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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불법에 대한 갈등

이 날에 천황은 듣고 나서 뛸 듯이 기뻐하며 사신에게 조를 내려 “짐이 예부터 지금까지 이와 같이 미묘한 법은 들은 적이 없다. 그러나 짐이 혼자 결정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여러 신하들에게 일일이 “서쪽의 번국(蕃國)이 바친 불상의 용모는 장엄하고 눈부시다. 지금까지 전혀 본 적이 없던 것이다. 이것을 예배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소아대신도목숙녜(蘇我大臣稻目宿禰;소가노오호키미이나메노스쿠네)주 001
번역주 001)
宣化, 欽明朝의 大臣으로 馬子의 아버지이다. 『日本書紀』 선화천황 원년(536) 2월조에 처음 나오며 흠명천황 31년(570) 3월에 사망한다. 여기서 宿禰는 姓이 아닌 존칭이다. 蘇我氏 인물 가운데 처음으로 大臣으로 취임하여 大王家와 인척관계를 맺고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였다. 蘇我氏는 武內宿禰의 자식인 石川宿禰의 후손으로 大和國 高市郡의 蘇我(현재 橿原市 曾我町)지역을 본거지로 세력을 형성했던 씨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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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서쪽의 번국 여러 나라가 하나같이 모두 예배합니다. 풍추일본(豐秋日本)만 어찌 홀로 등지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물부대련미여(物部大連尾輿;모노노베노오호무라지오코시)주 002
번역주 002)
『日本書紀』 안한천황 원년(534) 12월 시월조에 처음 보일 때부터 大連으로 나온다. 守屋의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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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신련겸자(中臣連鎌子;나카토미노무라지가마코)주 003
번역주 003)
中臣氏는 天兒屋命의 후손으로 대화정권의 제사를 담당한 씨족이다. 『中臣氏系圖』에는 흠명조에 常磐이 처음으로 中臣連을 사성받았다고 나오고, 中臣이라는 씨명은 신과 인간을 중개한다는 의미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鎌子라는 이름은 『中臣氏系圖』에도 보이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中臣氏의 유명한 인물로는 大化改新 때에 활약한 中臣鎌足이 있다. 中臣鎌足은 천지천황 8년(669)에 ‘大織冠 內大臣’이라는 직위와 ‘藤原氏’라는 씨명을 받았다. 이에 일족도 藤原氏를 칭했지만 문무천황 2년(698) 겸족의 아들인 不比等만 藤原氏를 계승하고 그 외에는 다시 中臣氏를 칭하게 되었다. 中臣連은 천무천황 13년(684)에 朝臣姓을 사성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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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함께 “우리나라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항상 천지사직(天地社稷)의 180신을 춘하추동으로 제사지내고 섬겨 왔습니다. 이제 번신(蕃神)으로 바꾸어 받든다면 국신(國神)의 노여움을 살까 두렵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원하고 있는 도목숙녜에게 (불상을) 맡겨 시험 삼아 예배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대신(大臣)은 무릎 꿇고 받으며 매우 기뻐하고 소간전(小墾田;워하리다) 집주 004
번역주 004)
현재 奈良縣 高市郡 明日鄕村 북부의 大字豐浦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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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안치하였다. 부지런히 불도를 닦고 이를 위해 향원(向原;무쿠하라)주 005
번역주 005)
『元興寺緣起』에서는 牟久原에 櫻井道場을 만들었다고 하며, 『上宮聖德法王帝說』에서 櫻井寺가 지금의 豐浦寺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을 통해서 볼 때 小墾田家에서 가까운 지역에 위치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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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집을 희사하여 절로 삼았다. 그 후 나라에 돌림병이 돌아 백성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심해져서 치료할 수가 없었다. 물부대련미여중신련겸자가 함께 “지난 날 신들의 계책을 따르지 않아서 이렇게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바로 원래대로 되돌린다면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것입니다. 속히 (불상을) 던져 버리고 열심히 후일의 복을 구해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주상한 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유사(有司)가 불상을 난파(難波;나니와)의 굴강(掘江;호리에)주 006
번역주 006)
大阪灣에서 가까운 大川(天滿川)을 가리킨다. 大和의 向原에 있었던 불상을 難波까지 가서 버린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위의 기사를 부정하기도 한다. 한편 廢佛의 방침을 선언하기 위해 일부러 도래인이 많이 거주하던 難波에 버렸다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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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던져 버리고, 가람에 불을 놓았다. 전부 타버려 남은 것이 없었다. 이때 하늘에는 바람과 구름도 없었는데 갑자기 대전주 007
번역주 007)
磯城島의 金刺宮 大殿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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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불이 났다.

  • 번역주 001)
    宣化, 欽明朝의 大臣으로 馬子의 아버지이다. 『日本書紀』 선화천황 원년(536) 2월조에 처음 나오며 흠명천황 31년(570) 3월에 사망한다. 여기서 宿禰는 姓이 아닌 존칭이다. 蘇我氏 인물 가운데 처음으로 大臣으로 취임하여 大王家와 인척관계를 맺고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였다. 蘇我氏는 武內宿禰의 자식인 石川宿禰의 후손으로 大和國 高市郡의 蘇我(현재 橿原市 曾我町)지역을 본거지로 세력을 형성했던 씨족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2)
    『日本書紀』 안한천황 원년(534) 12월 시월조에 처음 보일 때부터 大連으로 나온다. 守屋의 아버지이다.바로가기
  • 번역주 003)
    中臣氏는 天兒屋命의 후손으로 대화정권의 제사를 담당한 씨족이다. 『中臣氏系圖』에는 흠명조에 常磐이 처음으로 中臣連을 사성받았다고 나오고, 中臣이라는 씨명은 신과 인간을 중개한다는 의미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鎌子라는 이름은 『中臣氏系圖』에도 보이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中臣氏의 유명한 인물로는 大化改新 때에 활약한 中臣鎌足이 있다. 中臣鎌足은 천지천황 8년(669)에 ‘大織冠 內大臣’이라는 직위와 ‘藤原氏’라는 씨명을 받았다. 이에 일족도 藤原氏를 칭했지만 문무천황 2년(698) 겸족의 아들인 不比等만 藤原氏를 계승하고 그 외에는 다시 中臣氏를 칭하게 되었다. 中臣連은 천무천황 13년(684)에 朝臣姓을 사성받는다.바로가기
  • 번역주 004)
    현재 奈良縣 高市郡 明日鄕村 북부의 大字豐浦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바로가기
  • 번역주 005)
    『元興寺緣起』에서는 牟久原에 櫻井道場을 만들었다고 하며, 『上宮聖德法王帝說』에서 櫻井寺가 지금의 豐浦寺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을 통해서 볼 때 小墾田家에서 가까운 지역에 위치했을 것으로 여겨진다.바로가기
  • 번역주 006)
    大阪灣에서 가까운 大川(天滿川)을 가리킨다. 大和의 向原에 있었던 불상을 難波까지 가서 버린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위의 기사를 부정하기도 한다. 한편 廢佛의 방침을 선언하기 위해 일부러 도래인이 많이 거주하던 難波에 버렸다는 견해도 있다.바로가기
  • 번역주 007)
    磯城島의 金刺宮 大殿을 가리킨다.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소아대신도목숙녜, 물부대련미여, 중신련겸자, 도목숙녜, 물부대련미여, 중신련겸자
지명
소간전, 향원, 난파, 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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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에 대한 갈등 자료번호 : ns.k_0032_0140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