사실의 일을 전하고 있는데, 다음 왕위의 계승문제를 두고 왕실의 외척 간에 대규모 분쟁이 있었다고 한다. 주요 귀족세력이 분열·대립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고구려 귀족세력의 대립은 비교적 오랫동안 그 여파가 이어졌다. 그러므로 대외적인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양원왕(陽原王, 재위 : 545∼559)주 004 7년(551)에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한강유역을 공격하였지만, 고구려는 이를 막지 못하였다. 5세기 이후 백여 년 가까이 차지해 온 한강유역을 상실한 것이다. 이와 함께 서쪽으로부터는 북제(北齊)가 외교적으로 압박해 왔고, 초원지대의 신흥강국 돌궐(突厥)이 군사적인 공세를 취해 왔다.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위기상황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고구려는 신라와 밀약(密約)을 맺고, 한강유역과 동해안을 포기하였다. 대신 남쪽의 군사적 위협을 타개하면서 안정을 추구하고, 서쪽으로는 돌궐의 공세를 막고자 하였다. 귀족세력은 그간의 내분을 종식하고 타협을 통해 정치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그 결과 귀족연립(貴族聯立)의 정치체제가 수립되었다.
양원왕(陽原王, 재위 : 545∼559)주 004 7년(551)에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한강유역을 공격하였지만, 고구려는 이를 막지 못하였다. 5세기 이후 백여 년 가까이 차지해 온 한강유역을 상실한 것이다. 이와 함께 서쪽으로부터는 북제(北齊)가 외교적으로 압박해 왔고, 초원지대의 신흥강국 돌궐(突厥)이 군사적인 공세를 취해 왔다.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위기상황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고구려는 신라와 밀약(密約)을 맺고, 한강유역과 동해안을 포기하였다. 대신 남쪽의 군사적 위협을 타개하면서 안정을 추구하고, 서쪽으로는 돌궐의 공세를 막고자 하였다. 귀족세력은 그간의 내분을 종식하고 타협을 통해 정치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그 결과 귀족연립(貴族聯立)의 정치체제가 수립되었다.
중국 사료인 『구당서』에 나오는 위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후기의 최고 관직은 대대로(對大盧)였는데, 이는 3년에 1번씩 선임했고 적격자의 경우 연임이 가능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원(翰苑)』에 인용된 『고려기(高麗記)』주 005가 참고되는데, 이를 보면 최상위의 5관등 이상을 보유한 귀족관료가 국정의 중요 문제를 결정하였다고 한다. 귀족세력의 합의를 통해 정치가 운영되었던 것이다. 이로 보아 대대로 역시 귀족세력의 합의를 통해 선임하였고, 연임을 결정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위의 『구당서』 기록처럼 대대로의 교체에 불만세력이 있으면, 무력충돌이 벌어졌고 무력으로 대대로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국왕도 이러한 무력충돌을 제어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왕권이 귀족세력을 압도하지 못하였고, 귀족세력의 합의가 도출되지 않을 경우 언제든 내분에 휩싸일 수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처럼 6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의 정치는 국왕보다 귀족을 중심으로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원왕(平原王, 재위 : 559∼590)대주 006에 이르면 어느 정도의 정치적 안정을 회복하였고,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는 계속 유지되었다.
이처럼 6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의 정치는 국왕보다 귀족을 중심으로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원왕(平原王, 재위 : 559∼590)대주 006에 이르면 어느 정도의 정치적 안정을 회복하였고,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는 계속 유지되었다.
위의 『신당서』 기록은 6~7세기 고구려의 지방제도를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주현(州縣)이란 지방행정단위가 있었고, 그러한 행정단위는 성(城)을 중심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각 행정단위마다 지방관이 파견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이와 같은 지방관은 휘하에 속료(屬僚) 즉 하위 행정조직을 갖추고, 지방을 통치하였는데, 이러한 지방행정조직은 이전 시기보다 한층 정비된 모습이었다. 비록 중앙의 왕권은 약화되었지만, 지방사회까지 미쳤던 중앙의 국가권력은 오히려 강화되었던 것이다.
전쟁과 멸망
6세기 후반 즉 평원왕대 재위 후반기부터는 4세기부터 지속되어 온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는 급격히 변화했다. 589년에 수(隋)나라가 중국 중원지역을 통일하고 북방의 돌궐을 제압하면서, 동아시아 최고의 강국으로 부상하였기 때문이다. 수나라는 자국 중심의 일원적 국제질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에 동북아시아에 대한 고구려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요하 방면으로 동진해 왔다. 수의 동진에 거란(契丹)·말갈(靺鞨)과 같은 동북아시아 일부의 세력은 고구려로부터 수로 이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598년 고구려의 영양왕(嬰陽王, 재위 : 590∼618)주 001은 수나라의 요서지역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수나라의 문제(文帝: 재위 581~604)주 002는 즉각 반격에 나섰다. 30만 이상의 육군과 수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장마로 육군의 군수보급에 문제가 발생하였고, 태풍으로 수군(水軍)이 붕괴하였다. 598년 수의 반격은 시도조차 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수의 고구려 공격은 612년 재개되었다. 수의 양제(煬帝: 재위 604~618)주 003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100만이 넘는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때까지의 세계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이 전쟁에서 수의 군대를 물리쳤다. 요동지역의 여러 성(城) 중 어느 하나도 함락되지 않을 만큼 방어가 굳건하였고, 영양왕과 을지문덕(乙支文德)주 004을 비롯한 주요 귀족세력이 힘을 모았기 때문이었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薩水大捷)주 005이 바로 이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였다.
수나라는 613년과 614년에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이미 수나라 내부에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불만이 높아졌다. 농민반란이 전국 곳곳에서 발생했고, 양현감(楊玄感)주 006과 같은 주요 귀족의 반란도 나타났다. 이 때문에 수의 고구려 공격은 지속될 수 없었다.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수는 618년 마침내 멸망하였다.
수나라에 이어 중원지역을 장악한 것은 당(唐)나라였다. 당은 처음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고구려 역시 수와의 전쟁에서 국력이 크게 소모되었다. 그러므로 양국은 한동안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620년대 후반 당나라는 대내외적 혼란을 수습하고 동아시아 최고의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그러자 곧 고구려에 외교적 압박을 가해 왔다. 수나라처럼 자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에 고구려에서는 천리장성(千里長城)주 007을 축조해 당나라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런데 이때 고구려 귀족세력 내부에서는 대당(對唐) 강경파와 온건파가 나뉘어져 분리되는 조짐이 보였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598년 고구려의 영양왕(嬰陽王, 재위 : 590∼618)주 001은 수나라의 요서지역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수나라의 문제(文帝: 재위 581~604)주 002는 즉각 반격에 나섰다. 30만 이상의 육군과 수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장마로 육군의 군수보급에 문제가 발생하였고, 태풍으로 수군(水軍)이 붕괴하였다. 598년 수의 반격은 시도조차 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수의 고구려 공격은 612년 재개되었다. 수의 양제(煬帝: 재위 604~618)주 003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100만이 넘는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때까지의 세계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이 전쟁에서 수의 군대를 물리쳤다. 요동지역의 여러 성(城) 중 어느 하나도 함락되지 않을 만큼 방어가 굳건하였고, 영양왕과 을지문덕(乙支文德)주 004을 비롯한 주요 귀족세력이 힘을 모았기 때문이었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薩水大捷)주 005이 바로 이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였다.
수나라는 613년과 614년에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이미 수나라 내부에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불만이 높아졌다. 농민반란이 전국 곳곳에서 발생했고, 양현감(楊玄感)주 006과 같은 주요 귀족의 반란도 나타났다. 이 때문에 수의 고구려 공격은 지속될 수 없었다.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수는 618년 마침내 멸망하였다.
수나라에 이어 중원지역을 장악한 것은 당(唐)나라였다. 당은 처음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고구려 역시 수와의 전쟁에서 국력이 크게 소모되었다. 그러므로 양국은 한동안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620년대 후반 당나라는 대내외적 혼란을 수습하고 동아시아 최고의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그러자 곧 고구려에 외교적 압박을 가해 왔다. 수나라처럼 자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에 고구려에서는 천리장성(千里長城)주 007을 축조해 당나라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런데 이때 고구려 귀족세력 내부에서는 대당(對唐) 강경파와 온건파가 나뉘어져 분리되는 조짐이 보였다.
개소문(蓋蘇文)이라는 자가 있는데, 혹은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姓)은 천시(泉氏)이며, 자신이 물 속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사람을 현혹시켰다. 성질이 잔인하고 난폭하다. 아버지는 동부대인(東部大人) 대대로(大對盧)이다. [그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지위를 받고자 했지만, 국인(國人)이 미워하여서 이어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머리를 조아려 뭇사람에게 사죄하고, 섭직(攝職)을 청하면서 [시켜보아] 합당하지 않으면 그 때는 폐하여도 후회가 없다고 하였다. 뭇사람이 불쌍히 여겨서 드디어 지위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너무 난폭하고 나쁜 짓을 하므로, 여러 대인(大臣)이 건무(建武: 영류왕)와 상의하여 죽이기로 하였다. 개소문이 [이를] 알아차리고 제부(諸部)의 [군사를] 불러 모아 거짓으로 크게 열병(閱兵)을 한다고 말하고, 잔치를 베풀어 대신(大臣)의 임석(臨席)을 청하였다. 손님이 이르자, 다 죽여버리니 무려 백여 명이나 되었다. 또 왕궁(王宮)으로 달려 들어가 건무를 죽여서 시체를 찢어 도랑에 던져 버렸다. 이어 건무 아우의 아들인 장(藏)을 세워 왕으로 삼고, 자신은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하였다. [막리지란] 당(唐)의 병부상서(兵部尙書) 중서령(中書令)에 해당하는 지위라고 한다.
위의 『신당서』 기록에서처럼 연개소문(淵蓋蘇文)주 008은 여러 대신(大臣) 즉 주요 귀족세력과 대립하였고, 그로부터 제거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642년 연개소문은 마침내 정변(政變)을 일으켰다. 이를 통해 그를 반대한 주요 귀족세력과 영류왕주 009을 제거하였고, 장(藏) 즉 보장왕(寶藏王)주 010을 왕으로 세웠다. 이로써 고구려의 정치권력은 연개소문이 장악하였는데, 그는 대당 강경파였다.
연개소문이 일으킨 정변의 여파는 고구려의 전역(全域)에까지 미쳤다. 안시성(安市城)의 경우 연개소문에 반대해 무력충돌까지 벌였다고 한다. 내분의 조짐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의 입장에서 연개소문의 정변은 고구려를 공격할 절호의 기회였다.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했다는 점에서 표면적이나마 내세울 명분도 있었다. 그래서 645년 당 태종(太宗 : 재위 626~649)주 011은 고구려에 공격에 나섰다.
수와의 전쟁과는 달리 645년 전쟁에서 전쟁에서, 고구려는 요동지역의 여러 성이 당의 공격에 의해 함락되었다. 당의 대군은 요동지역의 방어를 뚫고 국내성-평양 방면으로 진격해 왔다. 이와 같은 위기상황 속에서 안시성의 항전이 돋보였다. 안시성은 당나라 태종이 직접 이끄는 15만의 대군을 맞아 수개월 이상 그 공격을 막아냈다. 당 태종 결국 철군하였다. 그는 이후에도 고구려를 공격하고자 여러 차례 군대를 보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고구려가 서방의 수·당과 전쟁하는 동안, 백제와 신라의 움직임도 활발했다. 양국은 수·당을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고자 하는 한편, 서로 간에도 끊임없이 전쟁하였다. 이처럼 삼국의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가장 열세에 놓인 것은 신라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648년 신라의 김춘추(金春秋)주 012는 당과의 군사동맹을 성사시켰다. 신라-당 동맹이 결성된 것이다. 신라-당 연합군은 먼저 660년 백제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 공세를 이어 고구려를 공격했다.
처음 고구려는 신라-당 연합군의 공격을 막는 데 성공했다. 더욱이 백제의 부흥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당은 더 이상 고구려를 공격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런데 665년 연개소문이 사망하면서 사태가 급변했다. 연개소문의 사후 최고의 권력자 지위에 오른 첫째 아들 남생(男生)주 013과 둘째 남건(男建)주 014·셋째 남산(男産)주 015이 분열·대립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남생은 두 아우에게 정권을 빼앗겼는데, 정권을 되찾고자 당에 항복하였고, 당의 군대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이렇듯 내분에 휩싸인 고구려는 더 이상 당의 군대를 막아낼 수 없었다. 마침내 668년 국도 평양성이 신라-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보장왕과 주요 귀족은 당의 포로가 되었고, 당의 국도 장안(長安)으로 끌려갔다. 이후 고구려 유민은 검모잠(劍牟岑)주 016, 안승(安勝)주 017, 고연무(高延武)주 018 등을 중심으로 치열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왕조를 재건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연개소문이 일으킨 정변의 여파는 고구려의 전역(全域)에까지 미쳤다. 안시성(安市城)의 경우 연개소문에 반대해 무력충돌까지 벌였다고 한다. 내분의 조짐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의 입장에서 연개소문의 정변은 고구려를 공격할 절호의 기회였다.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했다는 점에서 표면적이나마 내세울 명분도 있었다. 그래서 645년 당 태종(太宗 : 재위 626~649)주 011은 고구려에 공격에 나섰다.
수와의 전쟁과는 달리 645년 전쟁에서 전쟁에서, 고구려는 요동지역의 여러 성이 당의 공격에 의해 함락되었다. 당의 대군은 요동지역의 방어를 뚫고 국내성-평양 방면으로 진격해 왔다. 이와 같은 위기상황 속에서 안시성의 항전이 돋보였다. 안시성은 당나라 태종이 직접 이끄는 15만의 대군을 맞아 수개월 이상 그 공격을 막아냈다. 당 태종 결국 철군하였다. 그는 이후에도 고구려를 공격하고자 여러 차례 군대를 보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고구려가 서방의 수·당과 전쟁하는 동안, 백제와 신라의 움직임도 활발했다. 양국은 수·당을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고자 하는 한편, 서로 간에도 끊임없이 전쟁하였다. 이처럼 삼국의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가장 열세에 놓인 것은 신라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648년 신라의 김춘추(金春秋)주 012는 당과의 군사동맹을 성사시켰다. 신라-당 동맹이 결성된 것이다. 신라-당 연합군은 먼저 660년 백제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 공세를 이어 고구려를 공격했다.
처음 고구려는 신라-당 연합군의 공격을 막는 데 성공했다. 더욱이 백제의 부흥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당은 더 이상 고구려를 공격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런데 665년 연개소문이 사망하면서 사태가 급변했다. 연개소문의 사후 최고의 권력자 지위에 오른 첫째 아들 남생(男生)주 013과 둘째 남건(男建)주 014·셋째 남산(男産)주 015이 분열·대립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남생은 두 아우에게 정권을 빼앗겼는데, 정권을 되찾고자 당에 항복하였고, 당의 군대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이렇듯 내분에 휩싸인 고구려는 더 이상 당의 군대를 막아낼 수 없었다. 마침내 668년 국도 평양성이 신라-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보장왕과 주요 귀족은 당의 포로가 되었고, 당의 국도 장안(長安)으로 끌려갔다. 이후 고구려 유민은 검모잠(劍牟岑)주 016, 안승(安勝)주 017, 고연무(高延武)주 018 등을 중심으로 치열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왕조를 재건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주요 자료(고구려사 관련 주요 자료 목록)
-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성립
· 발전
- 고구려의 변천
· 체제정비
· 영토확장(요동, 백제, 신라, 낙랑·대방군 고지, 기타지역)
· 5~6세기 대외관계(중국 남북조와의 관계, 백제·신라·가야와의 관계)
□ 『삼국사기』
□ 『송서(宋書)』 蠻夷列傳(고구려)
□ 『남제서(南齊書)』 東南夷列傳(고구려)
□ 『양서(梁書)』 동이열전(고구려)
□ 『위서(魏書)』 열전(고구려)
□ 『주서(周書)』 이역열전(고려)
□ 『일본육국사(六國史)』 한국관계기사
□ 『역주 한국고대금석문』(고구려)
□ 『송서(宋書)』 蠻夷列傳(고구려)
□ 『남제서(南齊書)』 東南夷列傳(고구려)
□ 『양서(梁書)』 동이열전(고구려)
□ 『위서(魏書)』 열전(고구려)
□ 『주서(周書)』 이역열전(고려)
□ 『일본육국사(六國史)』 한국관계기사
□ 『역주 한국고대금석문』(고구려)
· 고구려 후기 정세변동
□ 『삼국사기』
□ 『주서(周書)』 이역열전(고려)
□ 『수서(隋書)』 동이열전(고려)
□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고려)
□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고려)
□ 『일본육국사(六國史)』 한국관계기사
□ 『주서(周書)』 이역열전(고려)
□ 『수서(隋書)』 동이열전(고려)
□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고려)
□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고려)
□ 『일본육국사(六國史)』 한국관계기사
- 고구려·수 전쟁
· 수와의 관계
· 고구려의 요서 공격
· 수의 칩입과 고구려의 살수대첩
- 고구려·당 전쟁
· 당과의 관계
□ 『삼국사기』
□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고려)
□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고려)
□ 『정관정요』
□ 『당회요』
□ 한국고대사료집성 중국편
□ 『역주 한국고대금석문』(고구려)
□ 『중국소재고구려금석문』
□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고려)
□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고려)
□ 『정관정요』
□ 『당회요』
□ 한국고대사료집성 중국편
□ 『역주 한국고대금석문』(고구려)
□ 『중국소재고구려금석문』
· 초기전쟁(645), 중기전쟁(647~665), 말기전쟁(666~668)
□ 『삼국사기』
□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고려)
□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고려)
□ 『정관정요』
□ 『당회요』
□ 『역주 한국고대금석문』(고구려)
□ 『중국소재고구려금석문』
□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고려)
□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고려)
□ 『정관정요』
□ 『당회요』
□ 『역주 한국고대금석문』(고구려)
□ 『중국소재고구려금석문』
-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중앙통치조직(관등과 관직, 합좌제도)
· 지방·군사제도
□ 『삼국사기』
□ 『삼국지』 동이전(고구려)
□ 『주서(周書)』 이역열전(고려)
□ 『수서(隋書)』 동이열전(고려)
□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고려)
□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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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서(隋書)』 동이열전(고려)
□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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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구조
· 사회구조
- 토착신앙(천신신앙, 조상숭배신앙, 지신신앙)
- 불교
- 도교
- 유학과 역사학
- 예술 및 건축
□ 『삼국사기』
□ 『삼국유사』
□ 『일본육국사(六國史)』 한국관계기사
□ 『역주 한국고대금석문』(고구려)
□ 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문화재연구소)
□ 고분벽화
□ 고구려문화유산자료
□ 『삼국유사』
□ 『일본육국사(六國史)』 한국관계기사
□ 『역주 한국고대금석문』(고구려)
□ 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문화재연구소)
□ 고분벽화
□ 고구려문화유산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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