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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신드

(b) 신드
인도 측 변론서(소제기서)에 담긴 중요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신드의 초창기 역사는 조각나 있고 불투명하기 때문에 본 사건과 무관하다. 신드는 외부 정복자들이 수 차례 지배함에 따라 여러 번 부침을 겪었다. 신드는 18세기에 칼호라스(Kalhoras) 왕조가 권력을 잡으면서 하나의 분리된 정치체제로 떠올랐으며, 비록 그것이 완전히 독립된 실체는 아닐지라도, 그 지방 대부분에 걸쳐 권력을 확장했다. 그것은 칸다하르(Kandahar)의 두라니(Durani) 통치자들이 다스렸다.
칸다하르에서 독립된 실체가 된 굴람 샤 칼호라(Ghulam Shah Kalhora)는 긴 투쟁 끝에 과감하게 우월한 통치세력으로 집권하게 되었다.
사라프라즈 칸과 그의 후계자들의 폭력과 전제정치는 칼호라 왕조의 전복을 가져왔다. 원한과 앙심에 못 이겨 사라프라즈 칸은 (이전에는 그의 밑에서 충성을 다했던) 탈푸르의 발루치(Baluch) 종족 추장들을 불충하다고 살해하였다. 칸의 사망에 이어 얼마 간 불안정한 시기가 도래하였는데 이 때 탈푸르 종족은 그들 추장들의 죽음을 앙갚음하려고 하였고, 사라프 칸의 후계자들이 그들을 진압하려 노력하였다. 종국에는, 탈푸르 족이 승리자로 떠올라 1787년에는 미르 파테 알리 칸 탈푸르(Mir Fateh Ali Khan)가 집권하였다.
파테 알리 칸이 집권하는 방법에 놀란 소랍(Sohrab) 칸과 토라(Thora) 칸은 망명해서 카이르푸르(Khairpur)샤 반더(Shah Bander) (신드의 일부분들)를 차지하였으며, 파테 알리 칸 통치세력과 인연을 끊었다. 그럼에 따라, 그 지방은 세 명의 우두머리를 가진 공국으로 분리된 채 남아있게 되었는데, 그것들은 이름하여 히더라바드(Hyderabad) 혹은 파테 알리 지배 밑의 신드 하부지역, 카이르푸르 혹은 소랍 지배 하의 신드 상부지역, 그리고 토라 지배 하의 미르푸르(Mirpoor) 지역이다.
히더라바드 지역에서는 파테 알리가 세 명의 형제들, 굴람(Ghulam) 알리, 카람(Karam) 알리 그리고 무라드(Murad) 알리 등과 권력을 공유하였다; 그리고 진실된 만장일치제인지는 몰라도 그 형제들은 “챠르 야르스(Char Yars)” 혹은 네 명의 형제들 이라고 일컬어졌다. 그들은 신드의 미르스(Mirs) 혹은 아미르스(Amirs) 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1758년에는 영국이 처음 신드에 나타났고 1775년에 철수하긴 했지만 정착촌 (在外商館; factories)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영국과 신드 간 상업적 교류는 파테 알리 지배 하인 1799년에 재개되었다.
파르카르 지역은 명목상 신드의 아미르 지배 하에 있었다.
영국 세력의 출현 이전에 신드의 역사에 관한 이 같은 인도 측 설명에 파키스탄은 여러 가지 언급을 하였다.
파키스탄은 인도의 부국무장관이었던 버틀러 씨가 1936년 영국 의회에서 한 언급을 들고 있다: “... 모슬렘 인디아(Moslem India) 어느 부분보다도 이전에, 신드는 분리된 단위(a separate unit)로 만들어졌다...” (인도 자료 TC-46, 513쪽). 파키스탄은 서기 712년 마호메드 벤 카심(Mahommed Ben Kassim)의 신드에 대한 정복으로부터 수 세기에 걸쳐 신드는 원만하게 융합된 인종적 단위로써 구분되어 남아있었다고 말한다. 이 단일체가 전체로써, 영국세력이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철수하는 시기인 1947년에, 파키스탄 무슬림 통치지배세력(Moslem Dominion of Pakistan)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신드의 아랍 지배자들은 11세기에 숨라 (Sumra)왕조로 바뀌어졌고 그 지방 내 도도(Dodo)의 통치는 매우 강력해서 그의 권위는 쿠취에서부터 나사르푸르(Nassrpur)까지 인정받게 되었다. 숨라 왕조는 16세기에 아르군(Arghun) 왕조가 이어받게 되었다. 쿠취는 마지막 숨라 지배자인 피로즈(Firoz)를 돕고자 하였는데 이것이 첫 번째 자라 전투의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 다음 이백년간 신드는 칼호라스 때까지 델리(Delhi) 왕국의 한 지방이 되었는데, 이 칼호라스는 모굴 지배 하의 왕의 대리인(총독)이었으며 18세기 초기에는 독립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람브릭, 찰스 나피어 경과 신드, 1952년, 11쪽). 칼호라스 왕조는 그렇지만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의 두라니(Durani) 왕조에게 일정한 공물을 받쳐야 했다.
동인도회사는 신드에서 1635년에서 1662년 그리고 1758년에서 1775년까지 재외상관(정착촌)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전권공사는 1751년 굴람 샤 칼호라 지배 시기에 처음으로, 1799년 파테 알리 칸 통치시기에 두 번째로 파견되었다. (후텐바크, 영국과 신드와의 관계 1799-1843, 1962 판, p. VII, 2).
승리한 신드 지배자가 쿠취의 라오에게 벌을 주고자 모라에다 둑을 쌓기 시작했다는 것은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푸란 강의 물은 더 북쪽에서 좀 더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었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물길을 막은 것이지 악의에 의해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였다.
파키스탄은 더 나아가, 인도가 파르카르(Parkar) 지역은 영국이 1819년에 탈푸르 아미르(Talpur Amir) 지배자와 교섭할 당시 “명목상 (형식적으로)” 그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고 언급한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파르카르는 당시 신드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이것은 인도 측 자료 A-90에서 A-93에서와 같이 영국 통치세력이 신드의 아미르스에게 파르카르의 산도적들을 진압하라고 요구한 것이 명확하다.
파키스탄은 더 나아가 더 나아가 쿠취의 정치 고문(agent)이 1864년 11월 9일에 쓴 비망록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비망록에는 쿠취의 정복이 진행 중이고 당해 지방 족장들과 연합하여 효과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영국과 쿠취와 연합 이전 와구르 지역은 실제적으로 독립되어 있었고, 쿠취의 다르바르(Darbar)가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은 형식적으로나마 통치권을 보여주는 것 뿐이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파키스탄의 몇 가지 다른 것들은 뒤의 구술변론에서 자주 언급되고 토론된 문제들과 연관이 있다. 그것은 두 전쟁참여자들 중 누가 을 점령하거나 지배하는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18세기에 있었던 쿠취-신드 간 전쟁들의 해석과 평가에 관한 문제이다.
파키스탄은, 에 관한 한, 신드의 통치자들이 매번 그 을 지나갔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분명한 통제와 지배를 분명히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의 북쪽 끝을 넘어 있었던 쿠취의 전초기지와 관련하여 파키스탄은, 만약 쿠취의 지배자들에 의해서 통제되었다는 일체의 추론이 신드 지역에서 쿠취가 전초기지, 이 기지는 뒤에 버려졌지만, 를 건설했다는 그러한 주장으로부터 나온다면(가능하다면){거꾸로} 신드을 통제했다는 추론이, 쿠취라크파트신드의 지배자들이 오천 명의 국경수비대들을 진주시킨 사실과 관련하여, 한 층 더 유력한 논거(a fortiori)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펼친다.
심지어 을 넘어선 지역에 대한 소유권의 멸실이 에 대한 주장되고 있는 쿠취의 라오의 주권 손실을 자동적으로 의미하고 있지는 않다손 치더라도, 신드의 굴람 샤 칼호라의 쿠취의 주요지역에 대한 뒤이은 공격 그리고 승리들은 에 대하여 주장되고 있는 “라오의 주권”의 흔적 일체들이 따라서 완전히 말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도는 굴람 샤 칼호라가 쿠취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가 오천 명의 수비대를 라크파트에 배치했다는 것도 받아들인다. 또한 그렇게 의 반대편인 쿠취의 주요지역에 배치된 수비대가 샤라프라즈 칼호라가 그것을 다른 곳에 필요한 이유로 자발적으로 철수할 때까지 거의 10년 동안 계속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수비대의 철수 이후에도 신드의 통치자들은 계속해서 쿠취를 지나다녔고 어떤 경우에도 쿠취의 주요지역은 변함없이 늘상 싸움이 발생했던 곳이었다. 사실, 신드의 지배자들의 에 대한 통제는 에 걸쳐 자행되는 공격에 대한 쿠취의 통제의 무능력이 설명해 준다.
인도는 다른 견해를 취한다. 신드의 이전 통치자들이 1762년과 1782년 사이에 최소한 네 차례에 걸쳐 을 가로질러 다닌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이 에 대하여 정치적이고 효과적인 통제와 지배를 보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제임스 번스(James Burnes) 박사가 그의 책 쿠취의 간략한 역사와 함께하는, 신드 왕실 궁전 방문기 (1829)에서 언급한 것처럼, 신드쿠취가 침략받은 네 번 어떤 경우에도 성공적으로 영구히 정착하지 못하였다. 그럼에 따라, 인도 측 청구이유 내에서는, 을 지나갔다는 행위는 에 대한 점령의 의도 내지는 그러한 결과 없이 늘상 군사적인 침탈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구술변론에서, 파키스탄은 18세기 전쟁들을 더 장기간에 걸친 과거라는 맥락 속에서 보았고, “역사의 주된 흐름”이라는 논거를 펼치는데 공을 들였다. 파키스탄은, 신드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17세기 초에 시작되고 그 이후에도 계속되어 각 시기마다 일정한 방향성이 있는, 일종의 역사의 주된 흐름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신드쿠취를 지배한다. 한 번 쿠취신드의 일부분이다. 신드쿠취를 지배하고 다스리며, 공격한다. 신드는 그것을 계속 유지할 능력이 없는지도 혹은 유지하지 않기로 결정했을지 모른다. 신드는 물러날 수 있다. 그러나 자주자주 이러한 일이 계속 일어나곤 한다. 이것이 주된 흐름이다.
그 다음으로 의 북쪽 끝을 넘어 쿠취의 전지기지를 설치한 데브카란 세스(Devkaran Seth)의 시기가 도래한다. 이 때에 대해 파키스탄은, 1730년 경 개시하여 1741년 혹은 약간 이후에 끝나는 약 11 혹은 12년 간의 일이 있었는데, 데프카란 세스라는 한 남자가 역사의 주된 흐름을 거슬러 비라와라힘 키 바자르에 몇 개의 군사기지를 건설하였는데, 역사가들이 증거하듯이, 이러한 기지들은 신드지방으로부터 퇴출되었고 언급한다. 이것은 주된 흐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해프닝이었고 오히려 그 반대로 주된 흐름을 단지 강조하고 뒷받침할 뿐이다.
이 같이 막간에 생긴 일 이후에, 주된 흐름은 또 다시 같은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신드 통치자들이 공격하고, 또 공격하고, 세 번째 공격까지 있다. 매번 쿠취는 희생자였다. 은 재차 지나다녔고(유린당했고) 그 흐름은 계속 흐른다. 이 같은 조그마한 막간에 생긴 일을 제외하고는 어떤 때에도 그 방향은 바뀌지 않는다.
굴람 샤 칼호라와 그의 후계자들의 침략에 관하여 파키스탄은 에 대한 횡단행위는 다양한 방향에서 이루어졌음을 부가하여 설명한다. 굴람 샤는 나라(Nara) 루트를 통해서 지나간 반면에, 샤라프라즈는 숨라시르(Sumrasir)를 그리고 미르 파테 알리는 와구르초우바리(Chowbari) 루트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아미르는 선택하는 의 어느 곳에서도 가르지를 수 있었으며, 바로 이것이 통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을 점령하려는 의사 또는 그러한 결과 없이 군사적 침탈의 일환으로 그러한 횡단행위가 있었다는 인도 측 주장에 대응하여 파키스탄은 은 점령(점유)할 수 있는 지역으로 적절한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그 같은 지역에 대한 효과적이고 완전한 통제는 양안이 다 통제되지 않는 한 달성되기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단지 그것을 가로지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렇게 횡단하려는 타인을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을 통제하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파키스탄은, 신드는 과거 여러 경우에 있어서 양쪽 해안의 통제를 통하여 에 대하여 완전한 통제를 한 적이 있었고, 그 나머지 경우에는 자신이 을 가로지르는 능력과 쿠취의 횡단을 저지할 수 있는 능력과 같은 방법으로 불완전한 통제를 보였지만, 쿠취는 한 번도 일말의 통제능력을 보인 적이 없었다고, 결론 내린다. 인도는, 쿠취에 귀속되고 여태까지 그래 왔으며, 쿠취에 귀속되어있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하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쿠취에 귀속되었다는 일체의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그 권원(source of its titles)을 제시하지 않는다. 인도는 단지 주장할 뿐이고, 역사가 보여주는 논거는 그러한 주장과 상반된다.
이상의 주장에 인도의 답변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i) 먼 역사는 본 사건과 무관하다. 파키스탄이 한 것처럼 그렇게 멀리 되돌아 간다면, 누구든지 율리우스 캐사르(씨이저)가 1900년 혹은 그 이전에 프랑스를 지나갔으므로 이태리가 프랑스를 소유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우리는 전반적으로 19 세기 시기에 관심이 있다. 그렇게 훨씬 뒤로 갈 수 없는 한 이유는 비교적 최근 시기까지 발생한 모든 일이 한쪽에서 또 다른 한쪽으로 변동이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쿠취는 18세기 초엽 안정을 취했을 것이 분명하고 신드는 아마도 그 후였을 것이다.
(ⅱ) 소위 역사의 흐름이라는 방향과 관련하여 본다면, 한쪽 방향으로의 흐름이라는 것은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일정한 시기에 걸쳐 한쪽을 차지하였고 그 다음에는 몇몇 다른 이들이 다른 시기에 걸쳐 횡단하였으나 다른 이들이 세 번 횡단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는 측면에서 일정하게 바뀌는(변화하는) 흐름이 있다고는 할 수 있겠다.
이와 연관해서 인도는, 1520년 패배 이전에는 라오 켄가르는 신드로부터의 있을지도 모르는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라힘 키 바자르와 비자와에서 을 가로질러 기지를 건설하였고, 신드 정치에 간섭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19세기 시작 무렵에는, 쿠취 쪽으로부터 의 횡단행위가 있었는데, 그것은 파테 모함메드가 산적떼 혹은 강도떼들을 추적하고 잡기 위하여 파카르신드에 군대를 파병할 때였다.
(ⅲ) 1762년에서 82년까지 10년 동안 굴람 샤와 그의 후계자들이 쿠취를 침략한 것은 쿠취를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은 러쉬부룩 윌리암스가 말할 것처럼, 예방책 차원에서 수행한 것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호전적인 쿠취는 늘 잠재적인 위험이었다: 반면에 신드의 왕국 속으로 영구히 일체화하는 희망도 없었다. 하나 분명한 것은 쿠취는 너무 강해서 복속시킬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마하로의 군대가 패퇴될 수는 있었어도, 바야드와 라지푸트 봉건세력(영주)들은 강력한 발판을 유지하고 있어서 효과적으로 영구히 복속시킬 수 없었다. 더 나아가, 은, 비록 적절하게 장비를 갖춘 원정이라면 가로지를 수 있었지만, 정상적인 연락을 가로막는 너무 커다란 방해물이어서 쿠취신드로부터 행정통제를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게서, 150쪽.)
인도는, 결과적으로 아미르(Amirs)는 쿠취에 정착하려는 혹은 그들 지배의 일부분으로 만들려는 혹은 합병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iv) 신드는 결코 의 양쪽을 통제한 적이 없었다. 신드 수비대가 과거에 락파트에 건설되었다는 것과 관련하여 인도는 이런 종류의 영토에서 수비대의 정착은 에 대한 통제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v) 을 가로지르는 능력은 그것만 가지고는 통제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쿠취가 그렇게 하기로 했다면 을 가로질러 건넜을 수도 있었겠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은 어느 누구도 영구히 정주하지 않고, 어떠한 군대도 어떠한 기지도 또는 무력도 정립된 적이 없는 지역이라는 단순한 사실은 당사자들 어느 누구도 방해받지 않고 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 * *
란 전체와 그것 넘어 영토가 옛날에는 쿠취에 귀속되었다는 의견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하여, 인도는 그 변론서 안에 1960년 1월에 열린 서쪽 경계 문제에 관한 인도-파키스탄 장관급 회담에서 제출된 파키스탄 측의 외교문서를 인용하였다는데, 다음과 같다:
“1762년 이전에는 쿠취 전부가 북쪽 끝까지에 걸쳐, 그리고 심지어 라힘키 바자르(Rahimki Bazar)와 베라워우(Verawow)를 넘어선 지역까지 쿠취 토후국의 관할권 내에 있었다.” (인도 변론서, 112문.)
파키스탄 항변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 하면서 그것을 부인한다:
“1762년 이후 어떤 시기에도 라오 왕조가, 그러한 권한을 갖지 않았었다는 주장이 있다손 치더라도, 자신이 란에 대하여 가졌을지도 모르는 권력을 박탈당했다고 보여주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파키스탄 항변서, 212문.)
인도 변론서 안에서 위로부터 “파키스탄은 신드의 영토는 1762년 이전에는 쿠취의 란 어느 부분도 포함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신드의 남쪽 경계선은 의 북쪽 끝을 따라 나있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용인하였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파키스탄 항변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인도 변론서 212문에 언급되어 있으며 1960년 개최된 서부경계선 관련 인도-파키스탄 장관급 회담에서 제출된 ‘간략한 문서’에 담겨있는 내용은, 사실 1762년 이전에는 신드의 주요지역에 마하라오(Maharao)가 몇 개의 전진기지를 설치하였다는 몇몇 저술가들의 판단에 담긴 주장으로부터 제기된 하나의 추론에 다름 아니었다. 만일 그러한 추론이 반대편 해안에 전진기지를 설치했다고 한다면, 같은 논리로, 뒤 이은 일정한 날짜에 신드의 통치자들이 쿠취의 주요지역에 군사기지를 설치했었다면 하나의 역추론(converse inference)이 가능할 것이다. 역사에 관하여서나 혹은 몇몇 고려 속의 진술에서 나온 특정한 추론에 관하여는, 어떤 한 당사자에 의한 ‘수용(받아들임)’의 문제가 있을 리가 없다. 그런 맥락에서, 일정한 전제에 바탕을 둔 입장 진술은 하나의 주장에 불과하다. 쿠취 전부가 그 북쪽 끝까지 쿠취 토후국 관할권에 속한다는 사실은 부정된다.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주장되고 있는 라오의 기지들은 바로 그 몇몇 저술가들에 의해서 1741년 즈음에 돌이킬 수 없게 사라져 버렸다고 묘사되었다. 신드의 통치자들이 라크파트에 오천 명의 수비대를 구축하였을 때, 은 그들의 통제 밑에 있었고, 1762년에 그들에게 부여된 에 대한 관할권을 신드의 지배자들이 잃었다고 볼만한 일이 그 이후에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그러한 국면은 1819년 쿠취와 영국 간 조약 체결 당시 상태였다.” (파키스탄 항변서, 212문.)
인도의 최후 변론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1762년 이전에는 쿠취 전부가 북쪽 끝까지 그리고 라힘-키-바자르베라워우를 넘어선 지역까지 쿠취국의 관할권에 속하였다’라는 인도 자료 A-24에 담긴 파키스탄의 언급은 파키스탄이 주장하는 것 같이 쿠취에 관하여 몇몇 저술가들이 한 몇몇 언급들로부터 나온 추론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수용’이다. 파키스탄은, 신드 영토가 1762년 이전에는 의 어느 부분도 포함하지 않았다 라거나 신드의 지배자들이 1843년 영국이 신드를 정복할 때까지 그 해 이후로 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쿠취의 마하라오가 1765년에 굴람 샤 칼호라에게 라크파트 요새를 양도하였다고 보여주는 어떠한 증거도 제출하지 않았다.” (인도 최후변론서, 112문.)
파키스탄의 외교문서에 담긴 언급의 중요성은 구술변론에서 세 차례에 걸쳐 되풀이 되었다.
파키스탄 측 변호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본인은, 이 모든 것이 역사에 관한 진술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역사는 당사자들의 언급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 바 있다. 역사에 대한 이 같은 언급은 역사적 고려들과 함께 검토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충분히 정확한 것이지만, 어떠한 추론이라는 것은 확증(정당화)되지 않는 사실로부터 만들어진다. 답은 이것은 해석이 아니라 수용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본인은 변론서 청구이유 중에, 만약 어떤 이가 그 같은 진술을 닦아 세울 수 있다면 본 구술변론절차 동안에 승인여부 문제로 취급될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이 있곤 했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지적하곤 하였다.” (녹취록, 5157쪽)
“본인은, 그 진술을 다루면서 이미, 역사문제에 관하여 한 특정 저술가가 일정한 논점(요지)를 만드는 방법은 어떤 법률(Statute) 문구 같은 것을 해석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라고 설명한 바 있다.” (녹취록, 8287쪽.)
인도 측 변호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것은 역사문제이고 ‘그러한 역사문제에 관하여 허용(허가)의 입장을 취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렇지만} 본인이 그 진술을 지지한다거나 그 진술이 정확하다고 본다는 범주(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쿠취의 란 지역을 넘어선 라오의 점령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본인이 본 구술변론절차 모두연설에서 말한 것을 다시 환기시켜드릴까요? 본인은, 그가 다른 쪽 점령지들 포기했을까 아니면 포기하도록 강요받았을까 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므로, 그가 그때까지 의미할 바 없이 그의 영토 중에 일부분인 란을 포기했었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녹취록, 9552쪽.)

색인어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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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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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신드 자료번호 : nj.d_0024_0020_0040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