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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쿠취

1. 영국 세력의 출현(도래) 때까지 쿠취와 신드
(a) 쿠취
인도 측 변론서(소제기서)에 담긴 중요한 정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쿠취의 고대 역사는 본사건과 무관하다. 쿠취의 현대사는 사마스(Sammas)라고 일컬어지는 종족의 몇몇 구성원들이 신드의 하부지역을 다스렸던 9 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쿠취로 이주하였고 원주종족민들을 점차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했으며 쿠취 지역의 주권적 실체로 떠오르게 되었다. 12세기에는, 자다(Jada)의 아들인 라카(Laka)가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왕조는 자데자스(Jadejas)라고 알려졌다. 1548년에는 켄가르지(Kengarjee)라는 이 왕조의 한 지배자가 쿠취 지역 전체에 대해 라오(Rao)라는 이름 아래 주권적 실체가 되었다. 그는 구자랏(Gurarat) 지방의 통치자로써 아마다바드(Ahmadabad)라는 원주부족의 왕이었다. 바르물지(Bharmuljee)라는 그의 아들의 통치기간 동안에는, 구자랏 정부는 아마바다드 왕조로부터 델리에서 통치하고 있었던 모굴(Moghul) 황제로 그 정권이 이양되었다. 바르물지는 모굴 세력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였으나 두 차례 패전을 겪은 후 그는 제국의 우위에 동의하였고 모굴제국은 그를 쿠취의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확인해 주면서 공물을 요구하였다.
18세기 초반 라오 다이술지(Rao Daisuljee) 통치(그는 1718년 왕위에 올랐다) 때는 문제의 시기였다. 이 나라는 아마바다드로부터의 침략 위협에 처음 시달렸고 신드의 소다스(Sodas)라는 한 종족은 쿠취 지방으로 돌연히 침입하였다. 데브카란 세스(Devkaran Seth)라는 유능한 재상의 도움으로 라오는 뒤에 신드카티아와르(Kathiawar) 지역 변경에 따라 군사적 기지를 건설하는데 성공하였다. 군사적 전초기지는 파르카르(Parkar)비라와(Virawah)에 만들어졌고, 시드라힘 키 바자르(Rahim ki Bazar)에 한 요새가 건립되었다. 인도 측 제출 증거에 따르면, 당시에는 의 북쪽 끝을 넘어 쿠취 지역 발판의 범위는 다음에 걸쳐있다.
(a) 영국군 중위 알렉산더 번즈(Alexander Burnes)의 비망록(자서전) (1830)에 따르면, 당시 저자가 쿠취 지역 총병참장의 부보좌관으로 근무할 때는: “신드를 지배하는 쿠취의 라오 왕조의 세 왕의 통치가 끊김 없이 있었는데, 즉 발리아리(Ballyaree), 라오마 카 바자르 (Raoma Ka Bazar) 그리고 부디나(Budeena) 등이 그들로써 그들의 권력은 문제가 없었다 ...”;
p. 32
(b) 쿠취의 정치적 고문인 로버츠(Roberts) 중령이 1844년에 신드 정부에 보낸 서신에 따르면:
“이전 폐하는 라오마 카 바자르와 그것에 의존하는 서너 개의 자그마한 마을들을 소유하였는데 그로부터 그는 지난 20년 간 평균 39,000 코리(Correes) 씩 쿠취 국가에 귀속되는 수입을 얻었다. 루크푸트(Luckput)의 거의 반대편에 있는 ‘우스티 분더(Wustee Bunder)’라고 불리우는 버려진 마을은 또한 전에는 부지(Bhuooj)국 소유였다 ... 라오마 카 바자르는 1741년 쿠취 두르바(Kutch Durbar)로 없어졌고, 우스티 분더는 약 50년 간 ...” (인도 측 자료 A-27);
(c) 1827년 찰스 월터 대위의 쿠취 역사에 대한 간단한 스케치 에 따르면, 당시 저자가 쿠취의 정치고문으로 쿠취의 장관으로 근무할 때.
“데오카 세트(Deokaran Sett)는 ... 군대를 파르카르로 끌고 와서 비라보우(Veeravow)에 타나(Thanna)를 건설하였는데 이것은 쿠취를 침입한 소다스를 벌하기 위함이었다 ... 리마스 족이 그를 청했는데, 이 족속은 비록 무술만스로 개종되었다고 해도, 자레자스(Jharejas) (삼마트리(Sammatree))와 동일한 원류로부터 나왔고, 그리고 그의 합병을 돈독히 하기 위하여, 지금은 리마카 바자르(Rymaka Bazar)라고 하는 마을에 요새를 건설하였고 라오의 영향권을 그 지역까지 확장하였다.”
비슷한 언급이 맥무르도 대위 (1819), 마운트스튜어트 엘핀스톤 봄베이 총독 (1921), 그리고 봄베이 지명색인 (1880) 등에 있었다.
인도는 라오 소유 영토가 거대한 란을 넘어서 지역까지 확장되었으므로 그 은 따라서 그의 영토 내에 있었던 것으로 필연적으로 귀결된다고 말하면서 결론짓는다. 비록 그가 을 넘어서 이러한 점유를 잃었다고 해도 에 대한 주권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다. 라오 다이술지의 아들, 라오 라카(Laka) 지배 시절에는 의 북쪽 끝 넘어 있는 쿠취의 전진기지들은 버려진 채 방치되었다. 이러한 일이 18세기 중반에 일어났다.
커다란 혼란의 통치가 1760년 왕위에 오른 라오 고드지(Godjee) 시기에 있었다. 이 지배기간 동안, 쿠취는 네 차례나 신드의 무장세력에 의해 침범 당하였다. 두 번의 침략은 칼호라(Kalhora) 왕조의 굴람 샤(Ghulam Shah)로 일컬어지는 신드지방 지배자들의 지휘에 따른 것이었고, 납비(Abdul Nabbi)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침입은 각각 1762년, 1764년, 1775년 그리고 1777년에 있었다.
가장 피해가 컸던 침략은 1762년에 있었던 첫 번째 것이었다. 8만 명에 달하는 신드의 군대와 있었던 결정적인 자라(Jhara) 전투는 쿠취에게 커다란 패배였다. 굴맘 샤는 그 결과로 라오의 여동생과 혼인하기를 요구하였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는 신드모라(Mora)에 있는 푸란(Puran) 강에 돌연 제방 쌓기를 시작하여 사이라(Sayra)라고 알려진 커다란 쿠취 지역에 물대는 것을 막았다.
1764년 침략은 쿠취라크파트에서 오천 명의 수비대가 떠난 후에 신드지역으로 굴람 샤가 후퇴하면서 끝났다. 사라프라즈가 이 수비대를 철수 시켰다.
인도는 쿠취의 통치자 각각은 특정 영토를 그의 아들들에게 나누어주곤 했는데 그들은 거기서 족장(추장)이었다. 이런 추장이 죽으면 그 땅은 그의 아들들 간에 분할되는데 가장 나이가 먹은 아들이 더 큰 몫을 차지해서 그가 추장이 되었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여러 명의 추장들과 토지소유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비록 그들은 라오 왕가에게 충성의 의무는 있었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영토 안에서는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들은 라오의 세습적 조력자이었고, 그리하여 라오는 전쟁 시 일정한 군역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러나 항상 라오에게 충성했던 것은 아니며 그들 중 몇 명은 라오에게 자주 반기를 들곤 하였다. 그들의 숫자와 권위 때문에 그들은 쿠취 지방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관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위에 있었다.
이러한 톡특한 전제정치, 자데자 바야드(Jhadeja Bhayad) (자데자 왕조의 형제애를 의미함) 의 존재 때문에 18세기 끝과 19세기 처음에 두루두루 있었던 혼란이 있었다. 쿠취는 당시 두 개의 분리된 실체로 나뉘어 있었다. 전통적 수도 부지(Bhuj)에는 에너지 넘치고 능력 있는 군인인 자마다르 파테 모함메드(Jamadar Fateh Mohammed)가 사실상 통치자로 지배하고 있었지만 반면에 쿠취의 주요 항구가 위치한 만드비 남쪽 지역에는 독립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던 한스라지(Hansraj) 라는 족장이 있었다.
이것이 1804년과 1809년 사이에 영국이 쿠취의 인접세력으로 출현할 때의 상황이었다.
파키스탄의 쿠취 역사와 관련된 생각은 다르게 진행된다. 파키스탄은 첫 번째로 다음의 러쉬브루크 윌리암스(Rushbrooke Williams)의 글을 든다:
“선사시대 대부분과, 역사의 여명기를 통하여, 중세의 초입 때까지 쿠취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거의 과장된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왕조 또는 종족통치세력이었든 간에 지금은 신드구자랏 지방으로 알려진 영토를 다스릴 기회가 있었던 지배세력이었고, 그들 스스로가 하나하나의 거점을 그리고 그것들 사이에 있는 도서 국가들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함을 증명하였다.” (검은 언덕, 역사 속 쿠취와 전설, 1958, 59쪽.)
7세기 중국 여행가 휴엔-창(Hiuen-Tsang)은, 비록 7세기 말엽 즈음에는 신드의 권위가 약화 중에 있었지만, 6세기 말 경에는 신드의 통치자에게 정복당했고, 또한 서기 712년 아랍 세력의 신드 정복이 있은 후에는 이 모두가 함께 사라졌다고 기록하였다(전게서, 66쪽.). 설령 아랍 세력들이 724년과 738년 사이에 있었던 원정에서 쿠취의 족장을 패퇴시켰다손 치더라도 그들이 9세기까지 쿠취 지역에 심각하게 정착했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신드의 카티(Kathi) 종족민이 쿠취를 얼마동안 점령하였고, 11세기까지 구자랏의 몇몇 통치자들은 그들 가운데 분할하여 지배하였다(전게서, 68, 70쪽). 1874년의 휴(A.W. Hughes)의 신드 지방 지도색인에는 서기 천 년 경에는 쿠취는 가즈니비드 왕조의 지배 하에 있었다. 1520년 경에는 어떤 한 신드 통치자가 자라의 첫 번째 전투에서 쿠취를 패퇴시켰다. 월터에 따르면 1716년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쿠취의 라오에 대한 점령상태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분더스, 안자르 마을 ..., 코라 푸르굼마, 그리고 비슷하게 미아니의 몇몇 마을, 그리고 와구르라푸르 등에서의 하찮은 무역이 수입을 걷을 수 있는 유일한 출처였다.” (월터, 쿠취 역사의 간략한 스케치, 1855년, 103쪽.)
파키스탄은 쿠취의 통치자가 쿠취의 주요지역인 와구르에 대한 통제를 거의 하지 않았고, 신드의 우월한 지위에 대항하여 에 대한 통제를 할만한 입장에 있지도 않았다고 보여주는 파키스탄 측 자료 B.302 (1865)를 제출하였다. 파키스탄 자료 B.303(1821)는 또한 라드한푸르(Radhanpur)국이 와구르에 그 근거발판을 마련했었고, 란을 가로질러, 그로부터 공물을 접수했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p. 34
파키스탄은 첨언하기를, 1781년에 탈푸르(Talpur) 왕조의 파테 알리 칸(Fateh Ali Khan)에 의한 또 다른 쿠취 침략이 있었다고 한다. 파키스탄은 더 나아가 신드카디르(Khadir) 섬을 점유하고 있었고 와구르 지역에서 일정한 공물을 징수하였다고 말한다. 영국 세력의 출현에 발맞춰, 신드는 대략 1816년에 카디르에서 철수하였다. 그렇지만, 루나 지역에 대하여 1826년에 새로운 공격이 가해졌다.
파키스탄은, 월터에 따르면, 의 넘어선 쿠취의 전진기지는 포기했던 것이 아니라 쫓겨난 것이라고 지적한다(전게서, 112쪽).

색인어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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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쿠취 자료번호 : nj.d_0024_0020_0040_0010_0010